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잡기장

Lovers & Fighters
• 저희 부부는 지난 4월 13일 일요일 오후 Strathfield Town Hall에서 열린 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그 연주회는 Strathfield Symphony Orchestra (이후 약자로 SSO)가 정기적으로 공연하는 음악회중 하나입니다. 저희는 가까운 인문학 친구이며 그 오케스트라의 단원중 한분인 정(김)경옥 선생의 초청으로 지난해 부터 가끔 발걸음을 해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호주에는 연방정부나 주정부에서 직접 운영하거나 지원하는 세계적 명성을 지닌 유명 오케스트라와 합창단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유급 전문음악인들과 예술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호주에는 또한 각 지역마다 그 지역의 특성에 따라 다른 형태의 소규모 Symphony Orchestra나 합창단들도 적지 않게 많이있습니다. 이런 지역 오케스트라는 대부분이 자신의 직업을 갖고 있는 무급 단원들로써 그냥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음악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지역 오케스트라는 Local Council로 부터 약간의 지원이나 편리를 제공받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 운영은 오직 대원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SSO도 그 중 하나입니다.
SSO는 1969년 첫 연주회를 시작한 후 지난 2019년엔 50주년 (Golden Jubilee)을 축하했고 금년엔 56년이나 되는 퍽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SSO는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음악 애호인들로 구성된 비영리 예술 단체입니다. 1년에 4번씩 꾸준히 지역 주민들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해 왔습니다. 약 70여명의 단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저희를 초청해 주신 정경옥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단원들의 나이는 대체로 30대로 부터 70대 후반에 이르는 폭넓은 연령층의 남녀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음악 감독 및 지휘자로는 일본출신으로 호주의 유명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사다하루 무라마츄 (Sadaharu Muramatsu) 박사가 이끌고 있습니다.
• 이번에 연주한 콘서트의 주제는 이였습니다. 참 흥미로웠고 다시 생각해 보게해 주는 타이틀이었습니다. 그날 음악회는 3명의 작곡가들이 만든 3개의 작품을 약 2시간에 걸쳐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이 3명의 작곡가들은 모두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아마 여기에는 시대적이며 지역적인 어떤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사랑해야 할 내 고향, 그러나 미워할수 밖에 없는 그 땅> <품어 주어야 할내 동족들, 그러나 싸울수 밖에 없는 사람들> 분명 여기에는 지휘자 사다하루의 예술적 사유와 이번 연주에 대한 그의 특별한 해석과 의미가 부여 되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주로 부담없이 편안하게 ABC FM을 습관 처럼 틀어놓는 것 외에는 별로 음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이날의 연주회는 아주 색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와 그날 연주회장에서 받은 팜플렛과 구글에서 검색하여 얻은 정보들을 읽어 보면서 조잡한 잡기장 하나를 남겨봅니다.
• 처음 연주된 곡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Sergei Prokofiev 1891 – 1953)가 작곡한 <로미오와 줄리엣 – Romeo & Juliet> 이었습니다. 프로코피예프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 작곡가입니다. 그의 출생지 손촙카는 그땐 소련 땅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고향을 떠나 미국, 독일, 프랑스 등지로 망명생활을 하며 떠돌아 다니면서 작곡가와 지휘자로 활동하다가 1923년엔 스페인 출신 성악가 리나 코드나와 결혼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대공항이 시작된 후 다시 고향 땅 소련으로 영구 귀국하여스탈린 치하에서 어렵게 작품활동을 하다가 1953년에 사망했습니다. 그가 남긴 주요 작품으로는 오페라 중 <불의 천사> <전쟁과 평화>, 발레 중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 <신데렐라>, 교향곡 중에서는 <키제 중위> <고향의 노래>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번에 SSO가 연주한 발레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잘 알고있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각색한 것으로 52개의 곡으로 구성된 대작인데 그 중에서 7개를 연주했습니다. 원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청춘 남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그린 유명한 작품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가문은 오랜 대립과 갈등을 지닌 앙숙이었지만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허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줄리엣의 죽음으로 결말이 나는 비극입니다. 그런데 프로코프예프는 그의 발레음악을 통하여, 죽은 줄리엣을 다시 살려냄으로 비극을 기쁨으로 재해석합니다. 애잔함과 격정적 음율이 교체되는 가운데 그는 싸움을 사랑으로, 슬픔을 해피엔딩으로 만들어냅니다. 사다하루 감독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서로 사랑 하면서도 또한 싸우는 세상> 이요, <서로 싸우면서도 그래도 사랑하게 되는 인간 관계> – Lovers and Fighters – 로 이 작품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프로코피예프 역시 그가 태어난 고향 땅 우크라이나와 20여년 이상을 떠돌이로 살았던 이방인들의 땅과 끝내는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고국 소련 땅 사이에서 <사랑하기도 하며 동시에 미워하기도 해야 하는 갈등>을 겪으면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삶이란 <사랑하면서도 싸우고, 싸우면서도 또한 사랑하는 것> 입니다. 산다는 게, 별것이겠습니까? 사랑하면서도 싸우고, 싸우면서도 또 사랑하는 거지요!
