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종교학 입문 :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동문선 / 1995.6.1
언어와 종교, 종교의 분류, 종교의 비교 및 과학정신 을 기술한 입문서다.
○ 목차
서 문
1장 언어와 종교
2장 종교 및 그 분류
3장 아리아, 셈, 튜라니아의 언어 및 종교
4장 종교의 비교및 과학정신
○ 저자소개 :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 ~ 1900)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Friedrich Max Müller, 1823년 12월 6일 ~ 1900년 10월 28일)는 독일 출신의 영국 철학자이자 동양학자이다. 우리에게는 막스 뮐러라고 더 잘 알려져 있으며 ‘겨울 나그네’로 유명한 독일의 낭만파 서정 시인 빌헬름 뮐러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시인이나 음악가가 되고자 했으나 1843년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베를린에서 셸링 아래에서 일을 하며 인도학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라틴어와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를 익혔다.
1846년에 산스크리트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옥스퍼드로 거처를 옮겼다가 아예 영국으로 귀화했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가 되어 평생을 성실한 학자로 살면서 비교언어학과 비교종교학의 과학적 방법론을 확립하였다. 막스 뮐러는 전 생애 동안 오직 한 편의 소설을 남겼는데, 그 작품이 바로 1866년에 발표한 ‘독일인의 사랑’이다. 이 작품은 그의 유일한 소설로, 몇 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고전으로 남아 그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위대한 작품이 되었다. 물망초 같은 낭만적 사랑 이야기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이외에도 ‘고대 산스크리트 문학가’, ‘신비주의학’, ‘종교의 기원과 생성’ 등의 저서를 남겼다.
○ 요약
宗敎學 入門 _ F. 막스 뮐러
개관
1강. 言語와 宗敎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는 1강 言語와 宗敎에서 言語를 통한 宗敎연구를 강조했다. 다시 말해서 언어가 가지 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의미들을 통하여 종교연구가 비로소 인문 과학의 한 영역이 될 수 있다라 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만 아는 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라는 역설은 독단적 제 종교의 편협한 우물에 서 나올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한 종교의 현상이나 본질을 알기 위해서 많은 종교들을 비교 연구함으로 제 종교의 본래적 모습과 의미를 알 수 있다라는 것이다.
종교의 비교 연구는 종교간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통점과 다른 점을 이해하는 것에 비교연 구의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종교 연구에 있어서 객관성과 보편성을 전제로 했을 때 비교 연구가 가능하다.
뮐러는 종교를 교의를 따르는 신앙 행위 외에 무한자에 대한 지각 능력이라고 하였다.
뮐러는 종교를 연구하는데 언어학이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고 했다. 특히 고대 언어 연구를 통해 여러 종교들 의 본질적 의미를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2강. 宗敎 및 그 分類
인류의 종교는 聖典을 갖고 있는 것도,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성전을 가진 종교는 아리아 민족과 셈 민족들 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브라만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모세교, 기독교, 마호메트교 그리고 중국의 유교와 도교 를 포함해서 인류의 8대 종교라 한다.
종교를 참 종교와 거짓 종교로 나누는 것은 비과학적인 분류방법이므로 종교 분류는 自然宗敎와 啓示宗敎 로 나누고 있다.
종교를 사회 과학적으로 분류하기 위해 國家宗敎와 個人宗敎로 분류하였다. 보다 더 세밀하게 분류하자면 多神敎, 二元論, 一神敎, 單一神敎 및 無神論 으로 종교를 분류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하겠다.
3강. 아리아, 셈, 튜라니아의 言語 및 宗敎
뮐러는 셸링의 견해를 들어 민족을 구성하는 國民性에 영향을 주는 것이 종교라는 것에 대한 예로 신이 선택한 민족 유대인의 역사를 들었다. 종교가 국민성의 기초가 된다는 생각은 철학자뿐만 아니라 역사학자 그리고 법률 을 연구하는 학자들마져 거의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뮐러는 古代 宗敎가 초기 언어에 의존하고 있음을 튜라니아어, 셈어, 아리아어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 하면 언어가 신앙과 숭배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를 지닐 때 종교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는 신화에까지 영향을 미쳐 인간의 비유적이고 시적인 표현이 자연물 등의 숭배 대상을 인격화시켰다. 그래서 뮐러가 말하는 ‘언어의 질병’ 에 의해 신화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뮐러는 아리아인과 셈인의 종교 연구를 통하여 초기 종교의 본질적 인 모습은 같았으나 언어의 지역적 차이 즉, 방언으로 인해 지금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음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와 종교는 밀접한 자연적인 관련이 있으며, 언어의 분류는 고대 종교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아리아족이 분리되기 이전에 공통된 아리아의 종교가 있었고 셈족과 튜라니아족도 지금의 종 교가 아닌 처음의 종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언어와 종교의 연관성이 갖고 있는 의의는 세계 중요 종교의 과학적 취급을 위한 참다운 역사적 시초가 형성됐다는데 있다.
