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27년 11월 12일, 레프 트로츠키가 공산당에서 축출되고 이오시프 스탈린 (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8 ~ 1953)이 소련의 전권 장악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8년 12월 18일 ~ 1953년 3월 5일)은 러시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정치인·작가·시인, 언론인이다.
–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Joseph Vissarionovich Stalin)
.본명: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
.출생: 1878년 12월 18일, 러시아 제국 티플리스 현 고리
.사망: 1953년 3월 5일 (향년 74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주 쿤체보
.국적: 러시아 제국 → 러시아 공화국 → 소련
.학력: 트빌리시 신학교 중퇴
.직업: 정치인, 작가, 군인, 시인
.정당: 소련 공산당
.종교: 조지아 정교회 → 무종교 (무신론)
.배우자: 에카테리나 스바니제 (1906–07),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1919–32)
.자녀: 야코프 주가시빌리, 바실리 스탈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그는 1923년 4월 30일부터 1924년 1월 21일까지 소비에트 연방 레닌 시대의 제2인자 겸 실권자였으며 1924년 1월 21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였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지아 출신으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를 꿈꿨으나, 공산주의 혁명 사상에 감화되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공산주의 운동가·노동운동가가 되었다.
1924년 4월 3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을 지냈다.
스탈린의 폭력적 정치수단, 지나친 러시아주의 그리고 관료주의적 성향은 스승인 레닌에 의해 비판받기도 하였다. 레닌은 특히 그의 유명한 유언장에서 “스탈린에 최고 지도자 자리를 주지 말라.”고 할 정도로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으나, 1924년에 이르러 이미 거의 모든 내부 정치 조직체는 스탈린의 지배권하에 들어갔다. ‘레닌의 유언’문서는 레닌이 친필로 직접 작성한 것이라 스탈린의 당내 지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스탈린은 용의주도함 때문에 레닌의 유언을 은폐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평가절하시킬 수 있었다. 1920년대 말에 스탈린은 레닌 이후 소련 공산당의 두뇌로써, 국제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하던 레온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 레닌 사후 경쟁자들 축출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은 그를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뒤 준(準)비잔틴식으로 우상화했다. 레닌주의의 대제사장이 된 스탈린은 경쟁자들을 축출한 후 최고권력자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자신의 우상화도 함께 추진했다. 1925년 차리친 시를 스탈린그라드 (지금의 볼고그라드)로 개명하였다.
경쟁자 이전에 견해가 달랐던 트로츠키와는 수시로 충돌했는데, 국적과 국경을 초월한 국제 노동자, 무산자 연대를 통해 전 세계의 공산주의화를 이룩해야 공산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맞서 그는 소련 단독으로도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고, 한 국가를 공산주의화 시킨다는 일국공산주의론을 확립했다. 권력투쟁 과정에서 스탈린의 용의주도함과 치밀함을 간파하지 못한 트로츠키는 망명하였다.
한편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는 강화되어 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난했다. 빅토르 세르주는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트로츠키파로 분류되기도 했다. 1928년 강화돼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한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를 공산당에서 출당하고 5년 뒤에는 투옥시켰다.
– 집권하며 산업화 추진
집권 직후 스탈린이 집단화와 산업화, 중공업을 통한 경제발전을 선언하자 소비에트 연방 사회 일각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우파 자본주의 세력은 레닌의 죽음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공산주의 정권을 타도할 계획을 세운다. 정보원들을 통해 자본주의 세력의 움직임을 간파한 그는 우파 인사들의 집회장소를 급습하여 체포, 숙청한다. 또한 1924년부터 레닌의 유지 계승, 트로츠키파 지지자에 의한 스탈린 암살 비밀조직들이 비밀리에 조직됐다가 적발되면서 스탈린의 의심과 분노는 한층 극에 달하게 된다.
1925년 이후부터 반대파 인사에 대한 가혹한 숙청이 계속되었고, 1927년 레프 트로츠키가 공산당에서 축출되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소련의 전권을 장악한다.
– 스탈린과 트로츠키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1879년 11월 7일 ~ 1940년 8월 21일)은 소비에트 연방의 전 해군 군사인민위원 (1918 ~ 1925), 외교관, 정치가, 사상가이자 노동운동가이다.
볼셰비키 혁명가이며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그의 사상을 따로 일러 트로츠키주의라고 한다. 보통 레프의 영어식 이름을 따서 레온 트로츠키 (Leon Trotsky), 뜨로쯔끼라고도 부른다. 트로츠키는 필명이며, 본명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이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 대회에서 멘셰비키에 가담했으나 1904년 결별하고 1917년 7월 볼셰비키에 가입하기 전까지 양 분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10월혁명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당의 지도자 중 하나로 소비에트 연방을 건설했다. 초대 소비에트 연방의 외무부 장관을 맡았으며 붉은 군대의 창립자이다.
레닌의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과 이론적인 차이가 생겨 권력투쟁을 하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연속혁명론’으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계속 진전시킬 것을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을 튼튼한 공산주의 국가로 만든 후, 공산혁명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트로츠키의 세계혁명이론은 서유럽의 공산주의 지식인들과 혁명가들에게 혁명이론으로 지지를 받았으나, 결국 그는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인민의 적’으로 몰려 소비에트 연방에서 쫓겨나게 되어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말년에 멕시코에서 거주했으나, 스탈린이 사주한 암살자에 의해 등산용 피켈로 살해당했다.
– 1930년대 이후 반대파 없이 통치
1930년 이후에는 스탈린의 반대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또한 그는 소련군 내부의 장군급 인사를 단행한 뒤, 군 장군을 숙청한다.
1941년 5월 6일부터 1945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를 지내고 1945년 다시 총리에 재선되었으며 1941년 7월 1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방상을 겸하였다. 1945년 6월 27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련군 대원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39년에는 나치 독일과의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독일이 1941년 침공하여 발발한 독소전쟁 초기에는 제대로 된 군사정책을 발휘하지 못하여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위협받았으나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를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독일군의 항복과 함께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 사후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정적 숙청과 동지들마저 반혁명 혐의로 숙청하여 그의 자위를 확고히 했다. 경제발전과 계속된 승전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철저히 우상화되었으나 죽음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강력한 비판을 받고 격하당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산주의 변질과 정적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로 평가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사람들이 삶이 어려워지고 국가 위상이 곤두박침에 따라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집권 이전에는 ‘선생님’이라는 애칭이 있었으나,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조직자’,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로도 불렸다.
사후에는 공산주의를 변질시킨 독재자로 재평가받고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의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인 ‘스탈린’이라는 가명은 ‘강철’을 뜻하며, 트빌리시 신학교 시절의 필명으로 쓰던 것이 굳어져서 본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본래 이름은 조지아어로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이며, ‘소소’는 그의 초명인 동시에 애칭이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