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808년 12월 22일,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 빈에서 초연
‘교향곡 5번 다 단조’ (Op. 67)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1804년에 착상하여 1808년에 완성한 교향곡이다. 1808년 12월 22일 빈에서 초연되었다. 동양에서는 보통 ‘운명 교향곡’으로 알려져 쓰이고 있다. 단 서양에서는 ‘다단조 교향곡’으로만 통하고 있으나 ‘운명’ 부제가 자주 쓰이기 시작하는 추세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 (Wien) 시내의 빈 강 곁에 있는 테아터 안 데어 빈 (Theater an der Wien) 극장에서의 1808년 12월 22일 저녁 ‘아카데미’ (Akademie. 당시에는 연주회를 Akademie라 했음)에서 베토벤이 자신의 세계 음악사상 불후의 작곡인 몇 가지 새 작품들을 모두 자신의 지휘로 선 보일 때에 이 작품도 함께 초연됐다.
음악 연주회 역사상으로도 손꼽을 유명한 이 ‘아카데미’는, 현대에는 상상할 수 없을 긴 연주시간 (4시간 이상)을 기록한다.
.교향곡 6번 바 장조 “전원” Op. 68
.콘서트 아리아: 아, 페르피도(Ah, perfido), Op. 65
.미사곡 다장조, Op. 86 중 Gloria 악장 Sanctus 악장과 Benedictus 악장
.피아노 협주곡 4번 사장조 Op. 58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 겸 지휘)
.휴식 (Intermission)
.교향곡 5번 다단조 Op 67
.독주 피아노 즉흥곡 (베토벤이 직접 연주한다.)
.합창환상곡 다단조 Op. 80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 겸 지휘)
– 구성
악장구성은 다음과 같다.
.알레그로 콘 브리오
.안단테 콘 모토
.알레그로
.알레그로-프레스토
독일 음악사학자 Paul Bekker는 각 악장마다 ‘몸부림(Struggle)’, ‘희망(Hope)’, ‘의심(Doubt)’, ‘승리(Victory)’라는 별칭을 달았다.
– ‘운명’이라는 별칭
‘운명 교향곡’이라는 별칭은 일본에서 붙여진 것으로, 동양에서도 널리 쓰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곡 자체가 ‘운명 교향곡’으로 불리는 일은 적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 다음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베토벤이 죽고 나서 몇 년 뒤 그의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가 다음과 같이 쓴 것이다.
Den Schlüssel zu diesen Tiefen gab dessen Schöpfer selber, als er eines Tages mit dem Verfasser über die demselben zu Grunde liegende Idee sprach, mit den Worten: So pocht das Schicksal an die Pforte, indem er auf den Anfang des ersten Satzes hinwies. / 그는 [작품의] 깊이에 다가갈 수 있는 실마리를 주었는데, 하루는 그가 필자가 바라보는 가운데 1악장의 첫머리를 가리키며 그의 작품의 악상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운명은 이처럼 문을 두드린다!’
쉰들러가 쓴 베토벤의 삶에 대한 모든 기록은 전문가들에게는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대부분 쉰들러가 낭만적으로 비화시킨 관점으로 작곡가를 바라보았다는 의견이 많다 (예를 들면 그가 쓴 베토벤의 대화록은 전부 날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위 기록이 쉰들러가 꾸며낸 얘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가능성은 크다.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 작은 음형은 [베토벤이] 빈의 프라터 공원을 지날 때 들은 노랑촉새의 노랫소리에서 나왔다. — 베토벤의 제자인 카를 체르니
대중은 노랑촉새와 문을 두드리는 운명 가운데 좀 더 극적인 이야기를 선택했지만, 체르니의 주장은 꾸며냈을 가능성이 너무 적다. — 홉킨스 Hopkins)
엘리자베스 슈웜 글레스너(Elizabeth Schwarm Glesner[2])는 베토벤이 “성가시게 묻는 사람들에게 별 도움이 될 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는 점으로 위 이야기에 대해 논박했다.
– Ludwig van Beethoven 교향곡 5번 ‘운명‘ 전악장
음악의 성인 ‘악성’(樂聖)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 ~ 1827)에 대하여
루트비히 판 베토벤(독: 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 등이 있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출생: 1770년 12월 17일, 신성 로마 제국의 기 신성 로마 제국 본
.사망: 1827년 3월 26일 (56세), 오스트리아 제국의 기 오스트리아 제국 빈
.직업: 피아노 연주자, 오르간 연주자, 작곡가
.장르: 서양 고전 음악
.악기: 피아노, 오르간
.활동 시기: 1778년 ~ 1827년
○ 생애
– 유년 시절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12년~1773년)이었다. 할아버지 베토벤은 17살에 독일로 이주하여 쾰른 선제후 궁정의 베이스 가수로 취직해서 악장 (Kapellmeister)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외아들 요한 판 베토벤 (Johann van Beethoven, 1740년~1792년)도 같은 곳에서 테너 가수로 일하였으며 피아노와 바이올린 교습으로 부수입을 벌었다. 요한은 1767년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 (Maria Magdalena Keverich)와 결혼하였는데, 마리아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요한 하인리히 케베리히 (Johann Heinrich Keverich)의 딸이었다. 마리아는 원래 모두 7남매를 낳았다. 장남인 루트비히 마리아는 태어나자 마자 곧 죽었고 둘째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다. 셋째 카를과 넷째 요한을 낳은 후에 낳은 자녀들도 모두 일찍 죽진 않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일찍 죽게 되었다. 1787년 마리아가 죽은 후 살림을 맡아 준 가정부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부양은 베토벤의 몫이었다. 첫째 동생인 안톤 카를 (Anton Karl Beethoven : 1774~1815)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형의 비서 역할을 맡으며 출판을 도왔다. 하지만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베토벤 전기 작가인 세이어 (Thayer)는 바가텔집 작품33과 가곡 작품52 등으로 추측하고 있다.)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카를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스 요한 역시 베토벤에게 골치아픈 존재였다.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된 그는 상당한 돈을 모은 후 형에게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할 때에도 형의 반대를 꺾고 결혼한 뒤부터는 더 멀어졌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 부모님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는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악기 앞에 세워놓았으며,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된다. 그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행동때문이다. 그러나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음악 선생으로는 판 덴 에덴 (van den Eeden)의 궁정 오르간 주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 (Tobias Friedrich Pfeiffer)가족의 친구이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리고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 (Franz Rovantini)에게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9살 (속설에서 말하는 7살이 아닌)에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삼아 돈을 벌려 했으나 결과는 시원찮았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 요한은 거짓말로 아들 베토벤이 6살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7살 4개월, 즉 8살이었다. 나이를 속여 더 멋지게 보이고 돈을 더 받아내려고 한것이다. 다시말해 아들 베토벤의 재능을 팔아 술을 사먹으며 흥청망청 썼다.
