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이집트 방문기 (25)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23년 10월 11일~21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일~24일 (강릉 오죽헌·설악산·남양주 다산생가, 2박 3일)에 “아는 만큼 보인다” (“I Can See As Much As I Know”)라는 주제로 제2차 인문학여행을 33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방문기를 어떻게 써야하나 생각하다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보다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기록해 본다. _ 편집자 주.

로마 캄피돌리오 언덕과 고대로마 공화당 터
10월 21일 (토) Ergife Palace 호텔에서 조식 후 우리 일행은 트레비분수를 시작으로 베네치아광장과 엠마누엘 2세 기념관을 방문했다. 이어 캄피돌리오 언덕과 고대로마 공화당 터, 원형경기장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일대를 방문하고 로마국제공항에서 출발해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일정이다.
공화정기 로마 사람은 유명한 일곱 언덕이 있는 로마 시를 중심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도시에는 극장도 몇 곳 있었으며, 체육관 (gymnasium), 술집, 목욕탕, 유곽도 있었다. 로마 영토내의 거주 가옥은 시골이나 수도 로마의 수수한 집에서 팔라티누스 언덕의 우아한 궁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인구 대다수가 로마 도심의 주택들 (빌라 형태)에 살았다.
로마의 도시에는 대부분 수도 로마 시와 마찬가지로 포룸과 신전이 있었다. 도심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도관이 있었으며, 해외에서 포도주와 올리브유가 수입되었다. 지주들은 보통 도시에 살았으며, 멀리 떨어진 자신의 농장에는 마름을 두어 관리하게 했다. 노동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여러 지주들이 많은 수의 노예를 해방시켰다.
기원전 2세기 중반부터 그리스 문화가 점점 부상했는데, 강건한 로마의 정신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그리스인 노예 가정 교사가 로마의 젊은이(때로는 여자 아이도)들을 가르쳤다. 그리스 조각을 헬레니즘식 경관으로 궁정이나 별장의 정원을 꾸몄으며, 로마 요리 상당수도 그리스식이었다.
베네치아광장과 엠마누엘 2세 기념관을 둘러본 우리 일행은 로마의 일곱 언덕 (팔라티노, 캄피돌리오, 퀴리날레, 비미날레, 에스퀼리노, 첼리오, 아벤티노) 중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향했다.

