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뤼시스, 라케스, 카르미데스
플라톤 / 천병희 역 / 숲 / 2015.1.20

국내 그리스·로마 고전 번역의 독보적 존재로 평가받는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가 번역하고 있는 플라톤 시리즈. 초기 대화편 3편을 번역해 한 권으로 묶었다(뤼시스, 라케스, 카르미데스).
.뤼시스(우정에 관하여)
우리가 우정과 사랑을 나눌 친구를 만날 때 서로 상반되어 친구가 되는지, 서로 유사해서 친구가 되는지, 친구됨을 깊숙이 파고든 작품이다.
사랑받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 유사한 사람들, 유사하지 않은 사람들, 훌륭한 사람들, 친근한 사람들. 어떤 사람들이 서로 친구가 되는가를 논의하는 대화편이다.
.라케스(용기에 관하여)
‘중무장 전투술’을 참관하고 나온 뤼시마코스와 멜레시아스는 이것이 자녀에게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놓고 이야기하다가 자녀를 둔 부모의 고민을 화제로 올린다. ‘자녀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와 ‘용기란 무엇인가’가 그것인데, 운 좋게도 곁에 소크라테스가 있어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조언을 구한다. 존경받는 교육 전문가답게 소크라테스는 시류와 발맞추지 않는 교육과 용기의 본질적 측면을 문답법을 통해 이야기한다.
.카르미데스(절제에 관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온 소크라테스가 오랜만에 아테나이 젊은이들이 모이는 레슬링도장에 나가 젊은이들과 절제에 관해 대화한다.
이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대담자들은 여러 각도에서 진지하고 치열하게 주제를 탐구하지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명쾌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플라톤의 다른 초기 대화편에서처럼 으레 자기모순에 빠져 난관에 부딪친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의도적인 것으로, 인간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안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되며,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평생을 두고 탐구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목차
옮긴이 서문_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5
주요 연대표 9
일러두기 12
뤼시스 Lysis 13
라케스 Laches 65
카르미데스 Charmides 119

○ 저자소개 : 플라톤 (기원전 427~347)
플라톤은 그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 지 4년째 되는 해, 그리스 아테나이에서 태어났다.
전쟁은 기원전 404년에 아테나이의패배로 끝났으므로 전쟁 속에서 태어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성장했다.
플라톤 집안은 비교적 상류계급이었고 그러한 배경의귀족 출신 젊은이답게 정계 진출을 꿈꾸었지만, 믿고 따르던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정치적인 배경이 있음을 알고 철학을 통해 사회의 병폐를 극복하기로 결심한다.
자주 외국 여행길에 올라 이집트·남이탈리아·시칠리아 등지로 여행을 떠났던 플라톤은 기원전 4세기 초 아테나이로 돌아와 서양 대학교의 원조라 할 아카데메이아 학원을 열고 철학의 공동 연구, 교육, 강의를 시작했다. 그곳을 통해 뛰어난 수학자와 높은 교양을 갖춘 정치적 인재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을 배출하며 집필활동에 전념한다.
주로 스승 소크라테스가 등장해 대화를 주도하는 철학적 대화편을 집필하는데, 그러한 대화편이 무려 25편에 달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이온』 『프로타고라스』 『메논』 『파이돈』 『파이드로스』 『국가』 『향연』 『필레보스』 『소피스트』 『정치가』 『티마이오스』 『법률』 등을 남겼다.
– 역자 : 천병희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5년 동안 독문학과 고전문학을 수학했으며 북바덴 주정부가 시행하는 희랍어 검정시험과 라틴어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지금은 단국대학교 인문학부 명예 교수로, 그리스 문학과 라틴 문학을 원전에서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원전 번역으로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로마의 축제들』, 아폴로도로스의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메난드로스 희극』, 『그리스 로마 에세이』, 헤로도토스의 『역사』,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기』, 플라톤의 『국가』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향연』 『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및 호라티우스의 『시학』 등 다수가 있으며, 주요 저서로 『그리스 비극의 이해』 등이 있다.

○ 내용
* 뤼시스
뤼시스(Lysis)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적 대화편’ 또는 ‘초기 대화편’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여 덕(德)의 정의(定義)에 관련된 문제를 놓고 대화 상대를 논박(elenchos)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진행하다 외견상 긍정적인 결과 없이 파장(aporia)로 막을 내린다.
– 개요
이 작품은 덕(德)에 대한 정의(定義)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필로스(philos)’라는 일상 언어의 애매성을 그대로 끌어들인 상태에서 진행된다. 이 작품에서 이루어지는 논박(elenchos)은 대화 상대자의 믿음을 대상으로 삼고 펼쳐지는 다른 대화편들에서의 논박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은 대화를 진행하고 외견상 긍정적인 결과 없이 ‘아포리아’로 끝나 버리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 작품이 그러하다. 일부 학자들은 이 작품을 초기 작품의 범주에 넣는데 동의하고 있지 않은데, 중기 저작들에서 발견되는 생각들이 아직은 충분히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저작에 속하게 하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이 작품에서는 중기 저작에서 나타나는 아이디어와 개념들이 초보적 수준으로 등장하는데, 이를 토대로 이 작품의 집필시기를 굳이 추정해 본다면 초기가 거의 끝날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서양 지성사에서 ‘우정’, ‘사랑’이라고 번역하는 필리아(philia)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다.
19세기에 아스트(Ast), 조허(Socher)와 같은 철학 연구자들은, 이 작품은 플라톤의 작품이 아니라고 여기기도 하였다. 그들은 이 작품이 필리아의 중요한 요인으로 유용성과 욕구를 설정하고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강조되던 완벽한 필리아의 관념과 배치되기 때문에 플라톤의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 이 작품과 플라톤의 다른 저작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이 작품이 위작이라는 시각은 줄어들었고,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플라톤의 독특한 권학방식(protreptic)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이 작품이 갖고 있는 그러한 독특한 특성 때문에 플라톤의 어느 저작보다도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이 작품에 대한 논문이나 연구서적의 수가 플라톤의 다른 작품에 비해 현저하게 적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방증해준다.
