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
수전 손택 / 이후 / 2007.7.20
수전 손택은 자신을 비평가나 에세이스트가 아니라 ‘소설가’로 불러 주기를 바랐다. 『In America』에서 손택은 이미 그것을 증명한 바 있지만 이 소설의 발간과 더불어 손택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게 될 것이다. 예술적인 실험, 내면의 고백, 철저한 비판 의식으로 무장한 여덟 편의 짧은 이야기를 통해 ‘소설가 수전 손택’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여덟 편의 작품에는 현대 도시와 문명, 미국 사회에 대한 통렬한 은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진보적 에세이스트로 겪었던 조직 생활의 부조리 등을 담은 다양한 형식의 소설들이 담겨있다.
○ 목차
인형
지킬 박사
미국의 영혼들
베이비
사후 보고
중국 여행 프로젝트
안내 없는 여행
오랜 불만을 다시 생각함
옮긴이의 글 – 결국에는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간다 _ 김전유경
○ 저자소개 : 수전 손택 (Susan Sontag)
미국 최고의 에세이스트이자 평론가, 소설가로 1933년 1월 뉴욕에서 태어났다. 첫 소설 ‘은인’ (The Benefactor, 1963)과 에세이 ‘캠프’에 대한 단상’ (Notes on ‘Camp’, 1964)을 발표하면서 문단과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66년 평론집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서구 미학의 전통을 이루던 내용과 형식의 구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에 반기를 들며 화려한 명성을 얻었다. 그 뒤 극작가,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문화비평가, 사회운동가 등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한 손택은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이자 ‘뉴욕 지성계의 여왕’, 그리고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로 미국 문화의 중심에 우뚝 섰다.
미국 펜클럽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1987 ~ 1989)에는 한국을 방문해 구속 문인의 석방을 촉구했고, 1993년에는 사라예보 내전 현장에 가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상연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도 아낌없이 보여 줬다.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사진에 관하여’ (1977)와 ‘전미도서상’ 소설 부분 수상작인 ‘인 아메리카'(1999)를 비롯해 네 권의 평론집과 여섯 권의 소설, 네 권의 에세이, 네 편의 영화 시나리오와 두 편의 희곡이 있으며 현재 32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파리의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 역자 : 김전유경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M.C. 에셔 : 무한의 공간』, 『그는 지도 밖에 산다』, 『강조해야 할 것』, 『성 정치학』, 『별에서 온 아이』, 『그렌델』 등이 있다.
○ 독자의 평 1
수전 손택처럼 별명을 많이 얻은 여류비평가도 드물다. 가령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그런데 미국의 어느 보수주의 비평가는 손택에게 ‘문학계의 뚜쟁이’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선사한 바 있다. “미국은 대량학살 위에 세워졌다”는 독설을 퍼부은 양성애자에게 보수파가 붙일 수 있는 모욕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은 내가 난생 처음 접한 손택의 소설이다. 당초 예상과는 달리 무척 맘에 들었다. 손택의 소설은 《화산의 연인》과 같은 장편소설이 유명하지만 70년대 10여년에 걸쳐 쓴 8개의 단편들을 진지하게 읽어보는 것도 미국 문학의 전통에 한발 더 가깝게 다가선다는 의미가 있어 더 뜻깊지 않나 싶다. 이때는 암이 손택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던 시기지만 손택은 아이와 같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를 글에다 녹여냈다. 손택은 자신을 비평가나 에세이스트가 아니라 ‘소설가’로 불러 주기를 바랐다. 나는 저자의 이런 바람이 사실 문화사적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라고 본다. 나는 저자의 ‘소설가’에 대한 숭배에서 문학이 미학과 철학과 종교를 대신하리라는 그미의 은밀한 욕망을 읽는다. 철학은 미학에게 자리를 건넸고 미학은 문학에게 다시 자리를 건네야 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역자는 이 단편집의 주제가 “삶으로의 회귀”라고 설명한다. 그것도 부정적 현실로의 힘없는 복귀가 아니라 부정까지 끌어안은 삶을 긍정하는 강건한 회귀라고 역설한다.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알레고리적 서사로 <미국의 영혼들>과 <베이비>를 언급하고, 현대인의 일상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인형><지킬박사><사후 보고>를 언급한다. 그리고 손택의 개인적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 자기 고백적 서사로 <중국 여행 프로젝트>와 <안내 없는 여행><오랜 불만을 다시 생각함>을 거론한다.
