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성스러움의 의미
루돌프 옷토, 오토 / 분도출판사 / 1987.7.1
본서의 핵심개념은 ‘누멘적인 것’이다.
‘누멘’ (numen)은 라틴어로서,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는 자를 대할 때 자신의 ‘무’ (無) 속으로 함몰되고 사라져 버리는 피조물들의 감정”을 말한다.
예컨데 옆방에 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물리적 두려움의 감정이라면, 옆방에 천사와 같은 초월적 존재가 있음을 알 때 느끼는 것이 바로 누멘적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누멘적인 감정은 두려움을 동반하는 특징을 지니지만 동시에 “독특한 힘으로 끌어당기며, 매료하며, 매혹하는” 특징도 갖고 있다.
이렇게 두 가지 측면을 지닌 ‘누멘적인 감정’은 저자에 의하면 철저하게 선험적인 것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인간의 다른 능력으로부터 진화되거나 도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곧 ‘종교적 인간’ (homo religiousus)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서 누멘적인 감정이 선험적으로 주어졌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행 17:27 b)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와 동일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누멘적인 것은 철저히 비합리적 (말도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철저히 비합리적이고 불가언적인 누멘은 선과 정의와 공의 같은 합리적 선 (善)개념을 통해 도덕화가 이루어진다. 즉 시내산을 진동시키고 구름가운데 강림하신 두려운 야훼가 십계명 (도덕)을 제정함으로써 지극히 선한 존재로 재계시되는 것과 같다.
비합리적인 누멘과 합리적 선의 두 요소가 야훼 하나님 안에서 내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며, 이는 또 하나의 ‘선험적인 종합적 인식’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깨달아지게 된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어떻게 태양신이나 월신, 혹은 어떤 으스스한 장소적 누멘과 같은 아직도 ‘조잡한’ 반유령적인 존재로부터 그것이 맹세와 진실성의 보호자이고 계약의 보증자이며, 환대, 결혼의 성스러움, 종족과 씨족적 의무 등의 보호자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겠는가?” 결국 이 두 가지 속성이 양립한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 수 없었다면 지금처럼 두렵고도 자비하신 하나님을 고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목차
1. 합리와 비합리
2. 누멘적인 것
3. 피조물적 감정-누면적 대상에 대한 느낌의 주관적 반영으로
4. 두려운 신비
5. 매독성
6. 어마어마함
7. 유추적 감정들
8. 누멘적 가치로서의 거룩함-장엄성
9. 비합리적이란 무엇인가
10. 누멘적인 것의 표현수단
11. 구약성서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
12. 신약성서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
13. 루터에 있어서의 누멘적인 것
14. 두 가지 발전 과정
15. 선험적 범주로서의 성스러움
16. 그 역사적 출현
17. 조잡성의 원인들
18. 선험적 범주로서의 성스러움
19. 성스러움의 현현과 직감의 능력
20. 원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직감
21. 현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직감
22. 종교적 선험성과 역사

○ 저자소개 : 루돌프 오토 / 옷토 (Rudolf Otto, 1869 ~ 1937)
루돌프 오토 (Rudolf Otto, 1869년 9월 25일 – 1937년 3월 6일)는 저명한 독일 루터교 신학자, 철학자, 비교 종교가이다.
초기 20세기에 종교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학자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세계 종교의 중심에서 논의되는 심오한 감정적 경험, 즉 뉴미너스 (numinous) 개념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칼 바르트도 영향을 받았다.
루돌프 오토는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 감정으로서의 ‘누미노제’에 천착하고, 이러한 관점으로 세계의 종교를 거시적으로 연구하였다.
1917년 출간된 ‘성스러움의 의미’ (Das Heilige)는 일차 세계대전 직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역자 : 길희성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부에서 신학석사를 받았고,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부터 미국 세인인트 울라프대학교 종교학과, 1982년 귀국 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1984년부터 서강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인도철학사』, 『포스트모던사회와 열린 종교』, 『종교와 환경』, 『선불교와 그리스도교』, 『오늘에 풀어보는 동양 사상』, 『전통, 근대, 탈근대의 철학적 조명』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확실히 종교에서는 명확한 개념적 이해와 언어적 표현을 초월하는 어떤 비합리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옷토는 그의 분석을 시작한다. 그는 그것을 ‘누멘적 감정’ (das numinose Gefuhl) 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감정이 언어적 접근을 초월하는 비합리적 체험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어떤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대상, 즉 ‘누멘 (Numen) 혹은 누멘적 대상’ 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옷토가 이 책에서 주로 시도하고 있는 바는 이러한 누멘적 감정이 지니고 있는 여러 측면들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다각적으로 분석하여 신성, 혹은 성스러움, 특히 그 비합리적 측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키려는 것이다. – 역자 서문 중에서

○ 요약 : 聖스러움의 意味 / 루돌프 오토(길희성 역) _ 허호익
제0장 들어가며 (Outline)
인간은 자연적이며 합리적, 논리적인 삶 속에서만 살 수 없다. 때론 미친 듯이 거리를 활보하고 싶고, 모든 일상적인 삶에서 무작정 뛰쳐나와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도 있다. 이는 인간의 삶이 일상적이며 과학적이고, 설명 가능한 테두리에서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인간은 결코 이성적일 수 없는 비합리적인 면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역사속에서 이런 인간의 모습들을 끊임없이 확인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루돌프 오토 (Rudolf Otto: 1869-1937)의 글은 종교경험 속에서 비이성적인 면, 감성적인 면의 중요성을 부각시킴으로서 무한히 확대되는 인간의 삶의 영역을 보여주고 있다.