4강. 종교의 비교 및 科學精神
종교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세계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느 종교는 우월하고 상대적 으로 다른 종교는 열등하다는 식의 사고 방식은 종교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동등 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 종교에 소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종교에서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라는 思考에서 종교의 비교를 시작할 때에라야 비로소 제 종교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분석과 철저한 비교를 필요로 한다.
뮐러는 고대 세계의 많은 聖典들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다른 聖典들을 비교함으로써 얻어지는 科學精神 에 입각한 종교연구의 자세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언어가 갖는 多意性을 알아내어 종교의 聖典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문자적 의미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聖典들의 해석은 문자가 갖는 의미보다 인간이 갖는 심적 의미를 해석할 때, 보다 본질적 의미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言語와 宗敎
산스크리트의 발견 : 언어학은 모든 인문 과학의 토대를 놓고 있다. 이는 역사가, 신학자, 철학자, 일반에 이르기까지 해당하는 것이다. 언어학 연구중 비교언어학 연구와 산스크리트어의 발견은 언어학의 과학적 연구를 가능케 했으며, 인문 과학, 특히 종교학의 시작점에 있다.
宗敎의 과학적 연구 : 종교학의 과학적인 연구는, 종교를 과학적으로 취급하기에 너무 신성한 주제로 여기는 일상의 편견으로 인한, 제 종교에 관한 과학적 연구의 가능성이 부정되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그러나 ‘언어 의 중용’을 통한 公平性에 접근할 때 과학적인 연구는 가능하다. 아울러 다른 지식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비교 연구의 방법을 종교 연구에 적용함으로써 <하나만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의 딜레마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종교학의 연구는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위선의 오류를 파악, 수정해야 한다.
宗敎學의 범위 : 종교는 다른 두 가지의 모습을 의미한다. 하나는 우리가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전통에 의하여 전수되거나 혹은 경전에 포함된 교의를 이야기하는 그것을 의미하고, 다른 또 하나는 전 통적, 교의적 그것과는 매우 相異한 心的 능력이나 자질을 의미한다. 이것은 감각적, 직감적 지식의 영역이나, 이성적, 개념적 지식의 상태와는 또 다른 것으로 제 3의 능력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전자는 역사적 형태를 취 급해야 하는 것으로 比較神學이라 불리고, 후자의 경우 역사적 종교로부터 독립하여 인간 내면의 신앙능력 따위 를 말하는 것으로 종교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기에 理論神學이라 불린다. 여기선 언급한 心的 능력이나 자질은 고대 그리스어의 인간(헬/안트로포스) 이라는 말의 어원에서도 엿볼 수 있다.
無限한 것을 파악하는 능력 : 위에서 말한 제 3의 능력을 무한한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 종교학적 心的 능력이나 자질이 바로 무한한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며, 또한 여기에 다른 인문과학과는 다 른 종교학의 의미가 부여된다 하겠다.
宗敎 연구의 자료 : 인문 과학적 理論神學이 가능하기 위해선 상호간 비교 연구가 가능한 많은 자료가 충분히 수집되고 분류되어 분석되어졌을 때 가능하다. 우선적으로 比較神學이 먼저 충분히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理論神學이 많은 思想家들을 사로잡고 있는 동안, 比較神學의 연구는 진지하게 취급 될 수 없었다. 왜냐 하면 비교연구에 필요한 자료로의 접근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기에 자료의 중요성이 오히려 강조된다.
비판적인 학문의 규칙 : 언제, 어디서, 누가? 저자는 증인인가? 他者의 전승인가? 他者의 전승이라면 同時代의 사건인가? 전거가 혹 당파적이거나 감정적이지는 않는가? 다른 어떤 장애 적인 영향을 받았는가? 등등 비판적 학문의 자세는 참에 다가갈 확률을 높여준다.
聖典 연구에 있어서 언어의 效用性 : 聖典을 연구함에 있어서 언어는 그 본래적 의미와 종교 창시의 목적과 동 기를 가늠케 하는 매우 效用한 수단이다. 예컨대 聖典을 연구하면서 기록된 방언보다 더욱 원시적인 언어에 의 존할 때, 공평한 입장에서 聖典의 교의와 그 기록된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比較神學의 토양으로서 기독교 및 유대교의 古代 言語 및 思想 : 대부분의 종교가 공평하게 비교한다는 생각 에 찬성치 않는다. 이런 가운데 기독교가 유대교에 취했던 입장은 최초의 비교 신학적 교훈을 제시한다. 이 두개 의 종교는 神性, 인류의 평가, 도덕성의 동기, 그리고 永生의 희망에 있어서 견해가 다르지만 공통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유대교와 기독교의 연구는, 더욱 광범위한 탐구를 위하여 效用한 준비로서 이바지해 왔다. 이와 같은 연구에 있어서 古代 言語의 중요성은 당연시된다. 왜냐하면 古代의 말과 思想은 동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및 創世記의 해석 : 創世記 1장과 2장은 각기 다른 내용의 創世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혼란은 고대 언어를 통해 풀이가 가능하다. 예컨대 우리가 ‘똑같은 것’에 관하여 말할 때, 히브리인들은 뼈(骨)를, 아랍인들은 눈(目)에 관하여 말한다. 다시 말해 고대어의 연구자는 기술들을 꾸밈없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 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創造傳說 : 내용을 약하자면 모든 것의 머리에 있는 오모르카라는 여인을, 또는 암흑을 벨루스가 쪼개어 땅과 하늘을 만들고, 자신의 머리를 자르거나, 한 신에게 명하여 그의 머리를 잘라, 흙과 거기서 나온 피 를 섞어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히브리어의 創世記와 같은 맥락선상에 있다는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줄루족의 神話 : 세계가 만들어진 그 힘과 모든 자연 현상 산물에 대한 줄루인의 생각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각 씨족의, 또 모든 인류의 공통된 조상을 믿고 있다. 이 조상을 일반적으로 운쿨룬클루 (Unkulunklu)라 부르는데, 이는 曾曾祖父에 해당한다. 운쿨룬클루는 한 개의 갈대에서 나누어졌다고, 혹은 갈대 밭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운쿨룬클루가 최초의 남자였던 장소에서, 우트랑가(Uthlaga)는 최초의 여자가 되었다.
