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알베르트 슈바이처 / 한불학예사 / 2013.9.5
본서는 알버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 의 명서 “Von Reimarus zu Wrede” (1906 )의 영어 번역판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1910)를 eBook으로 다시 출간한 것이다. 예수 연구사에 기념비적인 업적이지만 한국의 서점가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상태다. 과거 “예수의 생애 연구사”(허혁 역, 기독교서회, 1986)란 책명으로 번역 출간된 바 있으나 절판된지 오래된 듯하다. 애써 보고자 해도 왠만한 도서관에서도 찾기 어려운 희귀도서가 된 듯 싶다. 원서로 읽기를 원하는 독자층의 수요에 부응코저 영어본 그대로 재출판하였다.
○ 목차
Chapter 01
속표지
원서 간기
간기와 판권
글머리
슈바이처의 삶과 사상
CONTENTS
PREFACE
I. THE PROBLEM
II. HERMANN SAMUEL REIMARUS
III. THE LIVES OF JESUS OF THE EARLIER
IV. THE EARLIEST FICTITIOUS LIVES OF JESUS
V. FULLY DEVELOPED RATIONALISM . PAULUS
VI. THE LAST PHASE OF RATIONALISM – HASE AND
VII. DAVID FRIEDRICH STRAUSS – THE MAN AND HIS
VIII. STRAUSS’S FIRST “LIFE OF JESUS”
IX. STRAUSS’S OPPONENTS AND SUPPORTERS
X. THE MARCAN HYPOTHESIS
XI. THE FIRST SCEPTICAL LIFE OF JESUS
XII. FURTHER IMAGINATIVE LIVES OF JESUS
XIII. RENAN
XIV. THE “LIBERAL” LIVES OF JESUS
XV. THE ESCHATOLOGICAL QUESTION
XVI. THE STRUGGLE AGAINST ESCHATOLOGY
XVII. QUESTIONS REGARDING THE ARAMAIC
XVIII. THE POSITION OF THE SUBJECT AT THE CLOSE
XIX. THOROUGHGOING SCEPTICISM AND
XX. RESULTS
○ 저자소개 : 알베르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 1875-1965)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는 교회 오르가니스트인 할아버지와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음악과 신앙의 영향 속에서 자랐다.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1899년 칸트의 종교철학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 1900년 성만찬 연구로 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신학부 강사로 활동하다 1904년 의료 선교에 대한 뜻을 정하고 1905년부터 의박 공부를 시작, 1913년 예수의 정신질환 이론에 대한 비판 논문으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곧바로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로 떠나 의료 선교를 시작했다. 의학 공부 증 1906년에는 『예수 생애 연구사』를 출판하여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학 연구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인이었던 슈바이처는 1917년 프랑스령이었던 랑바레네에서 포로로 잡혀 프랑스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의사로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18년에 석방되어 연주, 강연 등으로 모금활동을 하고 1924년 아프리카로 돌아가 생을 다할 때까지 의료 선교에 힘썼다. 1952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그는 1965년 91세에 랑바레네에서 딸의 바흐 연주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 독자의 평
슈바이처 박사 (1875-1965)는 독일의 의사이며 자선가로서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철학으로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하여 노벨 평화상 (1952년)을 받은 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신학자로서의 슈바이처 박사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슈바이처가 신학자로서 쓴 책으로, 약 백년 전에 출판된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영문 번역판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를 소개하려고 한다.
중학교 시절에 나 자신이 독실한 크리스찬이라고 생각하다가 기독교에 대한 회의에 빠져 방황하면서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를 보낸 후에 나는 이 책을 읽고 비로소 기독교에 대한 (나름대로) 올바른 관점을 정립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슈바이처 박사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독일 신학계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또 비평한 책이다.
이 책을 소개하려는 이유는 기독교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의 삶과 사상에 대해 역사적 관점에서 봄으로써 기독교에 대해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해서, 누구든지 평생 살면서 한 때 본인이 기독교인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독실한 기독교인인 친구, 직장 동료, 가족, 이웃을 갖게 되기도 한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받기 위해 동네 교회에 갔던 때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1학년 부터 초등학교 절친을 따라 서울 을지로에 있는 영락교회에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했고, 그후 한때 기독교에 상당히 심취하여 성경을 열심히 탐독하며 지냈다.
일요일 예배 후에는 원어민이 진행하는 영어 성경을 읽는 모임에도 빠짐없이 참석했었다.