루돌프 오토는 그의 책,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인간의 경험 중 특히 비합리적인 요소를 매우 중시했는데, 이러한 측면이 대부분 종교경험에 있다고 보고 종교경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비합리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종교연구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종교경험이 종교경험으로 구별될 수 있는 분명한 이유를 ‘성스러운 체험’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누멘적 감정’ (das numinöse Gefühl)이라 불렀다.
이 글에서는 성스러움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체험, 즉 오토가 말하는 핵심적 개념인 ‘누멘적 감정’(das numinöse Gefühl)이 도대체 무엇이고, 그 체험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주목하려 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의 ‘종교’, 그리고 ‘종교적 체험’과 ‘영성’의 의미를 오늘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깊게 숙고하고 성찰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제1장 합리와 비합리
오토에 의하면 종교(宗敎)는 합리적인 요소와 비합리적인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그의 책 ‘성스러움의 의미’는 책의 부제가 밝혀주고 있는대로 “신관념에 있어서의 비합리적 요소 그리고 그것과 합리적 요소와의 관계”를 연구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오토가 말하는 “합리적” 혹은 “비합리적”이란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합리적인 것은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비합리적인 것은 감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오토에게 있어서 합리와 비합리는 일차적으로는 술어이고, 다만 2차적으로 대상에 대한 사고와 감정으로 표현되는 것일 뿐이다. 오토에게 있어서 “합리적” 혹은 “비합리적”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그의 글에 잘 반영되어 있다.
“한 대상이 어떤 특별한 경우에 생각되건 생각되지 않건, 느껴지건 느껴지지 않건 간에 그 대상이 개념적으로 분명하게 사유가능하게 될 때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33)…… 반대로 그 대상이 느껴지건 느껴지지 않건, 생각되건 생각되지 않건 간에 이러한 개념적 명증성의 영역밖에 우리의 개념적 사유로는 잡히지 않는 것을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부른다.”(120)
성스러운 것은 이러한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먼저 성스러운 것은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유신론적인 신 관념은 신성을 정신, 이성, 의지, 전능, 본질적 통일성, 의식성, 혹은 이와 유사한 술어로 파악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신성은 인간의 인격과 이성에 유추적으로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스러운 것은 분명하게도 비합리적인 것이다. 설령 합리적 속성들이 전면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결코 신 관념을 다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은 비합리적인 주체를 전제로 한 속성들인 것이다. 결코 합리적 속성들이 신성의 본질을 다할 수는 없다. 경험적인 종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합리적인 요소와 비합리적인 요소의 독특한 복합체이다. 오토는 이러한 복합성을 “종교적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하나의 고유한 가치 평가의 행위”라고 하며, 그것을 “성스러움의 범주”라고 불렀다. 오토에 의하면 종교는 이러한 마음의 범주의 작용으로 인하여 성스러움이 어떤 것에 영향을 주어서 나타난 결과이다. 이것은 성스러움이란 신이나 귀신, 명상, 창조신화, 희생 등과 같은 것을 믿는 종교현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오토가 강조하는 것은 그것의 비합리적 요소이다.
“비합리적 요소는 모든 종교들 가운데서 가장 내적인 핵으로 살아있는 것이며, 만일 그것이 없다면 어떤 종교도 감히 종교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10)
이처럼 성스러움의 비합리적 요소는 오토에게 있어서 종교의 핵심을 이룬다. 오토가 말하는 “비합리적 (非合理的)”이란 말은 자신의 본능적 삶이나 세상사 가운데서 합리화를 저지하거나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어떤 희미한 것이나 멍청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 (合理的)”인 것이 인간의 개념적 사유 능력으로 분명하게 파악 가능한 것, 친숙하고 정의될 수 있는 개념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면 “비합리적”인 것은 “개념적 사유로는 잡히지 않으나 감정에는 주어지는 것”이다.