神話를 꾸미는 言語: 줄루족의 神話를 살필 때, 언어가 神話를 엮는데 작용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산스 크리트어에서 혈통 및 가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밤사(Vamsa)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원래 갈대ㆍ대나무를 의미 한다는 것이 그 이유를 설명한다.
– 宗敎 및 그 分類
聖典을 가진 종교 : 종교의 연구자에게 經典은 의심할 나위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세계의 역 사에서 經書를 가진 종교가 얼마나 소수인지, 또 그 역할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리아어족 및 셈어족의 종교 : 아리아인과 셈민족은 아리아민족 셈 민족 世界史에 주연 배우 역할을 해왔다. 특히 셈 민족에 있어서는 히브리인이, 아리아인에 있어서는 힌두인이 베다 舊約성서 각각 두 가지 經書의 종교를 발생 시켰는데, 히브리인은 브라만교 젠드 아베스타 모세교 모세교와 기독교를 낳았으며, 힌두인은 브라만교와 조로아스터교 코란 佛敎를 낳았다. 三藏 新約성서 마호메트교 튜라니안 佛敎 아리안 기독교
인류의 8대大 宗敎 : 아리아어족과 셈어족으로 부터 발원한 브라만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모세교, 기독교, 마호 메트교 외에 유일하게 이 두 민족의 범위 밖에서 하나 내지는 둘의 經書 종교를 자기 고유의 것이라 주장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유일한 국가가 있다. 中國은 聖典에 기초를 둔 孔子와 老子의 유교와 도교를 지니고 있었다. 전 자는 <四書五經>에 후자는 <道德經>을 토대로 세운 것으로, 이 두가지 종교를 포함해서 인류의 8대 종교라 한다.
그리스, 로마, 이집트의 宗敎 : 그리스인의 종교에선 무엇이 진정한 마음의 종교였는지 말해주고 있지 못한다. 또한 로마에선 종교적 가치판단의 근거가 되어질만한 그 어떤 자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근원적 종교라 불릴 수 있는 것이 마치 모자이크처럼 조합하지 않고선 그 어떤 자취를 발견해 낼 수 없다. 반면 이집트의 경우 이집트의 聖書라 불릴 만한 많은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儀式的 숭배의 원천 및 본래적 의도는 아직 도 우리에게 충분히 노출되어 있지 않다.
아프리카, 南渼諸島, 아메리카의 宗敎 : 아프리카인, 폴리네시아 인종,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에게도 우리가 귀 기울일만한 신에 관한 속삭임이 있고, 來生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상상이 존재한다. 남미 대륙의 아스텍 및 잉카의 고대 종교는 여전히 흥미 있는 문제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이 기성 종교들에 의해 점유되어 있을지라도 이들의 종교적 근원을 파헤침에 따라 有史 以前의 흔적 따위를 발견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宗敎 및 그 分類
自然宗敎 및 啓示宗敎, 國家의 宗敎 및 個人의 宗敎, 多神敎, 二元論, 一神敎, 單一神敎 및 無神論.
아리아, 셈, 튜라니아의 言語 및 宗敎
言語, 宗敎, 國民性 : 原詩的 시기에 민족들은 言語로써 지칭되었다. 또한 宗敎와 민족과의 관계는 言語와의 관 계 이상으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셀링의 民族起源說 : “하나의 민족은, 그것의 신화와 관련하여 스스로 결정했을 때만 존재한다.” (P.89) 이것은 언어에도 적용된다. 다시 말해 한 민족이 명확하게 됨과 동시에 명확해 지는 것이다.
헤겔의 이론 : “신의 관념은 한 민족의 보편적인 기초를 구성한다.”(P.90) 헤겔 역시 셀링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 한 것을 알 수 있다.
言語에 의존하는 古代 宗敎 : 초기 종교와 언어는 가장 친밀한 연관을 갖는다. 심지어 초기 종교가 인간 언어의 신성한 방언이라고까지 불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고대 종교의 언어에 대한 의존성을 여실히 일러주는 것이다.
