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년 8월 24일, 프랑스에서 7만 명 가량의 위그노 교도 학살
1572년 8월 24일, 프랑스에서는 7만 명 가량의 위그노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 교도를 학살하는 일명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St. Bartholomew’s Day massacre)이 있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은 기독교의 역사상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의 축일) 부터 10월까지 있었던, 로마 가톨릭교회 추종자들이 개신교 신도들을 학살한 사건을 가리킨다.
샤를 9세 때 어머니인 메디치 가의 카타리나가 아들을 위하여 후견 정치를 하고 있었고, 프로테스탄트들의 지도자인 나바라의 앙리와 샤를 9세의 누이와의 결혼으로 화해의 길이 바야흐로 열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카타리나와 기즈 가의 사람들은 1572년 8월 23-24일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에 참석한 위그노파들을 살해하는 무서운 계획을 시도하기 위하여 이 기회를 이용하였다.
특히 콜리니도 희생으로 쓰러진 이 “파리의 유혈 결혼식”에 이어, 지방에서 위그노파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잇달았다.
희생자의 수는 약 3만 명에서 7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 사건은 세계 역사상 가장 무서운 범죄 중 하나로 낙인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때 정치적인 동기가 교회적인 동기를 능가하였다.
이 소식은 곧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신실한 가톨릭교도였던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까지도 이 소식을 듣고 공포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상복을 입고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한다.
제네바에서는 이 비통한 소식을 듣고 금식을 선포하였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이 학살의 날을 축하하여 ‘하느님께 찬양’이란 뜻의 ‘떼 데움’ (Te Deum)이라는 성가를 부르도록 명하였고 특별 감사의 미사를 집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날을 기념하여 기념 메달을 주조하였다.
그러나 방금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13세 (1572년 5월 13일 임명)가 ‘테 데움’을 노래하였다면, 그것은 단지 그에게 위그노파에 대한 승리만이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또 로마에서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3일간 불을 끄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학살 사건에 가톨릭교회가 개입되었음을 끝까지 부인해 왔다.
그러다가 1997년 8월 2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가톨릭 청소년 축제 강론에서 처음으로 이 사건에 가톨릭교회가 개입되었음을 인정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직 용서만이 결실있는 대화에 이르게 할 수 있다”며 관용을 촉구했다.
한편 위그노 전쟁 (1562 ~ 1598)은 프랑스에서 발생한 종교 전쟁으로, 1562년 3월 1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프랑스내 개신교인들에 대한 학살인 바시 학살로 인해 시작되었고 낭트 칙령이 앙리 4세에 의해 발표되면서 신구 기독교 간의 종교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위그노는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상공업 계층이 많았다. 이는 직업소명설을 주장하는 개신교의 교리가 프랑스 상공업자들에게는 ‘복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위그노 전쟁은 종교의 자유가 명분이지만, 보통 초기 신흥 부르주아 세력이 옛날체제 (앙시앵 레짐)에 반발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귀족 등의 전통적 기득권 세력과 결탁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구실을 하면서 사회 체제를 경직시키고 있었고, 이러한 보수적인 신분 사회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심각한 제약이었다. 무역으로 성장한 네덜란드도 유사한 경우이며, 독일 북부의 영주들이 신흥 세력인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지원한 것도 기득권 세력과의 마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칼빈주의의 성장이 있다.
프랑수아 1세는 해를 거듭할수록 퍼져가는 마틴 루터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간주하는데 신중함을 보였다.
개신교는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인 루터주의의 형태로 프랑수아 1세 (1515 – 1547) 때에 처음으로 프랑스에 소개되었다. 프랑수아는 원래 이단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가톨릭교리와 정통 신앙의 정의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신교가 이단인지를 규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루터의 글은 파리 일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루터의 주장보다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희망했다. 1535년 1월에 프랑스의 모든 “루터교도”들은 울리히 츠빙글리의 신학을 따르게 되었고 위그노 세력은 확대되었다.
위그노 전쟁은 1562년 3월에 시작해 1598년 4월, 가톨릭과 개신교의 타협이 있었는데 그 결과 ▷낭트 칙령 반포를 통한 개신교의 확장 ▷파리와 기타 지역이 가톨릭 소유가 됨 ▷가톨릭-개신교 사이의 적대심 지속 ▷프랑스 정부의 권위 약화 ▷외국의 프랑스 영토 확보 실패 등으로 이어졌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