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교회는 성령공동체 (성령강림절 2026)
본문: 사도행전 2장 1–4절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기독교의 3대 절기는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성령강림절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육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날이고,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령강림절은 부활의 생명이 성령을 통하여 교회와 성도들의 삶 속에 실제로 역사하기 시작한 날입니다.
지난 주일 밤 11시 21분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사관님, 아침 일찍 일어나시면 전화 좀 주세요. 응급이 발생해서 그럽니다 .밤 늦게 미안합니다” 월요일 아침에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아주 낮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젯밤 8시경 아들이 죽었습니다.” 주일 저녁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 당료 쇼크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목사님은 장례 절차에 관하여 의논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구세군 장례 절차를 알아보고, 화요일 아침에 찾아갔습니다. 다행히도 소속 교단인 연합교회에서 도와준다고 해서 제가 할 일은 특별히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시인입니다. 저녁 때 자신의 심정을 시에 담았습니다. 시의 첫 문장은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아직도 너를 과거형으로 부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너는 내게 한 번도 “있었다”가 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식은 현재형으로 부모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성령은 한 번도 우리에게 과거인 적이 없습니다. 성령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입니다. 성령은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에만 임하셨던 과거의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은 사도행전 2장에만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오늘도 우리를 깨우시며, 오늘도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늘 우리 안에(in), 우리와 함께(with), 우리를 위하여(for)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강림절을 기념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기념일에 갇히지 않습니다. 성령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임재입니다. 성령은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성령은 어제의 감동으로 끝나는 분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언어와 삶을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행 2:1)
제자들은 한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도 있었고, 연약함도 있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막막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붙들고 있었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 8)
제자들은 이 말씀을 붙들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순절 날,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날은 단순히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날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날이었습니다. 교회가 탄생한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담대한 증인으로 변화된 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절의 의미를 세 가지로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첫째, 성령강림절은 약속이 성취된 날입니다.
둘째, 성령강림절은 교회가 탄생한 날입니다.
셋째, 성령강림절은 사람이 변화된 날입니다.

- 성령강림절은 약속이 성취된 날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라고 말씀합니다. 오순절은 원래 유대인의 절기였습니다.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날 지키는 절기였습니다. 농경적으로 밀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이고, 역사적으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기의 의미를 새롭게 완성하셨습니다.
구약의 오순절이 율법을 기억하는 날이었다면, 신약의 오순절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마음에 새기시는 날이었습니다. 돌판에 새겨졌던 율법이 이제 성령을 통하여 사람의 심령에 새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성령강림은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강림은 하나님의 오랜 약속이 성취된 사건이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요엘은 이미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하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그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강림절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 주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조급함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시작됩니다. 교회는 인간의 열심만으로 세워지는 곳이 아닙니다. 사역은 인간의 재능만으로 감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인간의 의지만으로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이 필요합니다.
성령 없이는 예배도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없이는 말씀도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없이는 기도도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없이는 봉사도 의무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강림절은 약속이 성취된 날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오늘도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 성령강림절은 교회가 탄생한 날입니다.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생일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임하시기 전에도 제자들은 있었지만, 성령께서 임하신 후에 비로소 그들은 세상 앞에서 복음을 증언하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18절에 약속하신 교회는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이 임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교회는 성부가 주인되고, 성자가 머리되어, 성령이 역사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탄생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만든 종교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성령의 임재로 탄생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성령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성령공동체라는 말은 교회가 단순히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친목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취미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정으로만 유지되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교회는 살아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배가 살아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말씀이 살아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기도가 살아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사랑이 살아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선교가 살아납니다.
사도행전 2장 후반부를 보면 성령 받은 교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서로 교제했습니다. 떡을 떼었습니다.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자기 소유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성령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성령을 받은 교회는 말씀이 중심에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교회는 기도에 힘씁니다. 성령을 받은 교회는 사랑으로 서로를 돌봅니다. 성령을 받은 교회는 예배와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은 교회는 안으로만 모이지 않고 밖으로 흘러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성령은 교회를 세우시지만, 교회를 교회 안에만 가두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탄생일인 동시에 선교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모이기 위해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모이는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삶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교회는 ‘선교 공동체’가 됩니다.
교회는 ‘선교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선교적’이지 않으면 ‘선교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의 목적이 바로 선교입니다.
