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89년 1월 23일,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 판화가 · 영화 제작가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1904 ~ 1989) 서거
20세기 초, 스페인에서 태어나 다재다능한 재능과 퍼포먼스로 회화와 영화 모두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본명은 살바도르 도밍고 펠리페 하신토 달리 이 도네메크 (Salvador Domingo Felipe Jacinto Dalí i Domènech, 1904년 5월 11일 ~ 1989년 1월 23일)으로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판화가, 영화 제작가이다.
–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본명: 살바도르 도밍고 펠리페 하신토 달리 이 도메네크 (Salvador Domingo Felipe Jacinto Dalí i Domènech)
.출생: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피게레스
.사망: 1989년 1월 23일, 스페인 피게레스
.국적: 스페인
.학력: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미술학교
.배우자: 갈라 달리
.활동 분야: 회화, 영화
.종교: 무신론자
.작위: 초대 푸볼의 달리 후작 (1982~1989)
.전시 장소: 뉴욕 현대 미술관, SCAD Museum of Art, 달리 극장·박물관, 시카고 미술관
.예술 사조: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탈인상주의, 인상주의, 사실주의, 입체파, Abstract ar
.시리즈: The Madonna of Port Lligat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데스티노, 황금시대, Salvador Dalí: In Search of Immortality
“세상은 나를 우러러볼 것이다. 어쩌면 나는 경멸당하고 오해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대한 천재가 될 것이고, 그것만은 확실하다.”
(The world will admire me. Perhaps I’ll be despised and misunderstood, but I’ll be a great genius, I’m certain of it.) _ 살바도르 달리
○ 생애 및 활동
살바도르 달리는 카탈루냐의 피게레스(Figueres)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형 이름 또한 살바도르였다. 그가 태어나기 9개월 전인 1903년 8월 1일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 또한 살바도르였는데 중산층 변호사였다.
마드리드의 미술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28년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와 작가들과 사귀고,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그의 수법은 ‘환상적 사실주의’라고도 불린다. 또, 영화 ‘황금시대’를 제작한 외에 로트레아몽의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의 삽화를 그렸다.
뒤에 미국에 건너가 정통적 초현실주의를 떠난 후, 가극·발레의 의상 등 장식 예술 분야에서도 활약하였다. 또 디즈니와 협력하여 드라마 제작에도 종사하였다. 귀국 후의 작품으로 ‘잉태한 성모’가 있다. 제 2 차 세계대전 후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고 그의 아내인 갈라(Gala Eluard Dalí)를 성모 마리아에 비유한 종교화를 연작했다. 갈라는 달리의 뮤즈이자 통치자이자 매니저였다. 그는 또한 독일의 히틀러를 찬양해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의 히틀러에 대한 숭모는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항상 제복에 꽉 조여진 히틀러의 부드럽고 살찐 등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벨트에서부터 어깨까지 가로지르는 히틀러의 가죽끈을 그리려 할 때마다 군복으로 포장된 그의 살의 부드러움에 두근거리는 바그너적 황홀경에 빠진다. 나는 사랑의 행위 중에도 이같은 극도의 흥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또 달리는 히틀러를 소재로 ‘히틀러의 수수께끼'(The Enigma of Hitler, 1938)라는 그림도 그렸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달리는 스페인에서 달아났는데 조지 오웰은 이런 그를 “쥐새끼처럼 달아났다”며 비판했다. 달리의 자서전에 대한 1944년의 주목할만한 연구에서, 조지 오웰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들은 달리가 훌륭한 기초자이면서 역겨운 인간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머리 속에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달리는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카탈로니아에 귀국 한 후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의 권위주의 정권과 밀착했다. 달리의 성명 중 일부는 “스페인에 파괴적인 세력(공화주의자들)을 제거하는”것을 목표로 한 프랑코의 행동에 대해 축하의 뜻을 전달했다. 달리는 프랑코에게 감옥에 갇힌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한 것을 칭찬하면서 전보를 보냈다. 그는 개인적으로 프랑코를 만났고, 프랑코 손녀의 초상화를 그려줬다.
달리는 또 2차 세계대전 후 원자폭탄을 찬미하는’멜랑코리, 원자, 우라늄의 목가'(Melancholy, Atomic, Uranic idyll, 1945)라는 그림도 그렸는데 멜랑코리라는 제목 덕분에 이 그림은 종종 전쟁의 비극과 핵폭탄에 대한 경고로 읽히곤 하였지만 이는 적절한 해석이 아니다. 달리는 또 비키니 섬에서 벌어진 핵실험을 소재로 ‘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Three Sphinxes of Bikini, 1947)라는 작품도 그렸다.
– 달리와 갈라
1929년 카다케스의 집에서 많은 이들을 초대한 가운데 달리는 운명적인 뮤즈, 갈라(본명은 엘레나 이바노브나 디아코노바(Elena Ivanovna Diakonova, Елена Ивановна Дьяконова)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당시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갈라는 달리의 열성적인 구애에 흔들려 연정을 품게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파리에서 달리의 개인전이 열리던 도중 동반 도주하여 홀연히 잠적했으며, 이후 갈라는 1934년 폴 엘뤼아르와 이혼하고 1월 30일 달리와 결혼하게 된다. 이때 갈라가 40세, 달리는 30세 였다.