제2장 누멘적인 것-종교체험
오토는 이러한 성스러움의 비합리적인 요소를 신성을 의미하는 라틴어 “누멘” (Numen)으로부터 “누멘적인 것” (das Numinöse)이라는 말을 만들어 표현한다. 이러한 누멘적 마음의 상태는 거룩의 범주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 일어나는데, 이 범주는 전적으로 자류적 (自類的, suigeneris)인 것이다. (종교적 선험성)
그러기 때문에 이 “누멘적인 것-종교체험”은 다른 모든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소여 (所與)와 마찬가지로 규명은 될 수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정의는 될 수 없는 것으로서 다만 듣는 이로 하여금 그 자신 안에서 자극을 받아 살아 움직이고 의식될 때까지 그를 이끌어 주려고 시도하는 것일 뿐이다.(39)
오토의 공헌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오토는 종교의 진수를 “누멘적인 것 – 종교체험”으로 파악하고, 그것의 특성을 논리성과 합리성을 초월하는 비합리적인 그 무엇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강한 누멘적 성격이 오토의 거룩개념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속성인 것이다. 그는 모든 종교의 중심내용을 이러한 “누멘적인 것”의 관점으로 통찰하였고, 그것으로서 종교학의 틀을 세우고자 하였다.
특히, 오토가 이야기했던 ‘감정 (感情)’에 대한 강조는 다양한 종교체험이라는 토대 위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오토의 이런 주장은 결코 책상에 앉아 관념적으로 생각하여 사변적으로 도출해 낸 결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종교적 감정”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는 그 용어를 “누미노스”라고 칭한다. 고대 로마사람들은 이러한 누미노스의 감정을 자연속에서 느끼는 신적인 힘 (Power)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 ‘누미노스’라는 용어를 통해서 종교적 감정을 표현하려고자 하였다. 그는 초월적인 힘을 통해서 느끼는 인간의 감정, 성스러운 것을 통해서 느끼는 인간의 종교적 감정이 바로 “누미노스”라고 보았다. 그것은 초월적 존재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감정인데 이런 감정의 상태를 온전히 언어로 표현 할 수는 없지만 굳이 설명해 보자면 세 가지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공포감 (Tremendum)이다. 둘째는 신비로움 (Mysterium)이다. 셋째는 매혹의 감정(Hascnaus)이다. 특히 매혹의 감정이란 무엇인가에 끌려가는 감정을 말한다. 결국 첫번째, 두번째의 감정은 세번째 감정을 나타낸다고 오토는 말한다.
오토는 이러한 종교경험이 매우 일반적인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종교적 감정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있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이러한 종교적 감정의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것을 성스럽게 느끼고 종교적인 감정을 일으키게 되는가? 오토의 대답은 전혀 다른 것, 주변에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서 누미노스의 감정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거룩한 것을 세가지 범주로서 요약하였는 데 첫째는 ‘신적인 것’ 혹은 ‘신의 속성’을 거룩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둘째는 ‘신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는 사물들’을 거룩한 것으로 분류하였으며, 셋째는 ‘신적인 존재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이 거룩한 것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았다. 바로 이러한 세가지 범주를 통해서 사람들은 성스러운 감정을 느낀다고 오토는 보았다.
제3장 누멘적인 것의 여러 가지 요소들
오토가 말하는 누멘적 체험은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구별된다. 하나는 주관적인 성격이고, 또 하나는 객관적인 성격이다. 주관적인 성격에서 그것은 누멘적인 대상을 대면함으로 자신을 무(無)로 인식하게 하는 “피조물 의식”혹은 “피조물적 감정”으로 나타난다. 피조물적 감정이란 오토에게 있어서는 사건의 개념적인 설명이 아니라, 절대적인 전능하신 자 앞에서 자기 허물을 발견하는 직접적이며 근원적인 감정계기이다. 이러한 감정계기를 통해서 얻어진 대상은 대상 자체의 양심이 합리적인 개념 가운데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것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멘적 대상 앞에서 가지는 주관적인 수반계기인 것이다. 오토는 이러한 “피조물적 감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피조물적 감정이란 오히려 주관에 나타나는 하나의 수반적 요소 내지 결과로서, 틀림없이 내 밖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대상과 일차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어떤 다른 감정적 요소 (즉, “두려움”)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상이야말로 곧 누멘적 대상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오직 누멘의 현존이 체험되는 곳에 혹은 누멘적 성격을 지닌 어떤 것이 느껴지는 곳에, 따라서 누멘적이라는 범주가 어떤 실재하는 혹은 상상적인 대상에 적용될 때 만이 비로소 그 반영으로서의 피조물적 감정이 발생하는 것이다.“(44)
이러한 주관적인 성격은 객관적인 측면에서 또 다시 두가지 성격을 지니게 되는데, 하나는 “두렵고 떨리는 신비의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홀리고 끌리는 매혹의 감정”이다.