로마 캄피돌리오 언덕
캄피돌리오 (이: Campidoglio)는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이다. 카피톨리누스 언덕 (이: Mons Capitolinus)이라고도 불린다.
이 언덕은 로마의 일곱 언덕에서도 가장 높은 언덕으로, 로마 신화의 최고신이었던 유피테르와 유노의 신전과 로마 시청이 위치해 있다.
캄피돌리오는 로마의 신 사투르누스에게 헌정되어 몬스 사투르니우스 (Mons Saturnius)라고 초창기에 알려졌다.
원래 ‘캄피돌리오’라는 이름은 나중에 지어진 유피테르 신전에만 한정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언덕 전체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고대어로 caput은 머리, 핵심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신전의 토대 부분에서 사람의 잘린 머리가 나오며 확인되었다. 이곳은 고대 로마 제국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졌다.
16세기에 이르러 원래 라틴어로 카피톨리누스라고 불렸던 이름이 이탈리아어 ‘캄피돌리오’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캄피돌리오 언덕에는 르네상스식 궁전들이 들어섰고,이 궁전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로 지어졌다.
이 디자인은 미켈란젤로가 세웠던 도시 계획의 일부였다.
영어로 수도를 뜻하는 ‘Capitol’이 바로 이 캄피돌리오 언덕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 캄피돌리오 광장
캄피돌리오 광장 (Piazza del Campidoglio)은 이탈리아 캄피돌리오 언덕에 있는 광장이다. 미켈란젤로가 1537년에 설계했다. 투시적 효과가 의도된 동적인 타원형 외부광장이 특이하게 사다리꼴을 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미켈란젤로의 가장 두드러진 작품 중에 하나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바로크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착시효과를 이용해 신비의 계단이라고도 불리는 ‘코르도나타 계단’을 오르다 힘겨워질 즈음 캄피돌리오 광장을 만났다. 1537년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곳이란 설명에 남다르게 보였다. 중앙에 로마 제국의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과 세나토리오 궁전이, 양옆으로는 카피톨리노 박물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완벽한 좌우 대칭 구조를 띄고 있으며,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한다고 한다.
바로크 양식의 광장과 곳곳의 여러 조형물, 광장을 감싸고 있는 고전 건축물들이 모두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미켈란젤로의 작품성이 가장 잘 두드러진 곳으로 알려져 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 (이: Statua equestre di Marco Aurelio)은 청동으로 제작되었고 높이는 4.24 m (13.9 ft)이다. 황제는 말을 타고 있는 기마상이지만, 그 외에 황제를 묘사한 조각상 부분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입상과 많은 유사점들을 나타내고 있다. 원본은 카피톨리니 미술관 안에 전시되고 있으며, 현재 캄피돌리오 광장에 있는 조각상은 1981년에 원본을 복원하기 위해 치우면서 만들어진 복제품이다.
이 기마상은 권력과 신과 같은 웅잠함이라는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부분은 실물보다 큰 크기이고 로마 황제들이 군대에게 명령을 내릴 때 쓰던 ‘아들로쿠티오’ 자세를 그의 손으로 취하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정복당한 군대가 본래 이 조각상의 일부를 이루었다 (‘미라빌리아 우르비스 로마이’를 포함한 중세 시대의 기록물을 근거로 하며, 앞서 언급한 서적에 따르면 한때 기마 부분의 오른쪽 앞다리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족장<야만족>에 대한 조그만 조각상이 있었다고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승자이자 완전한 정복을 이뤄낸 황제로서 묘사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무기나 갑주가 없는 형태로 표현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기 자신과 그의 집권기를 그가 바라본 관점에 따라 전쟁 영웅보다는 평화를 가져온 자로서 보여진다.

기마상은 서기 175년경에 세워졌다. 본래 위치에 대해서는 논쟁 중에 있으며 포로 로마노와 콜론나 광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가 있던 곳)이 제시되었다. 그렇지만, 본래 기마상이 있던 장소가 중세 초에 포도밭으로 바뀌었다.
황제를 표현한 기마상들이 여럿 있었으나, 그 조각상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는데, 후대 제국에 들어 주화나 새로운 조각상 등에 쓰일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청동상을 녹이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은 남아있던 기독교 이전 로마 황제들의 청동상 두 개 중 하나이며, 나머지 하나인 레지솔레는 프랑스 혁명이 벌어지고 나서 파괴되었다.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이 캄피돌리오에 보존된 것은 철학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기독교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대중적으로 오해받았기 때문이었으며, 실제로도 여러 황제들과 장군들의 기마 청동상 20여 점 이상이 로마 제국 시대 말 이래로 녹여졌었다. 이 오해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옆에 있었다가 663년에 콘스탄스 2세가 로마를 방문했던 동안에 가져간 것이 유력하다고 보는, 콘스탄티누스 기마상의 옛 위치에서 비롯한 것으로 추측된다. 콘스탄티누스 조각상이 없어지면서, 로마 시민들은 결국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조각상을 콘스탄티누스로 오해하게 되었다.

중세에 들어서면서 이 조각상은 대중들의 시선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로마 시대 조각상들 중 하나였다. 8세기에는 로마의 라테란 궁전 동쪽에 있는 캄푸스 라테라넨시스 (Campus Lateranensis)에 있었으며, 이후에 교황 식스토 4세가 추가한 페데스탈 위에 놓여져 있었다. 라테란 궁전 옆에 있던 기마상의 위치는 그 장소가 황제가 태어나고 교육 받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조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의 자택이 있었던 사실 때문이었다. 교황 바오로 3세의 명으로, 1538년에 미켈란젤로가 광장을 재설계 하던 시기에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옮겨졌다. 미켈란젤로는 정 가운데 광장에 조각상을 두는 데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직접 페데스탈을 설계하였다. 본래 청동상은 카피톨리니 미술관의 콘세르바토리 궁전에 있으며 광장에 있는 것은 현대의 복제품이다.
혁명 공화정인 로마 공화국이 시작된 1849년 11월 29일 밤, 대규모 행렬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의 손에 적백녹 (tricolore, 현재의 이탈리아 국기로 당시에는 새롭게 만들어진 ‘체제 전복’적인 깃발이었다)의 기를 쥐어주었다. 1979년, 세나토리오 궁전 인근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가 동상의 하단 대리석 부분에 손상을 입혔다고 한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당시 서방에 아직 도입되지 않았던 등자를 사용하지 않은 채로 말에 탑승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기마 부분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들에서 재사용되기 위해 꼼꼼하게 연구된 한편, 안장 깔개는 표준 로마 시대의 복장의 일부라는 생각을 갖고 복제되었다. 안장 깔깨는 사실 사르마티아인들에서 그 기원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말이 사르마티아의 말이고 이 조각상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르마티아인들에 대한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라 주장되는데, 이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이름에 ‘사르마티쿠스’를 추가하기도 했었다.