<인형>(1963)에서 주인공은 현대 사회의 단조로운 일상을 자기 대신 살아줄 복제인간을 만든다. 그런데 인형에게 일상적 삶을 맡긴 후 정작 주인공은 권태의 늪에 빠져 부랑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우리 삶의 의미는 단조로운 생활을 견디는 데서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과 똑같은 인형을 복제해 낸다 할지라도 앞으로 벌어질 생은 예측 불허이기에 결코 안전할 수가 없다.<지킬박사>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다룬 명작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다시 쓴 작품이다. 사이비 교주 어터슨의 종교단체에 소속된 지킬 박사는 하이드를 살해하려 한 죄목으로 감옥에 수감된다.
<사후 보고>는 자살로 생을 마친 뉴욕 여인 줄리아를 통해 뉴욕의 세속도를 그려낸 우울한 드라마다. ‘가난한 떠돌이’ 줄리아의 자살은 도시의 고통과 삶의 공포에 대한 저항이자 고발인데, 이야기 곳곳에 화자의 감상을 빌어 손택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모럴리스트적인 글도 보인다. 다음과 같은 글들이 바로 저자의 평소 생각을 드러낸 글이다.
“우리는 써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내 머리 속에 있는 이 모든 잡다한 것들을 보라. 로켓, 베니스의 교회들, 데이비드 보위, 디드로, 누옥 맘, 빅맥 햄버거, 선글라스, 오르가슴. 신문과 잡지를 얼마나 많이 보는가? 사탕이나 수면제나 절규 치료법이 내 이웃이듯이, 그것들도 내 이웃이다.”(229-30쪽)
“누군가와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기억되는 모든 것은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감동적이고, 보석 같다. 최소한 과거는 안전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에 있으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남았으니까.”(236쪽)
미국은 절제의 국가가 아니라 소비의 국가다. <미국의 영혼들>은 색정의 세계에 빠진 ‘평면 얼굴’ 아가씨와 ‘음란’ 씨의 이야기로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탐색이다. 여기서 ‘상반된 가치들의 혼재’는 미국 사회의 특징으로 부각된다. <베이비>는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을 소재로 한 매우 실험적인 작품이다. 의사의 말이 모두 생략되어 있는데 환자의 말로 미루어 미국 사회의 부모자식 관계를 알레고리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중국 여행 프로젝트>는 가지 않은 중국에 대해 미리 쓴 기행문이다. 손택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 그곳에서 사망했고, 손택의 어머니는 중국에서 그녀를 임신했다. 그만큼 중국은 손택의 정체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오랜 불만을 다시 생각함>은 세상을 변혁시키려고 운동조직에 몸담은 멤버가 조직을 떠나려고 하면서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 독자의 평 2
수전 손택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정작 그녀의 작품은 읽어볼 기회가 없던중 이웃 블러거 양송이님께서 보내주신 책 중에 그녀의 책이 두 권이나 있었기에 드디어 그녀의 작품을 만나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미국 뉴욕에서 유태인 부모로부터 태어났는데 원래 그녀의 성은 ‘로젠블랏’이었다가 그녀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가 재혼을 하게 되었고, 그런 와중에 새아버지의 성을 따라 ‘손택’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어 찾아본 것이었지요.
그녀는 아리조나주 턱손에서 그리고 로스엔젤레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걸로 되어 있고, 대학은 버클리를 다니다가 University of Chicago에서 철학, 문학을 공부했고, 또 하버드에서 이론학을, 영국 옥스퍼드, 프랑스 소르본에서도 수학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 여러 장소를 옮겨다니며 여러 학문에 힘쓴 덕분에 그녀의 사고가 좀 더 유연하면서도 독특해진 것 같단 제 나름대로의 추측도 해보았구요.
그녀는 또 17 세에 결혼을 해서 아들 하나를 남기고 8 년의 결혼생활을 끝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제가 보통 때와 달리 이렇게 한 작가의 생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그녀에게 관심이 가서이기도 하지만 어떤 작품을 읽기 위해서 유난히 그 작가의 성향과 가치관에 천착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 수전 손택이란 유명 작가이자 수필가, 예술평론가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읽기 수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사상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경이 없을 경우에는 한 여인의 시니컬한 독백을 그저 받아내어야만 하는 것인지 내지 그녀만의 세계라는 거대한 미궁을 헤매는 듯한 감성에 당황하게 되어 쉽사리 그녀의 글들을 포기하게 될 것 같단 느낌을 그녀의 첫 작품에서부터 강렬하게 받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 자신 바로 이런 느낌으로 다른 책에 비해 진도가 훨씬 더디게 나간다는 걸 절감했기에 말입니다.