– 등장인물
.소크라테스 : 기원전 469년 ~ 399년의 인물. 이 작품에서 주된 대화자 가운데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대화 내용 자체를 전달해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에로스의 전문가로 등장하는데, 에로스와 필리아에 연류되어 있는 당사자들과 바로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며 이 글을 이끌어 간다. 소크라테스는 이 작품에서 스스로 ‘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에서 청년인 크테시포스와 히포탈레스보다 훨씬 연상의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크테시포스 : 파이아니아 출신이며, 이 작품보다 이후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에우튀데모스'(Euthydēmos; Ευθύδημος)에서 클레이니아스를 애인으로 얻은 자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연애를 즐기는 성향의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동년배인 히포텔레스가 애인 뤼시스를 향해 보이는 돌출적인 생동에 대해 냉소적인 평가를 내리는 인물로 등장한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할 때, 곁에 있던 사람이다.
.히포탈레스 : 히에로뉘메스의 아들이다. 이 사람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이 작품 이외에서는 없다. 대화의 맥락으로 보아 크테시포스와 연배일 것으로 여겨진다. 뤼시스를 향한 그의 ‘일방적인’ 에로스가 이 대화편의 줄거리를 추동하는 한 축이다. 그는 열정적이면서도 소심한 일면을 가진 것으로 나온다. 히포탈레스(Hippothalēs)라는 말은 ‘말[馬]을 풍부하게 가진 자’라는 의미인데, 당시 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유한 가문 출신이라는 징표로 간주되었다.
.뤼시스 : 데모크라테스의 장남이다. 소크라테스의 주된 대화 상대이다. 히포탈레스가 오매불망하는 미소년으로 나온다. 그에 대한 포사는 ‘카르미데스’나 ‘알키비아데스’를 떠올리게 한다. 지적 열의가 강하지만 친구 메넥세노스보다는 다소 총기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는 인물이다. 뤼시스의 가문에 대한 언급이 이 작품에 약간 언급되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시작할 때 뤼시스는 부모의 온정적 간섭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충실한 아들로 등장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고 난 후에는 보호자에게 약간의 저항을 하는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메넥세노스 : 크테시포스의 사촌이자 그의 제자이며, 데모폰의 아들이다. 뤼시스와 절친한 친구 사이로 등장한다. 그의 이름을 딴,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인 ‘메넥세노스’가 있다. 그런데 메넥세노스는 ‘메넥세노스’에서 오히려 역할이 미미하지만, 이 대화편에서는 비중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메넥세노스도 크테시포스와 함께 소크라테스의 임종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 줄거리
이 작품은 총 11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에서 전제를 제시하고, 2장에서 기본적인 탐색을 한다. 이후 3장에서 10장까지 친구의 성립 여부에 대해 여섯개의 후보를 주고 토의한다. 마지막 11장은 파장(罷場)이다.
.에로스와 필리아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성벽 밖에 있는 귐나시온(gymnasion)들을 자주 찾아다니며, 멋있는 젊은이들과 만나 여러 주제에 대해 논의(logos)하였다. 그런데 이 작품의 귐나시온은 소크라테스가 평소 즐겨 찾던 아카데미아(Akadēmeia)와 뤼케이온(Lykeion)이 아니라, 최근에 생긴 팔라이스트라(Palaistra)이다. 소크라테스가 이 새로운 귐나시온에 들어간 이유는 아카데미아에서 뤼케이온으로 가던 도중 팔라이스트라 앞에서 히포탈레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히포탈레스는 자신이 뤼시스라는 소년을 사랑하고 있는데, 함께 팔라이스트라에 들어가서 자신에게 뤼시스를 대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뤼시스와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주겠다는 다짐을 받고 팔라이스트라 안으로 들어간다.
히포탈레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소크라테스는 뤼시스의 친구 메넥세노스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이 두 아이를 상대로 한 대화는 그 두 아이 간의 친구관계에 대한 것인데, 여기서 이 대화편의 주제인 필리아가 앞에서 도입된 에로스와 대비되면서 부각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 대화에서 인간의 외면적 조건에서 기인된 동등함이 필리아의 중요한 계기이고, 정의와 지혜의 측면에서 드러난 동등함이 필리아에서 중요한 관건임을 전달한다.
– 필리아와 앎 혹은 유용성의 관계
이 부분에서는 소크라테스와 뤼시스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 부분에서는 뤼시스와 부모의 관계에 대해 심층적인 조명을 하는데 그 골격은 다음과 같다.
부모는 자신의 자식을 친애한다. 그래서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행복한 사람이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자이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뤼시스의 부모는 뤼시스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막는 경우도 있다. 뤼시스가 여러 일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랑을 얻으려면 앎을 가져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필리아를 수동적인 측면에서 다루면서 필리아가 성립하려면 앎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는 이후 논의의 기반 바탕으로 된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부자관계를 넘어 이웃, 국가, 세계로 확대되면서 필리아의 또다른 중요한 계기가 도입된다. 결국 누구든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려면 해당 사항에 대한 앎을 갖는 것이 마땅한데, 그런 앎을 갖고 있는 자에게 해당 사안의 처리를 맞길 경우, 앎이 그것을 가진 자에게 유용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이 부분부터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다. 메넥세노스가 다시 돌아와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어떠한 재화를 얻는 것 보다도 친구를 얻는 것을 더 연연(戀戀)해 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친구의 본질에 대한 논의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누가 누구의 친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능동적, 수동적인 친구관계를 그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해 본다.
하지만 그 대답들은 상호성이 기각되어 일방적인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친구관계로 인정되지 아니한다.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를 다시 뤼시스로 바꾼다.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의 시구를 통해 위에 고찰한 문제의 교착 상태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 시구를 바탕으로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라는 명제를 이끌어내 검토한다. 훌륭한 자와 훌륭한 자가 친구인지, 나쁜 자와 나쁜 자가 친구 인지 검토한다. 일단 나쁜 자는 상호간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리고, 훌륭한 자의 쌍을 검토하는데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아 소크라테스와 뤼시스는 흡족해 한다.
.훌륭한 자의 자족성
소크라테스는 위 단계에서 검토한 것에서 미심쩍은 점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은 기각논변을 펼친다.
훌륭한 자끼리는 서로 훌륭함으로 도움을 주고 받을 필요가 없어 도움을 주고 받지 아니한다. 따라서 서로 존중할 수 없다. 서로 존중할 수 없는 것은 서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친구일 수 없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비슷한 자끼리 친구일 가능성에 대한 기각은 사실상 비슷한 것을 강하게 이해하여, 유사한 것이 아니라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데 기인한다.