구세군은 1865년에 동부 런던 할렘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78년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전의 이름은 “The Christian Mission”이었습니다. 1878년, 이름 변경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대장인 윌리엄 부스가 보고서를 검토하다가 “The Christian Mission is a volunteer army”라는 문장을 보게 됩니다. 그 순간 부스가 말합니다. “Volunteer(자원봉사)라고? 나는 자원봉사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징집된 군인이다.” 그리고 그는 그 문장 위에 “Volunteer”를 지우고 “Salvation(구원)”이라고 적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름은 The Salvation Army(구세군)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1878년 8월의 일입니다.
구세군은 하나님의 군대이고,구세군에 속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입니다. 디모데후서 2:3-4절에서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구세군은 세상을 구원하는 선교공동체입니다.
- 성령강림절은 사람이 변화된 날입니다.
성령강림절의 가장 놀라운 사건은 사람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환경을 바꾸기 전에 먼저 사람을 바꾸십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제자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베드로의 변화는 매우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그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는 용감해 보였지만 두려움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그는 충성스럽게 보였지만 십자가 앞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자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서서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히 선포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던 사람이 이제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실패했던 사람이 이제는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성령은 단지 감동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을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두려움을 담대함으로 바꾸십니다. 성령은 실패를 사명으로 바꾸십니다. 성령은 상처를 간증으로 바꾸십니다. 성령은 무너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이 변합니다.
1) 성령이 임하시면 마음이 변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이 변화됩니다. 두려움이 믿음으로 바뀌고, 원망이 감사로 바뀝니다. 불안하던 마음에 평안이 임하고, 닫혀 있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집니다. 상황이 먼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이 먼저 바뀝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십니다.
2) 성령이 임하시면 말이 변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의 입술이 새로워집니다. 부정의 언어가 사라지고, 생명과 소망의 말이 흘러나옵니다. 불평하던 입술이 감사하는 입술로 바뀌고, 상처 주던 말이 위로하는 말로 바뀝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생명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3) 성령이 임하시면 삶이 변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되고, 세상 가치에 끌려가던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게 됩니다. 예전에는 나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예전에는 피하고 숨었던 사람이, 이제는 복음의 증인으로 서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단순히 감동받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 삶을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습니다.
잠언 4:23-27절에는 마음과 말과 삶의 흐름을 연결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마음(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은 생명의 샘, 즉 모든 말과 행동의 출발점입니다. 마음이 흐려지면 말이 흐려지고, 말이 흐려지면 삶이 흐려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마음이 곧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2) 말(4:24)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마음이 지켜지면 말이 달라집니다. 말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예수님도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눅 6:45)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바르면 말이 바르고, 말이 바르면 관계가 바르게 됩니다.
3) 삶(4:25–27)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마음이 변하고, 말이 바뀌면,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결국 마음이 지켜지면 말이 바르고, 말이 바르면 삶의 길이 올바르게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를 더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더 겸손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더 섬기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더 담대한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마음에는 믿음이 자라고, 입술에는 소망이 흐르고, 삶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납니다.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성령강림절은 약속이 성취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강림절은 교회가 탄생한 날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힘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강림절은 사람이 변화된 날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이 담대한 증인이 된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 안에서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오늘도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고, 기도 가운데 임재하시며, 예배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성령 하나님,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임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 가운데 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마음과 교회 위에도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가정에도 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일터와 삶의 자리에서도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레미야를 아십니까? 예레미야 31:31-34
서론
지난주에는 “히스기야를 아십니까?” 제목으로 히스기야 왕의 특징을 3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히스기야는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내적 개혁을 한 사람입니다. 우상은 단순히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둘째, 북왕국을 멸망시키고 호시탐탐 남왕국 침공을 엿보던 앗수르에 의한 외적 위기를 극복한 사람입니다.
셋째,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눈물로 기도하여 15년의 생명을 연장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예레미야를 아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레미야는 구약의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고통을 깊이 보여 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가슴에 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눈물만 흘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말씀 때문에 고난받은 선지자였고, 동시에 절망의 시대 속에서 새 언약의 소망을 선포한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영적으로 무너지고,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가던 시대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네 형태를 만들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구별하여 온 세상의 예언자로 세웠다.'(렘 1:5) 그때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는 아직도 어려서 말할 줄도 모릅니다.'(렘 1:6) 하자,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보호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 활동했던 이사야가 ‘자원한 선지자’라면(사 6:8), 예레미야는 ‘징집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히브리어로 ‘나비’입니다.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대언자입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때부터 시드기야 왕 때까지 약 40년 동안 말씀을 전했으며, 나라가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울었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를 세 가지 모습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둘째, 고난 받는 선지자입니다.