대개의 경우 책이 어렵다고 느껴질 때 우리들은 두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고 봅니다.
모르는 채 그대로 책 읽기를 진행시키는 경우와 결국엔 책뚜껑을 덮어버리고 마는 경우 두 가지지요. 그렇게 포기하다가 언젠가 다시 책을 펼쳐들 수도 있긴 하지만 또 대개는 그냥 영원히 덮어버리는 수도 많구요. 부디 이 책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읽었다면 제가 얼마나 이 작가와 작품에 애정을 가지려고 노력했는지 아시겠지요?
제 경우를 보자면 책이나 영화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 감상도 변한다는 것을 또 경험으로 알기에 지금 마음에 안 든다거나 이해가 안되었던 것들을 주로는 후에 다시 시도하는 편인데 그녀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가장 답답했던 부분은 제가 그녀가 말하고
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정확히 판단내릴 수 없었단 것이랍니다. 왜냐면 그녀를 전혀 알지도 못했고, 그녀의 사상과 가치관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저 보이는 그대로를 읽으면서 제 나름의 느낌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면 또 여지없이 드러나는 저의 무지에 짜증이 나기도 여러 번이었고, 또 그러다 보면 이거 그냥 한 여자가 횡설수설하는 걸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란 의심도 솔직히 몇 차례 들었답니다. 그렇게 보통의 독서 방식과 다르게 천천히 책장을 넘기면서 읽었던 단편들이었는데 그 중에서 오늘은 역시 다른 때와 달리 한 편에 대해서만 이야기할까 합니다.
먼저 이 책에서 맨 처음으로 소개되는 ‘인형’이란 작품은 다 읽은 후 찾아보니 그녀가 1963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던데 어떻게 그 당시 이미 인간의 복제란 문제를 점칠 수 있었는지 놀라웠습니다. 한 마디로 그녀가 미국의 지성으로 알려진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던 충분한 증거를 발견한 셈이라고나 할까요? 그녀의 혜안이 놀라우면서도 그녀의 예지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게 확실하단, 일종의 자극을 받게 되었지요.
더불어 제 자신도 더욱 노력해야겠단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런데 인간 복제란 문제가 이미 그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던 그런 사안은 아니었겠지요?
이 소설은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과 똑같은 인형을 복제해 낸다 할지라도 앞 으로 벌어질 생은 예측 불허이기에 결코 안전할 수가 없다는, 다시 말해 아무리 지겹고 따분한 현실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쳐봤자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또 이전과 크게 변할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한다는, 결국 처음과 별 차이없는 그런 일상의 연속이라는 대단히 비관적인 결론을 인식시켜 줍니다. 물론 누구라도 예외가 없다는 것에서 조금의 위로를 받을 순 있었지만 분명 슬픈 현실을 정확히 찔리게 되니 “아얏!~” 소리가 절로 나오더군요.
또한 우리가 늘 접하면서 잘 안다고 믿는 가족조차도 어쩜 우리들의 변화에 그리 예민한 반응을 보여줄 수 없는 슬픈 관계로 전락하고만 현대사회의 사랑 부재, 개별성에 대해서 작가는 소리 높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또 해봤습니다. 우리 모두 결국 혼자일 수 밖에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또 꼬집고 싶었는지두요. 그러니 그녀의 표현이 그렇게나 냉소적이지~ 싶었구요.
그리고 결국 아무리 자신을 분열시키고 또 분열시켜봤자 돌아오는 결과를 몽땅 끌어 안아야 하는 건 오로지 자신 스스로라는 걸 깨달게 만들면서 일상에서 느끼게 되는 무료함에서 비롯된 헛된 망상의 여지를 싹둑 자르는데 일조하긴 했습니다…만, 이러다 또 언제 다시 싹이 자라 시시콜콜 투덜거리면서 내 맘대로 공상의 나래를 펴댈지는 장담할 수가 없네요.
그런데 어쩜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우리들의 불완전성과 그와 동시에 일탈을 꿈꾸는 우리의 희망을 묘하게 겹쳐 보여주므로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게 하려는 게 아니었을까란 망상(?) 혹은 공상을 또 해보게 되었지요. 독특한 그녀만의 시선으로 우리들을 주목하게 만들고 우리들을 일깨우면서 ‘인생, 그거 뭐 별 거
있나?’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단편을 다시 여러 번 읽으며 그녀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탐구해봐야겠단 결론에 도달했고, 그렇게 하려니 기운이 솟음과 맥 빠짐이 동시에 펼쳐지는군요.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