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48년 1월 30일,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Mahatma Gandhi / 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 ~ 1948) 타계
마하트마 간디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Mahatma Gandhi / 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년 10월 2일 ~ 1948년 1월 30일)는 인도의 정신적 · 정치적 지도자로,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시인인 타고르가 지어준 이름이다. 영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인도의 영국 식민지 기간 (1859~1948) 중 대부분을 영국으로부터의 인도 독립 운동을 지도하였다.
1890년 영국 런던 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한 그는 이후 1916년 영국 런던 대학교 법학과에서 명예 학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반영 인도 독립운동과 무료 변호, 사티아그라하 등 무저항 비폭력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인도의 작은 소공국인 포르밴더의 총리를 지냈던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종교는 부모의 영향으로 힌두교이다. 인도의 화폐인 루피의 초상화에도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실 간디는 가난하지 않은 풍족한 삶을 대학교 까지 즐겼으며, 버스에서 처음 인종차별을 받고는 비폭력 시위를 열어 많은 사상자와 사망자를 만들고, 영국에게 인도 군인들을 지원했으며, 끝까지 비폭력 시위로 많은 사상자를 만들었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 (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 (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評判) 이것뿐이오.” ― 마하트마 간디
세계적으로도 존경받는 위인이다. 1999년 4월 18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욕 타임스는 지난 1천년간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선정했다. 성웅 (聖雄)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지만 간디의 전용 칭호에 가깝다.
다만 현대에는 간디에 대한 무결점의 성인과 같은 이미지를 지우고 기존과는 다른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던 간디는 힌두교 내에서 4개의 카스트에 속하지 않는 불가촉천민 (Untouchables)에 대해서는 악담을 퍼붓는 등 심각한 신분 차별을 보이는 발언을 해왔기에 결국 힌두교적 질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사람이란 평가가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이에 반해 인도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암베드카르 박사는 불가촉 천민 출신으로 힌두교로는 인도를 발전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다른 불가촉천민들과 함께 불교로 대규모 개종을 해 카스트에 대한 저항을 실천하기도 했다.
쇼맨십이 상당히 강했으며, 자기애도 강했다고도 전해진다. 소는 인정을 해도 불가촉 천민은 인정하지 않는 신분차별적 발언들이 숱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암베트카르 박사와의 갈등이후, 그는 불가촉천민의 아이를 양자로 거두기도 하고, 그들에게 ‘하리잔 (신의 아이들)’이란 이름도 붙여주었다. 이에 대항하여, 힌두교의 카스트에 반감을 가졌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는 ‘달리트 (억압받는 자)’라고 부르기로 하고 운동을 펼친다. 당연히 현재 인도에서는 누구도 불가촉천민을 하리잔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실제 대우가 하리잔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 마하트마 간디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Mahatma Gandhi / Mohandas Karamchand Gandhi)
.본명: Mohandas Karamchand Gandhi
.별명: 마하트마
.출생: 1869년 10월 2일, 인도 제국 구자라트 주 포르반다르
.사망: 1948년 1월 30일 (79세), 인도 뉴델리에서 암살 (화기에 의한 사망)
.학력: 영국 런던 대학교 법학과 중퇴
.직업: 독립운동가, 법률가, 사상가, 정치인, 저술가
.경력: 인도 국민회의파 명예고문위원
.부모: 카람찬드 간디 (아버지), 푸틀리바이 (어머니)
.배우자: 카스토르바이
.자녀: 할리랄 간디 (아들)
.종교: 힌두교 (비슈누파)
.정당: 인도 국민회의파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민족 운동의 지도자이자 사상가로 비폭력운동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서부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나 18세 때 런던에서 법률을 배우고, 1891년 귀국하여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893년의 남아프리카 여행에서 백인에게 박해받는 인도인들을 보고 1915년 귀국할 때까지 인도인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위해 투쟁을 시작했다. 이후 아힘사 (불살생), 무소유, 무집착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적 바탕 위에 사티아그라하 (진리의 주장) 운동, 아슈람 공동체 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영국에 대한 비협력 운동의 일환으로 납세 거부 · 취업 거부 · 상품 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지도했다.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도 노력하였으며 그가 보인 평화정신은 세계인의 공감을 자아냈다.