아프리카 言語 및 宗敎 : 아프리카의 원초적 신앙 형태의 모습은 기성 종교에 의해 잠식당해 있기 때문에, 아프 리카 원초적 주민 최초 발음을 감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아프리카 종교의 성장과 쇠퇴에 관하여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리아인의 神의 이름 및 의미 : 언어의 고대 기록을 탐구할 때, 인도, 그리스 및 독일의 고대 신화에서 최고신 이 同一한 이름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신의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디아우스(Dyaus), 그리스어 로 제우스(Zeus), 라틴어로 요위스(Jovi-s), 독일어로 티우(Tiu), 이다. 이들의 어휘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숭배하고 있었을 전 아리아인의 조상들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우상숭배로 한정 지어선 안된다. <베다> 가운데 디아우스 삐타르(Dyaus pitar), 그리스어에서 제우 빠테르( ), 라틴어에서 유피테르 (jupiter)라는 기원을 보면, (이들이 세 가지로 분산되기 전 ‘하늘ㆍ아버지’를 의미했다.) 단순한 우상숭배가 아니라 아리아인은 막연한 무한자, 곧 現前의 영원한 하늘에 대한 同一한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셈인의 神의 이름 및 의미 : 셈의 언어도 아리아 제 언어처럼 공통된 신의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남방어 혹은 아랍어, 북방어 혹은 아람어, 중앙어 혹은 히브리어 등이 분파 되기 이전, 여호와가 아브라함에 의해 숭배되고 바알(Baal)이 페니키아에서, 엘(El)이 바빌론에서 기도의 대상이 되기 이전에 우리는 셈족의 종교적 개념을 통찰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핀란드의 神話 : 핀란드인의 신화는 신들의 이름으로 가득 넘치고 있다.
中國의 宗敎 : 질서와 규칙에 강한 경향이 있는 중국인은 튜라니아 부류에 속한다. 이들의 종교는 單音節의 언 어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예컨데 天(tien)은 天命ㆍ天意 및 天道 혹은 攝理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孔子 에게 있어서도 “하늘이 나를 안다” (P.121)라는 말을 통해 유교, 도교 이전의 근원적 신앙 심리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또한 튜라니아어계의 다른 분파인 만주인, 몽골인, 타타르인, 핀인, 혹은 라프인의 하늘에 대한 견해가 더욱 분명 히 말해주고 있다. 훈어 = tang-li , 몽골어 = teng-ri , 중국어 = tien .
– 종교의 비교 및 科學精神
과학적 종교 연구의 필요성, 고대 세계의 聖典, 리그베다의 찬가, 젠드 아베스타, 佛敎 聖典, 마하바라타, 孔子 및 老子, 파피루스의 언어, 이집트의 神들, 아프리카의 神話, 古代 宗敎의 小兒的 言語, 抽象的 思想의 비유적 표현, 하늘 숭배, 古代 言語의 多義性과 多神敎, 宗敎의 변증법적 생명, 宗敎와 言語의 평행
이상으로 宗敎學 入門에 관한 目次에 준한 정리 및 나열을 마감하고자 합니다.
이 책의 내용은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가 1870년 2월과 3월에 런던 王立硏究所에서, 宗敎 比敎硏究入門 에 관한 講義를 정리한 것으로 이를 일정한 目次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책의 내용을 발제함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뮐러 또한 第 4 講 도입부에 「이처럼 어려운 과제를 맡게 된 데 대하여 유감스럽게 느꼈음을 고백한다.」,「만일 명예에 손상이 없이 강의를 그만둘 수 있었더라면 나는 기꺼 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P.133)라고 말한다. 그래서 발제를 하며 가능한 한 책의 目次를 중심으로 정 리 및 나열하는 형식을 택했다. 그러나 종교학의 방대한 범위(時, 空을 포함)와 宗敎學 硏究에 필요로 하는 事前知識의 미비로 不充한 발제였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宗敎學이 어떠한 學文이며, 宗敎學 硏究에 임하는 자세 및 방법을 體得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宗敎學을 硏究함에 있어서 한가지 기억 할 것은 태고로부터 존재하였던 인간 본연의 신앙심의 不在를 통한 卓上空論에 빠져서는 안되리라는 것이다.