– 콘세르바토리 궁전
콘세르바토리 궁전 (Palazzo dei Conservatori, 관리인들의 궁전)은 중세시대 때 지역의 행정관들을 위해, 기원전 6세기에 유피테르에게 봉헌된 신전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위에 지어졌다. 미켈란젤로가 콘세르바토리 궁전의 개보수 작업을 실시하면서 2개층으로 뻗어 있는 대 오더가 처음으로 이곳에 사용되었으며, 1층의 로자 입구와 2층의 창문 옆으로 코린토스식 필라스터와 그것을 보조하는 이오니아식 원주가 배치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새로운 포르티코는 옛 양식에 대한 재해석이었다. 이 포르티코는 엔타블러처들, 플랫 하나, 격천정으로 이뤄졌다. 기둥에 배치된 엔타블러처들은 각 구간의 앞에 설치됐고, 동시에 조화되는 반기둥들은 뒤쪽의 벽에 기대어 있다. 각 필라스터는 양쪽에 교각과 원주가 있는 혼합체를 이루었다. 거대한 필라스터는 포르티코와 위층과 접하고 있는 넓은 기초를 형성하였다. 모든 창들이 분절 페디먼트로 덮여 있다. 천장을 꾸민 발러스트레드는 전체적으로 강한 수평성을 강조하며, 이것과 대조적으로 수직을 이루는 원주들이 웅장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거대한 기둥의 수직성은 독립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반면에 엔타블러처와 발러스트레드의 수평성은 광장의 세로축을 강조하고 있다. 궁전의 파사드는 1530년대에 미켈란젤로가 보수하였고 다시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보수가 이뤄졌다.
로마에서, 콘세르바토리 궁전의 포르티코는 여러 길드들을 보호했었다. 재판소에 갈 정도 충분한 중요성을 띠지 않는다면 사업 상에 벌어진 분쟁들에 대한 판정을 이곳에서 내렸다. 이곳은 이러한 상업 활동에 있어 적절한 장소였다. 1470년대까지 로마의 주요 시장은 캄피돌리오 일대에서 열렸는데, 캄피돌리오에서 남쪽에 위치한 옛 포룸에서 가축에 대한 세금 부과 및 매매가 계속해서 이뤄졌다.

고대로마 공화당 터
우리 일행은 캄피돌리오 언덕을 둘러본 후 고대로마 공화당 터로 향했다.
언덕에서 바라본 공화당 터는 당시 고대 로마의 영광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고대 로마 (Roma antiqua)는 기원전 753년, 이탈리아반도 로마에서 발흥한 로마 왕국부터 로마의 기원후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의 로마 문명을 의미한다.
이 시대의 로마는 로마 왕국, 로마 공화국, 로마 제국으로 이어져왔다. 이후 전성기를 거쳐 최전성기에 이르렀던 로마는 지중해 세계에서 오늘날의 미국과 비견될 정도인 그야말로 최강대국이었다.
이곳 고대로마 공화당 터는 로마의 발흥과 전성기, 쇠퇴 과정 중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논의되고 실행되었던 로마의 심장부였던 것이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서유럽에 대한 로마 제국의 통제력은 사라졌으며, 서로마 멸망을 고대 로마의 끝으로 보는 게 다수설이다.
로마 문명 자체는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진다.
로마는 그리스 문명과 더불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럽 문명의 틀을 마련한 국가 (또는 문명)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유럽 문명의 가장 중요한 뿌리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융합이 일어난 곳이 로마 제국이기 때문이다.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면에서는 후대의 공화주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서 고대 아테네가 가지는 위상을, 비슷하게 공화주의 이데올로기에서는 로마가 담당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또한 고대 로마의 심장부인 로마는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교회의 중심지로서 크나큰 위상이 있다.