– 사람들과의 만남
.폰 브로이닝 집안과의 만남
베토벤은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받아, 이때부터 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젊은 의대생 프란츠 베겔러 (Franz Wegeler)는 그를 폰 브로이닝 집안 (von Breuning, 나중에 베겔러는 이 집안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에 소개해 주었다. 베토벤은 종종 폰 브로이닝 집안에 갔는데, 여기서 그는 독일문학과 고전문학을 접하였으며, 몇몇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의 환경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자신의 집안에 비교한다면 편안한 곳이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평생 친구이자 재정지원자가 되는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과 알게 된다.
.모차르트와의 만남
모차르트의 전기작가인 오토 얀 (Otto Jahn)은 모차르트가 베토벤의 천재성에 감탄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베토벤이 17살이 되던 해인 1787년,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의 목적이 베토벤 자신은 모차르트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단정짓고 있지만, 꼭 그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때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음악을 접하고 싶은 마음도 충분히 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만나고 싶다는 청을 듣고 거절할 마음도 있었지만, 베토벤의 고향인 본에서 유명한 작곡가라는 말에 베토벤을 만나게 된다. 모차르트의 요구에 의해 베토벤은 즉흥곡을 연주했는데,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그것을 암기하고 치는거라 여기고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자 베토벤은 평상시에 가장 자신있던 즉흥실력을 모차르트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모차르트에게 즉흥곡의 테마 주제를 요청한다. 흥이 일기만 하면 즉흥연주에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던 그였고, 베토벤의 뛰어난 연주는 모차르트를 감탄시키기에는 너무나 충분하였다. 그 즉흥곡을 듣고, 모차르트는 여러 친구들이 모여있는 옆방으로 뛰어가 이렇게 외쳤다. “저 사내를 잘 지켜보게, 나보다 유명하게 될 존재가 나타났다네.”
1787년 베토벤의 첫 빈 여행에 관하여 확실하게 단정짓는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모차르트를 만났는지, 만났다면 어느정도 대화를 나누었는지, 또는 모차르트에게서 레슨을 받았는지의 여부도 확인할만한 자료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토 얀이 주장한 것과 같이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만났다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근거 또한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당시의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지오반니의 작곡에 전념하고 있어서 사소한 방문객은 잘 만나주지도 않았던 터라 당시에는 유명하지 않은 시골청년 베토벤에게 관심을 보였을리 없고, 모든 이야기는 사람들의 상상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리라는 것이 근래의 통설이며 국제음악계에서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이것을 증명해줄만한 물질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궁정악단
1789년,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월급의 반을 받을 수 있었고, 궁정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여 가족의 수입으로 삼았다. 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의 새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플루트 및 바이올린 주자 안톤 라이하 (Anton Reicha)와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과의 만남
선제후의 도움으로 1792년 베토벤은 빈으로 갔다. 아마 1790년대 말 당시 런던으로 가던 요제프 하이든이 성탄절 쯤에 본에서 머물 때 그에게 처음으로 소개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2곡의 장송칸타타 (WoO.87,WoO.88) 악보를 보고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베토벤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어 1792년 7월에 런던에서 빈으로 귀환한 뒤부터 베토벤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베토벤이 본을 떠날 때 그의 친구들이 이별의 인사말을 적은 기념노트를 보면, 빠른 날짜는 8월 24일(리히터가 쓴 것), 늦은 날짜는 11월 1일 (브로이닝이 쓴 것)이므로, 베토벤이 빈으로 떠날 준비 기간과 출발시간을 거의 가늠할 수 있다.
11월 10일에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즉시 하이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하이든은 그에게 만족했지만, 베토벤은 실제로 가르침을 받다보니 이전의 위대한 우상이었던 거장 하이든에게 여러가지로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하이든이 고치고 돌려준 베토벤의 악보를 본 요한 셍크 (Johann Schenk, 1753-1836)가 미처 하이든이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오류와 잘못을 지적해주자 하이든에 대한 불신감은 더욱 깊어졌다. 베토벤은 마침내 “하이든에게서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당시 하이든이 베토벤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하이든의 느긋하고 여유있는 성격을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가르친다는 일이 적성에 맞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다 가르치는 상대가 젊은 혈기에 급한 성격으로 알려진 베토벤이었으니 서로 맞지 않았음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후 베토벤은 당시 빈에서 뛰어난 이론가로 통하던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 (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가르침을 받고, 모차르트의 연적으로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리 (Antonio Salieri, 1750~1825)에게 성악곡 작곡을 배운다. 1793년 말, 결국 베토벤은 하이든 곁을 떠나지만 두 사람 간의 불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베토벤이 스스로 가장 만족해하던 다단조 3중주곡을 출판하지 말라고 하이든이 충고한 것 때문에 베토벤은 심한 상처를 받았던 일도 있듯이,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 뭔가 개운치 않은 앙금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1794년, 하이든의 두번째 영국 여행이 베토벤에게는 선생님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1795년 피아노 소나타 1~3번 작곡을 완성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하였으며, 그해 8월 하이든이 빈으로 돌아왔을때 카를 리히노브스키 후작 저택의 연주회에서 직접 들려주었다. 이 3곡의 소나타가 작품2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하이든과 베토벤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베토벤 쪽에서 말하자면 하이든은 과거의 업적을 놓고 볼 때 역시 위대한 대선배였다. 단지 그는 자신의 향학열을 만족시켜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지위와 연륜을 갖춘 하이든 쪽에서 볼 때도 신출내기 청년 음악가의 불평이나 불만 따위에 일일이 대응하여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 사정이 두 사람 간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를 막아준 것이라고 여겨진다.
피아노 3중주 1~3번 작품1과 피아노 소나타 1~3번 작품2를 작곡한 것 외에도 그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은 상당수의 곡을 작곡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오늘날 대부분 WoO작품번호로 분류된다. 그의 작품을 볼수록 작곡 양식이 성숙해지고 범위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악학자들은 1791년에 쓴 어느 변주곡집에서 그의 교향곡 3번의 주제와 비슷한 부분이 있음을 찾아낸 바 있다.
– 음악수업
베토벤은 바로 작곡자로 자립하지 않았으며, 음악 공부와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였다. 하이든의 지도를 받으며 그는 대위법을 숙달하고자 하였으며, 이그나츠 슈판지히에게서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다. 이때 일찍이 그는 때때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서 주로 이탈리아풍 성악 작곡 양식 등의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이 관계는 1802년(또는 1809년까지 일수도 있다.)까지 이어졌다. 1794년 하이든이 영국으로 떠나자 선제후는 베토벤이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빈에 남기로 하였으며,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과 다른 선생에게서 대위법 공부를 계속하였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 기간이 끝났으나,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이미 빈의 여러 귀족들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 연주활동
1793년 베토벤은 빈에서 피아노 명인이자 귀족 살롱의 즉흥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서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전주곡과 푸가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 출간한 작품은 변주곡집 (WoO 66)로 보인다. 1794년 거의 내내 베토벤은 작곡에 매달렸으며 작품 출판을 하지 않아 이듬해 1795년의 작품 출판이 더욱 중요해졌다. 베토벤은 1795년 3월에 빈에서 처음으로 대중 연주회에서 공연하여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였다. 기록 증거가 모호하여 이 작품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인지 2번인지는 불분명하나 두 작품 모두 완성을 앞둔 비슷한 상황이었다(두 작품 모두 몇 년 동안 완성되어 출판되지 못하였다). 연주회 직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처음으로 작품 번호를 붙여 피아노 3중주 1번을 내놓았다. 이들 작품은 자신의 후원자 리히노브스키에게 헌정되었으며, 한 해 생계비에 가까운 이익을 얻었다.