그는 1947년 7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융화를 위해 활동하던 중 1948년 1월 30일, 반이슬람 극우파 청년이 쏜 흉탄에 쓰러지게 되었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R. 타고르로부터 ‘마하트마 (Mahatma, 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은 뒤로 ‘마하트마 간디’라 불려온 그는 인도인뿐 아니라 세계인의 가슴속에 위대한 영혼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그의 정신이 기려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도의 자치(自治)’가 있다.
○ 생애 및 활동
– 생애 초기
간디는 인도 서부에서도 사우라슈트라 주의 유명 항구도시인 포르반다르의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부모에게서 인도의 전통종교중 하나인 자이나교의 교육을 받으며,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수상으로 부임한 라지코트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배움은 없었으나 아들의 말을 믿어주고 배려하는 분이었으며, 어머니는 힌두교의 교리와 전통을 성실하게 지키는 신실한 힌두교 신자였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간디에게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한 성격과 성실한 믿음을 심어주었다.계몽사에서 펴낸 계몽사 그림위인전기 ‘마하트마 간디’ (송건호 글, 홍성담 그림, 계몽사)에 따르면 간디는 청소년 시기에 방황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따뜻하게 감싸주심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레 상처를 치유했다고 한다.
– 결혼
7살 때 이미 그는 약혼을 했었지만 약혼녀들이 모두 차례로 죽어, 세 번째 약혼녀인 상인 집안의 딸인 카스투르바이 마칸지와 13세에 결혼한다. 간디는 결혼 후 방탕한 생활을 버리고 힌두교의 교리를 충실히 지키며 성욕을 자제하기도 했다. 그는 정액은 생명력의 근원이고 정액의 배출은 몸과 머리를 약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뒤로 일생 동안 수많은 여성의 사랑을 받고 그들을 가까이 두었음에도 직접적인 성행위나 사정은 자제하였다 한다. 그는 보어 전쟁과 아프리카 전쟁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고 영국군에 지원했으나 참전하기 며칠 전 결핵에 의한 염증에 걸려서 포기해야만 했다.
– 영국 유학
1887년 인도 사밀러스 대학교 (Samaldas College)에 입학했다. 계몽사에서 펴낸 계몽사 그림위인전기 ‘마하트마 간디’ (송건호 글, 홍성담 그림, 계몽사)에 따르면, 대학생 시절 아버지 친구의 권유로 영국 유학을 결심하였는데, 당시 힌두교에서는 그의 유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온 청년들이 서방의 자유로운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힌두교 전통을 무시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힌두교 원로지도자들은 간디를 배웅하면 벌금을 물리기로 결의할 정도로 격렬하게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3년간의 영국유학생 시절 간디는 공부에 열중했으며, 개인적인 도덕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인도와는 다른 런던의 도시생활과 음식, 예절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힌두교 전통에 따라 채식을 고집하여, 멀리 떨어진 채식식당까지 가서 밥을 먹을 만큼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채식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알려주는 책과 식당을 알게 되었으며, 런던 채식주의협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는 어린시절 영국처럼 강해지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한 친구의 말에 감화되어 고기를 먹은 적도 있었지만, 힌두교 신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간디는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University College London: UCL) 에 입학, 법학을 공부하여 1891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 남아프리카 생활
대학을 졸업한 이후 간디는 1893년에 남아프리카로 떠나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게 된다. 그러나 개업 직후 남아프리카 정부에 반대하는 반정부단체를 결성하여 반정부운동을 벌이게 되는데 특히 남아프리카 정부의 자국민 보호를 위해 외국 이민자들의 신상을 기록하게 하는 법률에 강력히 반발하여 이러한 법률의 폐기를 주장하였고 이를 위한 게릴라 시위를 일으키려다 사전 발각되어 체포당하게 된다.
이후 출소한 간디는 인도에 돌아오자마자 1899년 남아프리카에서 제2차 보어전쟁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영국군 입대를 자원하게 된다. 간디는 영국군의 입대시험 및 신체검사에 무사히 합격하여 영국군의 지휘를 받게 되나 당시 서류에는 계급이 없는 지원병 신분이었다.