○ 독자의 평
– 막스 뮐러의 ‘종교학 입문’
“종교학이라는 이름은 많은 이들의 귀에는 결함이 있는 그 무엇처럼 들린다. 세계 모든 종교들을 비교 연구하면서도, 특별히 선호하는 입장을 주장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는 오히려 위험스럽고 비난받을만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고유한 경외심은 분명히 억압당할 것이고, 게다가 자신만의 종교와 신을 감지하는 이들은 되려 우상숭배자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이런 오해를 위해 철두철미하게 도움을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도 때로는 이와 같은 걱정들을 공유할 때가 있으며,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를 다른 종교들과 나란히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비교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는 내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을, 혹은 내가 진리보다 더 상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즉 검증의 권리를 포기할 수도 또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비교 종교학이 경우에 따라 우리가 기꺼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을 우리로부터 앗아가지는 않는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새로운 진리를 얻고자 한다면, 손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의 판단에 의하면 우리는 참된 종교의 본질에 속한 것은 아무것도 잃지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잃는 것에 대해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보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이득이다.”(8-9쪽)
– ‘종교학 입문’ 중에서
(발췌 번역을 위해 사용한 독일어 판은 다음과 같다. Max Müller, Einleitung in die vergleichende Religionswissenschaft. 2. unveränderte Auflage, Straßburg 1876. )
“자연과학의 발전을 연구하는 역사가는 연금술사에 대해서 화내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점성술사에 맞서 반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역사가는 그들(연금술사와 점성술사)의 사유방식대로 생각해보려 노력한다. 그리고 연금술사들의 오류 속에서는 최초의 화학을, 점성술사의 환각 속에서는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기대하고 그것을 발견하고자 애쓴다. 이것은 종교들을 연구할 때에도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 우리 역시 종교가 무엇인지(종교의 본질), 그것이 인간의 정신세계에서는 어떤 종류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종교가 가지는 법칙들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이다.” (8쪽)
“다른 학문영역에서 위대한 결과물을 얻어낸 이 비교방법을 종교연구에 적용시키는데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방해하고 있단 말인가? 그와 같은 비교적인 연구방법을 통하여 종교들의 기원, 본질, 성장 그리고 쇠망에 대한 많은 지배적인 견해들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우리의 의무요 책임이기도 한 다른 모든 학문 분야에서의 대담한 발전이 종교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또한 우리가 ‘신학에서 모든 새로운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저 악명 높은 옛날의 금언으로 인해 겁을 먹지 않는다면, 종교들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얻게 되는 식견들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바뀔 것이고, 이러한 연구는 박차를 가해질 것이며, 이토록 오래토록 태만하고 등한시하던 연구는 지체 없이 시작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13쪽)
“동일한 효력이 종교들에게도 통용된다. ‘하나만 아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른다.’ 산을 움직일 정도로 충분히 강한 믿음을 가진 수천 명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종교의 본질이 무어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그 숫자는 점점 줄어들던지, 아니면 어떤 대답도 내놓지 못하던지 혹은 종교의 표면적 현상에 대해서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본질이나, 참된 신앙의 심리적 근거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킬 것이다.
종교에는 적어도 매우 상이한 두개의 의미가 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우리가 유대교, 그리스도교 혹은 브라만의 종교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것들로부터 우리는 구전전승이나 혹은 경전을 통해 보존되고 있는 그리고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도들 혹은 인도인들의 믿음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기본 교리의 다양한 체계들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로 우리가 종교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데 큰 어려움 없이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개가 종교를 바꾸었다.’ 즉 예컨대 그가 유대교 대신 그리스도교의 신앙교리를 받아들였다는 것 말이다. 이는 아무개가 고대 힌두어 대신 영어로 말하기로 결심했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교는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다. 언어의 다양한 역사적인 형태들을 제외하고 언어 그 자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도 같이, 우리 역시 믿음의 모든 역사적 형태들을 제외하고 믿음을 인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종교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그리스도교, 유대교 혹은 다른 형태의 종교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이름들과 변화무쌍한 형태들 가운데에서 불변의 것을 인식하는 인간 안에 주어져 있는 보편적인 정신적 능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 능력은 감각과 이성으로부터 독립적일뿐만 아니라, 그것의 본성에 의하여, 감각과 이성과 날카롭게 대립하여 서있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단지 이것들에 이름붙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이러한 능력, 자질, 천성 혹은 본능이 없다면, 가장 낮은 수준의 서물숭배와 우상숭배라는 종교형태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주의 깊게 귀 기울이기만 한다면, 곧바로 모든 종교들안에서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울리는 기본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소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을 이름 붙이려하는 노력 가운데 스스로를 드러낸다.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대해 절대에 대한 갈구, 불변하는 것에 대한 동경, 혹은 신에 대한 사랑이라 부른다.” (14-16쪽)
모든 감각적으로 알아챔이 이루어지는 기본적인 조건들을 연구하는 첫 번째 철학분야가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모든 지적인 혹은 개념적인 지식의 기본 조건들을 탐구하는 두 번째 철학분야가 있다고 한다면, 무한한 것을 지각하는 기본 조건들 혹은 모든 종교의 가장 깊은 원천이 되는 무한함에 대한 동경을 연구하는 세 번째 철학분야를 위한 자리도 분명히 남아있을 것이다. (16쪽)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종교라고 하는 단어가 갖고 있는 두개의 의미 때문에 종교학은 두개의 분야로 나뉜다. 먼저 종교의 역사적인 현상을 다루는 것으로서 그것은 ‘비교신학’이라 불린다. 두 번째는 종교가 최고 수준으로 혹은 가장 낮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조건들을 설명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이론신학’이라 부른다. (19쪽)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미 많이 보아왔듯이, 인류의 주요한 종교들을 위한 토대로서 쓰이는 여러 사료들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를 통해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학자들은 개별적인 종교들 속에서 참으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그리고 창시자와 그의 첫 제자들이 남긴 가르침과 후대에 의해 덧붙여진 것들과 그 알맹이가 바뀐 것들을 구별해 낸다. 이처럼 뒤에 이루어진 변화들에 대한 연구는 (그것은 때로는 더욱 좋게 만들 수도 혹은 더 나쁘게 만들 수도 있긴 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지니며, 아울러 우리에게 많은 실제적인 가르침을 준다. 하지만 어떤 언어의 후대 방언을 연구하고 그것을 문법적으로 혹은 사전적으로 비교하기 전에, 우선 필수적으로 그 언어의 처음 모습을 알아야만 하는 것처럼, 해당하는 종교의 참된 의미를 규정하거나 혹은 그 종교를 다른 종교 체계들과 비교하기 전에, 그 종교의 본래 모습이 연구자에게 익숙하도록 만드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한 종교의 옛 정신과 새로운 정신은 때때로 대립되어 서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24-25쪽)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정경을 가지고 있는 종교들의 숫자가 얼마나 적으며, 인류의 수많은 종교들 중에서 경전을 지닌 고귀한 종교들은 또 얼마나 미미한가!