– 유명세를 타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리히노브스키 공 (그는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에도 동행하였다)도 함께하였으며,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공연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 (Op.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임금에 헌정하였다. 이 곡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한 작품으로, 비르투오조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임금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았다.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으며, 그해 11월에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 (오늘날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자유를 빼앗아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 (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 (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 음악적 성숙
1798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드디어 그가 작곡의 꽃이라고 여기던 현악 4중주와 교향곡에 손을 대었다. 1798년에서 1800년 사이에 그가 작곡한 현악 4중주 1~6번 (Op.18 –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의 부탁으로 그에게 헌정한 곡이다)은 1801년에 출판되어 1800년 교향곡 1번과 2번과 함께 초연하였으며,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신예 음악가 세대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계속 다른 악곡도 작곡하여 ‘비창’ (Op. 13)과 같은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작품도 내놓았는데, 쿠퍼는 이를 “성격의 강렬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 역동성, 음조 면에서 이전 작품을 뛰어넘었다”고 평가하였다. 1799년 그는 그의 생전에 널리 인기를 얻었던 7중주도 완성하였다.
1800년 2월 2일에 베토벤은 교향곡 1번을 초연하기 위하여 도시 극장을 임대하였으며,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과, 자신의 7중주,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한 곡 (이들 곡은 당시 출판되지 않은 상태였다) 등 다양한 곡목을 공연하였다. 알게마이네 무지칼리쉐 차이퉁 (Allgemeine musikalische Zeiting) 지에서 “오랫동안 가장 흥미로운 연주회”라고 묘사했던 이 연주회는 어려움도 겪었는데, 일부 비평가들은 “연주자들이 독주자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나(가령 베토벤의 피아노와 목관 5중주에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이 쓰였으나 형식이 같은 모차르트의 작품과 매우 비슷한 측면을 보인다.)무치오 클레멘티와 같은 음악가들에게서도 양식상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의 선율, 음악적 전개, 전조(轉調)와 기조(基調)의 쓰임, 감정의 특성 면에서 그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으며, 자신의 초기 작품이 처음으로 출간될 때 일부 작품에서 그 영향이 도드라졌다. 그때부터 1800년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업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 교습
1799년 5월 베토벤은 헝가리인 백작부인 안나 브륀스비크 (Anna Brunswik)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교습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였는데, 그는 맏딸 요제피네 (Josefine Brunswik von Korompa (1779-1821)와 관계를 맺어, 그때부터 수많은 억측의 대상이 되었다. 교습이 끝난 직후 요제피네는 요제프 다임 (Josef Deym von Střítež 1752-1804)백작과 혼인하였으며, 베토벤은 이들의 가정에 자주 방문하였으며, 모임에서 교습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였다. 요제피네의 결혼은 누가 보기에도 불행하였으나,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으며, 1804년 다임이 죽은 뒤에도 요제피네와 베토벤의 관계는 별 진전이 없었다.
베토벤은 그 밖에 다른 제자도 있었다. 1801년에서 1805년까지 그는 페르디난트 리스 를 가르쳤는데, 그는 작곡가가 되어 나중에 그들의 만남을 다룬 책인 “베토벤은 기억한다”을 썼다. 젊은 카를 체르니 도 1801년부터 1803년까지 베토벤 밑에서 수학하였다. 체르니 자신도 저명한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그가 맡은 제자 가운데는 프란츠 리스트도 있었다. 그는 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도 빈에서 초연한 바 있다.
1800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주로 두 작품에 집중하였는데, 월광 소나타 등과 이보다는 작은 곡도 계속 썼다. 1801년 봄 그는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1801년과 1802년에 수차례 공연되었으며, 베토벤은 이 곡의 인기에 편승하여 피아노 편곡판도 내놓았다. 1802년 봄, 그는 교향곡 2번 을 완성하여 연주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결국 취소되어버렸다. 이 교향곡은 이듬해 1803년 4월에 자신이 상임 작곡가로 있는 빈 강의 강변 극장 (Theater an der Wien)의 어느 예약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2번과 더불어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3번,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도 같이 공연됐다. 평가는 제각각이었으나, 연주회는 재정적으로 성공하였고, 베토벤은 일반 연주회 표의 세 배 가격으로 표값을 책정할 수 있었다.
1802년 전에는 어쩌다 가끔 형 베토벤을 도와주던 동생 카를이 출판 경영에서 큰 역할을 맡으면서, 베토벤은 출판업자와의 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최근 작곡된 작품에 더 높은 값을 불러 협상할 뿐 아니라, 카를은 베토벤이 예전에 작곡하고는 출판하지 않았던 일부 작품도 팔았으며, 형이 인기있는 작품들을 다른 악기 편성으로 편곡하도록 권하였다. 베토벤은 이런 부탁에 응했는데, 그는 출판업자들이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비슷하게 편곡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청력 상실
.청각장애의 이유
1796년경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 그는 심각한 귀울음(耳鳴)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왜 청력을 잃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 납 중독, 티푸스, 자기 면역 장애등의 설이 있으며, 심지어 잠을 깨기 위해 찬물에 머리를 담그던 습관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은 당시 부검 결과로, 오랫동안 외상이 커져 “내이(內耳)가 부푼” 상태였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에서는 베토벤이 청각장애를 겪은 이유를 납중독일 것으로 헤아렸다. 백만불 미스터리의 보도내용에 따르면, 베토벤이 죽은 다음날 한 어린 음악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가져 간다. 그는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죽을 때까지 잘 보관했으며 대대로 가보로 물려준다. 2차세계대전 때 이 물품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이것이 1994년 런던 소더비 경매소에서 세상에 공개된다.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아르곤 국립연구소에서 분석한 결과 납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의 100배가 넘는 납수치가 나타났다. 이로써 베토벤이 일생동안 겪은 육체적 고통과 청력상실의 직접적인 원인이 납중독임이 밝혀졌다.