제4장 두려운 신비 (Mysterium tremendum)
절대타자인 누멘은 양극적 특징이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두려움 (tremendum)의 대상으로서 한없는 공포와 경외를 한 개인 안에서 경험하도록 도와준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황홀 (fascinosum)의 대상으로서 한 개인을 황홀케하고 그를 사로잡는다. 오토에 의하면 두려움의 감정에는 네가지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데 그것은 두려움 (Awefulness), 압도성 (Overpoweringness), 활력성 (Energy), 그리고 신비의 요소 ‘전혀 다른 것’(Wholly Other)이다.
1. 두려움 혹은 전율감의 요소 (tremendum, awefulness)
오토는 모든 실존 (實存)의 신비의 문제는 신앙과 정성어린 신뢰보다 더 원초적인 “열정 (熱情)”에 있다고 보며 이러한 열정 안에는 경이적이고 신비적인 것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의 생각이 있다고 본다. 이 경건한 두려움은 구약성서의 “에맛 야훼”와 같은 표현으로서 신이 쏟아부어 인간의 사지를 마비시키는 “신의 두려움”으로, 희랍인들이 쓰는 “공황적 공포”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희랍어 “세바스토스”와 같이 그 어떠한 피조물이나 황제까지도 가질수 없는 것, 다만 누멘의 종교적 감정계기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공포에 찬 두려움인 것이다.
이것은 ‘전율을 느낀다’라는 용어가 비교적 정확하게 그리고 근사하게 그 본래의 의미와 부합하는 것이다. 이 전율의 전 단계는 “귀신에 대한 공포”와 “유령에 대한 공포”이며 바로 이 뿌리로부터 모든 종교가 나왔고 모든 “신화적 감각”과 “환상”의 여타 산물들도 나왔다. 오토에 의하면 이런 “귀신에 대한 공포”는 “원시인들의 종교”가 지닌 본질적인 특징이다. 오토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종교란 자연적인 공포로부터 발생하는 것도 아니며 억측에 불과한 소위 일반적인 세계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무시무시함이란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공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신비적인 것의 최초의 출렁임이요 낌새이기 때문이다. …. “귀신에 대한 공포”의 형태로 나타나는 누멘적 공포는 그것의 소박하고 거칠은 첫번째 술렁임으로서 이른바 원시인들의 종교가 지닌 본질적인 특징이다(51-52).
이러한 공포는 독특한 신체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사지가 싸늘해 지거나, 찬물을 끼얹듯 소름이 끼치게 되거나, 등골이 오싹하게 된다. 때로는 머리카락이 치솟고 사지가 떨리기도 한다.
2. 압도성 혹은 위압성의 요소 (majestas, overpoweringness)
누멘체험에 있어서 압도성의 요소는 “절대적 불가접근성”으로 요약되는 앞의 두려움의 요소가 후퇴하고 절대적인 위엄가운데 압도해 오는 신의 면전 (面前)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자기 겸비의 반응이다.
오토의 표현대로 하면 객체적으로 의식된 압도적인 것에 대한 대조로서 자신의 함몰성 내지 무화, 그리고 먼지와 잿더미같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히 느끼는 감정으로, 그는 이것을 “종교적 겸손의 누멘적 원리”라고 칭한다. 이 부분은 특히 슐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 감정”과 그 견해를 같이한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오토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 감정”을 받아들이면서도 오히려 그의 한계를 지적하며 자신의 “피조물적 감정”을 제시한다. 오토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의 감정”은 피조성에 의존한 감정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이 “먼지와 잿더미와 같은 제가 감히 당신께 말하나이다” (창18:27)라고 한 것은 피조성에 근거한 의존성이 아니라 피조물성에 근거한 의존성, 곧 압도적인 것 앞에 느끼는 무력감 (無力感)과 자신의 무성 (無性)이라고 한다. 오토에게 있어 아브라함의 고백이 슐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감정 보다 중요한 바로 이 피조물성, 곧 위압성, 잿더미 됨의 감정이 곧 진정한 의미의 신비주의의 본질 (本質)이 된다. 오토에 의하면 신비주의의 본질은 “한편으로는 자아의 소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초월적인 것만의 유일한 실재성 내지 전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의 중요한 특성은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자기비하를 계속하는 것이요, 초월적인 대상 앞에서 자신을 무 (無)로 느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당신만이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오토는 이러한 신비주의의 요소를 에크하르트 (Mcister Eckhart)에게서 찾았는데, 이런 이유로 오토는 그의 신비주의를 누멘적인 “위압성의 신비주의”라고 부른다. 이 “위압성의 신비주의”는 위압감과 피조물적 감정이 극단으로 고조됨으로, 다시 말하면 누멘적 감각의 비합리적 요소가 최고도의 긴장에 다다랐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체험과 일치를 이루어 “진실로! 나와 모든 피조물은 아무 것도 아니고, 당신만이 존재하며 당신은 모든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비주의이며 하나님 앞에 압도당한 인간의 겸손한 자기고백인 것이다.