제2차 보어전쟁은 영연방의 지상군과 보어인으로 구성된 오렌지 자유국, 트란스발 공화국 연합군과의 전쟁이었는데 최초 2년간은 보어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버텨내었으나 전쟁을 조기 종결시키기 위해 영연방이 당시 40만의 보어인 인구수에 필적하는 35만 병력을 투입하여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말살작전을 펼쳐 결국 보어인 총 인구수의 1/4에 해당하는 10만여명을 사살하여 결국 승리하게 된다. 이 때 간디와 인도인들은 의무병과 후송 임무 등을 맡았고, 가혹한 환경 하에서 후송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대표자 격이 되어 각종 조직의 위원으로 참여하게 되나 현직 군인이었기 때문에 중요 요직에는 오르지 않았으며 다만 인도인 차별에 반대하는 탄원서에 이름을 넣는 것 정도 외에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게 된다.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번에는 영국군 모병관으로 참전하게 된다. 당시 전쟁 영웅으로 각광받은 간디를 본 수많은 젊은이들이 영국군에 지원하였는데 그 수가 수십만에 이르렀으며 종전 이후 영국군이 승리하게 되자 모병관으로서의 성실성을 인정받아 다시 한번 영국 국왕으로부터 표창을 수여받게 된다. 이후 간디가 군 생활을 마치고 퇴임함으로써 받은 정근 훈장까지 합하여 총 3개의 영국군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영국군인임에도 인도인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급할 수 없었으며 영국에서도 인도인 신분으로 각종 차별대우를 받게 된다. 특히 1919년 영국에 반대하는 인도인을 영장없이 처벌할 수 있는 롤레트 법이 통과되었고 이 때문에 자신 또한 영국에서 배척당하게 되자 결국 정치계에 입문하여 본격적인 인도 독립운동을 이끌게 된다. 독립운동을 시작할 당시의 간디의 나이는 50세였다.
여담으로 가장 존경하는 남아프리카인은 보어인이었던 얀 스뮈츠 수상. 스뮈츠 역시 간디와 편지와 선물을 주고받았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고, 자신의 여러 저서에도 간디를 언급한 만큼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고 한다. 스뮈츠가 휴머니스트이고, 남아프리카 내 인도인의 처우 개선에도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 크다. 스뮈츠는 또한 제 1 야당 남아프리카 연합당의 당수인 만큼 국민당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집권과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했다.
– 독립운동
간디는 남아프리카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귀국 전 이미 별세한 뒤였다. 인도 라지코트와 봄베이에서 변호사생활을 시작했지만 법정에서 말 한 마디 못하고 물러날 정도로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간디는 1년간의 계약으로 남아프리카의 인도계 상사에서 근무하였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 에서의 생활은 간디가 백인들에게 교통시설 이용, 취업 등에서 차별당하는 동족들을 보면서 독립운동을 다짐하게 했다.
1893년 남아프리카의 나탈에 부임하여,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인도인들이 받고 있는 차별 대우를 깊이 체험하여 인종 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만들었다. 또한 톨스토이주의에 의거한 ‘비폭력 투쟁’의 단서를 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트란스발 정부가 인도인 이민 제한을 위해 부과한 지문 등록을 거부하는 운동을 일으키다가 여러 번 투옥되었으나, 마침내 철회를 쟁취하였다.
남아프리카의 프리토리아에서 살던 시절 간디는 동포들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찾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1894년 6월, 1년 계약이 끝나고 환송잔치 자리에서 우연히 나탈 의회가 인도인의 선거권 박탈을 입법화하려 한다는 신문기사를 읽게 됐다.
1894년 7월 정치운동가로 변신한 그는 나탈 지방의회와 영국 정부에 보낼 탄원서를 작성하고 수백 명의 서명을 받았다. 인도인 차별법의 입법은 막는 것에는 실패하였으나 나탈·영국·인도에까지 나탈 인도인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홍보하는 데 성공했다. 1894년 더반에 머무르기로 결심한 그는 ‘나탈 인도국민회의’를 창설하고 인도인의 단결심을 고취시켰다. 또한 인도인에 대한 차별대우의 실상을 국제사회의 여론에 널리 알렸다.