.꾸준한 음악활동
1801년에 베토벤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이로 인해 음악 활동과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 일부는 이미 청력 상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베토벤은 의사의 조언에 따라 빈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지내며 자신의 증세에 적응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는데, 베토벤은 음악 활동을 위하여 계속 살겠노라는 자신의 결심을 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청력 상실은 심해졌다. 이에 관한 확실한 일화가 있는데, 자신의 교향곡 9번을 초연할 때 연주가 끝나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그는 베토벤이 청각장애인임을 배려한 가수 카롤리네 웅거의 도움으로 객석을 향해 뒤돌아서자, 그제서야 관객들이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고 있음을 보았고, 관객들의 환대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어도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수지맞는 돈벌이 수단이던 공연 연주는 점점 어려워졌다. 1811년에 그는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로 그는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 박물관에는 그가 사용한 나팔 기구 등 보청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청력상실은 분명 큰 걱정거리였지만, 카를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는 그럭저럭 사람의 말이나 음악을 들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1814년 베토벤은 거의 대부분 청력을 잃었으며, 그가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로 시끄러운 아르페지오나 우레같은 베이스 음표를 연주할 때, “Ist es nicht schön?” (아름답지 않소?)라고 말할 때 손님들은 그의 익살과 용기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으면서 특이한 사료가 보존되었다. 바로 그의 대화록이었다. 죽기 전 10년 또는 몇 년 동안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할 말을 수첩에 써서 전하였으며, 베토벤은 말로 대답하거나 쓰기도 하였다. 이 책들은 음악이나 다른 화제에 대한 토론을 담고 있고, 그의 생각을 전해주고 있으며 음악과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자기 작품의 연주를 어떻게 느꼈을 지에 대한 연구의 자료가 되고 있다. 불행히도 베토벤이 죽은 뒤 그의 비서 안톤 신틀러 (Anton Schindler)가 베토벤을 이상화된 모습으로 그리려고 이러한 대화록 400권 중 264권을 파손해 버리거나 수정하였다.
– 후원
베토벤 이전까지의 음악가와 귀족간의 관계는 종속관계였다.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등의 작곡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이든도 에스테르하지 가문 소속의 음악가였지만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후계자가 워낙 음악에 관심이 없던 탓에 말년이 돼서야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모차르트도 귀족과의 종속관계를 벗어나기 위해 아르코 백작에게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까지 겪은 끝에 결국 종속관계에서 벗어났지만, 그 때문에 후원을 받지 못하여 가난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모차르트의 말년 작품들이 더 성숙했던 이유는 귀족과의 종속관계에서 귀족의 요구대로 작곡했던 틀을 벗어나 좀더 자신의 감정이 반영된 영향이 큰 이유였다.
베토벤도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는데, 베토벤은 역대 음악가들 중에서 최초로 가장 많은 후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작곡가였다. 그의 작품이 워낙 평이 좋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이름에 붙은 ‘판 (van)’이라는 호칭이었다. Van이라는 호칭은 그 당시에는 네덜란드 출신 귀족에게만 붙는 표시였고, 그의 할아버지 루트비히가 17살 때 독일로 이주한 네덜란드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많은 게르만계의 독일,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다른 음악가들과는 달리 베토벤에게만큼은 같은 동급으로 대우를 해주었다. 베토벤의 이름에 붙여진 Van 칭호 덕분에 그의 초창기 빈 데뷔가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쉬운 편이었다.
베토벤은 귀족들로부터 동급 지원을 받았었을 뿐더러, 음악가로서의 가치를 높여주게 되어 나중에는 베토벤 스스로도 귀족들의 존경과 인사를 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게 되었다.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베토벤’ (계몽사)에 따르면, 1812년 베토벤과 그가 존중하는 시인인 괴테가 테플리츠 (Teplitz) 온천에서 처음으로 만나 같이 산책을 하던 중에 자신들의 앞으로 지나가는 왕후들의 행렬을 보고 괴테는 먼저 인사를 했지만, 베토벤은 그들이 먼저 인사를 하기를 기다렸으며 기어코 왕후들에게 먼저 인사를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로 인하여 괴테와 베토벤은 친분을 깊게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나중에 베토벤이 베티나 브렌타노에게 자신의 심정을 담아 전해지게 된다. 이렇게 괴테와 헤어진 뒤에 좋아하는 시인들로 호우머, 실러, 클롭슈토크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괴테는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베토벤의 이런 사고방식은 후대 음악가 및 예술가들의 인식을 바꿔놓는데 크게 기여를 하여 베토벤 사후에 여러 음악가들이 귀족의 종속관계가 아닌 음악가, 즉 하나의 예술가로서의 인정을 받을 길을 가는 발판을 마련해주게 되어 후대 음악가들이 베토벤을 상당히 존경했던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베토벤의 후원으로 돌아와서, 그의 데뷔 초창기에는 작품 출판과 공연회로 수입을 벌면서 후원자들의 지원도 받았는데 이들을 위하여 그는 개인 연주회를 베풀고 이들의 부탁을 받은 작품을 써서 일정 기간을 두었다가 나중에 출판하기도 하였다.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등 그의 초기 후원자들 몇몇은 작곡을 요청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함과 더불어 연금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아마 베토벤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2세 황제의 막내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이었을 터인데, 그는 1803년 혹은 1804년에 베토벤에게서 피아노와 작곡 교습을 받았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어 1824년까지 만났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곡을 헌정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피아노 3중주 7번 (1811년)과 대작 장엄 미사 (Missa Solemnis, 1823)도 있다. 루돌프도 답례로 베토벤에게 자신의 작품 한 곡을 헌정하였다. 베토벤이 루돌프에게 보낸 편지들은 오늘날 악우협회 (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에 보관되어 있다.
왕실극장의 직위를 거부한 뒤 1808년 가을에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베스트팔렌 왕국의 임금인 제롬 보나파르트가 카셀의 궁정에서 급료가 높은 악장 (Kapellmeister) 자리를 맡아달라고 제안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베토벤의 친구들에게서 소식을 전해들은 루돌프 대공, 킨스키 (Kinsky) 백작과 롭코비츠 공은 베토벤이 빈에 머물도록 설득하고자 연간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루돌프 대공만이 베토벤에게 약속한 날에 주기로 한 연금의 몫을 지불하였다. 킨스키는 장교직 복무로 소환되어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며, 얼마 안되어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롭코비츠는 1811년 9월에 연금 지불을 중단하였다. 뒤이어 후원을 계속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며 베토벤은 대개 작품의 권리를 팔거나 1815년 이후 적은 연금에 의지하였다. 당초 후원자들의 재정 지원 약속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어느 정도는 무의미해졌는데, 정부가 전쟁 준비로 돈을 찍어내어 심각한 물가 상승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 슈베르트와의 만남
베토벤은 훗날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프란츠 슈베르트와 만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불과 2km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거리에 살았지만 베토벤이 청력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못해 쉽게 만나지 못했다. 슈베르트의 소심한 성격 또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 내어 만나게 된 것이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렇게 늦게 만난 것에 대해 후회를 했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 명은 이제 다 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말게.”
