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와 파키스탄 • 방글라데시, 그리고 인도불교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는 하나의 인도였다. 종교의 나라 인도, 그 종교가 서로를 갈라서게 했다.
인도는 종교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자비와 평등을 강조한 불교가 생긴 곳이 인도다. 인도에서는 4세기부터 민간신앙과 불교 등이 섞인 힌두교가 발전했다. 11세기 무렵부터 약 800년 동안은 이슬람교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인도는 시대별로 왕조의 변천을 겪으면서 그만큼 많은 종교의 변화를 겪은 나라다. 그래서인지 종교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알라신만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는 이슬람교와 세상 만물을 신으로 섬기는 힌두교 간에는 충돌이 잦았다. 영국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신자들의 다툼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인도인들을 분열시키는 식민지 정책을 썼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1905년, 영국은 벵골 분할령을 발표한다. 인도 북동쪽에 있는 벵골은 영국의 통치에 가장 거세게 저항한 곳이다. 이 법은 이슬람 신자가 많이 살던 곳을 동벵골, 힌두교 신자들의 지역을 서벵골로 나누었다. 인도의 민족운동이 힘을 얻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분노한 인도인들은 한마음이 되어서 저항했다. 영국산 면직물을 불태우고, 상점과 공장 문을 닫았다. 인도국민회의에서는 ‘영국 물건을 사지 말자’, ‘국산품을 애용하자’, ‘인도인의 손으로 인도를 통치하자’, ‘교육만이 힘이다’ 등의 구호를 내걸었다. 결국 1911년 벵골 분할령은 폐지되었지만, 종교 간 갈등을 일으키려 했던 영국의 속셈은 오랫동안 인도 사람들 가슴속에 남았다.
드디어 1947년에 인도는 손꼽아 기다리던 독립을 했다. 그러나 독립의 기쁨은 잠시, 인도국민회의와 이슬람동맹이 각각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 했다. 이 문제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종교를 찾아 떠나는 혼란을 겪었다.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든 이슬람교든 기독교든 종교를 가리지 말고 한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외쳤지만, 암살당하고 말았다.
결국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나뉘어 각각 독립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이슬람교와 힌두교 간의 종교 갈등이 영국의 식민 지배를 겪으면서 더욱 커져서 인도가 분리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런데 옛 지도를 잘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거대한 인도를 사이에 두고 파키스탄 영토가 두 지역에 흩어진 것이다. 동벵골이 있던 곳의 동파키스탄과 인도 서북쪽에 있는 서파키스탄. 인도를 사이에 두고 1000㎞가 훨씬 넘는 거리에 있는 이들은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언어도 문자도 민족도 풍습도 모두 달랐다. 게다가 인구는 동파키스탄이 훨씬 더 많았지만, 정치는 서파키스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정부의 예산도 서파키스탄 중심으로 쓰였고,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공무원이 돼도 높은 자리에 오르기 힘들 정도로 차별을 받아야 했다. 이 밖에도 불편한 점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에는 또다시 갈등이 시작되었다. 물론 파키스탄과 인도 간에도 분쟁은 계속되었다.
1952년 서파키스탄은 오직 우르두어만을 공식 표준어로 지정했다. 벵골어를 쓰던 동파키스탄에선 대학생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반대 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서 벵골어도 표준어로 인정한다는 선언이 나왔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벵골 지역의 동파키스탄인들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마침내 1971년 동파키스탄이 독립해 방글라데시가 된다. 인도가 힌두교를 믿는 인도,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분리된 것이다.
○ 파키스탄
파키스탄 (Pakistan)은 남아시아에 있는 국가다. 정식 명칭은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Islamic Republic of Pakistan)이다. 파키스탄 인구는 2억 명으로, 세계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인도네시아에 이어 2번째로 무슬림이 많은 나라다. 수도는 이슬라마바드이며, 주요 도시로는 카라치, 라호르, 라왈핀디, 페샤와르, 퀘타가 있다.
파키스탄이라는 이름은 초우드리 라흐마트 알리가 파키스탄을 구성하는 5개 지역명에서 따온 조어 (造語/組語)이며, 우르두어와 페르시아어로 “신성한 땅”이라는 뜻이 되도록 지은 말이다.
1906년에 벵골 분할령에 찬성하면서 전인도 무슬림 연맹이 결성되었다.
1929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 정권이 약해졌다. 인도의 자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무슬림의 국민국가를 만들자는 운동이 있었다. 1933년에는 파키스탄 선언이 발표되어 영국령 인도의 서북부인 현재의 파키스탄 지역을 파키스탄으로 명명했다.
