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
유화, 63×48cm, 1872년, 마르모탕 미술관 소장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년 11월 14일-1926년 12월 5일)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로, 인상파의 개척자이며 지도자다.
파리에서 출생하여 소년 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부댕의 문하생이 되어 정식 미술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859년 파리로 나가 피사로·시슬레·르누아르·바지유 등과 사귀게 되었다. 마네의 밝은 화풍에 끌려 밝은 야외 광선 묘사에 주력하였다. 마네를 중심으로 르누아르 및 피사로·드가·세잔 등과 함께 신예술 창조에 전력하였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에는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터너 등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더욱 밝은 색조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귀국 후, 1874년 그의 동료 화가들과 함께 제1회 인상파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출품된 작품이 물체 본래의 색깔을 쓰지 않고, 신선하고 밝은 색채로만 그려진 데 대해 비난과 공격이 쏟아졌다. 특히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2)가 가장 심한 비난을 받았는데, ‘인상파’라는 말은 이때 모네의 작품을 야유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요 작품으로 ‘인상, 해돋이’ ‘짚단’ ‘생 타들레스의 테라스’ ‘파라솔을 든 여인’ ‘수련’ ‘루앙 대성당’ ‘일본식 다리’ 등이 있다.
한편 클로드 모네의 1872년작 ‘인상, 해돋이’(영-Impression, Sunrise, 프-Impression, soleil levant)는 모네가 르아브르 항구의 아침 풍경을 그린 유화이다. ‘인상주의’라는 용어의 유래로 알려져 있다. 현재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에서 소장되어 있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미술사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중들이 폭넓게 선호하고, 미술 애호가들이 그림을 가장 소장하고 싶어 한다는 19세기 ‘인상파’.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상, 해돋이’는 19세기 후반을 퐁미한 인상파의 서막을 알리는 그림으로, 인상파란 유파의 이름도 이것에서 유래됐다. 마네, 드가, 세잔느, 고갱, 고호 등은 모두 이 인상파에 속한다.
인상파는 사진을 그리듯 사실적 묘사에 치중했던 중세 화풍에서 근대의 추상적 화풍으로 넘어가는 길을 열었고, 이후 입체파, 야수파 등을 거쳐 현대 미술로 발전하게 된다.
‘인상, 해돋이’가 1872년 그려지고, 1874년 최초의 인상파전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뚜렷하지 않은 그림의 윤곽과 흐릿흐릿한 색채 등은 사진처럼 있는 그대로 그리던 당시 미술계에 가히 충격적이었다. 비평가들은 작품 같지 않은 그림을 작품으로 우긴다고 비아냥거렸고, ‘인상파’란 명칭에도 이 비아냥이 깔려있다.
모네를 비롯한 당시 인상파 화가들은 머리 속에 있는 관념적 그림이 아닌 현장에서 눈에 보이는 그 순간을 화폭에 담으려 했고, 특히 빛에 주목했다. 같은 장소도 그 시점이 오전과 오후, 밤이냐에 따라 빛이 다르고 따라서 언제 그림을 그리느냐에 의해 그림 속 색채도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인상, 해돋이’는 태양이 가장 붉을 때인 해돋이 순간에 일렁이는 바닷물에 반사되는 빛의 가장 역동적인 순간을 화폭에 담았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 도날드 올슨 천문, 물리학 교수는 이 그림과 관련해 알려진 역사적인 사실들과 천문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인상, 해돋이’가 현지 시각으로 1872년 11월 13일 오전 7시 35분의 순간을 화폭에 옮긴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분석했다.
1870년대 르아브로 항구의 배치가 그대로 그림 속에 표현돼 있으며, 그가 머무르고 있던 라미라우테 호텔에서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그림 속에서 낮게 떠 있는 태양의 각도(그림의 화살표)를 분석하면 알 수 있다. 항구의 대규모 건설사업에 사용되던 크레인과 기중기의 실루엣은 ‘인상, 해돋이’의 오른 쪽에 그려져 있다.
임운규 목사(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