이후 갈라는 달리의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그녀는 달리의 매니저로서 그의 작품전시와 일정 조정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모든 전시장소 계약과 작품 판매는 모두 그녀의 손을 거쳐 성사되었다. 때때로 그녀는 달리의 그림에까지 직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달리는 갈라를 매우 사랑했다. 주변인들은 ‘달리는 갈라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을 정도. 그는 오직 갈라만을 위해 발레 공연을 기획하고 무대를 제작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갈라는 젊음에 대해 매우 집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성형수술까지 감행했다. 또한 피부를 위해 고가의 화장품들을 사용하고 병원의 시술을 받기도 했다.
달리의 아버지는 불륜 관계에서 시작되었던 갈라와 달리의 결혼에 대해 매우 반대했다. 그 와중에 그의 아버지는 달리가 프랑스 전시에서 ‘나는 그저 재미로 어머니의 초상화에 침을 뱉곤 한다’라고 인터뷰 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달리의 아버지는 당연히 매우 화를 냈으며 그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지만 달리는 거절했다. 결국 달리는 1929년 상속권을 박탈당했으며 또한 카다케스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말것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다음 해 여름, 달리와 갈라는 포르트리가트(Port-lligat) 해변에 작은 오두막을 사 들이는 것을 시작으로 몇년에 걸쳐 주변의 땅과 오두막들을 매입해 빌라를 건축했다. Port-lligat과 카다퀘스는 매우 가까운 거리이고, 이후 아버지는 달리와 그의 아내 갈라를 차츰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일본의 록밴드인 Galla의 초기 이름인 ‘GALA’는 이 갈라 여사로부터 따온 것이라고 한다.
– 말년
찬란했던 전성기가 무색할 만큼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1968년 달리는 갈라에게 지로나의 성을 사 주었다. 그리고 달리는 갈라의 요청에 따라 그녀의 허락 없이는 그 성에 접근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였다. 자신의 오랜 뮤즈가 멀어지자 달리는 신경쇠약과 우울, 그리고 건강 악화를 겪는다. 하지만 1970년대 달리는 사생활과 달리 작품활동은 아직 정정했다. 1969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무대연출과 프로그램 컨셉 아트를 만들기도 했으며, 피게라스에 달리 미술관을 세우기 위한 재단을 창설했으며 미술관의 천장화 제작에 참가하였다. 또한 뉴욕에서 최초의 입체 작품을 전시하는 등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76세가 되던 1980년, 중풍의 영향으로 달리는 붓을 잡기가 힘들 만큼 수전증에 시달리게 된다. 갈라의 불륜이 지속되면서 달리는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그녀를 폭행하여 갈비뼈 두개를 부러트리고 갈라는 흥분한 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리움을 투여했는데, 적정량을 넘어선 투약으로 달리는 혼수상태가 되어버리고 또 이것을 처치하기 위해 암페타민이라는 중추신경 자극제를 투여하게 된다. 이러한 약물 칵테일이 달리의 신경계에 나쁜 영향을 끼쳤고 그의 정신병은 더욱 심해지며 몸을 떨기까지 했다. 이 무렵 갈라는 노인성 치매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2년 달리는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후작 작위(Marqués de Dalí de Púbol)를 받게 되었지만 갈라가 같은 해 6월 10일 8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고, 이후 달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게 된다. 1984년 그의 집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친구들이 그를 구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달리는 화상을 입었으며, 일부 시각에서는 이 화재가 달리의 자살기도라고 보기도 한다. 달리는 심부전으로 1988년 11월 입원한다. 1989년 1월 23일 아침 그는 8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가 죽음을 맞이한 곳은 자신이 태어난 집과 불과 세블록 떨어진 거리였다. 그의 장례는 Sant Pere 교회에서 치루어졌으며 카를로스 국왕이 그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그의 시신은 자신의 미술관인 피게라스 극장 미술관에 안치되었다.
자식은 없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다가 2017년 7월 난데없이 61세인 빌라 아벨 마르티네즈라는 여성이 딸이라고 주장하며 3700억이 넘는 달리 재산(사회단체에 속해져있다고)의 상당수 상속을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논란 끝에 28년만에 묘지가 파헤쳐졌고 피부와 손톱, 뼈에서 DNA 샘플이 채취됐다. 스페인 국립 독성학 법의학 연구소에서 이 샘플을 통해 DNA조사를 하게 되었으나 사실이 아닌것으로 결론났다. 이번 분석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서 그 여성은 묘지 발굴 비용을 물어내야할 처지에 놓였다. 반대로 달리 재단은 고인을 모독한 사기극이 끝났다라고 자평.
○ 주요 작품
– 회화
.삶은 콩으로 만든 부드러운 구조물(내란의 예감)
.기억의 지속 – 그의 대표작들 중 하나. 살바도르 달리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작품이다. 제6차 교육과정 미술 교과서에는 ‘기억의 습작’으로 번역되었다. 원제는 La persistencia de la memoria다.
–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1928년, 안달루시아의 개, 각본, 출연
.1930년, 황금의 시대( L’Age d’Or), 각본
.1945년, 스펠바운드(Spellbound), 연출
.1970년대, 듄(Dune), 출연(불발)
.2003년, 데스티노(Destino), 각본, 연출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