1947년 8월 1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 당시 영국령 인도제국이었으나 종교적 이유로 인도와 분리 독립했다. 인도 제국 (Indian Empire)은 1877년에 성립된 영국의 식민 제국이었다. 영국 왕이 인도 황제를 겸임하였다. 인도에서는 영국의 지배 (British Raj)라고 부른다. ‘영국의 지배’라는 용어는 통치 시기를 이르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때는 영국의 영향력이 실질적으로 행사되었던 기간인 1858년부터 1947년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파키스탄 인구의 96%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으며, 그 중에서 수니파가 80%, 시아파가 20%를 차지하고 있다. 무슬림 외에는 힌두교인이 2%로 가장 많으며, 기독교인이 1.59%이다. 그 밖에도 소수의 바하이교, 시크교도, 조로아스터교도 등이 있다. 그러나 이같은 소수종교들은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해 탄압받는 종교들이다. 미국 국무부 산하의 종교자유위원회는 파키스탄을 최악의 종교 탄압 국가로 규정했다.
파키스탄의 종교인구의 구성은 영국령 인도의 분할에 의해 크게 바뀌었는데, 영국령 인도가 인도와 동서 파키스탄 등으로 분할 독립할 당시 7백만 명의 무슬림이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이동했고, 반대로 6백만 명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는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이동하여 파키스탄에서 무슬림은 더욱 더 큰 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의 독립은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1971년 방글라데시 (동파키스탄)의 독립 문제를 놓고, 서파키스탄 중심의 파키스탄군과, 방글라데시의 분리 독립을 주창하는 묵티바히니 독립군, 이들을 지원하는 인도군 사이의 전쟁. 이 전쟁으로 방글라데시가 독립했다.
독립전쟁의 발단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1952년 서파키스탄은 오직 우르두어만을 공식 표준어로 지정했다. 벵골어를 쓰던 동파키스탄에선 대학생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반대 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서 벵골어도 표준어로 인정한다는 선언이 나왔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벵골 지역의 동파키스탄인들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마침내 1971년 동파키스탄이 독립해 방글라데시가 된다.
독립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가 우세했다. 그러나 화력과 장비에서 열세인데다 파키스탄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하여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전으로 파키스탄군에게 저항했다. 파키스탄군은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거리에 얼씬거리는 동파키스탄인에게 총탄을 퍼부었으며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사살되고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쑥밭으로 만들고 수많은 농민들을 죽였다. 서파키스탄군은 학살, 강간 등을 수시로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약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만명의 벵골인들이 헬게이트가 열린 동파키스탄에서 인도로 도망쳤다. 서파키스탄군이 동파키스탄에 헬게이트를 열어 약 600만명의 벵골인이 인도로 피난오자 인도 입장에서도 이 파키스탄 내전을 좌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한편 이러한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 저항에 당황한 파키스탄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고자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군의 인도 국경 폭격은 오히려 분노한 인도의 직접적인 무력 개입을 초래했다.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해도 기죽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했다. 이전까지는 앙숙 파키스탄을 골탕먹이기 위해 간접적으로 묵티바히니에게 비밀리에 무기 및 보급 지원, 인도 영토 내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는 정도였지만 인도 국경이 폭격당하자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인도는 입장을 적극 개입으로 급선회했다.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는 묵티바히니와 방글라데시의 독립 운동 지원을 천명하면서 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전쟁은 인도군-묵티바히니 연합, 파키스탄군 간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1971년 12월 3일 인도는 마침내 군대를 투입하여 벵골인들의 저항을 지원하였고 동부와 서부에서 인도와 약 2주일간 전쟁을 벌인 끝에 대패한 서파키스탄은 항복했다. 19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군 지도부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결국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은 방글라데시의 독립으로 막을 내렸다.
○ 힌두와 이슬람 전쟁, 그럼 인도의 불교는 어디로?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싯다르타 고타마 (Siddhārtha Gautama)에 의해 현재의 인도 동북부 지방과 네팔에 있던 마가다 (Magadha) 왕국을 중심으로 성립하였다.
싯다르타는 카필라 성주 (城主) 슈도다나 (Suddhodana) 왕을 부친으로 하고 마야 (Maya) 부인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으며, 샤카 족에 속하는 크샤트리아 계급이었다. 깨달음 (覺 · 각)을 성취한 후에는 “깨달은 자”라는 뜻인 붓다 (불타 · 부처)라는 칭호를 더하여 “고타마 붓다 (Gautama Buddha)”, 또는 “샤카 족의 성자”라는 뜻인 샤카무니 (석가모니 · Śākyamuni) 혹은 석존 (釋尊)이라고 불리었다.
고타마 붓다의 출생지는 룸비니 (Lumbini)였고 성장지는 가비라성 (Kapilavastu · 迦毘羅城 · 가비라성)이었으나 불교가 종교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마가다 왕국에서였다. 고타마 붓다의 종교적 활동인 수도 (修道) · 깨달음 (正覺 · 정각) · 포교 (布敎) 등이 지금의 인도 비하르 주에 해당되는 마가다 왕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출생지나 성장지보다는 마가다 왕국이 불교 발생의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다.
