사마천의 사기열전
양후열전 (穰侯列傳)
사마천 사기의 12번째 열전.
양후열전(穰侯列傳)은 양후(위염)의 기록이다. 그는 전국시대 중기 진 소왕(昭王)의 숙부로 누이가 섭정할 때 실권을 잡았다.
천하가 하루아침에 통일된것은 아니다.
그간의 세월동안 쌓인것이 발현하고 누대에 걸친 공적이 모여서 마침내 광활한 중국대륙을 하나로 일통천하 한것은 진나라가 여러대의 노력으로 이뤄낸것이지 결코 진시황 한명의 힘은 아니었다.
진나라는 옛부터 말과 가축을 치던사람들의 후예로 요순시대부터 하여 하.상.주 의 삼대에 걸쳐 공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주나라 대에 들어와서 서융의 변방에 영지를 받고 또 한참 후에야 제후로 봉해지고 작위를 하사받았다.
그것은 오로지 주나라 왕실의 번병으로 서융의 오랑캐를 잘 제어한 공로였다.
그러한 진나라가 이제 나라의 강성함을 믿고 천하 제후들을 핍박하고 주왕실을 업신여기며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천하를 호령하게 된것은 여러대의 훌륭한 군주들이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대의 명신양장 들에 힘입은바도 컸다.
황하와 주변의 산으로 둘러싸인 위나라를 포위해서 다른 제후들이 손도 내밀지 못할만큼 진나라를 잘 섬긴것은 위염(魏冉)의 공적이다.
○ 양후(穰侯) 위염(魏冉)
양후(穰侯) 위염(魏冉)은 진소왕(秦昭王)의 모친인 선태후(宣太后)의 동생이다. 양후의 선조는 초나라 사람으로 성은 미씨(羋氏)다. 진무왕(秦武王)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어 그 동생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소왕(昭王)이다. 원래 소왕의 모친은 미팔자(羋八子)라고 불렀으나 소왕이 즉위하자 미팔자는 선태후(宣太后)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다. 무왕의 모친은 선태후가 아니고 혜문후(惠文侯)다. 선태후에게는 2명의 동생이 있었다. 이부(異父) 소생으로 큰 동생은 양후(穰侯) 위염이고 작은 동생은 동부(同父) 소생 미융(羋戎)으로 후에 화양군(華陽君)이다. 그리고 소왕에게는 동모제로 고양군(高陽君)과 경양군(涇陽君)이 있었다. 그 중 양후가 가장 현능했기 때문에 혜왕 때부터 무왕에 이르기 까지 진나라 조정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 권력을 장악했다. 무왕이 죽은 후에 형제들이 다툴 때, 오로지 위염만이 소왕을 왕위에 앉힐 힘을 갖고 있었다. 소왕이 즉위하자 위염은 장군이 되어 함양을 지켰다. 계군(季君)의 반란을 진압하고 무왕의 비 혜문후를 친정인 위(魏)나라로 쫓아냈다. 소왕이 여러 형제들 중 반감을 갖은 자들은 모두 죽여 그 위엄이 진나라를 진동시켰다. 소왕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섭정을 행하던 선태후가 모든 정사를 위염에게 맡겼다.
소왕 7년, 기원전 300년, 저리자(樗里子)가 죽고 경양군(涇陽君)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조나라 사람 루완(樓緩)이 와서 진나라의 상국이 되었으나 조나라에 불리한 일이 생기자 구액(仇液)이라는 사람을 시켜 위염을 진나라의 상국으로 삼으라는 요청을 하게 만들었다. 길을 떠나려고 하던 구액에게 그의 문객 송공(宋公)이라는 사람이 만류하며 말했다.
「진나라가 공의 말을 듣지 않게 되면 루완은 틀림없이 공을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니 공께서는 루완에게 ‘청컨대 공께서는 진나라에 너무 서둘러서 위염을 상국으로 삼으라고 재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조나라 사자가 위염을 상국에 임명하는 일이 급하지 않다고 청하면 진왕은 공의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공의 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루완에게는 덕을 베푸는 일이 되고, 반대로 일이 성사된다면 위염이 공에게 감사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액은 그 말대로 쫓았다. 과연 진나라는 루완을 면직시키고 위염을 진나라 상국으로 삼았다.
