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519년 11월 8일,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입성
12세기 중반 아스텍 민족이 멕시코 고원 중부로 진출해서 14세기 무렵 아마카피츄틀 왕의 주도로 현 멕시코시티에 테노치티틀란 (Tenochtitlan)을 건설했다.
테노치티틀란은 15~30만 정도의 주민이 살던 멕시코 고원 최대 도시로 한껏 번영을 누렸다.
도시 이름의 뜻은 “선인장의 땅”으로, 독수리가 선인장 위에 앉아있는 땅에서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부족의 전설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1519년 11월 8일 에르난 코르테스와 그의 부하들이 마야를 정복하고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격했다.
코르테스는 아스텍의 군사 정치에 신물이 나 있던 다른 원주민 부족들과 함께 쳐들어갔다.
황제 몬테수마 2세는 코르테스에게 포로로 잡혀 가, 스페인 왕의 신하가 될 것을 요구받았다.
코르테스가 몬테수마에게 스페인에 왕국을 넘기라고 요구했고, 주민들은 그에 반발해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의 와중에 코르테스의 부하 4명이 사망하고 아스텍과 스페인을 화해시키려던 몬테수마는 돌에 맞아 죽었다.
결국 아스텍 제국은 스페인 정복자들의 공격으로 무너지게 되었다.
에르난 코르테스 (Don Hernándo “Hernán” Cortés de Monroy y Pizarro Altamirano, 1485년 ~ 1547년 12월 2일)은 카스티야의 정복자이다.
16세기 초 오늘날의 멕시코 본토 지역의 아스텍 제국을 정복하여 그 영토를 카스티야 국왕의 식민지로 삼은 것으로 유명하다. 코르테스는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식민화의 첫 단계를 끊은 식민지 개척자 첫 세대에 속한다.
– 코르테스의 테노치티틀란으로 행군
베라크루스에서 코르테스는 아스텍에 공물을 바치러 가는 원주민들을 만나 모테크소마 2세와의 회담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모테크소마 2세는 코르테스의 면담 요청을 여러 차례 퇴짜 놓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코르테스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1519년 8월 중순, 베라크루스에 병력 100명만 남겨둔 채 코르테스는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향한 행군을 시작했다.
동원 병력은 보병 600명, 기병 15기, 캐넌포 15문, 포섭된 원주민 전사 및 일꾼 수백 명이었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원주민들과 꾸준히 동맹을 맺었다. 켐포알라틀의 토토낙, 틀락스칼란의 틀락스칼텍 등이 이렇게 코르테스와 동맹을 맺은 원주민들이었다.
1519년 9월 2일에서 5일 사이에 오토미와 틀락스칼란이 세 차례 에스파냐인들과 충돌했다.
이들은 코르테스군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압도했지만, 코르테스는 계속 포로들을 풀어주면서 평화의 뜻을 전달했다.
코르테스 및 에스파냐인들이 아스텍의 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티차틀란 틀라토아니 우에우에 시코텐카틀과 오코텔롤코 틀라토아니 마시스카틀은 이 이방인들과 싸워 죽이기보다 그들과 편을 먹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했고, 틀라코치칼카틀 시코텐카틀 아사야카틀을 설득해 전투를 중단했다.
1519년 10월, 코르테스와 에스파냐인들은 1,000 여명의 틀락스칼란인들을 동맹으로 거느리고 중앙멕시코 제2의 도시 촐롤란으로 행진했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모테크소마 등에게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또는 동맹한 원주민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어 배신을 막기 위해 비무장 상태의 촐롤란 귀족 수천 명을 도시 중앙광장에 몰아넣고 학살한 뒤 도시 일부를 불태웠다.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할 무렵 코르테스의 에스파냐인+원주민 혼성군세는 매우 커졌다.
1519년 11월 8일, 모테크소마 2세는 코르테스 일행을 평화롭게 맞이했다. 모테크소마는 코르테스를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순순히 들여보냈다. 에스파냐인들의 약점을 파악해 추후에 짓밟으려는 심산이었다.
모테크소마는 에스파냐인들에게 후하게 황금을 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에스파냐인들을 달래기는커녕 역으로 그들의 탐욕과 야망에 불을 붙였다.