그 후 슈베르트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허약한 목소리를 듣고 괴로운 나머지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베토벤이 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슈베르트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 사망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부검에 따르면 머리카락에 수은이 치사량 이상 함유되어 있어서 독살의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 작품 시기별 분류
베토벤의 작품은 보통 세 시기, 즉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한다. 이 방식에 의하면 1802년 정도까지를 초기로, 그 이후부터 1814년 정도까지를 중기로, 그리고 1815년 무렵부터를 후기로 본다. 초기, 즉 고전기는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도 새로운 방향을 찾아 그의 작품의 지평을 넓힌다. 초기의 중요한 작품은 교향곡 1번, 교향곡 2번, 첫 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 첫 세 개의 피아노 협주곡, 20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도 들어있다. 중기, 즉 영웅기는 그의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면서 시작된다. 영웅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면모를 나타내는 대 편성곡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작품으로는 교향곡 3번부터 교향곡 8번까지 여섯 개의 교향곡과, 나머지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삼중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7번부터 11번까지 다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과, 7개의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 열정 등), 또 크로이처 바이올린 소나타와 그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를 들 수 있다. 후기는 1815년경부터인데, 지적인 깊이와 형식적인 혁명성 그리고 집중성과 인간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가령 현악 사중주곡(작품번호 131번)은 7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향곡 9번은 마지막 악장에 오케스트라와 더불은 합창을 집어넣었다. 그 밖의 이 시기 작품으로는 장엄 미사, 마지막 다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 대 푸가, 마지막 다섯 개의 피아노 소나타 (함머클라비어 소나타 등)이다.
○ 낭만주의적 특징
베토벤을 둘러싼 찬반 논쟁 가운데 하나는 그가 낭만주의 작곡가인지, 아니면 고전주의 작곡가인지에 대한 것이다. ‘낭만주의적’의 의미와 낭만주의 음악 시대 자체의 기간에 대한 의견이 사람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베토벤을 이 운동이나 기간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문맥에 따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문학과 예술의 한 미학적 시기로 간주한다면, 베토벤은 분명히 독일의 괴테·실러와 영국의 퍼시 실리와 같은 문학적 낭만주의 시기의 첫 절반에 위치한다. 그는 또한 슈포어와 E. T. A. 호프만의 민속적 특징에 자주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 분야별 작품 목록
– 교향곡
.교향곡 1번 C 장조, Op. 21 (1800년)
.교향곡 2번 D 장조, Op. 36 (1803년)
.교향곡 3번 E flat 장조 “영웅”, Op. 55 (1805년)
.교향곡 4번 B flat 장조, “낭만적”, Op. 60 (1807년)
.교향곡 5번 c 단조, “운명”, Op. 67 (1808년)
.교향곡 6번 F 장조 “전원”, Op. 68 (1808년)
.교향곡 7번 A 장조, “대곡”, Op. 92 (1813년)
.교향곡 8번 F 장조, “소곡”, Op. 93 (1814년)
.교향곡 9번 d 단조 “합창”, Op. 125 (18240-1825년)
.교향곡 10번 E flat 장조 Bia. 838 (1824-1827년)
한때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으로 알려졌던 “예나” 교향곡(C 장조)은 프리드리히 비트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미완성 교향곡으로 알려진 10번 교향곡은 배리 쿠퍼에 의해 단악장 교향곡으로 재구성되었으며 한국에서는 1989년에 초연되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탄생 250주년 행사때 나머지 부분을 AI가 완성 한 곡을 공개할 예정이다.
–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E flat 장조, WoO 4 “피아노 협주곡 0번” (1784년) (단편곡)
.Op. 15
피아노 협주곡 1번 C 장조 (1796~1797년)
제1악장용 카텐차 3작품 (1809년)
.Op. 19
피아노 협주곡 2번 B flat 장조 (1798년)
제1악장용 카텐차 1작품 (1809년)
.Op. 37
피아노 협주곡 3번 c 단조 (1803년)
제1악장용 카텐차 1작품 (1809년)
.Op. 58
피아노 협주곡 4번 G 장조 (1807년)
제1악장용 카텐차 2작품, 피날레용 카텐차 1작품 (1809년)
제1악장용 카텐차 1작품, 피날레용 카텐차 2작품 (Hess 81, 82, 83) (1809년)
.Op. 61a
피아노 협주곡 D 장조 (1807) (바이올린 협주곡 D 장조, Op. 61을 피아노를 위해 편곡한 작품)
제1악장용 카텐차 1작품 (1809년), 피날레용 1작품 (1809년)
피날레용 카텐차 2작품 (Hess 84–5) (1809년)
.피아노 협주곡 5번 E flat 장조, Op. 73 “황제” (1809년)
.피아노 협주곡 D 장조 Unv. 6 (Hess 15) (1814-1815년) (미완성)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C 장조, WoO 5 (Hess 10) (1792년) (단편곡)
.바이올린 협주곡 D 장조, Op. 61 (1806년)
*삼중 협주곡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삼중 협주곡 C 장조, Op. 56 (1805년)
*독주 악기와 관현악을 위한 다른 작품들
.플루트, 바순, 하프시코드와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칸타빌레 E 단조, WoO 207 (Hess 13) (1786년) (단편곡)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론도 B flat 장조, WoO 6 (1793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피날레로 의도 되었던 작품)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2번, F 장조 Op. 50 (1798년)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1번, G 장조 Op. 40 (1802년)