위염이 여례(呂禮)를 죽이려고 하자 여례가 제나라로 달아났다. 진소왕 14년 기원전 293년 위염이 백기를 천거하여 상수(向壽) 대신 대장으로 삼아 한·위(韓魏) 두 나라 연합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백기는 한·위 연합군을 패주시켜 그 군사 24만의 목을 베고 위장 공손희(公孫喜)를 사로잡았다. 다음 해인 기원전 292년 백기는 다시 초나라의 완(宛)과 엽(葉)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 해에 위염은 몸에 병이 들어 사직을 청하여 상국의 자리에서 면직되었다. 객경 수촉(壽燭)이 상국이 되었다. 그 다음 해인 기원전 291년, 수촉이 면직되고 위염이 다시 상국에 복직되었다. 양(穰)에 봉해지고 다시 도(陶)의 땅을 봉지에 더했다. 이로써 위염은 양후(穰侯)로 불려졌다.
위염이 양후에 봉해진 지 4년 째 되는 해인 기원전 287년, 위염은 스스로 대장이 되어 위나라를 공격했다. 위나라가 하동의 사방 4백리에 이르는 땅을 모두 들어 진나라에 바쳤다. 위염이 점령한 땅은 위나라의 하내(河內)의 땅으로써 크고 작은 성 60여개를 포함하고 있었다. 진소왕 19년 기원전 288년, 진나라가 서제(西帝)를 칭하고 제나라는 동제(東帝)를 칭했다. 그리고 한 달이 조금 지나 여례가 제나라의 사자로 진나라에 들어와 제와 진 두 나라는 각기 제호를 버리고 왕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유세했다. 진나라가 그 말에 따라 왕호로 돌아갔다. 위염이 다시 진나라의 상국이 되었다가 6년 후에 면직되었다. 면직 된지 2년 후에 다시 상국에 임명되었다. 위염이 상국이 된지 4년 째 되는 해에 백기를 대장으로 삼아 초나라의 도성 영(郢)을 함락시키고 그 땅에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그 공으로 백기는 무안군(武安君) 봉해졌다. 백기는 양후가 천거하여 임용된 장군으로써 양후와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양후의 부(富)가 왕실보다 더 많게 된 것은 백기의 힘이 컸다.
진소왕 32년 기원전 283년, 양후가 진나라의 상국의 신분으로 대장이 되어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장 망묘(芒卯)를 패주시키고 북택(北宅)으로 들어가 대량(大梁)을 포위했다. 양나라 대부 수가(須賈)가 양후를 찾아와 유세했다.
「제가 위나라의 높은 관리들이 위왕에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위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날 양혜왕(梁惠王)이 조나라를 정벌할 때 삼량(三梁)에서 조군을 이기고 한단(邯鄲)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랬음에도 조나라는 나라를 쪼개어 위나라에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한단은 조나라에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제나라가 위(衛)나라를 공격하여 그 옛 땅을 모두 함락시키고 위(衛)나라의 대장 자량(子良)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위(衛)나라 역시 나라를 나누어 제나라에 바치지 않았습니다. 위나라 역시 후에 그 땅을 모조리 찾을 수 있었습니다. 위(衛)나라와 조나라가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다른 제후들에게 겸병을 당하지 않고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난관에 부딪쳤다고 영토를 반복해서 내어주지 않고 어려움을 참고 견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정벌을 당할 때마다 영토를 떼어 준 송나라와 중산국(中山國)은 나라가 이내 망하고 말았습니다. 신은 위(衛)와 조(趙) 두 나라의 정책을 본받아 교훈으로 삼아야한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나라는 탐욕스러운 나라라 결코 친하게 지내면 안 됩니다. 마치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이 위나라를 잠식하여 결국 옛날 진(晉)나라의 고토였던 하동(河東)의 땅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또한 얼마 전에는 한장(韓將) 포연(暴鳶)을 격파하고 위나라의 8개 현에 달하는 땅을 할양받기로 했으나 위나라가 땅을 내어주지 않자 군사를 다시 일으켜 쳐들어왔습니다. 진나라는 원하는 땅을 얻기 전에는 결코 쉽게 포기하고 물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가 다시 위장(魏將) 망묘(亡卯)를 패주시키고 진격하여 북택(北宅)에 주둔하고 있으나 곧바로 진격하여 대량성(大梁城)을 포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대왕을 위협하여 많은 땅을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대왕은 결코 진나라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만일 지금 대왕께서 진나라의 위협에 굴복하여 초와 조 두 나라와의 합종을 배반하고 진나라와 강화를 맺는 다면, 초와 조 두 나라는 노하여 위나라에 등을 돌리고 진나라를 받들기 위해 위나라와 다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는 필시 조․초 두 나라와 연횡을 맺어 조․초․진 세 나라는 군사를 합하여 대량성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위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대왕께서는 결코 진나라와 강화를 맺지 마십시오. 