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성령은 우리를 하나의 몸으로 만든다
성령세례·성령충만·성령의 능력 (고린도전서 12:12–31)
들어가는 말 –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가 되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주 오래된 질문 하나 앞에 서려고 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까?”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정치적 생각도 다르고,
신앙의 색깔도 다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경계를 만듭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우리 교회와 저 교회는 다르다.”
“우리 신앙이 더 옳다.”
“저 사람은 아직 부족하다.”
인간은 차이를 발견하는 데 아주 익숙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차이를 가지고
분리와 우열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점12:12)
여기에서 바울은 교회를 설명하면서
건물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고
몸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왜 몸입니까?
몸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눈과 귀가 같지 않습니다.
손과 발이 같지 않습니다.
심장과 폐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르기 때문에 몸입니다.
다름이 사라져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가진 채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묵상할 성령의 신비입니다.
1. 성령세례 – “우리는 어떻게 한 몸이 되었습니까?”
바울은 13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여기서 우리는 흔히
“성령세례”라는 말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세히 보면 놀랍습니다.
바울은
“성령세례를 받아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세례의 목적은 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의 중심에는 개인의 황홀한 체험보다
공동체가 있습니다.
개인이 아니라
몸입니다.
성령세례는 경계를 넘어서는 사건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이 네 가지는 당시 사회를 가르는 엄청난 경계였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민족과 민족.
신분과 신분.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성령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경계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일하십니다.
사람은 말합니다.
“너는 유대인이다.”
“너는 헬라인이다.”
“너는 종이다.”
“너는 자유인이다.”
그러나 성령은 말합니다.
“너희는 한 몸이다.”
이것이 성령세례입니다.
2. 철학적 사유 – 인간은 독립된 원자가 아닙니다
현대인은 자신을
독립적인 개인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합니다.
나는 나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입니다.
내 자유는 나의 것입니다.
내 성공도 나의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은 결코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존재를
‘나-너(I-Thou)’의 관계에서 이해했습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인간이 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아들딸이고,
누군가의 부모이고,
친구이고,
이웃이고,
공동체의 구성원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누구와 함께 존재하는가?”입니다.
성서적 인간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의 극단적 개인주의를 넘어섭니다.
성서의 인간은 고립된 영혼이 아닙니다.
관계적 인간입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성령은
이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3. 성령충만 – “성령은 내 안에 무엇을 만들어 냅니까?”
그러면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령세례가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사건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뜻을 따라
계속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18은 말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충만은
한 번의 종교적 경험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령충만은 매일의 삶입니다.
화를 낼 때,
용서할 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려놓을 때,
약한 사람의 편에 설 때,
성령충만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감정의 강도가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4. 심리학적 사유 – 왜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싶은가요?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심리학적으로 들여다보면 매우 인간적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나는 더 영적이다.”
“나는 더 많이 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인가?”
그 질문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비교 자체를 해체합니다.
왜냐하면 몸에는
우월한 지체도 없고 열등한 지체도 없기 때문입니다.
눈이 발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너보다 중요하다.”
머리가 손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너는 필요 없다.”
인간이해를 기능으로 생각합니다
(축구시합 비유)
축구의 핵심이 협력 (cooperation)이라면,
축구는 경쟁구도입니다
우리/그들 구조입니다 승패를 겨눠야 합니다
바울의 몸 은유의 핵심은 더 깊은 상호의존(interdependence)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의 몸은
우리 / 그들의 구조를 해체합니다.
왜냐하면 몸 안에서는
손과 발이 경쟁하지 않고,
눈과 귀가 경쟁하지 않으며,
어느 지체도 다른 지체의 패배를 통해
자신의 승리를 얻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한다.”(고전 12:26)
이것은 축구의 논리와 상당히 다릅니다.
축구는 상대방이 약해야 승리합니다
실수해야 승리합니다
그러나 몸에서는 어떻습니까?
발이 다치면 눈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손이 다치면 머리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몸 은유가 가진 윤리적 급진성입니다.
그래서 ‘몸’은 경쟁사회의 대안입니다
고린도 사회는 경쟁과 계층의 사회였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보다 높다.”
“나는 더 중요하다.”
“나는 더 영적이다.”
“나는 더 좋은 은사를 가지고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몸 은유는
바로 이러한 서열화의 논리를
해체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22)
이것은 축구팀의 논리로는
완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축구팀에서는 선발 선수와 후보 선수가 있습니다.
주전과 비주전이 있습니다.
감독이 선수의 출전 여부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약한 지체를 제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
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혁명적인 공동체론입니다.
축구의 조직은 서열로 되어 있습니다
감독아래 선수라는 서열입니다
바울의 몸에는
그러한 중앙집권적 조직도가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가 몸의 머리라는 신약의 다른 전승이 있습니다(골 1:18; 엡 4:15–16).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의 강조점은
감독의 지시에 따라
각 선수가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체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생명체입니다.