• SSO가 연주한 두 번째 곡은 아람 하차투리안 (Aram Khachaturian 1903 – 1978)의 발레곡인 <스파르타쿠스, Spartacus Suite No.2> 였습니다. 하차투리안은 지금의 조지아국 코조리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부모님들을 따라 아르메니아 출신의 러시아 작곡가로 불리웁니다. 그 역시도 두 개, 혹은 세 개의 고국을 지닌 갈등 속에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앞에서 연주한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차와 함께 20세기 소련을 대표하는 3대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이번에 SSO가 연주한 <스파르타쿠스>는 <행복> <가야네>와 함께 그의 3대 발레곡 중 하나입니다.
<스파르타쿠스>는 고대 로마시대 노에 신분이면서도 뛰어난 검투사로 활동했던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를 발레곡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노예로써 비참하게 살던 스파르타쿠스는 반란군을 조직하여 로마 정부에 저항하는 반군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반란군은 여러개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마침내는 로마군의 총수인 크라수스를 체포했습니다. 그런데 체포된 크라수스는 전혀 로마의 장군답지 않게 비굴한 모습으로 용서를 빌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노예신분인 스파르타쿠스는 말합니다. <저렇게 비굴한 로마의 장군은 죽일 가치 조차도 없다. 그냥 살려주고 풀어주어라> 그런데 그렇게 풀려난 크라수스는 그 다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반란군의 우두머리 스파르타쿠스를 체포하여 무참하게 살해합니다. <스파르타쿠스>는 사랑이 미움으로 반전되고, 용서가 복수로 뒤집어지는 격렬한 음악이 이어지는 중에 남편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을 보며 통곡하는 그의 아내 프리지아의 눈물이 오버랩되는 발레곡입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입니다. 지다가도 이기고, 이기다가도 집니다. 인생이란 전쟁터에선, 사랑받은 사람이 오히려 증오하고, 용서 받은 인간이 오히려 복수하는 경우가 거듭됩니다.
Lover가 Fighter가 되고, Fighter가 Lover가 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 세상입니다.