사정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대왕께서 작은 땅을 떼어 할양하면서 진나라와 강화를 맺고 진나라에 인질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속임을 당할 것이라고 대왕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들은 바 있는 위나라가 처한 정황입니다. 원컨대 군후께서는 이 점을 심사숙고하여 일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천명은 항상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행운은 반복하여 찾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군후께서 포연과의 싸움에서 이겨 위나라의 8개 현을 할양받았습니다. 이것은 군후께서 거느린 군사들이 강하고 정예한 군사들 때문도 아니고 또한 계책을 꾸며 이룩한 공이 아니라 단지 하늘이 내려준 행운에 의한 것입니다. 오늘 다시 위장 망묘(亡卯)를 패주 시키고 북택으로 진격하여 대량을 공격하려고 하십니다. 이것은 행운이 항상 자기와 같이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제가 듣기에 위나라는 대량성을 지키기 위해 국내 100개 현의 갑병을 모두 불렀는데 그 군사가 30만이 넘었다고 했습니다. 30만의 군사로 7인(仞)1) 높이의 대량성 성벽에 의지해서 지키게 되면 상탕(商湯)이나 주무왕(周武王)이 다시 살아난다 할지라도 쉽게 공략할 수 없습니다. 배후의 초와 조 두 나라 원병을 무시하고 7인 높이의 높은 성벽을 올라 30만에 달하는 위나라 군사들과 싸워 그 뜻을 관철하여 공업을 세우는 일은 천지가 개벽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직 없었습니다.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게 되면 진나라는 군사를 물리쳐야 되고, 그렇게 되면 군께서는 필시 봉읍인 도(陶)를 잃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군께서 옛날에 세운 공로를 모두 잃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위나라가 바야흐로 주저하고 있을 때 군께서는 그들의 작은 땅을 요청하시면 바로 취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조와 초 두 나라의 구원병이 위나라에 당도하기 전에 위나라에 재빨리 작은 땅만을 요청하시어 위나라를 복종시키십시오. 바야흐로 주저하고 있는 위나라로써는 작은 땅을 바치는 일이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군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군후님께서는 바로 원하시는 바를 취하실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초와 조 두 나라 역시 위나라가 먼저 다투어 진나라와 강화를 한 배신행위에 노하여 그들도 역시 다투어 진나라를 받들려고 할 것이고 결국 삼국 사이의 합종은 와해되니 군후께서는 단지 그들 중 누구를 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더욱이 군후께서 남의 나라 땅을 얻는데 반드시 군사롤 이용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옛날 당진(唐晉)의 땅을 얻을 때 진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진공시키지 않았음에도 위나라는 강성(絳城)과 안읍(安邑)의 땅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도(陶)에서 하서와 하동으로 통하는 두 개의 길을 뚫기 위해 옛날 송나라의 영토를 점령한다면 위협을 느낀 위(衛)나라는 필시 선보(單父)의 땅을 진나라에 바칠 것입니다. 이로써 진나라는 싸우지 않고도 원하는 땅을 얻게 되고 군후께서는 위(衛)나라를 통제하고 도(陶)를 다스릴 수 있는데 어찌 구하여 얻지 못할 것이며 시도함에도 어찌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원컨대 군후께서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시어 위태로운 일을 행하지 마십시오.」
양후가 듣고 옳다고 하며 곧바로 대량의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다음 해인 기원전 282년, 위나라가 진나라를 배반하고 제나라와 합종을 맺었다. 진나라가 양후를 시켜 위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양후는 위나라와 싸워 그 군사 4만 명의 목을 베고 위장 포연(暴鳶)을 패주시켰다. 양후는 이로써 위나라의 3개 현을 얻어 자기의 봉지 도읍(陶邑)의 영지를 더욱 넓혔다.