셋째, 새 언약의 선지자입니다.
-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 9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 9:1)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는 백성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노력은 터진 웅덩이와 같습니다. 계속 붓지만 계속 새어 나갑니다. 채우려 하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물질로 영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안타까운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3번 우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우셨습니다(요 11:35).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회개하지 않는 도시를 보며 울부짖으셨습니다(눅 19:41).
겟세마네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기 위한 고통 속에서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히 5:7).
하나님의 사람은 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죄를 보고 울고, 영혼을 위해 울고, 시대를 보고 울고, 교회를 위해 울고, 국가를 위해 울어야 합니다.
어제는 현충일이었습니다. 현충일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친 이들의 눈물과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들의 희생 위에 오늘의 자유와 평화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 워싱턴 D.C에 가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가 있습니다. 그곳에 이런 비문이 써 있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공짜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눈물과 희생이 우리가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도 십자가의 사랑 위에 세워졌습니다.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방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책임입니다.
- 고난 받는 선지자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조롱을 당하고,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20장 앞부분을 보면 그는 바스훌이라는 제사장에게 맞고 목에 쇠고랑을 채운 채 갇히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 이것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너무 지치고 아파서 나온 선지자의 탄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의 안에서 불처럼 타올랐습니다. 예레미야가 입을 닫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붙는 것처럼 타올랐습니다.
여기서 “불”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강한 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안에서 조용히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그의 마음과 영혼을 붙들고, 그를 다시 일어나게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침묵하려고 했지만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안에서 살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고전 9:16)
“화가 있다”는 말은 단순히 벌을 받는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외면할 때 오는 영적 고통과 책임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하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고 고백한 것처럼, 바울도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잠자는 시대를 깨우는 사람입니다. 악한 시대를 역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선지자의 삶은 결코 평탄할 수가 없습니다. 악한 시대 속에서 선하게 살면, 당연히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증거입니다.
- 새 언약의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에서 34절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빛나는 약속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겠다.”(렘 31:33)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다릅니다. 옛 언약이 인간의 불순종을 드러냈다면, 새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냅니다. 옛 언약이 죄를 깨닫게 했다면, 새 언약은 죄를 용서합니다. 옛 언약이 돌판에 기록되었다면, 새 언약은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에 기록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새 언약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결심만으로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종교적 습관만으로는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어야 합니다. 은혜의 강물이 흘러야 합니다.
은혜는 상과 다릅니다. 상은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지만, 은혜는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구원받은 자답게 사는 성결도 우리가 노력해서 받는 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을 상으로 착각하는 자는 결코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구원을 받았고, 자기가 노력을 해서 성결하게 산다고 생각하는데 누구에게 감사하겠습니까? 교만한 자는 결코 감사하지 않습니다.
금요일에 성경 묵상은 교만한 에돔에 관한 경고였습니다. “바위 틈에 살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를 높은 데에 지었을지라도 내가 그리로부터 너를 끌어내리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49:6)”
에돔은 험한 바위산과 높은 산악 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페트라는 에돔의 수도였습니다. 바위 틈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 주는 천연 요새였고, 산꼭대기는 적들이 쉽게 올라올 수 없는 방어의 자리였습니다. 페트라 입구의 시크(siq) 길만 막으면 그곳의 철옹성입니다. 그래서 에돔은 교만하였습니다. 교만은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무지입니다. 정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진흙입니다. 진흙은 자기 모양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붙들릴 때 비로소 그릇이 됩니다(렘 18:4).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를 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지만,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죄를 보며 분노만 한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백성을 위해 울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고난 받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조롱과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새 언약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심판의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실 회복과 죄 사함의 은혜를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울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말씀을 붙드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 언약의 은혜를 붙드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죄로 무너지는 백성을 보며 울었던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이 시대와 교회와 가정과 영혼을 위해 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았지만 끝까지 말씀을 버리지 않았던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게 하옵소서.
무너진 시대 속에서도 새 언약을 선포하게 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은혜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주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옵소서.