만약 우리가 세계사라는 거대한 드라마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두 민족, 즉 아리안족과 셈족을 바라본다면, 단지 이들 민족들 중 각각 두개의 부족만이 거룩한 경전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리안민족에서는 힌두인과 페르시아인이, 그리고 셈족에서는 히브리인가 아랍인들만이 경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리안족의 힌두인들과 셈족의 히브리인들은 각각 또 다른 두개의 ‘경전종교’를 만들어 냈다. 즉 각각 인도와 유대라는 토대 위에서 성장한 종교들이 그것인데,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그것이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할 것은, 각 민족들의 세 번째 ‘경전종교’는 전적으로 독립된 기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첫 번째 종교들을 모방한 것이라는 점이다. (95-96쪽)
만약 우리가 여기에 개괄적으로 그려진 세계 종교들의 파노라마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이러한 종교들을 학문적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은 두려움 없이 자신의 작업에 착수한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자료들이 넘쳐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어디에 학문적인 분석을 위한 주도적인 원리들이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모든 종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는 개별적인 종교들의 고유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가? 어디에서 우리는 그들 종교의 기원, 발전, 그리고 쇠망의 가장 깊은 근거를 발견하는가? 마침내 우리는 어디에서 그들 종교가 지니는 최고의 목표를 찾을 수 있는가? (111쪽)
앞서 시도했던 분류들에 대한 우리의 개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무튼 참으로 중요하고 실제적인 목표를 위해 매우 쓸모 있는 분류는 다신론, 이원론 그리고 유일신론 종교들이다. 만약 어떠한 종교가 주로 더 높은 수준의 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면, 이와 같은 힘의 본질은 틀림없이 종교들을 분류하는 원칙으로 사용하는데 매우 눈에 띄는 특징이 될 것이다. 분류를 통하여 발생학적으로 많은 같은 종류의 것들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곧바로 신들의 숫자에서는 일치하는 많은 종교들이 다른 점에서는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또한 단일신교와 무신론적 종교라는 새로운 두개의 구분을 추가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이기도 한다. (126쪽)
무엇보다도 우리는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그리고 종교라는 이름 아래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해둬야만 한다. 여기서 종교란 인간의 마음 안에 알 수 없는 힘으로 살아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외부의 드러난 모습으로서의 종교, 즉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표현된, 파악 가능한 것으로서의 종교이다. 종교는 그렇게 묘사될 수 있고, 또 타인에게 전해질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종교라 부르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매우 좁은 범위 안에서 언급되는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적 존재를 위한 이름으로 인정되는 몇 개의 단어들이 있다. 그리고 본디 가지고 있는 문자적 의미를 버리고, 그처럼 순수하고, 자유로운, 보다 더 정신적인 형태를 취한 몇 마디 수식어들이 있다. (136-137쪽)
이처럼 아주 오래된 종교들과 역시 아주 오래된 언어들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이해한다면, 언어학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입증된 분류방법이 종교학에서도 역시 가장 쓸모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참으로 언어의 발생학적 관계가 존재한다면, 인류의 주요 언어들을 나누고 묶어주는 친척관계의 동일한 끈이 역시 종교들을, 적어도 최초의 종교들을 그것의 참된 상호 관계 속에서 개별적인 것과 전체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 (137-138쪽)
이와 같이 세 종류의 종교들은 세 개의 언어들, 즉 이란어, 셈족어 그리고 아리안어보다는 덜 혼동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인류역사의 가장 오래된 시기에 일어난 세 가지 일들을 생각나게 해주며, 그것들은 세계사에서 최근까지 발전하게 된 것을 처음부터 규정했고, 그 영향은 우리 언어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종교에서도 지금까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언어, 정신 그리고 종교라는 세 개로 이란, 셈족 그리고 아리안족을 나누게 한 혼란은 단순한 혼란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세 개의 지류로 갈라진 언어의 물줄기는 계속 흘러갔다. 세 개의 제단에 불을 밝혔던 종교의 불꽃은 스스로 재와 연기에 의해 가려지기 전까지는 꺼지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어느 곳이나 언어와 종교들이 있었다. 아리안족, 셈족 그리고 이란인의 영역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것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들판에서 저절로 성장한 언어요 종교였고, 비록 역사적으로 남겨진 것이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최소한의 흔적들은 아주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그것은 중국, 셈족 그리고 아리안족을 연구할 때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던 바로 그 특정한 학문적 방법에 따라 취급할 수는 없다. (142-143쪽)