– 시대적 배경
불교가 일어날 당시 인도는 베다 (Veda)와 우파니샤드 (Upanisad)에 근거를 둔 브라만교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당시 브라만교는 우주의 궁극적 근원인 브라흐만 (Brahman · 범 · 梵)과 개인에 내재하는 아트만 (Atman · 아 · 我)이라는 두 원리가 동일한 것이라는 범아일여 (梵我一如)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인간의 행위는 전생 (前生)의 카르마 (Karma · 업 · 業)에 의해 지배된다는 교의를 가졌으며, 현재의 행위의 결과는 미래의 행위를 결정한다는 윤회 사상 (輪廻思想)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의 사상가나 종교가들은 윤회로부터 해탈 (解脫)해야 한다는 것을 이론이나 실천 수행을 통해 주장하였다. 브라만교의 카르마 · 윤회 · 해탈의 사상은 후대 인도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불교 역시 이러한 인도의 전통적 종교 · 철학 사상을 근저로 하여 새로운 종교 사상으로 출현하였다.
– 붓다의 수행과 깨달음
싯다르타도 “깨달음 (無上正等覺 · 무상정등각 · 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아뇩다라삼먁삼보리 · Anuttarā Samyaksaṃbodhi)”을 얻기 전까지는 이러한 종교적 풍토 속에서 브라만교의 수행 방법을 따랐다. 싯다르타는 29세에 부인인 야쇼다라 (Yaśodhara)와 아들 라훌라 (Rāhula)를 버리고 출가 (出家)한 후 선정 (禪定)과 고행 (苦行)을 택하여 수행하였는데 이들은 당시에 유행되었던 수행법이었다.
싯다르타는 출가 후에 알라라 칼라마 (Alara Kalama)와 우다카 라마푸타 (Uddaka Ramaputta)에게 사사하다가 만족하지 못하여 스승을 버리고 5명의 수행자와 함께 고행의 길을 떠나 6년의 고행을 하였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6년의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이에 고행을 버리고 중도 (中道)의 길을 택하였다. 이윽고 마침내 싯다르타는 35세의 해 12월 8일 이른 새벽에 부다가야 (Buddhagaya)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하여 생 · 노 · 병 · 사의 생사윤회 (生死輪廻)의 근원을 단멸 (斷滅)하고 열반 (涅槃)의 세계를 체현하였다.
– 불교의 성립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은 고 (苦) · 집 (集) · 멸 (滅) · 도 (道)의 사성제 (四聖諦)와 생사윤회의 모습인 연기 (緣起)이다. 고통 (苦)의 원인인 집착 (集)을 극복 또는 제거 (滅)하여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방법 (道)으로 제시된 것이 정견 (正見) · 정사 (正思) · 정어 (正語) · 정업 (正業) · 정명 (正銘) · 정정진 (正定進) · 정념 (正念) · 정정 (正定)의 팔정도 (八正道)이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법 (法 · 다르마)이라 하며 그는 이 법을 펴기 위해 녹야원 (鹿野園 · 사르나트)으로 가서 다섯 수행자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고 (“초전법륜 · 初轉法輪”)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 이로써 불 · 법 · 승의 삼보 (三寶)가 갖추어지고 불교는 비로소 하나의 종교로서 교조 (敎祖) · 교리 (敎理) · 교단 (敎團)을 갖추고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 불교의 쇠퇴
7세기 인도불교는 힌두교의 영향으로 밀교화와, 8세기 중반부터는 금강승 (金剛乘) 불교가 팔라 왕조 (Pala Empire: 750-1174)의 보호를 받으며 마가다 (Magadha) 지방과 서벵골 (West Bengal) 지방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나 이때의 불교는 거의 힌두교나 다를 것이 없는 상태로 변질되고 말았다. 불교는 오히려 중국 · 한국 · 일본에서 번성하였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된 것은 불교 자체가 내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미륵 (彌勒) · 관음 (觀音) · 대일여래 (大日如來) 등의 부처나 보살이 힌두교의 신들과 거의 같은 성격과 기능을 갖게 되었고 이슬람교의 박해에 의해 승려의 수가 줄어들고 사원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인도의 불교는 거의 힌두교나 다를 것이 없는 상태로 변질되었고, 12세기 말에 이슬람교의 박해를 받아 소멸하였다. 그러나 인도 근방에서 네팔 부근이나 벵골 일부, 티베트와 가까운 지역 등에 불교 신자가 소수 남아있었다. 또한 이웃나라인 스리랑카에 불교가 남아있어 수 백년 후 불교가 부활하는 계기가 된다.
– 인도 불교의 부활
1891년 스리랑카 출신의 승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마하보디 협회를 만들고 불교를 포교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벵골 지역에서 불교 단체가 조직되었다. 1959년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 다람살라로 망명하면서 티베트 망명 정부를 세우고 불교 기록물을 가져옴과 함께 불교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19세기 말 아이요티 타스 (Iyothee Thass)를 시작으로 달리트 (불가촉천민)들에게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를 믿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1956년에 인도의 정치인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가 수십만명의 달리트들과 함께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했다. 오늘날 마하라슈트라 주에는 달리트 출신의 불교 신도가 많이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