눈물의 신앙, 말씀의 신앙, 새 언약의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히스기야를 아십니까? (왕하 20:1-3)
열왕기하 18:1–8, 19:14–19, 20:1–7
히스기야는 유다 왕들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한 왕이었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왕하 18:5)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평가입니다. 많은 왕들이 유다의 왕좌에 앉았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한 왕은 많지 않았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19명의 왕이 있었지만 선한 왕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든 왕들이 여로보암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이 성경에서 ‘악한 왕의 대명사’가 된 이유는 단순히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만든 죄의 구조가 북이스라엘 전체의 역사와 신앙을 200년 넘게 타락시키는 뿌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과 벧엘에 산당을 세우고, 금아지를 만들고, 절기의 날짜도 바꾸고, 제사장을 레위 지파가 아닌 사람을 세웠습니다(왕상 12:28-33). 여로보암은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국가의 근간인 법을 바꾸었습니다. 후대의 왕들은 악법을 따라 모두 악한 왕이 되었고, 결국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멸망했습니다.
반면 남왕국 유다에는 선한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 돌아가고 우상을 제거하며 말씀과 예배를 회복하려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선한 왕은 히스기야와 요시야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삶이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무너진 신앙을 바로 세우는 내적 개혁을 해야 했습니다. 나라 안에는 우상이 가득했고, 백성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강대국 앗수르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만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한복판에서 죽을 병에 걸리는 개인적 절망도 경험해야 했습니다.
히스기야의 삶에는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적 개혁입니다. 둘째는 외적 위기입니다. 셋째는 개인적 병입니다. 이 세 사건은 오늘 우리 신앙의 모습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 앞에서 개혁되어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앗수르와 같은 위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마주해야 할 죽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 히스기야와 내적 개혁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유다의 영적 상태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왕이었습니다. 성전은 더럽혀졌고, 우상숭배는 나라 곳곳에 퍼져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우상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치 개혁이나 경제 개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영적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의 개혁에는 분명한 방향이 있었습니다.
먼저 그는 산당을 제거했습니다. 산당은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인간의 편의와 욕망이 섞인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보다 사람들이 편한 길을 선택한 장소였습니다. 신앙의 타락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이동할 때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 내가 편한 예배를 찾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종교생활을 붙들 때 신앙은 무너집니다.
또한 그는 우상을 깨뜨렸습니다.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우상은 단순히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모두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돈, 권력, 성공, 명예, 사람의 인정, 자기 확신까지도 하나님을 대신하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히스기야는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놋뱀은 본래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었습니다(민 21장). 모세가 죽었던 느보산에 가면 놋뱀이 높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놋뱀 밑에 요한복음 3장 14절과 15절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백성들이 놋뱀을 바라볼 때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백성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놋뱀 자체를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도구가 목적으로 변질되면 우상이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과거의 은혜가 오늘의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목회자, 어떤 프로그램, 어떤 전통, 어떤 경험을 통해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오늘 하나님께 새롭게 순종하는 길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사용하신 도구라도, 그것이 하나님보다 앞서면 우상이 됩니다.
- 히스기야와 외적 위기
히스기야가 내적 개혁을 단행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큰 외적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앗수르는 고대 근동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앗수르는 이미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주변 나라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이제 그들의 군대가 유다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할 위기가 닥치자,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의 방어를 준비하였습니다. 전쟁에서 물은 생명입니다. 성 밖에 있는 수원이 적에게 노출되면, 예루살렘은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터널을 뚫어 기혼샘의 물을 성 안쪽으로 끌어들이고, 바깥쪽 물길은 막아 적군이 물을 얻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성밖 기혼샘의 물을 터널을 뚫어 성안 실로암 못으로 끌어왔습니다. 히스기야 터널의 놀라운 점은 양쪽에서 사람들이 동시에 파 들어가다가 중간에서 만났다는 점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정밀 장비가 없던 시대에 약 533미터의 암반 터널을 뚫고 두 팀이 만났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히스기야 터널은 지금도 물이 흐르고 있고 걸어서 갈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히스기야 터널과 관련된 추억이 있습니다. 성지순례 중 히스기야 터널에 가기 전날 밤에 갑자기 발에 통증이 생겼습니다. 밤이어서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습니다. 병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인터넷을 조사하던 중 통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몸 상태는 도저히 히스기야 터널에 갈 수 없는 상태이지만, 만약 이번에 가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다리를 절며 절며 뒤에서 일행을 따라 갔습니다. 동료 사관님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통풍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동료들의 배려로 탐방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왔습니다. 일행 중에 Tim 사관님이 통풍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팀 사관님에게 약을 얻어 먹고 무사히 성지순례의 나머지 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앗수르는 군사적으로만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앗수르 왕인 산헤립은 랍사게 장군을 보내어 유다 백성들의 믿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너희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다른 나라의 신들도 자기 백성을 구원하지 못했는데, 예루살렘이 어떻게 구원받겠느냐?”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위협과 조롱과 절망의 말이 담겨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 놓았습니다. 히스기야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단순히 “살려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셔서 천하만국이 여호와만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옵소서.” 그의 기도 중심에는 자기 보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백성을 반드시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3)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유다를 지켜 주셨습니다.