제1차 대전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노동 운동, 민족 해방 독립 운동의 지도에 전념하였다. 1915년 이후 1918년까지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기는 했지만 정치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했던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1919년 반영운동을 하면 체포영장 발부 등의 적법한 절차없이 무조건 잡아갈 수 있는 즉, 반영운동을 이전보다 더욱 가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롤래트 법이 제정되자 그는 영국의 지배에 다시 반기를 들고 “빵을 구하는 데 돌을 준다”고 항의하면서, 전 인도인에게 영국 상품의 불매·납세 거부·공직 사퇴 등 영국에 대해 폭력없이 저항을 할 것을 호소하였다. 1919년 봄 그는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선언하고 민중운동이 발생했지만 400명의 인도인이 영국군의 무자비한 발포로 학살당하면서 운동은 주춤하기도 했다.
1922년 체포되었으나 병으로 출옥하였으며, 1925년 국민 회의파 의장이 되었다. 1942년 영국에 대하여 인도 철퇴의 요구, 불복종 운동을 일으키다 투옥되었다. 석방된 후에도 인도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델리에서 인도와 파키스탄과의 융화에 전력하였다.
– 독립 이후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드디어 영국에서 독립을 했으나, 이슬람교도는 파키스탄으로, 힌두교도는 인도로 가는 민족분열이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종교갈등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하자, 간디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일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은 극단적 보수파 힌두교 신도들에게는 이슬람교도를 편드는 것처럼 보였으며, 결국 1948년 1월 30일에 뉴델리에서 열린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반이슬람 성향의 힌두교 급진주의 무장 단체 국민 의용단의 나투람 고드세에게 총을 맞아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는 79세였다.
1930년 그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간디는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자에 4번이나 올랐으나 끝내 수상하지 못하였다.
○ 사상
간디의 사상의 근본은 아힘사 (무상해)였다. 간디는 정치적인 폭력을 거부했으며 인류애를 통한 폭력 부정을 그대로 정치활동에 실천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은 몇 개의 단어로 대변한다면, 아힘사 (비폭력), 사티아그라하 (사티아 [진리]의 그라하 [파악 ·주장]), 브라흐마차리아 (감각의 완전한 통제, 금욕), 아파리그라하 (무소유) 등을 들 수 있다. 불살생을 실천하기 위해 간디는 평생 채식을 했으며, 진실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했으나 그 방식은 비폭력이었으며,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 브라흐마차리아 또는 해탈에 이르기 위해 금욕을 실천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신실한 힌두교도였으나, 다른 종교와 그 교리에도 관심이 많아 성경을 비롯하여 다른 경전 역시도 많이 읽었다. 하나된 인도를 꿈꾸었던 그가 여러 종교가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 여러 종교에 관심을 보인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디는 의외로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민인 불가촉천민에게 우호적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이들의 인권 개선 운동을 적극적으로 방해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무슬림들과 시크교도들의 분리선거는 인정하면서도 불가촉천민의 분리 선거를 반대하며 금식까지 불사하였던 인물이고, 하리잔이라는 이름 역시 그런 그를 향한 불가촉천민들의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꺼낸 카드에 불과했다. 간디는 불가촉천민 해방에 있어서,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와 가장 날카롭게 대립했던 인물 중 하나이다.
○ 명언들
“나는 그리스도교도이자 힌두교도이자 이슬람교도이자 유대인이다.”
“나는 예수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싫어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스스로를 예수의 제자라 부르면서도 예수를 닮으려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간디가 이 말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일부 존재한다.)
“진리를 찾아가는 자는 티끌보다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새로운 진리가 드러나면 그에 따라 생각을 바꾸는 것이 진리에 대한 일관성이다.”
“내가 머물러 있어야 한다면 하나의 심부름꾼으로 머물러 있겠습니다.”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3등차로 여행해야 한다.”
“남들이 단순하게 살 수 있도록 검소하게 살라.”
“비폭력은 인류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폭력으로 얻은 승리는 패배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우리는 힘사 (폭력) 속에 갇힌 무력한 인간들이다.”
“눈에는 눈 (식의 보복)을 고집한다면 모든 세상의 눈이 멀게 될 것입니다.”