.비슷하지 않은 것이 비슷하지 않은 것에게 친구
소크라테스는 위에서의 기각을 보고, 헤시오도스의 시구를 통해 봉합점을 돌파하고자 한다. ‘비슷하지 않은 것이 비슷하지 않은 것에게 친구’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비슷한 것(반대되는 것)끼리는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적대하지만, 비슷하지 않은 것은 서로에게 원해지는 것이고 유익을 주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슷하지 않은 것이 비슷하지 않은 것에게 친구가 될 수 있지 않냐는 물음을 제기한다.
하지만, 이 명제는 곧바로 기각된다. 적대가 필리아에 반대되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반대되는 것(비슷하지 않은 것)이 반대되는 것에게 친구라는 입장을 취하면, 적대적인 것이 친구인(우호적인) 것에게 친구이거나 아니면 친구인(우호적인) 것이 적대적인 것에게 친구라는 불합리한 귀결을 강제하게 된다. 따라서 위에서 제기된 명제는 받아들 일 수 없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훌륭한 것의 친구
또 다른 막다른 골목에 직면한 소크라테스는 사물들이 사실은 가치 차원에서 세 부류로 나뉜다는 점에 착안하여 훌륭한 것, 나쁜 것,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의 조합을 이용하여 활로를 모색하려 한다. 그런데 훌륭한 것과 훌륭한 것의 조합, 나쁜 것과 나쁜 것의 조합은 앞에서 이미 기각되었고, 나쁜 것은 친구일 수 없기에 훌륭한 것과 나쁜 것이 친구일 수 없다.
이제 남은 것은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훌륭한 것과 친구이거나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과 친구일 가능성이다. 그런데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끼리의 조합은 비슷한 것끼리의 조합이므로 친구가 될 수 없다. 결국 남게 되는 것은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과 훌륭한 것의 조합이다. 그런데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은 그 자체로 중립적이므로 나쁜 것이 와 있어야만 훌륭한 것을 요구하므로 훌륭한 것과 친구가 된다. 여기까지 논변을 진행한 소크라테스와 뤼시스는 일단 만족한다.
.첫째 친구
이전의 논의에서 소크라테스는 만족했지만 다시 미심쩍음이 나타나면서 논의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면서, 기존에 검토했던 후보는 기각된다.
기존의 친구에 대한 입장은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나쁜 것이 와 있음으로 해서, 훌륭한 것을 요함으로, 훌륭한 것과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친구관계는 어떤 것을 위해서 그리고 어떤 것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를 토대로, 이전의 논의의 결론에서, 요구하고 싶어하게 되는 훌륭한 것도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의 친구임을 밝히고 기각 논변을 진행한다. 소크라테스는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훌륭한 것의 친구가 되게 하는, 요구하고 싶어하게 되는 훌륭한 것이 제거되면 이 친구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위 논의의 결론을 기각한다.
.욕구가 필리아의 원인
먼저, 소크라테스는 이전의 논의를 완전히 무위로 돌린다. 욕구가 친애의 참된 원인이고, 욕구하는 것이 욕구되는 대상에게 친구라는 점을 밝히며, 여섯번째 후보로 이행한다.
.가까운 것이 가까운 것에게 친구
소크라테스는 앞서 욕구에 대해 살펴본 바를 토대로 논변을 진행한다. 그는 욕구란 빼앗긴 어떤 것을 되찾기 위해 발생한다고 보고, 또, 친구는 본성상 서로에게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훌륭한 것이 훌륭한 것과 가까움으로 하여 친구가 되면, 나쁜 것이 나쁜 것과 가까움으로 하여 친구가 되므로, 이 논변의 전제 자체가 기각된다. 따라서, 친구를 위한 모든 대안은 기각된 것이다.
.아포리아
뤼시스와 메넥세네스의 보호자가 그들을 집으로 인도하면서 이 작품은 마무리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친구의 진정한 조건을 찾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 라케스
플라톤이 남긴 영원한 고전 가운데 한 편인 ‘라케스’는 ‘자녀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와 ‘참된 용기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룬 책이다. ‘중무장 전투술’ 시범을 보고 나온 뤼시마코스와 멜레시아스는 이것이 자녀에게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놓고 고민한다. 아테네의 명망 높은 정치인으로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자식 교육에는 소홀하였던 부친들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지닌 그들은 자연스레 자식 교육에 관심이 많았는데, 마침 소크라테스를 만나 그에게 조언을 구한다. 소크라테스는 교육이란 젊은이들의 영혼을 위해 실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영혼의 보살핌’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에 따라야지 다수의 의견에 따라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이 두 명의 학부모와 함께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그동안 잊고 지내 왔던 ‘참교육’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2~404년) 때 아테나이의 유능한 장군인 라케스와 니키아스가 고유한 미덕인 용기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주고 소크라테스가 둘을 중재하며 멋지게 토론을 이끌어 간다.
.전반부
뤼시마코스는 아들이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공부해야 최대한 훌륭한 인물이 될지” 니키아스와 라케스에게 조언을 구한다. 라케스와 니키아스가 소크라테스를 극찬하고 적극 추천하며 도입부는 시작된다. 교육에 대한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를 말한다. 1) 다수결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진짜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의 의견 존중)를 찾아라.(p84) 2)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미덕을 검토해라.(p91) 장군 출신인만큼 니키아스는 젊은이라면 중무장 전투술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중무장 전투술의 교육적 가치를 묻고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미덕을 검토하길 제안한다. 그래서 전투술과 관계된 미덕 중 용기를 탐구하기로.
.후반부 (중무장 보병술에 가까운 미덕인 용기를 탐구하며 용기의 본질을 하나씩 찾아감)
용기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 라케스에게 묻는다. 라케스는 “혼(영혼, 내면)의 인내가 용기”라고 대답한다. 용기의 실질적인 측면을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 왈, 지혜를 수반하는 인내만이 고상하고 훌륭하다. 어리석은 인내도 분명 있으니! 니키아스 “용기는 무엇이 두려움에 떨게 하고 무엇이 자신감을 불어넣는 가에 관한 지식이요.”(인지적 측면) 라케스가 이해하지 못하니 소크라테스는 속도란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해내는 능력이라는 답처럼 용기도 그리 답해보라고 질문한다. 인내만으로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지혜를 수반하는 인내와 어려움을 수반한 인내를 구분하라고 말한다. 어리석은 인내는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지혜로운 인내만이 용기
어리석은 인내를 발휘해서 졌다면 그럼 용감한 사람인가? 결과가 안 좋을 경우엔? 용기엔 판단력과 지혜를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용기는 일종의 지식(지혜, 소피아)이다. p98
니키아스, 용기는 두려움을 인식하는 것이 절대 기준임을 주장한다.