식사할 때는 꼬박꼬박 기도를 했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목박혀 돌아가셨고, 예수님은 부활 했으며 언젠가 재림할 것이라는 정통 기독교의 교리들을 곧이곧대로 믿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부터 기독교의 교리에 조금씩 회의가 생기면서 점점 교회와 멀어지더니. 대학교 때부터는 아예 등을 돌리고 교회도 다니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누가 내 종교를 물어보면 무교라고 대답하고 있으며, 자신을 크리스찬이라고 생각하고 일요일에는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고 있는 부인과 살고 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으며, 명동에 나가보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푯말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어느 도시에서나 동네 빵집이나 수퍼 처럼 흔하게 교회와 십자가를 볼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가족. 지인 또는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든가 “저희 교회에 나오세요”라는 종용이나 압박을 수시로 받으면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반면에 다른 종교,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저희 절에 나오셔서 구원받으세요”라는 식의 포교는 하지 않는다.
왜 기독교는 이렇게 우리에게 압박감을 주는가?
기독교는 어떤 종교이며 그 핵심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은 한국인은 드물 것이다.
이런 고민에 대한 답을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라는 책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나같은 경우에는 기독교에 대해 가장 고민하던 시기에 이 책을 읽었고 기독교에 대한 나의 관점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은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으며 독일어로 되어 있는 원서와 영어로 번역된 책이 있을 뿐이다.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이유는 이 책이 상당히 전문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잠재적 독자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어 섣불리 출판에 나설 출판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고 상당한 도움을 받은 한 사람으로써 이 책을 기독교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많은 한국인들에게 소개해 줌으로써 내가 슈바이처 박사에게 받은 빚을 갚고,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에 대해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책은 400페이지가 넘는 상당히 방대한 책이기 때문에 전체를 간단히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일단 주요 챕터별로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제1장: 연구 문제(The Problem)
독일 신학의 위대한 업적
슈바이처는 독일 신학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비판적 연구라고 단언한다.
“The greatest achievement of German Theology is the critical investigation of the life of Jesus.”
그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통해 독일 신학이 이룬 업적은 미래의 종교적 사상의 방향을 결정했다고 극찬한다. 또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연구의 역사는 교리(도그마)에 대한 연구의 역사보다 더 가치 있다.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연구한 독일 신학자들
역사적 예수의 생애에 대한 책을 쓴 초기의 주요 독일 신학자는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와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였다. 이 두 사람은 그 전까지 이 주제에 대해 연구한 모든 사람들이 이룬 업적을 능가했다.
라이마루스는 생전에 자신이 받을지도 모를 박해를 두려워하여 이 주제에 대해 침묵하였고 그가 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목적(The Aims of Jesus and His Disciples)”이라는 책은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는 자신의 책 “예수의 생애(Life of Jesus)”를 27살의 젊은 나이에 출판하였고 그로 인해 학교에서 쫓겨나고 인간관계가 멀어져서 평생 외롭게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에 자부심을 가졌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역사적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연구의 역사는 슈트라우스 이전과 이후의 2기로 나눌 수 있다.
1기의 주요 관심사는 기적의 문제였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슈트라우스는 이러한 초자연적 사건들은 그저 사료에 포함된 신화적 요소들로 다루어야 한다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한편, 라이마루스는 예수가 살던 시대의 종말론적 사상에 주목했다.
핵심 연구문제
이 무렵(19세기 말) 예수의 생애에서 주된 역사적 문제가 서서히 의제로 제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예수의 마음 속에서 종말론은 어떤 중요성을 가졌는가?”라는 질문이었다.
“What was the significance of eschatology for the mind of Jesus?”
(eschatology 에스커탈러지: 종말론)
이 문제와 연결된 또 다른 문제는 “예수의 자의식(the self-consciousness of Jesus)”에 대한 문제였다.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했는가 아니면 단지 예언자라고 생각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이런 연구 문제에 대해 19세기 말의 주요 독일 신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 구성되어 있다.
제2장: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 (Hermann Samuel Reimarus)
라이마루스 이전에는 예수의 생애에 대해 역사적인 개념을 정립하려고 시도한 사람이 없었다.