.합창환상곡 c 단조, Op. 80 (1808년)
*관현악곡
.서곡
코리올란 서곡 다 단조 Op. 62 (1807년)
명명축일 다 장조 Op. 115 (1815년)
헌당식 다 장조 Op. 124 (1822년) (전 곡은 서곡 외, 아테네의 폐허 Op.113으로부터 4곡을 전용, WoO 98과 함께 초연)
피델리오 서곡 Op. 72c (1814년) (오페라 “피델리오” 제3판의 서곡)
레오노레 서곡 1번 가 장조 Op. 138 (1805년)
레오노레 서곡 2번 다 장조 Op. 72a (1805년) (오페라 “피델리오” 초판의 서곡)
레오노레 서곡 3번 다 장조 Op. 72b (1806년) (오페라 “피델리오” 제2판의 서곡)
.부수 음악
에그몬트 (서곡과 9곡) Op. 84 (1810년)
아테네의 폐허 (서곡과 8곡) Op. 113 (1811년)
슈테판왕 (서곡과 9곡) Op. 117 (1811년)
쿠프너의 비극 ‘타르페이아’를 위한 “개선행진곡” WoO 2a (1813년)
레오노레 (1805년판) 제2막 서주 WoO 2b (Hess. 117) (1813년)
레오노레 프로하스카 (4곡) WoO 96 (1815년)
“아테네의 폐허”를 위한 행진곡과 합창 Op. 114 (1826년) (Op. 113 제6곡의 개작)
칼 마이슬의 축전극 “헌당식” 합창곡 WoO 98 (1822년)
.발레 음악
기사를 위한 발레 음악 (8곡) WoO 1 (1791년)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서곡, 서주와 16곡) Op. 43 (1801년)
.실용적인 무곡
관현악을 위한 열두 개의 대무곡 WoO 14 (1791년)
관현악을 위한 열두 개의 미뉴에트 WoO 7 (1795년)
관현악을 위한 열두 개의 독일 무곡 WoO 8 (1795년)
두 개의 바이올린과 더블 베이스를 위한 여섯 개의 미뉴에트 WoO 9 (1795년 이전)
피아노를 위한 여섯 개의 미뉴에트 WoO 10 (1795년) (2번 사장조가 유명함)
두 개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일곱 개의 랜들러 WoO 11 (1799년)
두 개의 바이올린과 더블 베이스를 위한 여섯 개의 랜들러 WoO 15 (1802년)
축하 미뉴에트 WoO 3 (1822년)
.교향시
웰링턴의 승리 OP. 91 “전쟁” (1810년) (전쟁교향곡으로 알려진 곡이며, 2파트로 되어있어 구성상으로는 최초의 교향시임
*실내악곡
– 현악기를 위한 실내악곡
현악 삼중주
.현악 삼중주 1번 E flat 장조, Op. 3 (1794년 이전)
.알브레히츠베르거를 위한 전주곡과 푸가 e 단조, Hess 29-31 (1794-1795년)
.현악 삼중주를 위한 세레나데 D 장조, Op. 8 “현악 삼중주 2번” (1797년)
.Op. 9 (1797-1798년)
현악 삼중주 3번 G 장조
현악 삼중주 4번 D 장조
현악 삼중주 5번 c 단조
현악 사중주
.초기 현악 사중주
현악 사중주를 위한 미뉴에트 A flat 장조, Hess 33 (1790–1792년)
Op. 18
현악 사중주 3번 D 장조 (1798년)
현악 사중주 1번 F 장조 (1799년)
현악 사중주 2번 G 장조 (1800년)
현악 사중주 4번 c 단조 (1801년)
현악 사중주 5번 A 장조 (1801년)
현악 사중주 6번 B flat 장조 (1801년)
현악 사중주 F 장조, Hess 34 (1801–1802년) (피아노 소나타 9번 E 장조, Op. 14의 현악 사중주 편곡판)
.중기 현악 사중주
Op. 59 “라주모프스키” (1806년)
현악 사중주 7번 F 장조
현악 사중주 8번 e 단조
현악 사중주 9번 C 장조
현악 사중주 10번 E flat 장조, Op. 74 “하프” (1809년)
현악 사중주 11번 f 단조, Op. 95 “세리오조” (1810년)
.후기 현악 사중주 및 대푸가
현악 사중주 12번 F flat 장조, Op. 127 (182-1825년)
현악 사중주 15번 a 단조, Op. 132 (1825년)
현악 사중주 13번 B flat 장조, Op. 130 (1825-1826년)
현악 사중주를 위한 대푸가 B flat 장조, Op. 133 (1825-1826년)
현악 사중주 14번 c sharp 단조, Op. 131 (1825-1826년)
현악 사중주 16번 F 장조, Op. 135 (1826년)
현악 오중주
현악 오중주 C 장조, Op. 29 “폭풍” (1801년)
현악 오중주 c 단조, Op. 104 (1817년)
현악 오중주를 위한 전주곡 d 단조, Hess 40 (1817년)
현악 오중주를 위한 푸가 D 장조, Op. 137 (1817년)
현악 오중주 C 장조, Hess 41 (1826년)
현악기를 위한 다른 실내악곡
첼로와 비올라를 위한 듀오, WoO 32 “두 개의 안경 오블리가토와 함께” (1796–1787년)
두 개의 바이올린을 위한 듀엣 A 장조, WoO 34 (1822년)
피아노를 포함한 실내악곡
.바이올린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 A 장조, Hess 46 (단편곡) (1790–1792년)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론도 G 장조, WoO 41 (1793–1794년)
Op. 12 (1798년)
바이올린 소나타 1번 D 장조
바이올린 소나타 2번 A 장조
바이올린 소나타 3번 E flat 장조
바이올린 소나타 4번 a 단조, Op. 23 (1801년)
바이올린 소나타 5번 F 장조, Op. 24 “봄” (1801년)
Op. 30 (1803년)
바이올린 소나타 6번 A 장조
바이올린 소나타 7번 C 단조
바이올린 소나타 8번 G 장조
바이올린 소나타 9번 A 장조, Op. 47 “크로이처” (1803년)
바이올린 소나타 10번 G 장조, Op. 96 (1812년)
.첼로 소나타
Op. 5
첼로 소나타 1번 F 장조 (1796년)
첼로 소나타 2번 G 단조 (1796년)
첼로 소나타 3번 A 장조 (1807년)
Op. 102
첼로 소나타 4번 C 장조 (1815년)
첼로 소나타 5번 D 장조 (1815년)
다른 독주 악기와 피아노
플루트 소나타 B flat 장조, Anh 4 (1790–1792년)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백작께서 춤을 추신다면 주제에 의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 WoO 40 (1792-1793년)
만돌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c 단조, WoO 43a (1796년)
만돌린과 피아노를 위한 아다지오 E flat 장조, WoO 43b (1796년)
만돌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C 장조, WoO 44a (1796년)
만돌린과 피아노를 위한 안단테와 변주곡 D 장조, WoO 44b (1796년)
헨델의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베우스 중 보아라, 용사는 돌아온다 주제에 의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 WoO 45 (1796년)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중 처녀인가 부인인가 주제에 의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 Op. 66 (1798년)
호른 소나타 F 장조, Op. 17 (1800년)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중 사랑을 아는 사나이들은 주제에 의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 WoO 46 (1801년)
플루트 (또는 바이올린)와 피아노를 위한 세레나데 D 장조, Op. 41 (1803년)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노투르노 D 장조, Op. 42 (1803년)