- 히스기야와 개인적 병
히스기야는 외적 위기만 겪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개인적 절망도 만났습니다.
열왕기하 20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는 병들었고, 그 병은 죽을 병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사야 선지자는 “너는 집을 정리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죽음이 가까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히스기야 앞에 놓인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말을 듣고 낙심하여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벽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왕하 20:2-3)
히스기야는 왕의 체면을 내려놓고 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통곡했습니다. 성경은 그의 눈물을 숨기지 않습니다. 신앙은 눈물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아픔이 없는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 나가기 전에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겠고 15년을 더 살 것이다”(왕하 20:5-7절)
히스기야는 죽음의 문턱에서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얼굴을 돌렸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세상 사람은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아는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이분은 60세 때 암에 걸렸습니다. 장로님은 바로 히스기야의 기도를 했습니다. “제가 주께 진실과 전심으로 행한 것을 기억하시고 히스기야 같이 15년을 연장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장로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을 연장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75세가 가까이 왔을 때 장로님은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한 번만 더 15년을 연장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족하겠나이다.” 장로님은 지금 84세입니다.
수요일에 암 치료 중인 후배 사관님의 안부가 궁금해서 전화를 했습니다. 대화하는 중에 사관님도 히스기야의 기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관님은 기도 중에 ‘진실과 전심’(in truth and with a perfect heart)이라는 단어가 걸렸다고 합니다. “정말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를 위해서 일을 했나?”
사관님은 하나님께 미안해서 ‘진실과 전심’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들어주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호전되었고, 수술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께 얼굴을 돌렸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세상 사람은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니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히스기야는 누구입니까?
히스기야는 개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께 돌아갔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위기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두려움의 편지, 상처의 편지, 문제의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 놓아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죽을 병 앞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간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과 역사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히스기야의 신앙입니다.
개혁의 자리에서 우상을 깨뜨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위기의 앗수르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 놓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죽을 병의 자리에서 생사를 주관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고백은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 마음의 우상을 깨뜨리게 하옵소서.
주님, 앗수르의 편지를 주 앞에 펴 놓게 하옵소서.
주님, 죽을 병 앞에서도 주의 얼굴을 구하게 하옵소서.

천국환송예배 설교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다 (롬 14:7-8)
우리는 지금 전원 형제의 ‘천국환송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는 5월 17일 저녁 8시경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당뇨 쇼크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36년간의 짧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길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지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여 보면, 인생의 불행은 짧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 데에 있습니다. 인생은 삶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깊이가 더 중요합니다.
전원 형제의 아버지인 전현구 목사님은 시인입니다.
목사님은 아들을 보내는 심정을 ‘고별과 석별 사이에서’란 제목의 시에 담았습니다.
시의 첫 문장은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아직도 너를 과거형으로 부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너는 내게 한 번도 “있었다”가 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부모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전원 형제가 하늘나라로 가고 목사님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평안한 얼굴로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사모님은 저에게 간증을 들려주었습니다.
“아들을 보내고 눈물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원이는 네 아들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맡겼던 내 아들이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마음에는 평안이 밀려왔고, 원망 대신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날 사모님의 간증을 들으며 위로하러 갔던 제가 오히려 더 많은 위로와 은혜를 받았습니다.
시의 중반쯤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아들아, 너는 나의 신학이었다. 너를 통해 새롭게 신학을 배웠다. 책 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 속에서 피 흘리는 존재를 통해 나는 인간의 존엄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를 배웠다.”