3. 활력성의 요소 (Energie, energy or urgency)
앞의 두려움과 위압성의 요소는 그 안에 세 번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오토는 그것을 “누멘적 활력성의 요소”라고 부른다. 이러한 요소는 특히 신의 진노 가운데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요소로서 생동성, 정열, 감정적 기질, 의지, 힘, 운동, 흥분, 활동과 같은 지시어들로서 표현된다. 활력성의 현상은 이 요소가 경험되는 순간 인간의 마음은 활성화되고 “열성”으로 치달으며 엄청난 긴장과 역동성으로 채워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오토는 이러한 누멘 체험의 활력적 요소를 에크하르트의 “역동적 신비주의”에서 발견한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은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살아있는 과정으로서, 이 과정은 율법 (律法)이나 맹목적 충동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힘과 지고 (至高)의 경이스러운 자유 안에서 누리는 자기 활동이다. 이토록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이 자유로운 자기 활동 안에서 누멘체험의 활력적 요소는 인간에게 체험되는 것이다.
종교가 하나의 추상이 아니고 살아있는 신 (神)의 실재 (實在)를 경험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만족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소원과 갈망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이러한 활력적인 누멘 체험이 발생한다.
4. 신비의 요소 ‘전혀 다른 것’ (Das ganz Andere)
신비 가운데서 두려움의 요소를 빼고 남은 것을 오토는 기이한 것 혹은 경이로운 것이라고 부른다. 이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마음 속에서 하나의 경이, 경이로운 것, 신비한 것에 부딪쳤다는 것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은 순수히 누멘적 감정의 영역에 처해있는 심정적 (心情的)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는 이 단어의 표현을 “기막힘”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기막힘은 놀라움과는 다른 말로서 오토에 의하면 “우리로 하여금 입을 딱 벌리게 하는 순전한 놀라움과 절대적인 이질감”을 뜻하며, 예컨데 라틴어의 “정신을 잃게한다.”에 비견 될 수 있고, 좀 더 정확히는 희랍어의 “놀라움”과 “놀라다”에 해당하는 것이다. 오토는 이러한 표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생소한 것, 소외감을 주는 것으로서, 일상적인 것, 아는 것, 친숙한 것, 따라서 편안한 것의 영역(領域)을 벗어나는 것이며, 이러한 것들과는 반대되고 따라서 마음을 순전한 놀라움으로 채우는 것이다(67).
오토는 “전혀 다른 것”의 누멘적 요소는 신관념에서 비합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신비신학”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보고, 신비주의 신학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한다. 그에 의하면 신비주의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제 일차적으로 경이․ 놀라움 (Wunder)의 신학이며 전혀 다른 것의 신학이다. 이것은 들어보지도 못한 것의 신학, 새롭고 희안한 것에 관한 신학, 역설과 이율배반의 신학, 그리고 “반대의 일치의 신학”이다. 여기에서만 부정의 신, 언표불가능의 신, 숨어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제5장 누멘적 찬송들
신에 대한 찬송에 있어서도 단순한 ‘합리적’ 찬송과, ‘두려운 신비’의 요소들에 따라 비합리적인 것과 누멘적인 것에 대한 감정까지도 표현하는 찬송에는 차이가 있다. 즉 전자의 밝고 합리적이고 친근한 찬송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여도 ‘신의 영광’에 완전히 합당한 것은 아니다. 이는 누멘적인 감정을 담고 있는 찬송은 근원적으로 신의 비의 (秘意) 앞에 서 있는 존재의 두려움, 압도, 매혹의 요소와 닿아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제6장 매혹성 (Fascination)
누멘적인 것의 내용은 한편으로는 위압적이고 압도적인 두려움의 요소로 체험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분명히 독특한 힘으로 끌어당기며, 매혹하는 어떤 것으로서, 두려움의 요소와 함께 하나의 묘한 대조를 이룬다. 황홀함을 이루는 요소로서는 오토가 말하는 매혹성, 어마어마함 (monstrous), 그리고 장엄성 (august)이 있다.