그리고 아리안과 셈족 종교의 친밀한 혈연관계는 증명될 수 있다. 주요한 신들의 이름들이나 각 종교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를 나타내는 단어들, 예를 들어 기도, 희생, 제단, 영혼, 율법, 신앙등과 같은 말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아리안족과 셈족 안에 보존되고 있으며 이러한 유물들은 오직 하나의 설명을 허용할 뿐이다.(즉 사용하는 단어들과 그것이 가지는 뜻이 같다는 것이다. * 역자주) 가족관계로 이루어진 이 두개의 언어와 종교에 대한 연구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척되어 있다면, 이란 종교들에 대한 비교 연구 역시 대단히 성공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때가 오고 있는 셈이다. (150-151쪽)
내가 보기에, 비교신학과는 달리 이론신학은 -그것은 때로 종교철학이라 불리기도 한다- 비교신학을 전제조건으로 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만약 내가 비교신학 연구가 이론신학 영역에서도 언어철학과 연관되어 비교언어연구를 일으킨 것과도 같은 동일한 혁명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주장했었다면, 그것은 허튼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197쪽)
이제 마지막 한 시간의 강연만을 남겨놓고 있는 지금 나는ㅌ 최대한 이 시간을 잘 사용하고자 한다. 따라서 나는 인류의 중요한 종교들을 성공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인 올바른 정신, 양식 그리고 방법들에 대하여 기술하도록 하겠다. (200쪽)
우리는 ‘바알과 주피터에 대하여 어떠한 두려움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자유롭고 대담하게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위험은 전혀 다른 곳으로부터 몰아쳐온다. 만약 하느님이, 즉 영원한 섭리로 세상을 유지하고 통치하는 하늘과 땅의 창주주가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와 같은 수많은 존재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만들어졌으나, 망각의 시간 속에 그들 스스로 철저히 하느님에 의해 버림받았으며, 인간의 종교는 거짓이고, 인간의 하느님 숭배 역시 단지 연극일 뿐이며, 인간의 전 생애는 하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인류의 종교에 대한 정직하고 독립적인 연구는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한 연구는 또한 아우구스티누수가 알아낸 ‘진리가 없는 종교란 없다’는 것도 알도록 해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오래된 종교들의 역사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명확하게 ‘인류에 대한 신의 교육’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03-204쪽)
어디에서나 만나게 되는 종교의 참된 목적은 선하고 성스럽다. 불완전하고 유치한 종교라 할지라도 영혼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신에게로 귀속시키고 있다. 또한 신에 대한 개념이 불완전하고 유치하다 하더라도, 그 개념들은 여전히 인간 정신이 잠시라도 도달할 수 있고 또 파악할 수 있는 완벽함에 대한 가장 높은 수준의 이상적인 것들이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 정신을 끌어올려 그것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에 이르게 하고, 적어도 그 안에서 더 높은 수준의 그리고 더욱 개선된 삶에 대한, 그리고 신적인 빛 안에서의 삶에 대한 동경을 일으킨다.
종교적 감정을 드러내는 가장 오래된 표현들은 종종 유치하며, 어느 경우에는 불쾌감을 유발하고 또한 꺼려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처음으로 종교적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관대함과 부드러움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인류의 전 역사에서 유년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시기의 종교적 언어를 이해하려고 하는데 이와 동일한 부드러움과 관대함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가? 종교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아이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급작스럽고 종종 불경스럽게도 들리는 질문들을 도대체 누가 기억하지 못하는가? (242-243쪽)
나는 언어 이해에서의 이와 같은 변화를, 오래된 그리고 새로운 종교들에게 불가피한 이와 같은 오해를 <변증법적인 성장과 쇠퇴> 혹은 <종교의 변증법적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종교의 역사적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 이와 같은 변증법적인 과정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필수적인 것인가를 보게 될 것이다. 종교 언어에 나타나는 이러한 변증법적인 종류들은 무한하며, 종종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다. (253쪽)
– ‘에세이’ 중에서