전 목사님은 아들의 고통, 아들의 상처, 아들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했습니다. 목사님은 아들을 통해서 교리 속에 갇힌 예수가 아닌, 고통 속에 함께하는 예수를 배웠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세상이란 학교에 등록해서 다양한 과목을 배웁니다. 내가 잘하는 과목도 있지만 못하는 과목도 있습니다. 필수 과목도 있지만 선택 과목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과목도 있지만 싫어하는 과목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과목에는 나름의 의미와 뜻이 있습니다. 인생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각 과목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대충대충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졸업할 시간이 되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게을리했는가를 뒤늦게 깨닫고 후회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사는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가 동일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다르다면 죽음의 끝자락에 섰을 때 살아왔던 삶에 대하여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살 수는 있지만, 자신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언젠가는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가 동일하였기에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삶과 죽음의 이유가 동일할 때, 죽음의 순간에 비겁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삶의 이유는 그리스도였습니다. 죽음의 이유도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입니다. 아직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명이 남아 있는 것이고, 우리가 죽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다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36년의 삶은 육신적으로 너무 아쉽고 애통하지만, 전원 형제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 마치고 본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아들아,
만약 인간의 눈물을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면, 너의 눈물은 반드시 별처럼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조금은 평안하여라.
너무 오래 너는 스스로를 심판하며 살았다. 이제는 자신을 용서하며 쉬어라.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 침묵의 강을 건너게 되면, 그때 우리 다시 아무 말없이 오래 눈을 맞추자.
이 생에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눈물 없이 나누자. 그때는 아버지가 꼭 먼저 말하마.
“아들아, 미안하다” ‘원아, 수고 많았다”
기도하겠습니다.
36년 전,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경륜 가운데 목사님 가정에 전원 형제를 귀한 선물로 보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의 삶의 시작도 주님의 손에 있었고, 그의 걸음걸음도 주님의 인도하심 아래 있었으며,
이제 그의 마지막도 주님의 품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여정을 마치고 하나님 나라로 간 전원 형제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 모여 천국환송예배를 드립니다. 짧았지만 귀했던 그의 생애 속에 주님께서 심어 주신 사랑과 믿음과 선함의 흔적들을 되새기며,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이 시간 육신의 이별로 깊은 슬픔 가운데 있는 유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풍성히 부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낸 마음의 아픔을 성령께서 친히 어루만져 주시고, 하늘의 소망으로 다시 일어설 힘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또한 함께 조문한 모든 이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위로의 은혜를 더하여 주시고, 우리 모두가 이 땅의 삶이 잠시임을 기억하며 영원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Death is not the end of life, but its completion (Romans 14:7-8)
We are currently holding a ‘Heavenly Farewell Service’ for Brother Jeon Won. He passed away on the evening of May 17th around 8:00 PM from a heart attack caused by diabetic shock while returning home after exercising. He lived a short life of 36 years on this earth.
Although his life was not long, it offers us an important lesson. Upon deep reflection, the misfortune of life lies not in its brevity, but in realizing what is truly important too late. In life, the depth of life is more important than its length.
Brother Jeon Won’s father, Rev. Jeon Hyeon-Gu, is a poet. He captured his feelings of sending his son off in a poem titled ‘Between Farewell and Parting.’ The first line of the poem made me think deeply.
“Son, I still have not learned how to call you in the past tense. For you have never once been to me as ‘was.’ “
There is a saying that when parents pass away, they are buried in the ground, but when a child dies, they are buried in the heart. That is why it seems that children always remain in a parent’s heart in the present tense.
After the Jeon brothers went to heaven, I visited the pastor’s home. The pastor and his wife welcomed me with peaceful faces. His wife shared her testimony with me. “While I was praying with tears after sending my son off, I heard the voice of God. God told me, ‘Won is not your son, but My Son whom I entrusted to you.” The moment I heard those words, peace flooded my heart, and I was able to offer prayers of gratitude instead of resentment.”
Around the middle of the poem, there is a sentence that reads:
“ Son, you were my theology. Through you, I learned theology anew. Not through the God in books, but through a being bleeding from within flesh, I learned how desperate human dignity truly is.”
Pastor Jeon shared in his son’s pain, his son’s wounds, and his son’s final moments.
It seems the pastor learned through his son not a Jesus trapped within doctrine, but a Jesus who shares in suffering.
From birth, humans enroll in the school called the world and learn various subjects. There are subjects I excel at, but there are also subjects I struggle with. There are required subjects, but there are also electives. There are subjects I like, but there are also subjects I dislike. However, every subject has its own meaning and purpose.
During the course of life lessons, we often spend our time half-heartedly, failing to realize the importance of each subject.
Then, one day, when the time to graduate suddenly arrives, we belatedly realize how negligent our studies were and feel regret
Today’s text, ‘Romans’, is a letter sent by the Apostle Paul to the believers living in Rome.