누멘의 신비는 두려움으로 인식될 지라도, 그것을 만나는 사람에게 그것은 역설적으로 매혹적으로 체험된다. 귀신 (鬼神)이나 신 (神)은 우리 마음에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공포적인가 하면 또 그렇게 유혹적이고 매력적일 수 없다. 가령 우리가 성소를 대할 때 위압과 압도를 당하여 무언가 두려워지는 마음이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피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끌려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충동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무서움을 느끼면서도 무언가에 끌리는 것, 이것이 누멘의 끌어 당기며 매혹하는 요소이다. 지극한 비천함 속에서도 용기를 잃고 그 앞에 떨고있는 피조물은 동시에 언제나 그 앞으로 나아가려는 충동을 느낀다. 이것이 오토가 말하는 누멘의 매혹적인 요소이다. 이러한 누멘의 매혹적인 요소는 그것이 합리적 표상들과 개념들로 도식화 될 때 사랑, 자비, 동정, 도움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게 되는 행위에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주술적인 행위를 통하여 자신과 누멘과를 주술적으로 동화하려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신들림, 내거, 자기충만의 샤만의 방법으로 흥분하는 황홀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토는 이런 매혹성이 긴장의 극치에 이르면 충일한 것으로 되며 이것이 곧 신비적인 요소로서 종교적 동경의 요소에만이 아니라 개인의 기도나 공동제의의 형태 속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매혹성 또한, 누멘적 신비에 있어서 두려움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지시어라는 것이다.
제7장 어마어마함 (das Ungeheure)
누멘의 황홀한 신비안에는 “어마어마한” 요소가 또 하나 있다. 이것은 어떤 양이나 질에서 “거대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합리주의적으로 재해석된 말로서 본래는 “편안하지 않은 것”, “켕기는 것”, 즉 하나의 누멘적인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말은 “아주 거대한 것”, “너무 커서 우리의 공간적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부터 “어마어마하게 켕기고 겁먹게 하는 것”이란 뜻으로 전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은 “엄청난 것” 혹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것으로서의 기이한 것” “이질감을 주게끔 하는 것”이란 의미로도 쓰이게 되었다. 오토는 누멘적 대상은 인간에게 너무 크고 엄청나서 경악을 자아내는 켕기는 것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아연실색케 하는 어마어마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제8장 유추적 감정들
누멘적인 것의 특징은 두려운 신비라는 면과 절대적으로 매혹적인 면을 동시에 담고 있다. 특히 우리는 여기에서 ‘숭고한 것’ (das Erhabene)의 예를 통하여 누멘적인 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숭고성의 개념 자체는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으며 그 자체에 어떤 비밀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숭고성의 감정은 누멘적인 것의 감정과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다.
또한 누멘적인 감정도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고 진화될 수 없는 하나의 질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누멘적 감정도 하나의 감정이기에 다른 감정들과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감정을 유발시키기도 하고, 그들에 의하여 유발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누멘적 감정을 유발시키는 요소들과 자극들을 탐구하고, 누멘적 감정을 일깨우는 자극의 연쇄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누멘적인 것은 합리적 개념들에 의하여 도식화 됨으로서 성스러움이라는 범주 자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렇게 볼 때 성스러운 것과 숭고한 것의 연결은 단순한 감정의 연계 이상이며, 모든 고등종교들을 통하여 숭고성 역시 성스러움의 진정한 도식 중의 하나임을 암시한다.
제9장 누멘적 가치로서의 거룩함 ― 장엄성
매혹성이 황홀한 신비의 주관적 측면이라면 장엄함은 그것의 객관적인 측면이다. 오토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장엄성도 역시 하나의 가치임에는 틀림없으며, 실로 하나의 객관적인 가치로서 동시에 절대적으로 궁극적이며 무한한 가치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객관적 가치들의 비합리적 기반과 원천이 되는 누멘적 가치인 것이다(111).
이러한 장엄성의 체험에서 인간이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현실성과 현존 자체의 확실한 평가절하이다. 오토는 이 장엄한 누멘 앞에 선 인간의 전적인 속된 감정을 좀 더 신학적으로 해명하려고 한다. 누멘의 객관적 가치의 인식과 그것에 상응하는 인간의 평가절하를 신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원죄 (原罪), 혹은 원죄책으로 말할 수 있다. 오토에 의하면 이 원죄 교리의 기원은 개인의 누멘 앞에 선 절대적 무가치의 체험이다. 하나님은 그의 “두려움”이나 “압도성”을 통해 그의 위엄과 장엄성을 보이신다. 예를 들어 이사야의 체험은 인간성의 보편적 실존상태와 자기비하적 누멘체험을 대변한다. 그의 고백은 이 원죄의 인식과 그것의 실존적 고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오토는 죄 (罪)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죄 (罪)를 도덕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죄의 도덕적 측면은 결코 죄의 근원도 아니고 그것의 결정적 요인도 아니다. 오토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죄는 결코 행동의 결과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게되는 본래적인 마음을 지칭한다. 계율을 어김으로서 창조주와 멀어져가는 어떠한 감정상태 즉, 초라한 감정상태, 속됨의 감정을 그는 “장엄성”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표현 해 보려고자 하였다. 죄를 지은 자가 갖게되는 마음의 태도가 바로 “장엄성”이다.