인류의 언어 안에는 이러한 연구를 위한 무한한 광로가 열려져 있다. 이 언어 안에는 모든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이 되고, 모든 낡은 것은 새로운 것이 된다. 언제나 언어 속에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사상이 담겨있고, 사실 그것은 종종 새로운 사상으로 인해 희미해지고 덮여지기 까지 한다. 하지만 많은 점에서 가장 날카롭고, 가장 원시적인 모습 안에서 여전히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언어는 끊임없이 성장하며, 우리의 연구 역시 끊임없이 층층이 살아있는 언어의 겉모습에서 가장 깊은 곳의 심연까지 밀고 들어감으로써, 많은 점에서 본래의 성분에, 바로 인류 언어의 뿌리에,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인류 사상의 본래 모습과 뿌리에 다다르게 된다. 심리학자들과 생리학자들의 관심은 이 뿌리가 자리하고 있는 저편의 세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어가 가진 참된 의미 안에서 좀처럼 인류의 역사에는 속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것은 본디 생각하는 이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생겨난 최초의 행위는 바로 단어이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언어의 지속성보다 더 놀라운 것이 바로 종교의 성장하는 지속성이다. 모든 새로운 것은 그 안에 낡은 것이 있으며 모든 낡은 것은 그 안에 새로운 것이 있다는 언어에 대해서 통용되는 말은 종교에서도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 그처럼 역사가 비롯된 이래 한 번도 새로운 종교란 있어본 적이 없다. 이처럼 계속하여 우리는 역사를 소급하여 추적할 수 있고, 모든 종교의 본래 성분과 뿌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리고 종교의 역사는 언어의 역사와도 같이 동일한 기원적 요소를 가진 것들의 새로운 결합과 혼합을 도처에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실제로 신적 존재를 바라보는 것, 인간의 약함과 종속됨을 느끼는 것, 신의 세계 통치에 대한 믿음, 선과 악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더 높고 좋은 삶에 대한 희망, 이것들은 모든 종교의 본래적 요소들이다. 종종 그것들이 감춰지거나 은폐된다 할지라도, 언제나 그것들은 다시 드러나게 되며, 그것은 지상에서 인간의 영혼으로 인한 혼수품의 하나는 될 수 없다. 그처럼 우리는 결코 종교를 소유할 수 없으며, 웅변적으로 우리 스스로 인류의 귀를 소리 나는 광석 혹은 울리는 종이라 생각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7-8쪽)
어떠한 종교의 현존하는 특징과 참된 특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언어적 표현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없다. 종교는 다수 대중의 공동재산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종교는 마치 한 언어에도 많은 방언들이 있듯이 셀 수 없이 많은 종파들로 바뀔 뿐만 아니라, 우리가 종교의 마지막 은신처까지 추적해 갈 때까지, 즉 인간이 참으로 믿고 있는 마음속으로 쫓아 들어갈 때까지 연구자의 흔들림 없는 파악으로부터도 거리를 두게 된다. 사람들은 마치 그 종교들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알고 있듯이 매우 분명하게 불교와 브라만의 종교에 대해서 말한다. 반면 단어들은 실제로 수백 년 전부터, 아니 수천 년 전부터 이 지구의 북쪽과 남쪽에 살았던 수백만 개인의 내적 확신을 위한 거대한 일반화 작업으로 생각했었고 기대했었다. (12쪽)
종교학은 인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마지막 학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학은 먼저 생겨났고, 또한 종교학은 세계에 새로운 풍경 하나를 제공할 것이다. 바로 종교학은 이미 낡아버린 그리스도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것이다. (17쪽)
이것만이 비교적인 종교연구의 유일한 쓰임은 아니다. 오직 종교학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교는 인류의 종교들 가운데 자신의 적절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종교학만이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공의에 의해 구원받는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여지는 그 시간의 완성되었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종교학만이 의식하지 않은 가운데 그리스도교로 향해 나아감으로써 인류의 전체 역사에게 역사가 지니는 참되고 진실 된 성스러운 특성을 다시금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17-18쪽)
언어학은 질서와 지혜가 모든 언어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리고 언어학은 보살핌 받지 못한 미개인의 황폐한 지껄임 속에서도 지금은 허물어진 저 옛날의 위대함과 아름다음을 발견한다. 신앙과 하느님 숭배의 조금 덜 완성된 형태에 대해서도 종교학이 언어학이 했던 것과 비슷한 변화를 우리 생각 속에 가져오기를 나는 기대한다. 그래서 이제 선교사들은 언제나 서로 다른 것들을 찾으려는 것 대신에 이제 모든 종교들이 공유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며, 아울러 그들은 진리의 빛으로 인도해주는 자그마한 광채를 반갑게 맞아들일 것이다. 그 작은 광채는 새로운 빛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참된 하느님에 의해 축성된 모든 제단을 보호할 것이다. (19쪽)
만약 우리가 어떠한 종교의 처음 시작으로까지 소급해서 추적할 수 있다면, 그 종교가 초기에는 대부분 이후시기에 불쾌감을 일으키는 많은 단점들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래된 세계 종교들의 창시자들은, 우리가 계속해서 판단할 수 있듯이, 비범한 재능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높은 수준의 이상에 자극받고, 진리를 사랑하며, 인류의 안녕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며, 비열함과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이 지상에 세우고자 했던 것은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본래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들 고유의 격언들은 제자라 불리는 이들의 생활방식과는 전적으로 다른 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떠한 종교를 확고히 세우자마자, 특히 그 종교가 강력한 국가의 종교가 되자마자, 이질적이고 세속적인 요소가 점점 더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적인 관심들이 창시자들이 본래 그들의 마음속에 그렸고 하느님과의 고요한 통교 속에 성숙시켰던 그들 계획의 소박함과 순수함을 파괴시킨다. (20-21쪽)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