• 그날 SSO가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Sergei Rachmaninoff 1873 – 1943)의 <교향적 무곡 (舞曲), Symphonic Dances> 이였습니다. 그는 러시아 출신이었으나 1918년 러시아가 공산화 된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평생 미국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한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요, 피아니스트요, 지휘자였습니다. 허지만 공산국가가 된 자신의 모국을 떠나 자유스런 땅 미국에 와서 마음껏 예술활동을 펼친 그였지만, 그래도 그의마음 속에는 영원히 지울 수 없고, 또 지워지지 아니하는 <어머니 나라>에 대한 애정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뛰어난 교향곡들과 합창곡, 오페라와 가곡들을 작곡하고 연주했던 라흐마니노프는 루빈스타인을 비롯한 유수한 음악가들로 부터 놀라운 찬사도 많이 받았으나, 그래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사랑과 싸움>이 뒤섞이여서 가장 높은 음으로부터 들리지도 않는 가장 낮은 음계에 이르기 까지 폭풍우가 휘몰아 치고 있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가 죽기전 마지막으로 작곡한 곡이라고 알려진 이 <교향적 무곡 Symphonic Dances>은 3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번 SSO는 그 아름다운 곡들을 모두 연주했습니다. 처음엔 <환상적 무곡 Fantastic Dances> 이라고 이름 붙여졌던 이 곡은 굉장히 화려하면서도 깊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왈츠의 템포를 따라 느렸다가 빨라지고, 빠르게 춤을 추다가 다시 아주 느려지는 모습이 전개됩니다. 극도로 높았지다가 다시 갑자기 낮아지는 극적 변화 속에서 연주는 차분함과 생동감이 교차되곤 합니다. 이 정열적 댄스 음악은 마치 최후의 심판날이 가까이 온 듯 전율을 느끼게 하다가 다시 우아함과 신비로움을 더해 주는 듯 합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이 무곡은 우리를 마치 영원한 <사랑과 싸움의 세계> <갈등과 사랑이 조화된 나라>로 초청하듯이 들려집니다.
• 그날 연주된 3개의 작품들과 그 작곡가들에게서는 몇 가지 공통점들이 나타납니다. 먼저 프로코피예프와 하차투리안, 그리고 라흐마니노프, 이 세명의 작곡가들은 모두 러시아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세 사람은 똑같이 그들의 조국에서 살지 못하고 어머니의 나라를 떠나 방랑하는 예술가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들 <사랑하는 내 조국>과 <미워지는 내 어머니의 나라> 사이에서 방황했던 예술가들이었습니다. <사랑할 수도 없고 미워할 수도 없는 관계> – 연주된 작품들은 바로 이런 자신들의 흔들리는 정체성과 갈등 속에서 고뇌하는 심리를 표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는 공산주의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나 그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이들 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저는 지난 12월 서울 방문 중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서 대학생이 되어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탈북민>들이 겪는 마음의 아픔과 한국사회에서 당하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정직하게 실토하며 북녘에 있는 부모님을 보고 싶어하며 오랫 동안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나도 오래 전에 고향 땅 북한을 도망쳐온 <탈북민>이라고 소개하면서 지금은 한술 더 떠 <탈남민> 까지 되어, 호주에서 이중적으로 고향을 그리워 한다는 이야길 하면서 격려를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들 말을 않하고 또 못해서 그렇지 <사랑과 전투 사이에서> 하루 하루를 아프게 살아가는 탈북민이요, 탈남민으로, Lover 이며 동시에 Fighter들 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꼭 한가지 신분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는 여러가지 다른 I.D. 카드들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서로 조화 시키기 어려운 사랑과 미움, 용서와 복수, 따스함과 차가움이 엎치락 뒷치락합니다. 우리는 이중 인격자요, 다중 인격자들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속에 공존하고 있는 용서와 미움, 사랑과 다틈 사이에서 평안을 잃고 살아 갑니다. 내가 낳은 자식도 사랑하다가도 미워지고, 밉다가도 다시 사랑하는 게 인생입니다. 두고 온 고국도 자랑스럽다가도 챙피해지고, 부끄럽다가도 다시 응원하게 되는 것이 이민자들의 마음입니다.
• SSO는 이번 콘서트를 통하여 다시 한번 더 진솔하고 정직하게 저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SSO가 금년 후반기에 준비한 다음 콘서트의 주제들 역시 이번 연주와 아주 흡사한 통일성 – 갈등과 조화, 대립과 통일 – 이 엿보여져서 소개해 드리니 꼭 한번 자리해 보시길 바랍니다. // 7월 콘서트 (5일과 6일) 주제 : Dream & Discovery – 꿈과 현실 // 9월 콘서트 (20일과 21일) 주제 : Earth & Sky – 땅과 하늘 // 11월 콘서트 (29일과 30일) 주제 : Heroes & Villains – 영웅들과 천민들 (*)
홍길복 (2025.4. 21)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