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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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과 오순절 (계 7:9-10)
2025년 1월 22-24일까지 구세군 Stanmore House에서 ‘다문화 자문 그룹’ (Multicultural Advisory Group) 모임이 있었습니다. 호주 내 CaLD 배경을 가진 구세군 교인과 사관들 14명이 모였습니다. CaLD는 “Culturally and Linguistically Diverse”의 약자로, 문화적 및 언어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 용어는 주로 정부와 공공 서비스 부문에서 사용되며, 주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CaLD 커뮤니티는 다양한 언어, 민족, 전통, 사회 구조, 종교를 포함하며, 호주의 다문화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세계의 언어는 약 7151개, 2024년 호주 통계에 의하면 호주는 원주민의 언어까지 합하여 400개가 넘습니다. 가장 많이 쓰는 언어는 영어 다음으로 만다린 그리고 아랍어 순입니다. 한국은 13위로 115,000명 정도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언어’가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분산과 통합, 그리고 일치의 과정을 보여 주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언어와 관련된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바벨탑의 ‘언어의 분산’(창 11장), 오순절 성령강림 ‘언어의 소통’(행전 2장), 그리고 천국에서 모든 민족과 언어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을 통한 ‘언어의 일치’(계 7장)입니다. 이 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인류를 어떻게 다루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하나로 모으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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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바벨탑: 언어의 분산(창 11장)
창세기 11장 1절 “온 땅에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바벨탑 사건은 인류가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라는 목표 아래 하나로 모였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모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 자기들의 힘과 이름을 드높이려는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며 하나님 없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을 보시고, 그들의 언어를 분산하게 하심으로써 흩으셨습니다.
교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앉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아야 영광을 자기가 받고, 하나님이 받아야 할 찬양을 자기가 받고,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예배를 자기가 받으려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예배를 중심으로 3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 예배를 보러 오는 사람, 예배를 받으러 오는 사람입니다.
루시퍼는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빛의 천사로, 그의 이름은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사야서 14:12절에 루시퍼는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고, 그로 인해 타락하여 하늘에서 쫓겨났습니다. 인간의 타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3장에 뱀이 하와를 유혹하며 말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고, 결국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에 빠졌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어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어제 출애굽기 33:3절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출 33: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4:8절에 모세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목에 깁스를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는 신체적인 특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고하고 고집이 세며, 교만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잠언 16:18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벧전 5:5). 바울은 경고합니다. “네가 선 줄로 아느냐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교만한 자는 자기를 모르는 자이고, 겸손한 자는 자기를 아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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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순절: 언어의 소통(행 2장)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이 되자, 예루살렘에는 로마 제국 각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과 개종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 다른 방언을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각국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벨탑 사건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때는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언어의 혼란을 넘어서 성령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온 인류를 소통하게 하였습니다. 방언이란 두가지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방언이 외국어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 사용된 반면, 고린도전서의 영적 방언은 개인의 영적 성장과 기도에 중점을 둡니다. 이들은 다른 언어를 씀에도 불구하고 성령안에서 서로 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소통(Communication)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각, 감정, 정보, 의미 등을 주고받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소통이란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쌍방향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피드백이 매우 중요합니다. 소통은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소통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소통의 반대는 불통입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서, 통하면 불통하고, 불통하면 통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첫 번째 통은 통할 通이고, 두번째 통은 아플 痛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소통하는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은 불통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지만 불통하여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가지의 소통이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 나와 너 그리고 나와 나입니다. 나와 나의 소통이 안되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습니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의 약자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타인의 평가에 민감합니다. 자신의 결핍을 다른 사람을 통하여 채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상대방에게 ‘투사’합니다. 투사란 자기의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투사가 시작되면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공동체의 문제로 발전합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건강한 자존감을 갖기가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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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찬양: 언어의 일치(계 7장)