어리석어서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멍청함 또는 어리석음, 겁 없음과 용감한 것은 다르다.니키아스는 용감한 행위들이란 지혜로운 행위를 말한다. p108
니키아스의 말에 따라 소크라스는 묻는다.”용기란 무엇이 두려움에 떨게 하고 무엇이 자신감을 불어넣는가에 관한 지식인 가요?” 무엇이 두려움에 떨게 하고 무엇이 자신감을 불어넣는지 검토하자고 제안한다. 니키아스는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좋은 일과 나쁜 일에 관한 지식” 미덕의 일부인 용기를 말하는 것이 아닌 미덕 전체를 이야기한 것이라 용기를 탐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용기라는 고상한 미덕을 사유하기엔 더없이 좋은 대목이다. p107-112
독일의 리더십 작가는 ‘용기’라는 책에서 이렇게 용기를 말한다. “진정한 용기는 조용한 미덕이다. 과장된 행위가 아니라 내면에 잠재된 강인한 그 무엇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는 것. 용감한 사람은 두려운 상황을 인식하지만 제압당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다. 옳은 것을 판단하고 지성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것. 용기가 용기다우려면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위가 두려움을 극복했느냐에 달렸다. 지혜롭지 못해서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겁 없음 혹은 멍청함이다. 결과가 아름답지 못하면 용기가 아니다. 용기는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혜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두려움을 행동 없이 마음으로만 이겨내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용기는 사고 있는 행동이다. 용기 구성하는 요소는 지(옳은 것을 판단), 정(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뛰어넘었나), 의(의지를 갖고 행동을 했느냐)다.
용기는 주관적이다. 두려움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두려움도 주관적이니까 용기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용기는 두려움을 극복했느냐의 여부다. 용기는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전쟁이 잦았던 시대에 비해 요즘은 용기가 엄청 필요한 시기에 사는 건 아니다. 상대방의 시선이 두려워서 진솔하지 못할 때 진솔한 것도 용기다. 용기가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미덕을 빛나게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발휘한다면 파워풀한 사람이 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옳다고 느껴졌을 때 두렵더라도 행동하는 것. 용기는 매우 고차원적인 가치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용기란 저돌적이고 뭔가 행동하는 것만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두려움 없이 저지르는 용기는 단지 겁 없음 아니면 무모함이다.
용기는 두려움 너머의 무언가(비전, 열정)를 보고 행동하는 것. 아래의 세 가지 질문에 답하는 것이 바로 용기다. 지혜로웠는가? 두려움을 이겨냈는가? 행동했는가?

* 카르미데스
카르미데스가 생각하는 절제란
1) 차분함
2) 부끄러움
3) 자기 할 일을 아는 것
– 절제란 무엇인가?
내(유진)가 생각하는 절제란 참는 것. 낭비하지 않는 것. 하고 싶어도 유익하지 않으면 참는 것. 쾌락을 즐기고 싶은 것을 억제하는 것. 혹은 쾌락을 잘 즐기기 위해 먼저 할 일을 하는 것. 예를 들면 오후에 마음 편하게 쉬려고 오전에 공부나 글쓰기를 끝내는 것.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다하지 않기다.
– 미덕이란 무엇인가
미덕의 결과는 안 좋을 수 없다. 좋지 않으면 미덕이 아니다. 미덕은 늘 좋다. 훌륭하고 아름답다. 하나의 미덕만으로 지혜에 도달하기 어렵다. 삶은 복합적이고 다양한 영역이 만족되어야 잘 살아갈 수 있다. 인생이 쉽지 않은 이유다. 경우에 따라 좋고 상황에 따라 나쁜 것은 미덕이 아니다. 예를 들면 예의, 신중, 겸손, 정직, 감사, 절제, 우정, 사랑 등 모두 좋은 것들이다. 사랑이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건 사랑의 본질을 잘 모르는 것이다. 사랑은 배려고 인내다. 미덕은 행복하고 가치 있는 것이고 고통스럽지 않다. 고유한 정의를 갖는다. 그것을 그것답게 만드는 본질을 말해야 하는데 상황마다 달라지는 속성을 말하는 우를 범한다. 카르미데스도 마찬가지. 모든 미덕은 자신을 알아야 한다.(속성)
‘미덕이란 무엇인가’ 자자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절제란 가능한 적게 즐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다. 슬픔이다. 금욕이다. 물욕이다.” 절제는 기쁨이고 쾌락이고 능력이라는 것이다. 몽테뉴, 절제란 쾌락을 가장 감미로운 상태로 맛보게 한다.
– 일상적인 미덕인 절제
절제는 확실한 미덕이다. 절제를 제대로 알고 나면 용기와 다른 일상적인 미덕이란 걸 알게 된다. 용기는 항상 필요한 미덕이 아니다. 항상 두려움(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정직이든 사랑이든)을 느낀다면 사는 게 힘들 거다. 절제는 간헐적으로 필요하지 않고 항상 필요한 미덕이다. 절제는 언제 탄생할까. 욕망이 있을 때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린 모두 욕망하는 존재다. 절제에 대한 오해는 아주 만연하다. “절제해라”라는 뉘앙스가 뭔가를 하지 말라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즐거움을 포기하라는 것 같고. 이 오해를 덜어내는 게 절제를 이해하는 종착점이다. 뭔가 억압하는 느낌이 있어서 가치를 제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미덕이다.
규율을 중시하는 나(유진)에겐 마음속에 나만의 규율이 적은 표가 있다. 매일 공부 한 시간, 집필 두 시간, 채식 위주 식사, 산책 한 시간, 요가 20분. 이건 목표 지향형의 규율이다. 욕망 절제형의 규율도 있다. 규율을 중시하는 의무 중심의 사람과 자율을 중시하는 소원(항상 소원을 추구하다 보면 절제를 못해서) 중심의 사람은 서로 다르다. 규율과 자율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 규율을 통해서 자율을 적절하게 통제하는 것이 쾌락을 확장하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보다 자유롭고 깊이 있게 향유(즐기고 경험하는 것)하게 만든다.