라이마루스는 1694년 12월 22일에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그곳에서 동양 언어 교수로 살다가 1768년에 사망했다. 그가 생전에 썼던 책들은 그가 사망한 후에 레싱(Lessing)에 의해 1774년부터 1778년 사이에 7번에 나누어 출판되었고 전체 4000 페이지에 달하는 원고는 함부르크 시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의 사후에 출판된 책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자연신교의 용인
.이성을 비난하는 성직자들
.모든 사람이 믿을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계시의 불가능성
.홍해를 건넌 유대인들
.구약 성서는 종교를 드러내기 위해 쓰여지지 않았음을 입증함
.부활 이야기에 대하여
.예수와 그 제자들의 목적
이 중에서 “예수와 그 제자들의 목적(The Aims of Jesus and His Disciples)”은 걸작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이 책은 비평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걸작이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천국과 복음의 의미
라이마루스는 예수의 가르침의 내용에 대한 질문을 시작 지점으로 삼았다. 그는 “사도들이 쓴 글에 담긴 그들의 가르침과 예수 자신이 생전에 선포하고 설교한 내용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예수의 설교의 내용은 똑 같은 의미를 가진 두 어구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가복음 1장 15절)라는 말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4장 7절)라는 말이다.
천국(Kingdom of Heaven)은 유대인의 사고 방식에 따라 이해해야만 한다. 예수나 세례요한은 이 단어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은 그 단어가 알려진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예수는 유대교 안에서 자신의 입장을 취했고 유대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열망을 전혀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천국의 본질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믿음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복음, 즉 예수가 하느님의 왕국(Kingdom of God)을 가져오려고 한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인용 부호는 라이마루스의 책에서 인용했음을 의미함. 이하 같음)
이미 하느님의 왕국을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며칠 만에, 아니 불과 몇 시간 만에 수천 명이 그를 믿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예수가 약속된 예언자라는 말만 들었다.
예수가 하느님의 왕국이 오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라고 제자들을 내보냈을 때 그들이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알고 있었던 사실은 그것 뿐이었다.
복음(Gospel)의 의미는 예수의 선도 하에 메시아의 왕국(Kingdom of Messiah)이 곧 온다는 것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복음을 듣는 유대인들에게 그가 메시아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 개념 속에는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없었다.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하느님의 아들이었고, 유대인들의 왕들도 하느님의 아들들이었다. 또한 메시아는 가장 높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 속에서도 예수는 여전히 “인간의 한계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적인 하느님의 아들, 삼위일체, 그리고 그와 유사한 교리적 개념들에 대해 우리가 배운 모든 것을 버리고 온전히 유대인의 사상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편견 없이 본다면 누구든 “예수는 유대교를 없애고 그 자리에 다른 종교를 세우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마태복음 5장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를 보면 예수는 율법을 폐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적으로 율법을 바탕으로 하는 입장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설교에서 새로운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왕국을 위해 필요한 의로움이었다. 다가올 왕국의 시대에는 율법의 의로움만으로는 부족하며, 새롭고 더 엄격한 도덕성이 필요하다. 이 부분이 유일하게 예수의 설교가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보다 더 앞으로 나아간 점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도덕성은 율법을 폐기하지 않는다. 물론 나중에 예수의 신도들은 율법과 결별했지만, 그것은 예수의 명령을 따른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대교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세운 것이었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종족적 배타주의를 무조건적으로 공유했다. 마태복음 10장 5절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를 보면 그는 제자들이 이방인에게 하느님의 왕국이 오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명백히 그의 목적에는 이방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도행전 10장과 11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개종을 정당화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세례식과 성찬식은 예수가 새로운 종교를 세우려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길기 때문에 생략함)
기적과 관련해서는, 예수가 정말로 기적적인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정말로 기적적인 일을 했다면 사람들이 표적(sign =징후)을 요구했다는 성서의 기록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예수의 메시아 자격에 대한 표적을 보여주기를 열렬히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가 단 하나만이라도 압도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기적을 행했다면 얼마나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을까! 아마 모든 사람들이 즉시 예수 앞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의 봉기를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두 번이나 그는 그 날이 가까이 왔다고 믿었었다. 첫 번째는 그가 제자들을 내보내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23)라고 말했을 때였다. 그는 제자들이 설교를 시작하면 사방에서 그에게 모여들어서 자신을 메시아로 떠받들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의 기대는 실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였다. 그는 스가랴서의 메시아 예언을 이루기 위해 당나귀 새끼 위에 타고 입성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다윗의 아들에게 호산나”라고 외쳤다. 이제 자신의 추종자들의 지지에 의존하여 권력자들에게 도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신전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항거할 것을 명령했다. 그들이 천국의 문을 닫고 다른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예수는 마태복음 23장에 기록된 선동적인 설교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9) 이는 다시 말해서 그들이 곧 자신을 메시아로 부르며 맞이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을 갈릴리 사람들에게 보내서 봉기하도록 촉구했을 때 갈릴리 사람들이 거절했던 것처럼 예루살렘 사람들도 봉기할 것을 거부했다. 예수는 체포되기 전에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고,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며 생을 마감했다.