플루트 (또는 바이올린)와 피아노를 위한 민요 주제에 의한 6개의 변주곡, Op. 105 (1818–1819년)
플루트 (또는 바이올린)와 피아노를 위한 민요 주제에 의한 10개의 변주곡, Op. 107 (1818–1819년)
피아노 삼중주
피아노 삼중주 E flat 장조, WoO 38 (1791년)
바이올린,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 E flat 장조, Unv. 9 (Hess. 48) (1792년)
창작 주제에 의한 열네 개의 변주곡 E flat 장조, Op. 44 (1792년)
Op. 1
피아노 삼중주 1번 E flat 장조 (1797년)
피아노 삼중주 2번 G 장조 (1797년)
피아노 삼중주 3번 c 단조 (1797년)
피아노 삼중주 4번 B flat 장조, Op. 11 “거리의 노래” (1797년)
벤첼 뮬러의 오페라 프라하의 자매들 중 나는 재단사 카카두 주제의 의한 10개의 변주곡 G 장조, Op. 121a “카카두 변주곡” (1803년, 개정. 1816년)
피아노 삼중주 D 장조, Bia 425 (1805년 이전)
Op. 70
피아노 삼중주 5번 D 장조, “유령” (1808년)
피아노 삼중주 6번 E flat 장조 (1808년)
피아노 삼중주 7번 B flat 장조, Op. 97 “대공” (1811년)
바이올린,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 E flat 장조, Op. 38 “피아노 삼중주 8번” (1802–1803년)
피아노 삼중주를 위한 알레그레토 B flat 장조, WoO 39 (1812년)
피아노를 포함한 다른 실내악곡
WoO 36
피아노 4중주 1번 E flat 장조 (1785년)
피아노 4중주 2번 D 장조 (1785년)
피아노 4중주 3번 C 장조 (1785년)
피아노, 플루트와 바순을 위한 삼중주 G 장조, WoO 37 (1786년)
피아노와 목관악기를 위한 오중주 E flat 장조, Op. 16 (1796-1797년)
피아노 4중주 E flat 장조, Op. 16b (작곡 연도 불명) (피아노와 목관악기를 위한 오중주 E flat 장조, Op. 16의 편곡판)
클라리넷 삼중주 (클라리넷,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 B flat 장조, Op. 11 (“거리의 노래”) (1797년)
클라리넷 삼중주 (클라리넷,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 E flat 장조, Op. 38 (1802–1803년)
목관악기를 위한 실내악곡
두 개의 플루트를 위한 알레그로와 미뉴에트 G 장조, WoO 26 ̈(1792년)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과 바순을 위한 팔중주 E falt 장조, Op. 103 (1792년 이전)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과 바순을 위한 짧은 론도 E flat 장조, WoO 25 (1793년)
두 개의 오보에와 잉글리시 호른을 위한 삼중주 C 장조, Op. 87 (1795년)
호른과 현악 사중주를 위한 육중주 E flat 장조, Op. 81b (두 개의 호른, 두 개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1795년)
*피아노 독주곡
피아노 소나타
WoO 47 “선제후 소나타” (1783년)
세 개의 초기 피아노 소나타 1번 E flat 장조
세 개의 초기 피아노 소나타 2번 f 단조
세 개의 초기 피아노 소나타 3번 D 장조
Op. 2 (1796년)
피아노 소나타 1번 f 단조
피아노 소나타 2번 A 장조
피아노 소나타 3번 C 장조
피아노 소나타 4번 E flat 장조, Op. 7 “그랜드 소나타” (1797년)
Op. 10 (1798년)
피아노 소나타 5번 c 단조
피아노 소나타 6번 F 장조
피아노 소나타 7번 D 장조
피아노 소나타 8번 c 단조, Op. 13 “비창” (1798년)
Op. 14 (1799년)
피아노 소나타 9번 E 장조
피아노 소나타 10번 G 장조
피아노 소나타 11번 B flat 장조, Op. 22 (1800년)
피아노 소나타 12번 A flat 장조, Op. 26 “장송행진곡” (1801년)
Op. 27 (1801년)
피아노 소나타 13번 E flat 장조 “환상곡풍”
피아노 소나타 14번 c sharp 단조 “월광”
피아노 소나타 15번 D 장조, Op. 28 “전원” (1801년)
Op. 31 (1802년)
피아노 소나타 16번 G 장조
피아노 소나타 17번 d 단조 “템페스트”
피아노 소나타 18번 E flat 장조 “사냥”
Op. 49 (1792년)
피아노 소나타 19번 g 단조
피아노 소나타 20번 G 장조
피아노 소나타 21번 C 장조, Op. 53 “발트슈타인” (1803년)
피아노 소나타 22번 F 장조, Op. 54 (1804년)
피아노 소나타 23번 f 단조, Op. 57 “열정” (1805년)
피아노 소나타 24번 F sharp 장조, Op. 78 “테레제를 위하여” (1809년)
피아노 소나타 25번 G 장조, Op. 79 “뻐꾸기” (1809년)
피아노 소나타 26번 E flat 장조, Op. 81a “고별” (1810년)
피아노 소나타 27번 e 단조, Op. 90 (1814년)
피아노 소나타 28번 A 장조, Op. 101 (1816)
피아노 소나타 29번 B flat 장조, Op. 106 “함머클라비어” (1819년)
피아노 소나타 30번 E 장조, Op. 109 (1820년)
피아노 소나타 31번 A flat 장조, Op. 110 (1821년)
피아노 소나타 32번 c 단조, Op. 111 (1822년)
피아노 변주곡
드레슬레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c 단조, WoO 63 (1782년)
리기니의 아리아 사랑아 내가 왔다 주제에 의한 스물네 개의 변주곡 D 장조, WoO 65 (1790–1791년)
디터스도르프의 오페라 옛날 한 노인이 주제에 의한 열세 개의 변주곡 A 장조, WoO 66 (1972년)
스위스 노래에 의한 6개의 변주곡 F 장조, WoO 64 (1790–1792년)
하이벨의 발레 방해받은 결혼 중 비가노의 미뉴엣의 주제에 의한 열두 개의 변주곡 C 장조, WoO 68 (1795년)
파이시엘로의 오페라 물레방앗간의 처녀 중 얼마나 아름다운가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WoO 69 (1795년)
파이시엘로의 오페라 물레방앗간의 처녀 중 더 이상 내 마음은 느끼지 못하네 주제에 의한 여섯 개의 변주곡, WoO 70 (1795년)
창작 주제에 의한 여섯 개의 변주곡 F 장조 Op. 34 (1802년)
창작 주제에 의한 열다섯 개의 변주곡과 푸가 E flat 장조 Op. 35 “영웅 변주곡” (1802년)
영국의 국가에 의한 일곱 개의 변주곡 D 장조, WoO 78 (1802년)
지배하라 브리타니아여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곡 D장조, WoO 79
창작 주제에 의한 서른두 개의 변주곡 WoO 80 c 단조 (1806년)
창작 주제에 의한 여섯 개의 변주곡 D 장조 Op. 76 (1809년)
디아벨리의 왈츠 주제에 의한 서른세 개의 변주곡 C 장조 Op. 120 “디아벨리 변주곡” (1823년, 바하의 골드베르그 변주곡과 어깨를 견줄만한 대작임)
쥐스마이어의 장난과 농담 주제에 의한 여덟 개의 변주곡 F 장조, WoO 76 (1799년)
그외 총 21곡의 피아노 변주곡 작곡
바가텔 및 그 외 소품곡
피아노를 위한 일곱 개의 바가텔, Op. 33 (1802년)
피아노를 위한 열한 개의 바가텔, Op. 119 (1821년)
피아노를 위한 여섯 개의 바가텔, Op. 126 (1824년)
피아노를 위한 포코 모토 (바카텔) C 장조, WoO. 59 (Grove Op. 173) “엘리제를 위하여” (1810년)