카롤루스 1세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코르테스는 이 시점에서 아스텍인들이 자기 일행을 깃털뱀신 케찰코와틀의 사자 또는 케찰코와틀 본인으로 여겼다고 썼다.
하지만 현대의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 주장을 의심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그 직후 해안가에 남겨두고 온 에스파냐인이 토토낙인의 편을 들어 싸우다 아스텍인에게 살상되는 일이 벌어졌고 그 소식이 코르테스에게 도달했다. 코르테스는 모테크소마를 인질로 궁전에 잡아 가두고 그를 통해 테노치티틀란을 간접 통제할 계획을 세웠다.
– 테노치티틀란의 몰락
한편 쿠바 도독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 토벌을 위해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를 대장으로 하는 제4차 본토원정대를 파견했다.
나르바에스는 1520년 4월 멕시코에 상륙했으며 병력은 1,100명이었다. 코르테스는 나르바에스군을 영격하기 위해 테노치티틀란에 부하 200명만 남겨두고 해안으로 떠났다. 코르테스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나르바에스를 무찔러 포로로 잡고 그 병력을 자기 군세로 흡수시켰다. 한편 테노치티틀란에서는 코르테스의 부관 중 하나인 페드로 데 알바라도가 톡스카틀의 학살을 저지르고, 아스텍인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으로 서둘러 귀환했다.
1520년 7월 1일, 코르테스의 괴뢰가 된 모테크소마가 난민을 진정시키려다 자기 백성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에스파냐인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수설도 있다).
엄청난 수의 적에 압도된 코르테스는 일단 테노치티틀란을 버리고 동맹 원주민인 틀락스칼란으로 도망가기로 한다. 이 “비통한 밤” 때 에스파냐인은 소수만이 틀라코판 방죽길을 따라 테노치티틀란을 빠져나갔고, 후위를 지키던 이들은 아스텍인에게 살해되었다. 코르테스는 허둥지둥 도망치는 와중 앞서 노략질한 보물은 물론 대포도 잃어버렸다.
오툼바 전투에서 1대 30의 전력차를 극복하고 아스텍 추격군을 패퇴시킨 코르테스군은 겨우겨우 틀락스칼란에 도착하기까지 병사 870명을 잃었다. 동맹 원주민의 도움과 쿠바의 증원군으로 군세를 회복한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에 대한 소모전을 개시했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하는 보급선들을 끊고 아스텍의 동맹시를 하나씩 제압해나가며 테노치티틀란을 말려 죽이기 시작했다. 테노치티틀란 공성전은 에스파냐인의 승리로 끝났고, 테노치티틀란시는 파괴되었다.
1521년 1월, 안토니오 데 비야파나 (Antonio de Villafana)가 코르테스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목이 매달렸다. 새 테노치카 틀라토아니 쿠아우테목이 1521년 8월 13일 사로잡히면서 아스텍 제국은 멸망했다. 코르테스는 아스텍의 영토를 에스파냐 왕령으로 선포하면서 테노치티틀란을 멕시코시로 개칭했다.
이후 1521년에서 1524년까지 코르테스는 자칭 도독으로서 멕시코를 다스렸다.
– 테노치티틀란 유적 발굴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유적 발굴은 1978년 공사 도중 몇몇 유물이 발굴되며 세상에 드러났다.
그 뒤 멕시코 고고학 연구소 주도로 대규모 발굴 조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며 어느 정도 윤곽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발굴로 드러난 테노치티틀란은 호수 위에 떠 있는 둘레 10여km의 장방형 섬으로 건설되었으며 동쪽으로 티오판, 서쪽의 아차코알코, 남쪽의 묘트란, 북쪽의 쿠에포판 등 방위에 따라 네 구역으로 나뉘었다.
식량 해결을 위해 서쪽의 담수지를 막아 농지를 조성했다. 또한 수로를 두개 만들어 어느 한쪽이 청소중이거나 못쓰게 되었을 경우에도 식수를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도로는 정기적으로 청소를 했으며 쓰레기는 배에 실어 바다에 버렸다고 전해진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