– 로마 공화정
로마 공화국 (라: Res Publica Romana, 레스 푸블리카 로마나)은 고대 로마 시대에서 기원전 510년경 왕정을 폐지하고 이후 450여 년간 로마 정치를 이끌었던 공화정 정체(政體)와 그 정부를 일컫는다. 로마 공화국은 권력의 분리와 견제와 균형 원칙에 중점을 둔 복합적인 정치 체제였다.
오랜 세월 파트리키와 그 밖에 명문가 출신이 아닌 플레브스가 정치 투쟁을 벌이면서 공화국은 발전했다. 공화정 초기에 로마는 왕정 시대에 기원을 둔 귀족들이 통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이 정부를 장악할 수 있게끔 한 법이 철폐되었으며, 그 결과 신귀족이 출현했다.
공화정이 출범하고 처음 2세기 동안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에서 지중해 세계 전체로 영토를 넓혔다. 기원전 3세기에 로마는 북아프리카, 이베리아반도, 그리스, 갈리아 남부까지 정복했다. 이후 2세기 동안 로마는 오리엔트의 상당한 지역과 갈리아까지 지배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공화정 체제는 제국주의로 변질된다.

로마 공화국이 로마 제국으로 이행되는 정확한 시점은 학자들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역사가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에 오른 기원전 44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기원전 31년, 로마 원로원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특별한 권력을 부여한 기원전 27년 등을 로마 공화국이 종식된 시점으로 제시한다.
로마가 이룬 수많은 법률 및 입법 제도는 유럽을 비롯한 세계 전역의 근대 국민 국가와 국제 기구에 그 자취를 남겼다. 또 로마의 라틴어는 유럽 여러 지역의 문법과 어휘에 영향을 끼쳤다.
로마 공화국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받았다.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인데, 이 말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즉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가리켰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일컫게 되어 역사적으로 기원전 5,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국은 과두정의 성격을 띄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되, 다만 귀족 계층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는 형태였다. 공화정의 정치기구로는 원로원, 민회, 정무관 등을 두어 견제하였다.

– 고대로마 공화당 터의 유적들
17세기에서 19세기 동안 수많은 예술가들과 고고학자들이 이곳 고대로마 공화당 터를 거쳐갔다. 그들은 이곳의 옛 영화를 그리워했으며, 이와 관련된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이 작품들 중 몇몇은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어 현재의 보존과 복원 작업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도 한다. 1803년에 한 고고학자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에 쌓여있던 잔해들을 치웠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포룸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다. 1898년에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크게 3개의 목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첫째 곳곳에 흩어져 있는 기둥, 잔해, 조각상들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을 것, 둘째 문화재들을 파손하지 않고 흙과 돌 속에 파묻혀 있는 건물들을 다시 파낼 것, 셋째 이미 발굴된 건물들의 용도와 이름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2008년에 폭우가 내려 유적들 일부가 손상되었다. 다만 발굴 작업은 여전히 지속되었고 2009년에는 추가적인 결과들이 출토되었다.
신전으로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디부스 아우구스투스 신전, 콩코르드 신전,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카이사르 신전, 야누스 신전, 유피테르 신전, 사투르누스 신전, 베누스 신전, 베누스와 로마 신전,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신전, 베스타 신전 등이 있다.
바실리카로 바실리카 아에밀리아, 바실리카 줄리아, 바실리카 막센티우스 등이 있으며, 개선문으로는 티베리우스 개선문, 티투스 개선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아우구스투스 개선문 등이 있다.
고대로마 공화당 터에 관해서는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 편에서 더욱 세세하게 적으려 한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