제10장 나가며
루돌프 오토는 그의 책 ‘성스러움의 의미’를 통해,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합리화시켜 버림으로 그 생명력을 잃어버린 정통주의 기독교에 대하여 종교의 본질인 비합리적 요소를 회복하고 거룩의 의미를 부활시켜 그것에 생명력을 공급하려고 노력하였다. 요아킴 바흐 (Joachim Wach: 1898-1955)가 지적했던 것처럼 오토는 그 당시의 합리주의적 신학과 이성에 기초를 두고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정의하려는 피상성에 반발하였다.
오토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란, 종교개혁자들이 본래적으로 말하려고 했던 것의 핵심인 종교체험의 확신과 그것의 중요성이었다. 오토의 책이 쓰여지게 되었던 역사적 배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유주의 신학의 위험성은 영혼의 이러한 누멘적 요소를 평면화 하려는 데 있었다. 그래서 합리주의 신학은 성서의 기록된 기적도 다 부인해 버리고, 영적 세계의 문제도 심리적인 현상으로 일축해 버렸다. 그러나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들, 그 종교들의 경전, 그 종교들의 상징이나 신화들이 한결같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실은 궁극적 실재의 다른 차원을 발견함으로서 가능해지는 이러한 ‘변화의 체험’ 들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화두 (話頭)가 되는 것은 종교의 외적 형식이 아니라 내적 체험이다. 참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종교의 교의나 의식, 신학, 상징, 가치체계가 아니라 그것이 본래적으로 말하려 했던 영의 소리, 내적 체험이다. 오토가 “인간 체험의 영역가운데서만 주어지는 특유한 체험의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종교체험의 영역이다”라고 말했던 그 특유한 영의 체험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내적인 체험의 강한 요청이 현재 한국교회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교회부흥운동으로서의 성령운동을 부추기고 정당화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사실 한국 교회 성령운동의 문제는 첫 오순절 사건의 중심적 요소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에 관한 신학적 반성과 그것에 기초한 실천보다는, 오히려 물량적 교회 팽창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그 “성령 임재 사건”이 오용되고 남용되어, 이른바 성령사건을 신비한 종교현상의 성령운동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소위 말하는 “성령운동”은 목회의 영력과 교회의 부흥성장을 위한 도구로서 합리화 되어버린 점이 없지 않아 있다. 또한 방언, 치유, 예언, 열광적 찬송, 등등이 잘못된 은사라고 할 수는 없으나 복음의 전달을 통한 인간구원보다는, 그러한 종교현상이나 엑스타시적 은사에 더 큰 비중을 실어서 성령의 활동을 억지로 가시화 시키고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오토가 말하고자 했던 종교체험의 본질과는 다른 것이다.
종교체험의 사건이 지나치게 감성에 매몰될 때, 종교는 ‘감상주의적 종교’, 과잉흥분을 영적 체험으로 혼동하는 ‘영적 탐미주의’ 또는 ‘종교적 광기주의’로 변질되어 버린다. 또한 종교체험의 사건이 지나치게 인간의 덕성에 매몰될 때, 종교의 본래적인 자리는 사라지고 근엄하고 무거운 도덕적 바리새주의, 율법주의가 되어버린다. 또한 오토가 그 시대에 비판했던 것처럼 종교체험의 사건이 지나치게 인간의 지성에 매몰될 때, 종교의 본질은 메마른 교리지상주의나 초자연주의를 위장한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이론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건강한 종교는 이런 세가지 요소를 다 살려내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상호교통하며 조화를 이룰 때 인간의 삶이 또한 건강해진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이루어왔던 영성운동의 맹점은 바로 이런 건강한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세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어느 것 하나만을 강조하면서 나타난 부작용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진정 한국교회가 올바른 영성운동을 실현하고 건강한 영성생활을 지도해 나가기 위해서는, 참 신앙과 참다운 종교체험의 사건이 이러한 한쪽으로 지나치게 편향되기 쉬운 성향을 방지하고 또한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균형을 잡아나가는데 있다 할 것이다. 이런 책임은 일차적으로 향후 한국교회에 지도자가 될 우리들의 과제이기도 하며 오토가 소망했던 바램일 것이다.