절제, 쾌락의 노예가 되는 대신 쾌락의 주인으로 살게 만드는 미덕이다. 욕망의 제거가 아닌 욕망의 부작용(장, 단점을)을 인식하는 힘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면 주말에 TV 보는 것, 한 시간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상 보면 후회한다. 싫증과 후회는 절제를 표시하는 하나의 징표다. 후회나 싫증이 오기 전에 인지해서 절제하는 것. 무감각하면 절제가 필요도 없다. 탐미주의자, 쾌락주의자일수록 절제가 더욱 필요하고 절제할 때 총합으로 보면 쾌락을 깊이 누리게 만든다. 욕망의 제거도 추구도 아닌 욕망이 있는 곳의 부작용을 인식하고 발현되기 전에 자기를 아는 것. 후회와 싫증이 일어나는 지점의 자기 이해! 욕망이 없다면 절제가 불필요하고. 반대로 욕망만으로 우리의 행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절제라는 미덕으로 제어될 때 극대화된다. 결국 절제는 제대로 오랫동안 즐기게 만드는 기술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욕망이 있다. 자신에게 적절한 규율을 강요시키는 것, 그 지점을 아는 것이 절제다.
– 절제의 목표
쾌락의 극대화(쾌락에 대한 오해가 많은데 쾌락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 취침시간만 봐도 내일을 위해 절제하기보다는 오늘을 누리겠다고 합리화하는 사람은 늘 얼굴이 푸석푸석하다. 욕망을 이기지 못해서 오는 결과다. 쾌락만 추구해도 마찬가지. 규율만 추구하면 싫증과 후회가 온다. 규율도 자율도 단독으로 삶을 아름답게 이끌지 못한다. 절제는 극기의 극치가 아니라 한계의 존중이다. 절제, 후회와 싫증에 대한 감각으로 자신에게 규율을 부여하는 힘이다. 쾌락의 극대화 지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행복을 극대화하고 싶다면 절제를 제대로 알고 배워라. 절제의 본질을 알면 오해가 걷힌다.
○ 독자의 평
– 우정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뤼시스’
‘뤼시스’는 ‘필로스(친애)’, ‘에로스(사랑)’에 대한 대화편이다. 히포탈레스는 소년 뤼시스를 사랑하고 있다. 메넥세노스와 뤼시스는 친구 사이다. 아무 것도 모르지만 ‘사랑’에 대해서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처하는 소크라테스가 메넥세노스와 뤼시스에게 사랑과 우정에 관하여 묻는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두 사람 중 누가 누구의 친구가 되는가?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의 친구가 되는가?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의 친구가 되는가? 별반 차이가 없는가?”
첫째,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의 친구인가?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를 미워하는 경우가 있다.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에게 친구이지만,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에게 적이 된다. 적은 친구를 사랑하고, 친구는 적을 미워한다. 이 주장은 불합리하다.
둘째,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의 친구인가? 역시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를 미워하는 경우에,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에게 친구이지만,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에게 적이 된다. 친구는 적을 사랑하고, 적은 친구를 미워한다. 이 주장도 불합리하다.
셋째,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인가? 나쁜 자는 모든 자에게 해를 입힌다. 해를 주는 자와 해를 당하는 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 훌륭한 자는 훌륭한 자에게 친구인가? 훌륭한 자는 스스로 충분하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없으므로 서로 친구가 될 수 없다.
넷째, 비슷하지 않은 것이 비슷하지 않은 것에게 친구인가? 정의로운 것이 부정의로운 것에게, 절제하는 것이 제멋대로인 것에게 친구가 될 수 없듯이, 적대적인 것이 친구인 것에게 친구가 될 수도, 친구인 것이 적대적인 것에게 친구가 될 수도 없다.
다섯째,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훌륭한 것의 친구인가? 훌륭한 것, 나쁜 것,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있다. 훌륭한 것끼리, 나쁜 것끼리,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끼리는 친구가 될 수 없다.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나쁜 것’ 때문에 ‘훌륭한 것’을 위해서 ‘훌륭한 것’을 친구로 가진다. 예를 들어, 몸(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은 병(나쁜 것) 때문에 건강(훌륭한 것)을 위해서 의술(훌륭한 것)을 친구로 가진다. 하지만 더이상 ‘훌륭한 것’을 위할 필요가 없는 가장 ‘첫째 친구’가 있다. 이 때문에 다섯째 주장도 기각된다. ‘첫째 친구’는 오직 ‘나쁜 것’ 때문에 친구가 된다. ‘나쁜 것’이 사라진다면 모든 친구는 사라질 것인가? 인간에게는 욕구가 있다. ‘나쁜’ 욕구가 사라지더라도 이로운 욕구와 이롭지도 나쁘지도 않은 욕구는 남는다.
여섯째, 가까운 것이 가까운 것에게 친구인가? 우리가 욕구하는 것들은 본래 우리에게 속했던 것들로서 잠시 빼앗긴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원한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가까운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까운 것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가까운 것이 비슷한 것과는 다른 개념이라고 가정하자. 나쁜 것은 나쁜 것에게 가까운 것이며, 훌륭한 것은 훌륭한 것에게 가까운 것이며,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은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에게 가까운 것이다. 나쁜 것은 나쁜 것의 친구이고, 훌륭한 것은 훌륭한 것의 친구이며,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은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의 친구이다. 이것은 셋째 논변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기각될 수 밖에 없다.
해답을 찾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소크라테스가 이야기를 계속하고자 하나 시간이 늦어 친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두 친구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는 노예들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간다.
‘뤼시스’는 짧지만 매력적이고 어렵다. 논리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은 주장들을 소거해 나가면서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매력적이다. 필로스(친애)와 에로스(사랑)를 함께 다루고 있고 자주 맥락을 잊어버릴만큼 복잡한 논변은 어렵다. 그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명료하고 자세하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가 감정과 유용성(이익)에 기반해 지속되기 어려운 일반 사람들 사이의 친애(‘에로스’가 포함됨)보다 품성에 기반해 한층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훌륭한 사람들 사이의 친애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훌륭한 사람들은 서로 본받으면서 나날이 탁월해진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직접 해답을 말해주지만, 소크라테스는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깊은 수렁(aporia)에 빠뜨린다. 절벽을 타고 오르는 자만이 해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용기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라케스’
기원전 5세기 경 그리스 세계의 젊은이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었을까? 당시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이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도시국가 간에 전쟁이 잦았다. 불가피하게 젊은이들은 중장보병 또는 기병으로 전투에 자주 참전해야 했다. 특히 자유시민이 주축이 되어 편성된 중장보병으로 참전했다. 따라서 중장보병의 전투 능력은 병사들의 생존에 직결되었다.