다시 다음 해인 기원전 281년, 양후와 백기(白起), 객경(客卿) 호양(胡陽)이 군사를 이끌고 화양(華陽)에서 한(韓), 위(魏), 조(趙) 삼국의 군대와 싸워 그 대장 망묘(亡卯)를 격파하고 군사 10만 명의 목을 벴다. 양후는 계속 진군하여 위나라의 권(卷), 채양(蔡陽), 장사(長社) 땅과 조나라의 관진(關津)을 점령했다. 다시 관진을 조나라에 돌려준 댓가로 조나라로부터 원병을 얻어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양왕(齊襄王)이 두려워하여 소대(蘇代)를 사자로 보내 제나라를 위해 양후에게 은밀히 자기의 서신을 전하도록 했다. 양후를 접견한 소대가 말했다.
「제가 이곳에 오는 도중에 오고가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진나라가 장차 조나라의 중무장한 갑병 4만 명을 지원군으로 받아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는 중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 제왕이 ‘현명한 진나라 왕은 계책을 세우는데 심사숙고하고 지혜로운 양후는 일을 행하는데 능숙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조나라의 중무장 갑병 4만 명을 지원받아 제나라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몰래 들었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한·위·조(韓魏趙) 삼진(三晋)이 서로 친하게 되어 단결하면 그것은 바로 진나라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가장 큰 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백 번 배반하면 백 번 속이면 되지만, 그들이 신의를 깨지 않으면 도의를 지키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나라를 공격하게 되면 조나라를 살찌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 조·진 두 나라는 원래 원한이 깊은 나라이기 때문에 조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은 진나라에게는 해로운 일이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의 책략가들은 필시 ‘제나라를 파하고 삼진과 초나라를 피로하게 만든다.’라는 생각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나라는 이미 피폐해진 나라입니다. 그런 제나라를 천하의 여러 나라들이 마치 천균(千鈞)의 힘을 가진 강력한 쇠뇌로 쏴서 종기를 터뜨리는 행위와 같은 이치이니 제나라는 틀림없이 망하고 말 것입니다. 어찌 삼진과 초나라를 지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가 군사를 적게 출동시키면 삼진과 초는 진나라를 믿지 않게 되고, 반대로 많은 수의 군사를 출동시키면 그들은 진나라에 의해 제압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또한 진나라의 대군을 두려워한 제나라는 진나라에 붙지 않고 삼진과 초나라에 붙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가 점령한 제나라의 땅으로써 삼진과 초를 회유하게 되면, 삼진은 그 창끝을 진나라에게 돌려 진나라는 오히려 강대해진 적을 맞게 됩니다. 이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삼진과 초나라가 진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제나라를 도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진나라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삼진과 초나라는 지혜롭고, 진과 제는 어리석단 말입니까? 이것이 다섯입니다. 그래서 이치를 따져 안읍을 얻는다면 그것 역시 후환이 없게 되어, 그 결과 한나라는 필시 황하 이북의 땅과 통하는 길이 끊기게 되어 상당군을 잃게 됩니다. 상당군은 천하로 말하면 그 복심(腹心)에 해당하기 때문에 조나라로부터 군사를 지원받아 출병한다면 그 점을 두려워한 나머지 조나라는 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 중 어떤 것이 진나라에 이익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진왕은 총명하여 계책을 세우는데 능하고 양후는 지혜로워 일을 성사시키는데 능숙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조나라의 중무장한 4만 명의 갑병을 물리치고 제나라를 정벌하지 않으리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후는 조나라에 군사를 돌려보낸 후 제나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소양왕 36년 기원전 271년 상국 양후가 객경 조(竈)에게 명하여 제나라의 강(剛), 수(壽)을 점령하여 도읍(陶邑)의 영지를 넓히도록 했다.