It seems the pastor learned, through his son, about a Jesus who is present in suffering, rather than a Jesus trapped within doctrine. “For none of us lives for himself, and none of us dies for himself. For if we live, we live for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for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Romans 14:7-8)
For Paul, the reason for life was Christ. The reason for death was also Christ. Therefore, he confessed in Philippians:
“For to me, living is Christ, and dying is gain.” (Philippians 1:21)
Paul is a man who lived for Christ and died for Christ. This is the life of a person of faith.
Death is not the end of life, but its completion. The fact that we are still alive means that God’s mission to be accomplished through us still remains, and our death means returning to our true home after completing the mission entrusted by God.
Although his 36 years of life are painfully regrettable in the flesh, Brother Jeon has completed the mission given by God and has returned to the Kingdom of God.
I would like to conclude my message by reading the final part of the poem.
“My son, If God remembers human tears, your tears will surely be recorded like stars. So now, find some peace. You have lived for too long judging yourself.
Now, forgive yourself and take a rest. And someday, when I also cross that river of death, let us see your eyes for a long time again without saying a word.
Let us share the stories we could not finish in this life without tears.
Then, I will surely speak first. “My son, I am sorry.” “Won, you’ve done your best for your life.”

하와와 판도라
성경에서 나오는 최초의 여성은 ‘하와’이고,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최초의 여성은 ‘판도라’이다. 하와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 질서 안에서 인간의 관계를 완성하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판도라는 제우스가 인간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 만든 존재이다. 하와와 판도라는 ‘여성의 기원’이라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지만, 신학적 의미와 인간 이해는 전혀 다르다.
-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신 목적
성경에서 하나님은 하와를 ‘돕는 배필’로 만드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8) 여기서 중요한 말은 ‘돕는 배필’이다. 히브리어로는 ‘에제르 케네그도’이다. ‘에제르’는 단순히 시중드는 보조자가 아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분으로 표현될 때도 사용된다. ‘에제르’는 구약성경에 총 21번 나오며, 그중 하와에게 2번, 나머지는 주로 하나님의 도움 또는 결정적인 도움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또한 ‘배필’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그에게 마주 선 자’, ‘그에게 적합한 상대’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하와가 아담 밑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아담과 마주 보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와는 아담의 뒤에 숨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아담 앞에 서서 대화하고 응답하고 함께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이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했다. 하와는 아담보다 낮은 존재가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동등한 인간이다. 창세기 2장 22–24절에서는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 지음 받아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고백되고,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결혼 언약의 근거가 된다.
- 제우스가 판도라를 만든 목적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판도라’를 만든 목적은 매우 다르다. 판도라 이야기는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쳐다 준 신적 존재이다. 불은 단순한 불꽃이 아니다. 불은 문명, 기술, 지혜, 요리, 금속 가공, 도시 발전의 상징이다. 인간은 불을 통해 동물과 다른 문명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준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제우스의 입장에서 이것은 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인간이 불을 가지게 되면 도구를 만들고 기술을 발전시키며 신들의 세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우스는 인간에게 벌을 내리기로 한다. 그 벌의 도구가 바로 ‘판도라’이다. 판도라는 인류를 위한 축복으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사건에 대한 제우스의 보복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판도라는 여러 신들로부터 아름다움, 매력, 기술, 말재주 등을 선물로 받는다. 그래서 이름도 판도라, 곧 ‘모든 선물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다.
제우스는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낸다.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은 ‘먼저 생각하는 자’라는 뜻이다. 반면 에피메테우스라는 이름은 ‘나중에 생각하는 자’라는 뜻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지혜롭고 앞을 내다보는 존재이다.
그는 동생에게 제우스가 보내는 선물을 받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판도라를 받아들인다. 그는 나중에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판도라는 순수한 축복의 선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 세상에 고통과 재앙이 들어오게 하는 존재였다. 판도라가 제우스가 선물로 준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서 질병, 고통, 수고, 죽음과 같은 재앙들이 세상으로 나왔다. 급하게 뚜껑을 닫자 마지막에 ‘희망’만 남았다.
- 하나님과 제우스
하와와 판도라의 차이는 단순히 성경과 신화의 차이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이다. 특히 여성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는가의 문제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셨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는 전능한 창조주라기보다 신들의 왕이다. 그는 질투하고, 분노하고, 속이고, 복수한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인간보다 힘이 강할 뿐, 인간처럼 욕망, 감정과 약점을 가진 존재로 묘사된다.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신 목적은 선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로움을 보시고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만드셨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야 하고, 다른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한자어 인간(人間)은 ‘사람(人)’이 ‘사람 사이(間)’에서 비로소 사람이 되는 관계적 존재를 뜻한다.