청년들은 평시에도 중무장술에 관심을 갖고 이를 숙련하려고 노력했다. 전투 대형이나 무술을 가르치는 전문 교관이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라케스’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아테네의 뤼시마코스와 멜레시아스가 아들들에게 중무장술을 교육시켜야 할 지에 대한 자문을 요청하면서 진행된다.
주요 대담자는 장군으로 전투를 이끈 경험이 있는 실존인물인 니키아스와 라케스이다. 니키아스는 BC423년과 421년의 평화협약, 즉 ‘니키아스평화협정’을 맺어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전쟁을 휴전하게 했던 인물이다. 훗날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원정 시 아테네 해군을 전멸시키고 자신도 죽게 되는 실패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라케스 역시 군인으로 전투 중에 생을 마친 사람이다. 여기에 소크라테스가 조언자로 참여한다.
논의 주제는 2가지로 중무장 전투술의 교육적 가치와 청년들에게 필요한 ‘용기가 무엇인가’이다. 두 주제에 대해 장군 출신인 니키아스와 라케스의 의견은 대립적 구조를 띤다. 첫 번째 주제인 중무장 전투술의 교육 가치에 대해서 니키아스는 기마술과 중무장 전투술이 자유인에게 어울리는 배울 거리라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반면 라케스는 특별히 중무장 전투술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중무장술 훈련을 받았다고 해서 실제 전투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또 배운 사람이 조그만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오히려 비방만 더 받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중무장술 교관이던 스테실레오스가 해전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창피를 당한 사례도 들고 있다.
아무튼 니키아스는 군사이론가적 특성을 보이고, 라케스는 실전적 사고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둘 다 부분적으로 옳은 이야기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답게 두 군인이 주도하는 전투술에 대한 논의를 교육 전반의 문제로 능숙하게 확대시킨다. 청년들의 교육은 궁극적으로 영혼을 위한 것이란 점에서 중무장 전투술에 요구되는 덕목 중의 하나인 ‘용기’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게 이끈다. 병사에게 용맹함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니키아스는 용기를 “두려워할 것들과 대담하게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앎”이라고 정의한다. 전쟁에서든 다른 모든 상황에서 이를 분별할 줄 아는 것에서 용기가 나온다고 본 것이다. 반면 라케스는 “대오를 지키면서 적들을 막아 내고자 하고 도망치지 않는 것”을 용기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니키아스의 정의가 주지주의적 입장에 머물고 있고, 니키아스의 정의 역시 도망치면서도 용기 있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전투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용기가 발휘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각각 용기의 본성에 대해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실 소크라테스 역시 여러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향연’에는 소크라테스가 한 전투의 후퇴 과정에서 침착하고 용기 있게 행동했다는 알키비아데스의 목격담이 기술되고 있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물러설 때와 나아갈 때를 아는 것도, 또 공격할 때와 후퇴할 때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용기 있는 행위인지를 체험적으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두 사람이 주장하는 용기에 대한 부분적 정의에 동의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니키아스는 두려움을 이겨내야 할 상황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반해, 니키아스는 용기를 “영혼의 인내”라는 차원으로 보고 적을 대적하면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버텨내는 실전적 행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용기에 대한 두 사람의 정의 모두 용기의 본성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더 이상의 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두 사람의 견해가 용기의 본성을 분명하게 밝히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수준에서 끝난다.
플라톤의 초기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아포리아(Aporia)로 끝맺음으로써 플라톤은 독자들에게 용기의 본성에 대해 더 탐구해 나갈 과제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소크라테스가 용기의 본성에 대한 논의를 더 진전시켰다면 어떻게 결론지었을까? 결론을 낼 수는 있었을까? 용기를 영혼의 측면에서의 앎과 육체적 측면에서의 행동이 동시에 교호적으로 발동되는 어떤 양태로 정의해 내지 않았을까?
하지 말아야 될 것과 해야 될 것, 또 그것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해야 용기 있는 판단과 행위가 되고, 어떤 경우에 비겁한 판단과 행위로 지탄받게 될지는 현실에서 빚어지는 무수히 많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듯싶다. 더구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습성으로 볼 때 전쟁터에서의 상황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숱한 선택의 순간에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로 확장해서 용기를 정의하려 들었을 것이다. 결국 이렇게 무한 확장된 상황에서의 용기를 정의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결론을 미룬 것도 이 때문 아닐까?
– 절제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카르미데스’
플라톤은 이상 국가를 만들기 위해 국가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네 가지 덕목으로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들었다. 공동체 수호자들이 어떤 덕성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조화롭고 질서 있는 국가를 만들 수 있을 터. 플라톤이 도출한 4주덕(主德)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라케스’는 소크라테스의 용기에 대한 담론을, ‘카르미데스’는 절제(sophrosyne)를 테마로 다루고 있다.
소프로쉬네, 절제란 무엇인가? 지혜, 용기, 정의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적극적·외향적 가치라면. 절제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먼저 작용되는 소극적·내향적 가치의 특성을 지닌다. 절제는 타인에게 요구하는 가치라기보다 우선 자신의 감성과 판단, 행동의 조절에 스스로 부과하는 관념이라 할 수 있다.
‘카르미데스’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기원전 432년 포테이다이아(Poteidaia) 전투에 참가했다가 귀향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10대 초중반의 청소년 카르미데스와 10대 후반의 풋풋한 청년 크리티아스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절제의 의미를 탐색했다. 이 작품은 길지 않지만 단일의 주제에 대해 의미 있는 담론을 보여준다. 아고라나 체육관에서 청소년 및 청년들과 대화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파하던 소크라테스의 일상의 풍경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타우레아스(Taureas) 체육관(palastra)을 찾았다. 고대 그리스 도시의 팔라스트라는 레슬링 또는 복싱, 그리고 오늘날 격투기와 비슷한 판크라테이온 경기를 위한 연습장이었다. 이곳은 체육활동 뿐만 아니라, 철학자들과 청년들이 만나 담화를 통해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청년들은 이곳에서 알몸으로 운동하며, 균형 잡힌 탄탄한 몸과 운동 기량을 닦았다.