“나는 폭력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폭력이 선을 행한 듯 보일 때, 그 선은 일시적일 뿐이고, 그것이 행하는 악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솔직한 (의견) 차이는 대개 진보를 위한 건강한 신호다.”
“자신의 지혜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가장 강한 것도 약해질 수 있고, 가장 지혜로운 것도 틀릴 수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 건강하다.”
“양심에 있어 다수결의 원칙은 설 자리가 없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6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 뿐이오.”
“When I despair, I remember. that all through history the way of truth and love has always won. There have been tyrants and murderers and for a time, they can seem invincible but in the end, they always fall. Think of it. Always.” “절망에 빠졌을 때, 나는 기억한다. 모든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진리와 사랑이 승리했다는 것을. 독재자도 살인자도 있었고, 그들에게 당장 대항할 수 없어 보여도 결국엔 무너진다는 것을. 이것을 생각하라. 언제나.”
“세계의 모든 나라가 다 반대를 하더라도 온 인도가 다 일어나서 나를 잘못이라 하더라도 나는 나서련다. 인도를 위해서 또 세계를 위해서. 나도 지금 우리 나라가 순수한 비폭력의 정치 불복종 운동을 하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군사가 준비되지 못한다고 도망을 가는 장군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신은 내게 가장 귀한 비폭력의 무기를 주셨는데, 만일 내가 오늘의 위기에서 그것을 쓰기를 꺼린다면 신은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 고통받는 세계에 비폭력이라는 좁고 곧은 길 외에는 희망이 없다. 나와 같은 수백만 명이 자신의 평생 동안에 이 진리를 증명하는 데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실패일 뿐 절대 이 영원한 법칙의 오류는 아니다.”
“항상 생각과 말과 행동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도록 하십시오. 늘 생각을 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자제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직 자제를 실행하는 한에서만 사람다운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모든 소유를 내버릴 수 있을까. 내 몸부터 훌륭한 소유가 아닌가.”
“내가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한, 아내에 대한 나의 성실함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노예의 쇠사슬을 끌고 정규 교육을 받느니 차라리 자유를 위하여 무지한 채로 돌을 깨는 편이 낫다.”
“나는 민중을 알게 되었고 민중은 나를 알게 되었다.”
“관용과 사랑과 참이 있을 때는 서로 차이가 있어도 유익했다.”
“신에게 건강한 신체를 내놓는 일은 경건한 사람의 의무다.”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관리인처럼 행해야 한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면서도 동전 한 푼도 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할 수 있으면 모두가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동포를 천대하면서 자기가 높아진 듯이 여기는 것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
“나는 늘 가난한 사람들 속에 뛰어들었고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어떤 이에게서 신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를 더 알려고 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24시간 매분마다 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동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알 수 있다.” (※ 동물보호주의에서 자주 인용하는 문구이나, 실제로 간디가 이 발언을 했는지의 여부나 출처는 제대로 확인된 바가 없다.)
“세상에는 일곱 가지 죄가 있다. 노력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도덕성 없는 상업, 인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기도, 원칙 없는 정치.”
” 7가지 악덕, 1.철학 없는 정치2.도덕 없는 경제3.노동 없는 부4.인격 없는 교육5.인간성 없는 과학6.윤리 없는 쾌락7.헌신 없는 종교” (※ 출처 : 마하트마 간디 추모공원에 새겨진 그의 묘비명)
“약한 자일수록 상대를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한다는 것은 강함의 증거이다.”
“내일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십시오.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배우십시오.”
“권리의 진정한 근원은 의무이다.”
“My Life is My Message; 나의 인생은 나의 전언이다.”
