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899년 10월 11일,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과 보어족 간에 제2차 보어 전쟁 (Boer War) 발발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전쟁들로 1차 보어전쟁 (1880 ~ 1881)과 2차 보어전쟁 (1899 ~ 1902)로 나뉜다.
제2차 보어 전쟁은 1899년 10월 11일에 발발한 네덜란드계 보어인이 세운 트란스발 공화국 및 오렌지 자유국(Oranje Vrystaat)의 7만 연합군과 영국 45만 군대 사이의 전쟁으로, 1902년 5월 31일에 영국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영국이 승리함에 따라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의 영토는 최종적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 제2차 보어 전쟁 (Boer War)
.날짜: 1899년 10월 11일 ~ 1902년 5월 11일
.장소: 트란스발 공화국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 트란스발 주)
.결과: 영국군 승리교전국
.교전국: 대영제국(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인도 제국, 스리랑카 실론) VS 오렌지 자유국, 트란스발 공화국, 케이프 보어인, 외국 용병
○ 배경
희망봉 및 남아프리카 지역은 원래 네덜란드 식민지로, 네덜란드가 프랑스 점령하에 들어간 틈을 타 1806년에 영국이 합병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또한 법적으로 계속 갈등이 생기자, 영국의 통치를 원하지 않던 원래 이주민들, 즉 보어인들은 영국이 통치하는 지역들을 떠나 새로운 지역들을 개척하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케이프 식민지 동쪽의 나탈리아를 개척하려 했으니 이곳도 영국에게 합병된 후 북쪽으로 떠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South African Republic), 혹은 트란스발 공화국 (Transvaal Republic), 그리고 오렌지 자유국 (Orange Free State)을 세우게 된다.
처음에는 영국이 이 두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해주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남아프리카 지역이 여러 식민지, 아프리카 왕국, 및 공화국들로 나눠진 것이 차후 불안의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여겨 북쪽의 두 공화국을 자신들의 케이프와 나탈 식민지와 함께 연방을 만들어 합병을 하려 했다. 이를 더욱 부추긴 것은 북쪽 지역에 다이아몬드 및 금이 발견된 것과 베를린 회담 이후 급속히 진행된 아프리카의 분할이었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흑인이었지만, 이 전쟁은 주로 백인이었던 보어인들과 영국계 백인들의 싸움이었다. 보어인들의 억압에 대응하여 대부분의 흑인들은 영국을 지지했지만 그들은 전쟁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고, 양쪽 다 공식적으로 흑인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군인이나 독자적인 집단으로서는 큰 활약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양쪽 다 대부분의 노동자 및 비전투 요원들은 흑인들이었고, 결국 2차 전쟁 말기에는 영국 측에서 대략 1만 명의 흑인들을 무장한 군인으로서 운용한 것을 인정하게 된다. 다만 이는 영국의 초토화 및 강제수용소 정책으로 인해 먹고 살기 위해 군대에 지원할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었다.
○ 제1차 보어전쟁 (First Boer War)
영국이 합병한 케이프 및 나탈 식민지에서 나온 보어인들은 북쪽으로 나가 1852년에 트란스발 공화국과 1854년에 오렌지 자유국 (Oranje Free State)을 세우게 되었다. 영국은 처음에는 이들의 독립을 인정해주었지만 트란스발 공화국에서는 금, 오렌지 자유국에선 다이아몬드가 나오기 시작하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어서 1867년에 캐나다에서 여러 식민지들이 연합하여 연방을 세우는 것이 성공되자, 이와 똑같이 남아프리카 지방의 모든 식민지 및 국가들을 거대한 연방으로 묶어놓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연방을 세우면 영국의 영토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계속 영국에게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보어인들을 강제로라도 끌어들여서 차후 갈등의 요소를 미리 없애려 했다.
다만 이 계획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으니 강제로 합병당하는 보어인들은 물론, 본국령의 케이프 및 나탈 식민지도 이런 조치를 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연방의 계획된 영토에는 아직 흑인 원주민들, 특히 줄루 왕국이 다스리는 땅도 있었기에 이들과의 마찰도 불가피했다. 이 때문에 런던에 있는 영국 정부는 여러모로 당장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지근하게 행동했지만 현지의 영국 관료들은 무력을 동원해 1877년에 트란스발 공화국을 강제로 병합한다. 보어인들은 이런 조치를 내키지 않았지만 옆의 줄루인들과 계속 마찰을 빚고 있는 마당에 영국군을 상대할 능력이 없었고, 이 참에 영국군을 이용하여 줄루인들을 처리하려는 마음으로 일단 지켜보게 된다.