피아노를 위한 안단테 (바카텔) F 장조, WoO. 57 (Grove Op. 170) “안단테 파보리” (1805년) (원래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의 2악장으로 작곡됐으나 곡의 길이가 길어져 별도의 독주곡으로 만들어짐)
피아노를 위한 프레스토 (바카텔) c 단조, WoO. 52 (1795년) (원래 피아노 소나타 7번의 악장으로 작곡)
피아노를 위한 알레그레토 (바가텔) C 장조, WoO. 56 (1804년)
모든 장조를 위한 두 개의 전주곡 Op. 39 (1803년)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론도, Op. 51 (1797-1798년)
론도 1번 C 장조
론도 2번 G 장조
피아노 환상곡 f 단조 Op. 77 (1809년)
폴로네이즈 C 장조 Op. 89 (1814년)
그외 200여곡 이상의 다수 소품들이 있음
네 손 피아노 곡
발트슈타인 백작 주제에 의한 8개의 변주곡 C 장조, WoO 67 ̈(1792년)
네 손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D 장조, Op. 6 (1797년)
베토벤의 “그대를 생각하며” 6개의 변주곡 D 장조, WoO 74 (1799년, 1803년)
Op. 45 (1803년)
세 개의 행진곡 1번 C 장조
세 개의 행진곡 2번 E♭ 장조
세 개의 행진곡 3번 D 장조
네 손 피아노를 위한 푸가 B♭, Op. 134 (1826년) (현악 사중주를 위한 대푸가 B flat 장조, Op. 133의 피아노 편곡판)
*성악곡
오페라
움라우프의 징슈필 아름다운 신발가게의 딸을 위한 두 개의 아리아, WoO 91 (1795–1796년)
베스타의 불, Hess 115 (단편) (1803년)
피델리오, Op. 72 (1판은 1805년, 2판은 1806년, 3판은 1814년에 작곡)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트라이치케의 징슈필 ‘좋은 소식’을 위한 피날레의 합창 “게르마니아” WoO 94 (1814년)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트라이치케의 징슈필 ‘개선문’을 위한 피날레의 합창 “다 이루었다ǃ” WoO 97 (1815년)
관현악을 포함한 합창곡
황제 요제프 2세의 장송 칸타타, WoO 87 (1790년)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즉위 축제 칸타타, WoO 88 (1790년)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Op. 85 (1803년)
미사곡 C 장조, Op. 86 (1807년)
영광의 순간, Op. 136 (1814년)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Op. 112 (1815년)
장엄미사곡 D 장조, Op. 123(1823년)
다른 합창곡
남성을 위한 이별의 노래, “종이 울리네”, WoO 102 (1814년) )년녀ㄴ
네 개의 목소리와 피아노를 위한 전원 칸타타, “즐거운 건배의 노래” WoO 103 (1814년)
솔로 음색들과 관현악
베이스를 위한 아리아, “키스의 실험”, WoO 89 (1792년)
베이스를 위한 아리아, “아가씨와 사이좋게”, WoO 90 (1792년)
셰나와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첫사랑”, WoO 92 (1790-1792년)
셰나와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아아, 믿지 못할 사람이여”, Op. 65 (1796년)
셰나와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아니요, 걱정하지 마세요”, WoO 92a (1802년 이전)
소프라노와 테너를 우한 듀엣, “당신의 행복한 날”, WoO 93 (1802년 이후)
소프라노, 테러와 베이스를 위한 아리아, “사악한 자여 떨어라”, Op. 116 (1802년)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와 현악 사중주를 위한 “비가”(“살아 있는 듯이 편안히”), Op. 118 (1814년)
가곡
오 사랑스런 숲. WoO 119 (1794년)
아델라이데, Op. 46 (1795년)
그대를 사랑해, WoO 123 (1795년)
겔레르트의 시에 의한 여섯 개의 노래, Op. 48 (1803년)
Bitten (소원)
Die Liebe des Nachsten (이웃에 대한 사랑)
Vom Tode (죽음에 대하여)
Die Ehre Gottes aus der Natur (자연에 있어서의 신의 영광)
Gottes Macht und Vorsehung (신의 전능과 섭리)
Busslied (참회의 노래)
여덟 개의 노래, Op. 52 (1802년 출판)
Urians Reise Um Die Welt (우리만의 세계여행) (1792년)
Feuerfarb (불꽃 빛깔) (1793-1794년)
Das Liedchen Von Der Ruhe (휴식의 노래) (1793년)
Mailied (5월의 노래) (1796년 이전)
Mollys Abschied (몰리의 작별) (작곡 연도 불명 (초기 추정))
Die Liebe (사랑) (1792년)
Marmotte (봇짐장수) (1792년 추정)
Das Blümchen Wunderhold (사랑의 꽃) (1793-1796년)
희망에게, Op. 32 (1805년)
추억, WoO 136 (1807년)
먼 나라의 노래, WoO 137 (1809년)
그대를 생각하며, WoO 74 (1809년)
타향의 젊은이, WoO 138 (1809년)
네 개의 소곡과 한 개의 이중창, Op. 82 (1809년)
Hoffnung (희망)
Liebes-Klage (사랑의 슬픔)
L’ amante impatiente (Stille Frage) (짜증난 연인 – 조용한 질문)
L’ amante impatiente (Liebesungeduld) (짜증난 연인 – 사랑의 조바심)
Lebens-Genus (인생의 향락) (이중창)
괴테의 시에 의한 세 개의 노래, Op. 83 (1810년)
Wonne der Wehmut (비애의 기쁨)
Sehnsucht (동경)
Mit einem gemalten Band (물들인 리본으로)
희망에게, Op. 94 (1813년)
여섯 개의 연가곡집 멀리 있는 연인에게, Op. 98 (1816년)
체념, WoO 149 (1817년)
키스, Op. 128 (1822년)
그외 200여곡 작곡
민요
스물다섯 개의 아일랜드 민요, WoO 152 (1813년)
스무 개의 아일랜드 민요, WoO 153 (1813년)
열두 개의 아일랜드 민요, WoO 154 (1813년)
스물여섯 개의 웨일즈 민요, WoO 155 (1814년)
스물다섯 개의 스코틀랜드 민요, Op. 108 (1816년)
열두 개의 스코틀랜드 민요, WoO 156 (1818년)
열두 개의 다양한 국적의 민요, WoO 157 (1815년)
일곱 개의 영국 민요, WoO 158b (1813–1817년)
스물세 개의 다양한 국적의 민요, WoO 158a (1816–1817년)
일곱 개의 다양한 국적의 민요, WoO 158c (1817–1820년)
두 개의 오스트리아 민요, Hess 133, 134 (1820년)
*취주악곡
군악대를 위한 행진곡 1번 F 장조 WoO 18 “요르크 행진곡” (1810년)
군악대를 위한 행진곡 2번 F 장조 WoO 19 (1810년)
군악대를 위한 폴로네이즈 D 장조 WoO 21 (1810년)
군악대를 위한 에코세즈 D 장조 WoO 22 (1810년)
군악대를 위한 에코세즈 G 장조 WoO 23 (1810년)
군악대를 위한 행진곡 D 장조 WoO 24 (1816년)
군악대를 위한 행진곡 C 장조 WoO 20 (1822년)
*캐논 및 음악적 농담
카논 “연인의 품에 즐겁고 편한하게” WoO. 159 (1795년)
그외 100여곡의 캐논 작곡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