이 차이는 교회론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5. “나는 몸에 속하지 않았다” – 열등감의 심리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이번에는 반대쪽입니다.
우월감만 문제가 아닙니다.
열등감도 문제입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기도하지 못합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성경을 많이 알지 못합니다.”
“나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몸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성령은 사람을 비교해서 줄 세우지 않습니다.
성령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합니다.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6. 사회학적 사유 – 교회는 작은 사회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실험이어야 합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사회는 철저하게 계층화되어 있었습니다.
철저히 하이어락키 사회였습니다
시민과 비시민,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로마인과 이방인.
그런 사회 안에서 바울은
아주 혁명적인 공동체를 말합니다.
“한 몸.”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비유가 아닙니다.
사회적 질서에 대한 새로운 상상입니다.
교회에서는
신분보다 관계가 중요하고,
지위보다 섬김이 중요하며,
소유보다 나눔이 중요하고,
우월함보다 상호의존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꿈꾸었던 신앙공동체입니다.
성령세례의 의미를 바울에게서 찾는다면
공통 목표를 위해 조직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에게 속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7.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다”
26절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이 한 문장이 교회의 본질을
아주 깊이 보여줍니다.
고통의 사회학입니다.
사회가 무너지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는 순간입니다.
“저 사람 문제야.”
“저 사람 인생이야.”
“나는 상관없어.”
그때 공동체는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몸은 다릅니다.
손가락 하나가 아프면 온몸이 아픕니다.
눈에 작은 것이 들어가도 온몸이 불편합니다.
몸에는
“너의 고통은 나와 상관없다.”
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만드는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8. 성령의 능력 – “성령의 능력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사도행전 1:8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여기서 권능은 dynamis입니다.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의 능력은 나를 과시하기 위한 힘이 아닙니다.
증언하기 위한 힘이며
섬기기 위한 힘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는 힘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힘이 아니라
낮은 자리로 내려갈 수 있는 힘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는 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얼마나 살릴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힘입니다.
9. 그래서 바울은 은사를 말하면서 사랑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를 이야기한 뒤
13장으로 넘어가면 우리는 놀라운 장면을 만납니다.
바울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왜입니까?
은사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방언도 목적이 아닙니다.
예언도 목적이 아닙니다.
지식도 목적이 아닙니다.
능력도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이 목적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리고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여기에서 바울은 성령론의 기준을 바꾸어 놓습니다.
얼마나 강력한 체험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인간이 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10. 성령의 능력보다 성령의 열매가 더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5:22–23을 보십시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여기에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은
“방언”을 성령의 열매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적”도 성령의 열매라고 하지 않습니다.
“카리스마”도 성령의 열매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성령의 능력은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있지만,
성령의 열매는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능력은 순간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긴 시간 동안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11. 문학적 사유 – 바울은 ‘몸’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아름다움은 논리뿐 아니라
문학적 구조에도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몸을 의인화합니다.
발이 말합니다.
“나는 손이 아니다.”
귀가 말합니다.
“나는 눈이 아니다.”
그러자 바울은 묻습니다.
“온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이것은 단순한 논리가 아닙니다.
인간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환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눈이라면 몸은 볼 수 있지만
들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귀라면 들을 수 있지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차이는 결핍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다름은 공동체의 장애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조건입니다.
12. 이것이 복음무문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가 되려면 모두 같아져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같아지지 않아도 하나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의 놀라운 가능성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이 같아질 필요가 없습니다.
종과 자유인이 같아질 필요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같아질 필요도 없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채로
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문이 없습니다.
복음무문입니다.
사람은 문을 만들지만,
성령은 그 문을 넘어갑니다.
사람은 경계를 만들지만,
성령은 그 경계 너머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듭니다.
13. 성령은 교회가 만든 문을 넘어갑니다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들어가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유대인의 정결법과 경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집에서 성령이 임합니다.
베드로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성령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저 사람도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다.”
라고 허락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성령이 먼저 경계를 넘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성령에게
“여기까지 오십시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성령을 따라가야 합니다.
14. 한국교회에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늘 한국교회가
들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말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문을 만들었습니까?
보수와 진보,
정통과 이단,
우리 교회와 다른 교회,
신자와 불신자,
의인과 죄인,
우리와 그들.
그리고 때로는 성령을 말하면서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은 경계를
우리가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믿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15.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오히려 사람을 배제한다면 어떤 일이 버러집니까?
여기에 아주 날카로운 질문이 있습니다.
누군가“나는 성령세례를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자신의 교리와 다르면 정죄합니다.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적으로 만듭니다.
자신과 다른 성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혐오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합니다.
약한 사람의 고통을 모른 척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그 성령세례는 무엇을 만들었는가?”
바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성령은 한 몸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계속 분리시키는 영성이
과연 성령의 열매인지 물어야 합니다.