어른들은 팔라스트라에서 청소년들을 훈육하면서, 시민과 전사에게 요구되는 덕성과 강인한 체력을 단련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동성애가 자연스럽게 싹텄다. 이 작품에서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미소년 카르미데스가 체육관에 들어서자, 좌중의 어른들이 서로 자기의 옆에 앉히려 부산떠는 광경이나, 소크라테스마저 카르미데스의 아름다운 몸매를 보고 당황했다고 말하는 대목이 그렇다.
물론 이는 평소 목석같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미소년의 육체에 유혹을 느꼈다기보다는 미소년의 아름다움을 좌중에게 강조하기 위한 농담조로 읽힌다. 플라톤의 작품 <향연>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아테네 최고의 미소년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와 잠자리를 함께 하며 유혹해도 소크라테스가 넘어가지 않았던 일화를 상기해 보라.
아무튼 소크라테스는 카르미데스의 두통을 치료해 준다는 명목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는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선 머리를 치유해야 하고, 몸 전체를 치유해야 하며, 나아가 궁극적으로 혼을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부분이 건강하려면 먼저 나쁜 일의 원천이 된 몸, 그리고 혼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두통 해소를 위한 대증요법이 아니라, 건강의 균형을 찾아줄 보다 근원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소크라테스가 의도하는 것은 의학적 치료가 아니다. 두통 치료라는 명분으로 미소년과 이야기할 거리를 만들지만, 으레 그렇듯이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교사답게 미소년의 영혼을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논제로 이끌어 간다. “혼에 절제가 생겨나 자리 잡으면 머리와 몸의 다른 부분을 치유하기 쉽다”고 믿기 때문이다. 절제와 건강은 긴밀히 관계된다고 보는 관점에서 두통 치료의 용건은 ‘절제’라는 덕목에 대한 화두로 자연스럽게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의도한 화두로 대화를 이끄는 탁월한 재주를 지녔다.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알아차린 크리티아스는 카르미데스가 아테네에서 최고 명문 가문인 솔론의 후예인 만큼 절제와 다른 탁월한 자질들을 타고났다는 점을 소크라테스에게 주지시킨다. 카르미데스가 충분히 절제 있다면, 소크라테스가 특별한 주문(呪文)없이도 두통약을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카르미데스가 실제로 절제를 갖추고 있는지 캐어묻는다. 캐어묻는 것이야말로 소크라테스의 주특기. 카르미데스가 자신이 절제를 갖추었는지 여부를 분명하게 응답하지 못하자 소크라테스는 절제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먼저 규명해보자며 특유의 문답법을 전개한다.
카르미데스가 생각하는 절제란 무엇인가? 먼저 일종의 차분함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차분한 사람들은 절제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절제가 훌륭한 것 가운데 하나라고 전제하고, 차분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가운데 어떤 것이 훌륭한 것인지를 논증하면서 차분함이 절제의 속성이 될 수 없다고 논박한다.
글을 읽고 쓸 때 빨리 읽고 쓰는 것이 차분하게 읽고 쓰는 것보다 더 훌륭하다. 또 레슬링 경기도 활기차게 하는 쪽이 차분하고 느리게 하는 쪽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는 응답을 이끌어낸다. 그렇다면 절제는 일종의 차분함일 수 없고, 절제 있는 삶은 차분한 삶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렇게 소크라테스 특유의 변증법이 빛을 발한다.
두 번째 응답은 절제는 염치와 같다는 것이다. 절제는 사람을 부끄럽고 수줍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소크라테스는 이 역시 가볍게 반박한다. 절제는 훌륭한 것인데, 염치는 훌륭한 것이기도 하고 나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카르미데스는 세 번째로 절제는 제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규정해 본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쉬운 예를 들어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들이 저마다 필요한 제 것을 제작하고 제 할 일만 잘해야 한다면 국가 경영이 잘 될 수 있을까? 똑같은 일을 모두가 하려고 하는 것은 능력과 자질에 맞는 일을 나누어 하는 것보다 비효율적일 것이라는 반박인 깔려 있는 셈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반박에 카르미데스의 대응이 궁색해지자, 결국 크리티아스가 대신 응답에 나서게 된다. 사실 ‘절제가 제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이해는 카르미데스가 크리티아스에게서 들은 말이기 때문이다.
세탁장이, 제화공, 양복장이 등 모든 장인들이 제 할 일이 아닌 남의 일까지 하면 절제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인가? 크리티아스는 남의 일을 하는 것도, 헤시오도스가 ‘일은 수치가 아니오’라고 말했듯, 훌륭한 일을 한다면 절제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역시 의사가 언제 유익한 행위를 하는지 언제 유익하지 않은지 알지 못할 때도 있다는 예를 들어 반박한다.
마지막으로 크리티아스는 절제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델포이의 신전 기둥에 새겨져 있는 경구인 ‘너 자신을 알라’의 취지도 사람들에게 절제의 미덕을 가르치려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절제가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이라면 그것의 결과물은 무엇인지 반문한다. 진정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도 알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도 알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아는 것이 특별한 지식이라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은 지식에 관한 지식일 터.
소크라테스는 절제가 지식과 지식의 결여에 관한 지식이라면, 즉 자기가 아는 것도 알고 자기가 모르는 것도 알며, 같은 처지에 있는 남들도 검증할 수 있다면, 절제 있는 사람들은 과오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그 분야의 잘할 만한 전문가들에게 일을 맡기면 되기 때문이다. 절제의 도움을 받는다면, 과오를 줄이고 올바른 인도를 통해 가정이 정돈되고, 국가도 잘 경영될 것이라는 의미다. 이게 절제의 유익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여기까지 절제의 정의와 유익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돌연 정말로 절제가 유익한가에 대해 스스로 회의를 제기한다. 절제 있는 삶은 진정한 지식에 따라 행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지식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잘나가고 행복할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의문한다. 지식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느냐는 좋은 지식인가 나쁜 지식인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완전하게 정의내리는 일에 실패했음을 자책한다. 단지 “절제 있을수록 그만큼 더 행복하다고 여기라”고 조언할 뿐이다. ‘카르미데스’는 여기서 끝난다.