예수의 이 마지막 외침은 하느님이 그가 희망했던 목적을 돕지 않았다는 의미로 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고통을 받으면서 죽는 것은 그가 목적했던 바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지상의 왕국을 세우고 유대인들을 정치적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목적을 하느님은 돕지 않았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그들이 예수를 따르며 꿈꾸어 왔던 모든 꿈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것은 오로지 메시아의 친구이자 대리인, 그리고 이스라엘의 12 부족의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였으며, 그들이 버린 것보다 백배 이상을 돌려받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러한 그들의 세속적 희망을 책망하지 않고 반대로 그들의 그러한 믿음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이 모든 사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꿈이 실현되는 시간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6장 28절을 보면 예수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예수가 모든 메시아적 희망이 현 세대가 끝나기 전에 실현될 것이라고 약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자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미리 얘기했다면 그들은 예수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 겁장이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의 ‘부활’에 대해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에 예수의 제자들은 어떻게 충격을 극복했는가? 그들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희망의 두 번째 형태에 의존하였다. 지금까지 그들의 지배적인 사상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다윗의 후손으로서 나라를 정치적으로 구원하는 예언자의 정치적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을 초자연적 세계로 옮긴 또 하나의 메시아적 기대가 존재했다.
이에 따르면 메시아는 두 번 나타난다. 한 번은 인간의 형태로, 두 번째는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의 사망으로 첫 번째 희망이 무너지자 제자들은 두 번째 희망을 제시했고 메시아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공유하는 추종자들을 규합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 그 전까지 그들이나 예수 자신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던 영적인 구원의 의미를 부여했다.
제자들은 메시아의 재림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는 충실한 신자들을 모았고, 예수의 육체를 훔쳐서 숨기고 나서 예수의 육체를 찾더라도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50일을 기다린 후에 그가 곧 다시 돌아 올것이라고 온 세상에 선포했다.
따라서 원시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 보다는 예수의 재림에 대한 희망을 바탕으로 해서 탄생했던 것이다. 초기 교리의 주된 문제는 예수의 재림의 지연이었다. 이미 사도 바울의 시대에 예수 재림의 지연은 상당히 절박한 문제였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후서에서는 예수의 재림이 왜 늦어지는지에 대한 온갖 이유들을 늘어놓고 있다.
라이마루스의 업적
라이마루스의 연구 결과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서 가장 탁월한 성과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의 사상이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이해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종말론에 대해 잘못된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예수의 설교를 지배한 메시아적 이상이 주로 정치적 통치자, 즉 다윗의 아들의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그 다른 모든 실수들은 이 기본적인 오류의 결과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시초가 기만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유추하기 위한 가설이었다.
라이마루스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그는 유대교에서 메시아적 희망에 두 가지 체계(인간으로서의 메시아와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메시아)가 나란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 둘을 실제 역사 속에서 서로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는 와중에 그 둘을 동시적 관계가 아니라 순차적 관계에 놓는 실수를 했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로 인식했다는 사실에 비하면 이것은 사소한 과오이다.
그는 예수의 설교에서 핵심적인 부분인 하느님의 왕국에 대한 정의가 없다는 사실과 그가 빠르게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연구 문제라고 인식했으며, 예수가 종교적 창시자나 스승이 아니라 순수한 전도자(preacher)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예수의 태도와 그의 제자들이 좀더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게 된 과정을 너무나 정확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현재의 역사학이 추가로 언급할 부분이 없을 정도이다.
또한 그는 초기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성장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과 상황의 결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원래 예수의 설교에 포함되지 않았던 내용이 추가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가 세례식과 성찬식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초기 교회가 역사적 추측을 근거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예수가 치료의 기적을 행한 후에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지시한 사실과 제자들에게 전한 예수의 어떤 말들이 해결이 필요한 연구문제라고 생각했다.
라이마루스 이후 요하네스 바이스 (Johannes Weiss)까지 120년 동안 신학은 퇴보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역사적 인물로서 예수가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후대 유대교의 종말론적이고 계시적인 사상의 마지막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모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