성경에서 여자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다. 타락의 책임도 하와에게만 있지 않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임을 말한다.
반면 판도라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사회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인간의 고통과 불행을 설명하면서 여성을 위험과 재앙의 통로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판도라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볼 때 구원의 계시라기보다, 인간이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려 했던 신화적 상상력이다.

혈관과 신경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보기
서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몸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몸 안에는 뼈와 근육, 장기와 피부가 있고, 그 모든 기관들이 서로 연결되어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중에서도 혈관과 신경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지키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혈관은 피가 흐르는 길입니다. 피는 산소와 영양분을 온몸에 공급하고, 생명을 유지하게 합니다. 신경은 몸의 소통 체계입니다. 뇌와 몸 사이에 신호를 주고받으며, 감각, 움직임, 반응을 조절합니다. 혈관이 막히면 생명의 흐름이 막히고, 신경이 손상되면 몸의 감각과 기능이 무너집니다.
이 관계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혈관은 생명의 흐름을 보여 주고, 신경은 말씀과 성령에 대한 영적 감각을 보여 줍니다. 건강한 몸에 피가 잘 흐르고 신경이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듯이, 건강한 신앙에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흐르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영적 감각이 필요합니다.
- 혈관은 생명의 흐름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피를 생명과 깊이 연결합니다. 레위기 17장 11절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제사와 속죄의 맥락에서 주어진 말씀이지만, 동시에 피가 생명과 얼마나 밀접한지를 보여 줍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생명이 흐른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야 합니다. 은혜가 흐르고, 사랑이 흐르고, 용서가 흐르고, 기도가 흘러야 합니다. 신앙이 건강하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도 하나의 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합니다.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지만, 모두 한 몸에 속해 있습니다. 혈관이 온몸에 피를 보내듯이, 교회 안에는 사랑과 은혜와 섬김이 흘러야 합니다.
그러나 혈관이 막히면 몸이 병들듯이, 영적 혈관도 막힐 수 있습니다. 미움이 쌓이면 사랑의 흐름이 막힙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은혜의 흐름이 막힙니다. 교만이 들어오면 섬김의 흐름이 막힙니다. 불평과 원망이 많아지면 감사의 흐름이 막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영적 혈관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고 있는가, 내 가정 안에 사랑이 흐르고 있는가, 교회 안에 용서와 섬김이 흐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의 생명이 막힘없이 흐르는 삶입니다.
- 신경은 영적 감각을 보여 줍니다.
신경은 몸의 감각과 반응을 담당합니다. 뜨거운 것을 만지면 신경은 즉시 위험을 알려 줍니다. 몸 어딘가에 상처가 생기면 신경은 통증을 통해 문제를 알립니다. 신경이 건강해야 몸은 위험을 피하고 바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영적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적 감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반응해야 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 마음에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겸손히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우리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깨우는 영적 신경과 같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깨닫게 합니다.
하지만 영적 감각도 둔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죄에도 마음이 아팠지만, 반복되면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신경이 무뎌진 상태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는데도 아픈 줄 모르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건강한 신앙인은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고, 이웃의 아픔에 민감하고, 죄의 유혹에 민감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 혈관과 신경이 함께 건강해야 합니다.
혈관과 신경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하지만, 둘 다 몸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피가 잘 흘러도 신경이 마비되면 몸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신경이 살아 있어도 혈액순환이 막히면 몸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몸은 혈관과 신경이 함께 건강해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야 하고, 성령의 감각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얻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붙어 있을 때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랑과 순종과 섬김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우리는 생명력 있는 신앙인이 됩니다. 성령은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막힌 관계를 회복시키시며, 무뎌진 영적 감각을 깨우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신앙은 두 가지를 함께 붙드는 신앙입니다. 하나는 생명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감각입니다. 생명이 흐르지 않으면 신앙은 메마르게 됩니다. 영적 감각이 없으면 신앙은 방향을 잃게 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흐름이 있어야 하고, 서로의 아픔을 느끼는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가 흘러야 하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흘러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결론
혈관과 신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몸의 신비를 보여 줍니다. 혈관은 생명을 흐르게 하고, 신경은 몸을 깨우고 반응하게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건강할 때 몸이 온전히 살아 움직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야 합니다. 성령께서 깨우시는 영적 감각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막히지 않아야 하고, 말씀에 둔감하지 않아야 합니다. 은혜가 흘러야 하고, 순종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