그 이후 1879년에 영국은 줄루 왕국을 침공하여 합병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독립을 원하는 보어인들과의 마찰은 계속되었고, 결국 1880년에 보어인들은 폴 크뤼거를 사령관으로 하여 전쟁을 선포하여 영국군과 전쟁을 치른다.
그리하여 벌어진 전투가 1881년 2월 27일에 벌어진 마주바 언덕 전투 (Battle of Majuba Hill)였다.
이 전투에서 양 측은 비슷한 400여명끼리 맞붙었는데 결과는 영국군의 참패였다. 영국군은 전사자만 해도 92명, 부상자, 포로까지 전군 절반을 넘었던 반면 트란스발군은 달랑 1명이 전사하고 부상자 5명이었다.
이후 양군은 다시 전투를 벌이는데 트란스발군의 총전력은 3천명 수준이었고 영국군은 1천2백명 수준이었다. 영국군은 400명의 전사자를 내고 대패했다. 반면 트란스발군의 피해는 41명 수준이었다. 트란스발군의 지휘관은 피엣 주버트 (Piet Joubert) 대장이었고 영국군의 지휘관은 조지 콜리 (George Pomeroy Colley) 소장이었는데 콜리 소장은 전사했다. 1881년 3월 23일 프리토리아 협정을 맺어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재인정했다.
당시 영국 육군은 레드 코트라는 별명답게 전투복이 빨간색이었고 탄입대나 방서 헬멧, 각종 장구류도 옛날 그대로 눈부신 하얀 색이라 딱 표적처럼 보여서 저격하기 좋았다고 한다. 다만 모든 부대가 빨간색 복장은 입은건 아니고 카키색 군복을 입은 부대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1차 보어전쟁 당시 빨간색 옷을 입은 부대가 사상자를 많이 내자 군복과 위장의 중요성이 더욱더 부각되었다. 트란스발 측은 언덕에 숨으면 잘 안 보이던 옷차림이 많았다.
때문에 영국군은 현지에서 노획한 커피나 홍차 보급품 등으로 장구류를 갈색으로 물들여야 했다.
○ 제2차 보어전쟁 (Second Boer War)
국가 차원은 아니지만 트란스발 공화국을 지원한 해외 자원참전병들도 있었다. 네덜란드가 2천명, 독일 제국이 550명, 프랑스 제3공화국이 400명, 미국이 300명, 이탈리아 왕국이 250명, 러시아령 폴란드가 225명, 영국령 아일랜드가 200명, 스웨덴-노르웨이에서 150명, 러시아 제국에서 100명 정도가 보어인들을 지원해 참전했다. 일부 호주인들도 보어를 편들어 참전했다.
2차 보어전쟁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발생했다. 20년 전의 전쟁과 달리 금광 등의 이유로 더 많은 영국인들이 남아프리카로 유입되었고 요하네스버그 등에서는 영국인과 영국이 데려온 인도인 등 외국인들이 보어인들보다 더 많아지기도 했다. 이들은 주류세력인 보어인들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았는데 이를 구실로 세실 로즈 등의 제국주의자들은 보어 정부를 뒤엎을 쿠데타 등을 꾸미기도 했다. 1895년에 일어났던 제임슨 습격 사건 (Jameson Raid)이 그 대표적인 예. 하지만 로즈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준비되어 있던 요하네스버그’는 결국 봉기하지 않았고 쿠데타 시도는 무위로 돌아간다. 덕분에 로즈는 케이프 식민지 총독직을 사임하게 되었지만, 남아프리카와 로디지아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독일 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이 쿠데타 시도를 두고 크뤼거 대통령의 성공적인 방어를 치하하는 전보를 보냈는데 이가 바로 크뤼거 전보 (Kruger Telegram) 사건이다. 전보가 더 타임스에 실리자 영국인들은 즉각적으로 반독감정의 물결을 형성했으며 심지어 빌헬름 2세의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마저 이에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1899년 9월에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에게 영국인을 트란스발의 자국민과 평등히 대하라는 내용의 전언을 보내나 트란스발은 케이프 등에 주둔한 영국군에게 48시간 내에 퇴각하라고 답했다.