○ 가족 관계
.아버지 : 카람찬드 간디
.어머니 : 푸틀리바이
.아내 : 카스토르바이, 하릴랄 간디, 마닐랄 간디
.손자 : 아룬 마닐랄 간디
○ 관련 저서들
《간디 자서전》(박홍규 역, 문예출판사, 2007)
《날마다 한 생각》(함석헌 역, 출판사 호미, 2001)
《힌두 스와라지 (Hind Swaraj)》(안찬수 역, 출판사 강, 2002)
《만화 간디 자서전》(서기남 書, 박수로 畵, 주니어김영사, 2009)
○ 평가와 비판
– 평화주의자
그의 종교 사상의 근본은 아힘사 (무상해)였고, 인류애에 의한 폭력 부정만이 최후의 승리임을 확신하고 이를 그대로 정치 활동에 실천하였다. 육체적 욕망을 극도로 제한하고, 때로는 금식에 의해 속죄하였다. 또한 인도 인습인 사회적 계급 제도의 타파에 노력하였으며 불가촉천민의 해방을 실천하였다. 진실을 사랑하고 기만을 증오하였으며, 사회악에의 철저한 반항이 정치 활동의 강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일생 동안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폭력을 거부했는데, 그의 비폭력주의는 나라 안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18년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 역할을 맡은 것을 전후로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서면서, 간디는 인도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또 그 때부터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 (Mahatma)’로 불리게 되었다. 간디 자신은 이런 명예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마하트마 간디로 불린다. 1999년 4월 18일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지난 1천 년간의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선정하였다. (뉴욕타임스 1999년 4월 18일자 “Best Revolution; The Peacemaker”)
– 종교적 너그러움
간디는 종교적으로 너그러워서 힌두교 이외의 종교인들과도 교류하였다. 그의 친구중에는 감리교 선교사인 스탠리 존스가 있었다. 스탠리 존스가 간디에게 기독교가 민중들에게 다가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지혜를 구하자, 간디는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삶”을 제안하였다.
– 비판
.사회운동의 모순
간디는 거룩하고 활발한 사회운동을 했지만, 노동자들에게 간디는 자본가들을 위해 봉사하는 지식인에 불과한 측면도 있다. 그는 1917년 파업권이 없는 노동조합결성 지원을 자본가들에게 제의해서 구자라트 주의 노동운동을 침체시켰는데, 이는 활발한 노동운동으로 노동인권을 쟁취해 간 봄베이의 노동자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또한 1935년 가족임금제도 (가족 중 한 명이 실직시 다른 가족의 임금을 인상하는 제도)를 받아들여, 힘없는 여성과 노인노동자들이 해고당하게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전쟁에 협력하면 인도를 독립 시켜주겠다는 영국의 회유에 현혹되어 인도의 전쟁가담에 관여했는데, 이는 그의 비폭력주의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 참고로 비폭력주의는 대국인 인도 실정에는 부합할 수있지만 약소국의 독립운동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어 실제로 많은 식민지 나라들이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모순된 행동
성윤리의 모순: 또한 1990년대 이후 간디의 부적절한 사생활이 알려지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간디 스스로도 성욕을 자제하는 것이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라고 어려움을 고백하기도 했지만, 환갑이 넘어도 끊이지 않는 몽정을 속죄하기 위해 발가벗은 수 명의 여성들과 함께 자기도 했다. 새색시에게 몸으로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해 줄 것 부탁했는데, 알몸로 간디의 몸을 데워 주었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다른 여자들에 대한 질투심이 있었지만 간디로부터 받는 사랑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거절하지 못했다.
어린 소녀들과 동침한 일에대해 평소 고백을 하기도했었지만, 실상은 서양의 회춘법인 스네미티즘을 신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증손녀뻘 되는 친족인 마누 간디와도 동침하였는데, 작가 월리엄 샤일러는 이를 두고 ‘여성의 질투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바람둥이’라고 비판하였다.
지나치게 엄한 아버지: 그의 아들 할리랄 간디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도 독립운동 등에 투신하며 ‘작은 간디’ 라는 이름을 얻으리만큼 노력하였으나, 자식을 소유물로 여겨 모든 것을 지배하려던 아버지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한다. 위대한 남자들도 자식 때문에 울었다의 저자 모리시타 겐지로부터 ‘아들은 아버지의 위대한 삶을 위한 제단에 바쳐진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구이언: 그의 아내인 카스트루바이가 폐에 염증이 생겨 호흡기 질환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때 영국인 의사는 항생제를 주사하면 치유가 가능하다고 설득했지만 그는 영국인 의사의 진료를 믿을 수가 없다며 거절하였다. 아내가 죽고 며칠 뒤 그는 학질을 앓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그는 영국인 의사에게 진료를 부탁했다. 장염에 걸렸을 때에는 영국인 의사의 시술을 받기도 하여 비판을 받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