그때 스스로 장록(張祿) 선생이라고 칭하는 위나라 사람 범수(范睢)가 기회를 보아 진소왕에게 유세하면서 삼진(三晋)의 경계를 넘어 제나라를 정벌하려는 양후를 비난했다. 이로써 진소왕은 범수를 등용했다. 범수는 선태후(宣太后)가 왕 대신 진나라를 다스리고, 양후는 제후들에게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며, 경양군(涇陽君)과 고릉군(高陵君)에 속하는 무리들은 너무 사치하고 그들의 부는 왕실보다 더 많다고 했다. 진소왕이 깨닫고 양후를 상국의 자리에서 면직시키고 경양군 등의 무리들은 관 밖의 봉지로 쫓아냈다. 양후도 함곡관을 나가는데 그의 재물을 싫은 치중은 천여 대가 넘었다.
양후는 결국 도읍에서 죽고 그 곳에 장사지냈다. 진나라는 도읍의 땅을 환수하여 왕이 직접 다스리는 직할령으로 삼았다.
태사공이 말한다.
「양후(穰侯)는 진소왕의 친외삼촌이다. 진나라가 동쪽으로 그 영토를 더욱 넓혀가고 제후들을 약화시키며 일찍이 천하에 제왕(帝王)을 칭하자 천하는 모두 서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받들었다. 그것은 모두 양후의 공이다. 이어서 그의 신분은 지극히 귀하게 되고 부는 더욱 넘쳐났으나, 한 사람의 선비가 진나라에 들어와 유세를 행하자 몸은 꺾이고 세력은 빼앗겨 가슴에 울분을 머금고 죽었다. 어찌 타국에서 벼슬살이하는 기려지신(羈旅之臣)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되었겠는가?」
-색은찬술(索隱讚述)
穰侯智識 應變無方(양후지식 응변무방)。
양후의 지혜와 지식은 변화무쌍하여 그 끝이 없었고
內倚太后 外輔昭王(내의태후 외보소왕)。
안으로는 태후의 동생이고, 밖으로는 소양왕을 보좌했다.
四登相位 再列封疆(사등상위 재열봉강)。
네 번 상국의 자리에 오르고 두 번 열후의 봉해져 봉지를 얻었다.
摧齊撓楚 破魏圍梁(최제요초 파위위량)。
제나라를 압박하고 초나를 어지럽혔으며 위나라를 파하고 대량성을 포위했다.
一夫開說 憂憤而亡(일부개설 우분이망)。
그러나 선비 한 사람이 진나라에 들어와 한 번 유세하자 마음속에 울분을 품고 죽고 말았다.
○ 사자성어 : 색은찬술(索隱讚述)
穰侯智識 應變無方(양후지식 응변무방)。
양후의 지혜와 지식은 변화무쌍하여 그 끝이 없었고
內倚太后 外輔昭王(내의태후 외보소왕)。
안으로는 태후의 동생이고, 밖으로는 소양왕을 보좌했다.
四登相位 再列封疆(사등상위 재열봉강)。
네 번 상국의 자리에 오르고 두 번 열후의 봉해져 봉지를 얻었다.
摧齊撓楚 破魏圍梁(최제요초 파위위량)。
제나라를 압박하고 초나를 어지럽혔으며 위나라를 파하고 대량성을 포위했다.
一夫開說 憂憤而亡(일부개설 우분이망)。
그러나 선비 한 사람이 진나라에 들어와 한 번 유세하자 마음속에 울분을 품고 죽고 말았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