절제란 무엇인가? 다각적으로 규명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포리아(Aporia)로 끝났다. 미궁으로 끝난 탓에 오히려 긴 여운이 남는다. 소크라테스는 절제의 중요한 요소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 그리고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들었다. 이것이 절제의 온전한 정의로 규명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절제 있는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함은 분명히 했다. 그것이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카르미데스’는 플라톤의 초기 작품이고, 소크라테스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벌어진 일이 극화된 것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사람, 즉 소크라테스, 크리티아스, 카르미데스는 묘한 악연의 운명을 살게 된다는 점에서 끝나지 않은 ‘절제’의 정의를 다시 숙고하게 만든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스스로 절제 있는 삶을 추구했다. 반면에 이 작품에서 십대 후반과 초반으로 그려진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기원전 404년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한 후 세워진 30인 참주정의 핵심인물이 된다. 이들은 무자비한 공포 정치로 무고한 시민을 무수히 살상했다. 아테네의 민주정을 파괴한 30인 참주들은 ‘무절제’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30인 참주정의 잔혹한 통치에 대한 아테네 시민들의 트라우마는 5년 후 소크라테스의 죽음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기원전 399년에 소크라테스가 신을 믿지 않고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평소 민주주의의 폭정을 경계하고 비난한 소크라테스가 달가울 리 없었다. 게다가 30인 참주정의 주동자였던 크리티아스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증오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미움으로 전가된 측면도 있었다.
또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의 작품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젊은이들을 오도하는 소피스트로 매도한 것도 그에 대한 시민들의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억측과 과장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은 잘못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지혜를 추구하라고 가르쳤다. 헛된 야망과 명예를 추구하지 말고 영혼을 가꿀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한 때 제자를 자처했던 그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는 아테네 시민들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갖고 있던 이러한 편견과 오해가 근본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연설 대목이 길게 묘사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아테네에서 지혜롭다고 이름 높았던 철학자, 작가, 정치가를 한명한명 찾아다니며, 지독하게 캐묻는 문답을 통해 그들이 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더구나 그 사실조차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통렬하게 확인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크라테스는 역설적으로 스스로 자신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임을 확인하게 된다. 진정한 지혜는 ‘무지(無知)의 지(知)’임을 깨우쳐준 것이다. 그런데 이 ‘무지의 지’는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이 모르는 것도 아는 것’이라는 절제의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자신이 모색하던 미완성의 ‘절제’의 의미를 끝까지 궁구하고 실행했던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절제가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절제의 규명을 포기했었다. 그런데 끝까지 절제 있는 삶을 살았던 소크라테스는 결국 그로인해 더 일찍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렇다면 예전에 ‘절제’가 삶을 행복으로 이끌지 그렇지 않을지 알 수 없어서 아포리아로 남겨두었던 것이 오히려 진실이었음을 자신의 온 몸으로 증명해 낸 것이 아닌가. 이는 절제가 무엇으로 인도하든 구애받지 말고 절제 있는 삶을 추구하라는 소크라테스의 웅변은 아닐는지. 갖가지 유혹에 흔들리고 이모저모 재면서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 인물소개
– 뤼시스
데모크라테스의 장남이다. 소크라테스의 주된 대화 상대이다. 히포탈레스가 오매불망하는 미소년으로 나온다. 그에 대한 포사는 ‘카르미데스’나 ‘알키비아데스’를 떠올리게 한다. 지적 열의가 강하지만 친구 메넥세노스보다는 다소 총기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는 인물이다. 뤼시스의 가문에 대한 언급이 이 작품에 약간 언급되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시작할 때 뤼시스는 부모의 온정적 간섭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충실한 아들로 등장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고 난 후에는 보호자에게 약간의 저항을 하는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 라케스
라케스(고 그:Λάχης, 라: Laches, 기원전 467년경 ? ~ 기원전 418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시기의 고대 아테네의 장군이다. 라케스는 플라톤의 ‘라케스’에 니키아스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이다.
.생애
라케스는 멜라노포스의 아들이자, 티모크라테스의 아버지이다. 기원전 427년, 시라쿠사이와 레온티노이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고, 레온노티이는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테네는 레온티노이를 돕기 위해 라케스는 카로이아데스(유스티누스에 따르면 카리아데스)를 공동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20척의 함대와 함께 시켈리아로 파견했다. 레기온에 기지를 둔 아테네 군은 시라쿠사이의 동맹국인 리파리 섬을 휩쓸고, 로크리스를 공격한 후 기원전 426년 여름에 메세네의 영토인 밀라이로 향했다. 그 도상에서 그들은 메세네의 습격을 받았지만, 그것을 물리치고 메세네를 항복시켜 인질을 보내게 했다. 그뒤 그들은 밀라이를 포위하고 밀라이의 원군으로 온 시켈리아의 그리스인과 싸워 그들을 물리치고, 1,000명 이상을 죽이고 600명의 포로를 얻었다.
그 해 겨울 라케스는 시라쿠사이에게 아크로폴리스를 점령당한 시켈로이 인(그리스인이 정착하기 이전 시켈리아 원주민) 마을 아에트나를 시켈로이 사람과 함께 공격을 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했고, 게다가 추격에 나섰던 시라쿠사이 군대에 의해 패주를 했다. 그러나 로크리스 령으로 전진하여 로크리스 군을 물리치고 300명의 전사자를 내게 했다. 그 후, 시켈로이 사람의 협력을 얻어 라케스는 히메라에 도착하였고, 이어서 아이올로스 제도를 공격하고 레기온에 돌아왔다. 그후 푸트도로스와 교체되어 해임되었다.
라케스는 기원전 421년에 2년간의 휴전 조약 체결에 참여한 후, 기원전 418년의 니키아스 화약의 선언자들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양 진영이 대립을 그만 두지 않았기 때문에 기원전 418년에 라케스는 스파르타와 대립하고 있던 아르고스의 원군(보병 1000명과 기병 300기)으로 니코스트라토스와 함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파견되었고, 같은 해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전사했다.
– 카르미데스
Glaucon의 아들 인 Charmides는 기원전 5세기에 번성했던 아테네의 정치가였다.
.출생: 그리스 아테네
.사망 날짜/장소: BC 403년, 그리스 피레아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