16. 성령충만은 ‘내가 꽉 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리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흔히
“내 안에 성령이 가득 차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공동체론에서 성령충만은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해질수록
나는 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타자를 바라보는 사람이 됩니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해질수록
내가 옳다는 확신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생깁니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해질수록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질투하기보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실패를 조롱하기보다
함께 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자기중심성이 비워지고
관계성이 충만해지는 사건입니다.
17. 성령의 능력은 ‘힘’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고린도전서 12:28 이하에서
바울은 여러 직분과 은사를 말합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치는 은사,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그런데 바울은 마지막에 질문합니다.
“다 사도이겠느냐?”
아닙니다.
“다 선지자이겠느냐?”
아닙니다.
“다 교사이겠느냐?”
아닙니다.
“다 능력을 행하겠느냐?”
아닙니다.
“다 방언을 말하겠느냐?”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은 사람을 획일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다른 은사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게 하십니다.
18. 그래서 성령세례·성령충만·성령의 능력을 하나로 연결해 봅시다
이 세 가지는 서로 경쟁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성령세례
우리를 한 몸으로
받아들이시는 사건입니다.
성령충만
그 한 몸 안에서 성령의 뜻에 따라
계속 살아가는 과정 입니다.
성령의 능력
그렇게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 속에서 증언하고
섬길 수 있도록 주어지는 힘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도식화하면,
성령세례 → 공동체에 참여함
성령충만 → 관계 속에서 변화됨
성령의 능력 → 세상 속에서 증언하고 섬김 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묶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19. 결국 성령의 질문은
“얼마나 강력한가?”가 아닙니다
불의 종 능력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기독교 영성을 측정하려 합니다.
“저 사람은 방언을 한다.”
“저 사람은 예언한다.”
“저 사람은 능력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사랑이 있는가?”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은?
추상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다른 사람의 성공을 함께 기뻐하고,
다른 사람의 실패를 품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인간입니다.
이것을 복음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20. 새로운 인간은
‘혼자 완성된 인간’이 아닙니다
복음이 만들어내는 인간은
혼자 완성된 인간이 아닙니다.
성서가 말하는 성숙한 인간은
관계 속에서 성숙한 인간입니다.
나는 너 없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눈은 귀 없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손은 발 없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배운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젊은 사람은 노인을 필요로 하고,
노인은 젊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서로 다른 세대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몸 개념입니다.
21. 그러므로 교회의 성숙은 ‘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성숙한다는 것은
모두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같은 정치적 입장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같은 예배 형식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같은 신학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배척하여 죽이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성숙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22.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면 참 좋겠습니다.
첫째,
나는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누군가를 내 밖에 세워 놓고 있는 않습니까?
내가 만든 문은 무엇입니까?
누군가를 향해“너는 우리와 다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둘째,
나는 성령충만하다고 말하면서
어떤 인간으로 변화되고 있습니까?
나는 점점 부드러워지고 있습니까?
점점 오래 참게 됩니까?
점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까?
점점 용서할 수 있습니까?
점점 약한 사람의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까?
셋째,
성령의 능력이
나를 통해 누구에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내 능력 때문에
누군가가 살아나고 있습니까?
내 말 때문에
누군가가 다시 일어납니까?
내 신앙 때문에
누군가가 하나님에게 가까워집니까?
아니면
내 신앙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받고 있습니까?
결론 – 성령은 우리를 하나의 몸으로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세례는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 사건이 아닙니다.
나를 다른 사람과 하나 되게 하는 사건입니다.
성령충만은 내 안에 종교적 감정을
가득 채우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열어가는 과정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나를 높이는 힘이 아닙니다.
나를 낮추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힘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마지막 목적은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입니다.
혼자 서 있는 인간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인간입니다.
경계를 만드는 인간이 아니라
경계를 넘어 관계를 만드는 인간입니다.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인간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이 모여
하나의 몸이 됩니다.
마지막 묵상
오늘 집으로 돌아가시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해 봅시다.
나는 성령을 얼마나 강하게 경험했는가?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성령 때문에 나는 어떤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성령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가?
마지막으로 가장 깊은 질문을 던져 봅시다.
성령은 나를 높이기 위해 오셨는가,
아니면 우리를 하나 되게 하기 위해 오셨는가?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는
유대인과 헬라인도,
종과 자유인도,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도,
많이 가진 사람과 적게 가진 사람도,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도,
나와 너도,
서로 다른 채로 하나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복음에는 문이 없습니다.
문을 만드는 것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 문을 넘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는 몸의 한 지체다.”
“그리고 네 곁에 있는 사람도 나의 지체다.”
그러므로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프고,
네가 기뻐하면 내가 기뻐하며,
네가 살아나면 나도 살아난다.
이것이 성령께서 만드시는 새로운 인간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만드시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글, 사진 = 전현구 목사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