1899년 10월 12일 보어인들은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 등을 공격했다. 전쟁 초반 영국군은 속수무책이었으며 특히 12월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영국군의 주요 전략은 전열을 갖춘 보병들의 횡대 전략이었는데 보어인들은 민병대 위주의 기병부대여서 진형을 짜지 않고 영국군에게 접근해서 지형을 이용한 기습을 가했다. 12월 10일 슈토름베르크 (Stormberg) 전투에서 영국군은 오렌지 자유국군과 충돌하여 135명이 전사했고 600명이 포로로 잡혔다. 12월 11일엔 1만4천명의 영국군이 킴벌리 공략을 펼쳤으나 참호를 파고 대기하던 보어군에게 당해 120명의 전사자를 냈다. 12월 15일 콜렌조 (Colenso)의 피해는 막대했는데 2만1천명의 영국군이 레이디스미스 (Ladysmith)를 탈환하기 위해 투겔라 (Tugela) 강을 건너던 중에 포격 등에 노출되어 1127명이 전사했다.
이 일로 영국에선 대규모 애국주의 광풍이 불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 후기에 이르러 영국은 미국과 독일 제국의 등장으로 차차 쇠퇴해가던 시절이었는데 그 반작용으로 보어전쟁엔 엄청나게 관심이 집중됐다. 1900년이 되자 영국은 대규모 반격을 펼친다.
하지만 1900년 1월 영국군은 스피온 콥 전투 (Battle of Spion Kop)에서 대패했다. 당시 영국군의 지휘관은 찰스 워렌이었는데,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영국 왕립군사학교 역사상 최악의 인물로 찍히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찰스 워렌은 유명한 잭 더 리퍼 사건 당시 런던 경찰 총책임자였는데 이 때도 엉터리 같은 행동으로 수사에 지대한 어려움을 끼쳤다. 결국 이런 비난 속에 1905년 해임되어 한직이나 돌아다니며 3년 뒤 사임하고 이후 보이스카우트 운동을 벌이고 책 (자서전이라며 지가 벌인 실책을 변명하던)이나 쓰다가 삶을 마감했는데 1927년 86세로 죽을 때까지 장수했다.
찰스 워렌은 위에 언급한 레이디스미스로 가는 길목의 요충지인 스피온 콥을 확보하도록 했다. 병력이 야간에 안개를 틈타서 산을 올라서 진지를 펴고 보니 정작 스피온 콥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고, 그곳은 보어군의 포병 부대가 사전에 조준하고 있던 곳이었다. 독일제 화포로 무장한 보어군 부대는 영국군에게 포격을 가해서 큰 피해를 입혔는데 이 화포는 신형 무연화약을 사용해서 발사시 연기가 나지 않아 영국군은 화약 연기를 이용해서 좌표를 추적할 수 없었고, 결과는 일방적인 포격전으로 흘러갔다.
이 와중에도 워렌은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당시 보어군의 피해는 전사자 68명, 부상자 267명인데 반해 영국군은 전사 243명, 부상자 1,250명으로 영국군의 완패였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잊지 못한 처칠이 신나게 기사를 써 워렌의 무능이라며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도하여 워렌은 군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반격하는 과정에서 영국군들은 보어인 게릴라가 발붙일 곳을 없애기 위해 집결캠프 (강제수용소)를 세워 12만명의 보어인을 강제 수용했다. 보어인들이 살던 집과 농장은 불태웠다. 이 아이디어는 뒷날 나치 독일이 아우슈비츠에서 활용하게 된다. 강제수용소에서 27,927명의 보어인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이 중 22,074명은 16세 이하였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흑인들도 14,154명이 기아로 사망했는데 보어인들에게는 영국을 편든다는 이유로, 영국군에게는 보어인들을 편든다는 이유로 다수가 죽어나갔다.
1900년 9월에 이르러 영국은 트란스발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보어인들은 게릴라전으로 맞서게 된다. 영국군은 이에 맞서 초토화 작전으로 나간다.
1902년 5월에 보어는 항복하고 두 공화국은 소멸하여 남아프리카의 영국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영국은 승리하긴 하였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강제수용소와 초토화 작전으로 국제적으로도 비난을 당했다. 영국은 이 전쟁으로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많이 상실했고 아시아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동맹국으로 삼아 영일동맹을 맺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쟁이 당시 한반도의 정세에도 영향을 미친 셈이었다.
트란스발 공화국의 폴 크뤼거 대통령은 1900년 유럽으로 떠나 보어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자 트란스발로 돌아오지 않고 망명했다. 1904년 78세의 나이로 스위스에서 사망한 후 그의 시체는 남아프리카로 돌아와 프라토리아에 묻혔다.
영국은 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땅 전체를 영유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 때 보어인들의 저항에 질려 1910년에 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땅을 자치령으로 지정하고 남아프리카 연방을 출범시켜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내정을 완전히 위임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