요한계시록 7장 9절에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 7:10)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온 열방의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입니다. 바벨탑에서 분산되었던 언어가 성령의 역사로 소통되어, 결국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민족과 언어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는 단순한 인간적인 화합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의 일치입니다. 우리는 문화와 언어의 다양성 속에서 복음으로 일치를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오래전 저는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던 ‘연가’는 원래 뉴질랜드 민속노래로 로토루아에 살고 있던 마오리족의 사랑 노래입니다. 6.25 전쟁에 참전한 뉴질랜드군을 통해 국내에도 소개되어 인기를 얻어 한국에서 연가로 번안되어 불리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원 제목은 ‘포카레카레아나’로 수많은 나라에 소개되었습니다. 뉴질랜드 로토루아에서 구세군 사관회의가 있었습니다. 이동을 하던 중에 버스 안에서 한 사람이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그곳에 타고 있던 사관들이 자기의 언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한국어로 불렀습니다. “비바람이 치는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로~~” 언어는 다르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노래했습니다.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할 때 구성하는 악기가 다르지만 한 음을 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고형원 전도사’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고형원 전도사는 찬양사역자, 가수이며 현재 ‘부흥한국’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그는 직접 작곡한 ‘부흥’, ‘부흥 2000’, ‘물이 바다같이’, ‘비전’, ‘모든 열방 주 볼때까지’,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등 주옥 같은 찬양곡을 불렀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의 계시록 7:9-10절을 읽고 은혜를 받아 작곡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캐나다에서 사역할 때 예수전도단을 창립한 오대원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 본문의 말씀을 환상으로 보고 작곡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목이 ‘비전’입니다. 다 같이 일어나서 함께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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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고통을 공감하는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궁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이라는 직책은 고대 왕정 시대에 왕과 매우 가까이에서 일하는 고위직 궁정 신하를 의미합니다. 술 맡은 관원은 왕이 마실 포도주나 음료를 시중들며, 독이 들어 있지 않은지 먼저 맛보고 확임함으로써 왕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안정되고 높은 위치에 있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황폐해지고 동족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1. 민족의 고통을 공감하는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황폐한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져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느 1:3-4)
2. 공동체의 죄에 대한 회개의 기도
“느헤미야는 자신과 백성의 죄를 자백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느 1:5-6)
3.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간구하는 기도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회복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느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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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창세기 1장 26-28절은 인간의 창조 목적과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창조 세계를 책임 있게 다스리도록 부르셨다는 이 말씀 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성실히, 수행 하며, 하나님의, 장조, 세계를 사랑과 책임으로 관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과 깊은 관계 속에서 진정한 번영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창세기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되었다는것은, 그 본질이 학나님을 닮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이고 도덕적 이며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 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은 인간에게 고유한, 존엄성을 부여하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 을 확인시켜 줍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분의 성품을 반영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2.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성과 여성이 모두 하나님의 형성대로 창조되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동등한 존엄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이루 며,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강조되었습니다. 또한, 인간의 성별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계획하신 것으로, 남성과 여성의 차이와 역할은 서로를 억압하기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하며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3.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리고 관리할 책임을 주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활용하며, 생태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고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자연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돌보고, 그_질서를 보존하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목적에 따라 이끌 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피조물을 사랑으로 다스리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청지기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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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나?
솔로몬은 3권의 책을 썼다. 아가서는 청년의 ‘열정’, 잠언은 중년의 ‘지혜’, 전도서는 노년의 ‘통찰’에 대한 글이다. 잠언과 전도서는 지혜서이다. 잠언이 ‘해 아래의 지혜’라면, 전도서는 ‘해 위의 지혜’이다. 잠언이 ‘카르페 디엠’이라면, 전도서는 ‘메멘토 모리’이다. 하나는 삶을, 다른 하나는 죽음을 말하지만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인생은 ‘삶의 이유’와 ‘죽음의 이유’가 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앞에 섰을 때 살았던 삶에 대하여 후회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 3:12-13)
1. 기뻐하며 선을 행하고,
선을 행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기쁨과 연결되어 있다. 진정한 행복은 자기중심적인 만족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통해 찾을 수 있다.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선을 행할 때 얻어지는 결과이다. ‘테레사 효과(Teresa Effect)’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미국 하버드 의대의 연구진은 타인에 이타적인 봉사를 통해 깊은 기쁨과 성취감을 경험하고, 남의 선행을 보기만 해도 인체의 면역기능이 크게 향상되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테레사 효과’라고 했다.
2.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며,
수고란 일상의 일이다. 히브리어 ‘아보다’(avodah)란 단어는 세속적 일과 영적 예배를 모두 의미한다. 일상의 평범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삶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통로이다. 교회에서 하는 것은 영적인 일이고, 세상에서 하는 것은 세속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일이 예배가 되는 온전한 의미의 ‘아보다’를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 예배당에서 모여 드리는 예배는 반드시 삶의 예배로 이어져야 한다.
3.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의 삶, 음식과 음료, 우리의 관계와 성취 모두가 그분의 은혜이다. 선물들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해 주어진 것들이다. 선물들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인생을 ‘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행위 중심으로 살지만, ‘선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은혜 중심으로 산다. 한 주의 시작은 주일이다. 이번 주도 기뻐하며 선을 행하고,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 알고 감사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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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 채스우드 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