○ 독자의 평 1
옷토는 종교에는 명확한 개념적 이해와 언어적 표현을 초월하는 어떤 비합리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논의를 시작한다. 이를 그는 ‘누멘적 감정’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감정은 언어적 접근을 초월하는 비합리적 (‘반합리적’이 아닌) 체험이다. 왠고하니 그것은 누멘, 다시말해 어떤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대상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누멘적 감정이 지니고 있는 여러 측면들을 되도록 정확하고 다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신성 혹은 신성스러움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를 심화시키고자 하려는 것이다. 언어로 전하기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종교적 체험의 독특한 특성을 언어와 논리로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 독자의 평 2
루돌프 오토 (1869-1937)는 신학을 공부하고 두차례의 세계 여행으로 동양 종교에 대한 통찰을 얻었고 1937년 마르부르크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 책 ‘성스러움의 의미’는 1917년 처음 출간된 책이며 이 책에서 오토는 종교적 감성에는 개념적 이해와 언어적 표현을 초월하는 어떤 비합리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전재하며 그는 그것을 “누멘적 감정”이라고 정의하였으며 이 누멘 (Numen)적 감정에 대해서 깊게 파헤친 책이다.
누멘적 감정은 오토가 새로만든 단어이며 그 의미는 종교적 감성이라 할수 있는 단어도 낮설게 다가오는 충일성,매혹성,거룩함,장엄성,숭고함,두려움 등의 지시어 (루터는 초월적 세계나 감정을 상징하는 역할을하는 말로서 ‘지시어’라 했다)를 통해 엳볼 수 있는 불가해하며,언어로 표현이 안되는 즉 비합리적인 요소이며 감정이다. 신학적 표현으로 신성의 깊이에 있는 이러한 감정은 얕은편이고 (물론 난해하지만) 누맨적인것은 신성의 깊이와 비슷하게 있다고 하겠다. (언어로 표현이 힘든..)
이정도로 정리하면 나는 만족하며 이정도 알면 충분하다. 특히 이책의 핵심단어인 ‘누멘적인 것’이라는 의미만 알아도 충분한 성과라 생각한다.
불면증이 있다면 강력 추천하는 책이다. 이런 비합리적인 감정들을 말로 표현하며 심화시켰다는 자체가 정말이지, 이건 사고 능력과 그 내공이 대단하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젯밤 기억도 어렴풋하게난 꿈을 주제로 사실주의 장편소설을 쓰는 작업과 같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종교철학자, 신학자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분이 쓴 책이라지만 나에겐 한 오덕후 같은 내용의 연속인 이 책을 번역해 출판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작업이지 않았을까 예상해본다. 번역의 난해함은 오토가 시도하는 누멘적감정의 분석이라는 주제 자체의 난해함이 이미 가지고 있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오토는 앞선 신학자 슐라이어마허 (‘의존적감정’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뒤에는 ‘성스러움의 의미’를 통해 지금의 신학, 종교학에 영향을 주었을꺼다.
루돌프 오토의 성스러움 !
책을 읽기전 칸트가 이야기한 선험적 직관이라는 단어의 이해, 슐라이어마허의 ‘의존적 감정’, 성령, 대속, 속량 등의 신학적 개념을 알면 읽어나가기 조금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 초반의 역자가 말했듯 오토는 종교의 비합리적인 부분을 합리화 시키자는것 이아니라 비합리적인 부분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남겨두되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가능한한 확실하게 규정하고 포착해보자는 의도인 것이다. 종교적 감정의 경험은 다분히 자류적 (개인적, 주관적)인데 이것을 나같은 사람에게까지 이 책을 통해 그러한 것을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했다는것 또한 이 책의 의미라면 의미라 하겠다. 물론 신앙인 특히 그리스도교인에게 이책은 신학적 때론 종교학적인 이론으로 무장하는데 좋은 책이 될것이고 말이다.
다시말하지만 난해함은 물론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글을 통해 엿봄의 연속임으로 잠이 오질않을때 읽으면 적절한 서적임을 유의하자. 한번의 독서로 ‘누멘적 감정’에 대해 접근하려는 오토의 시도를 함께하기란 녹록치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종교학에 있어 심심치 않게 언급되는 고전 ‘성스러움의 의미’를 읽었다는데 의의를 두어야겠다. 저자는 ‘영원한 이성’에 대해하여 (내가 생각하기에 ‘신’이라고하는 개념일 것) 이미 열성적이고 진지한 공부를 해 본 적이없는 사람은 누구도 ‘불가언적 누멘’에 관심을 가지면 안된다고 느꼇다고 썼지만…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