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2월 4일, 독일 루터교회 목회자 · 신학자 · 반 나치운동가로 ‘독일의 행동하는 양심’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 ~1945) 출생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년 2월 4일~1945년 4월 9일)는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반 나치운동가이다. 고백교회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외국 첩보국 (독: Abwehr)의 구성원에 의해 진행된 계획에 가담하였다. 그는 1943년 3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결국 독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1945년 4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출생: 1906년 2월 4일, 독일 제국 브레슬라우 (현, 폴란드령인 브로츠와프)
.사망: 1945년 4월 9일 (39세), 나치 독일 바이에른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
.직업: 신학자, 저술가
.국적: 독일 제국, 나치 독일
.종교: 루터교회
.활동기간: 1926년 ~ 1943년
.장르: 기독교신학 저술
.학력: 튀빙겐 대학교 신학 학사, 베를린 대학교 신학 박사
.부모: 부) 카를 본회퍼, 모) 파울로 본회퍼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그의 출생지는 오늘날에는 폴란드 땅이다. 나치 독일 시절, 나치의 종교 탄압정책에 반대한 고백교회 (Bekennenede Kirche)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영화 ‘작전명 발키리’로 잘 알려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했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었다.
‘독일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리는 본회퍼는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튀빙겐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이탈리아 로마에서도 수학하였다. 미국 유학 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목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강연여행 중이던 미국에서 귀국하였고, 1940년에는 강연, 집필 금지처분을 받았다. 1942년 반나치스 지하조직을 주도하다가 발각되어 1943년 게슈타포에서 체포되었으며 1945년 4월 플뢰센베르크의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옥중서간’, ‘그리스도를 본받아’ 등이 있다.
○ 생애 및 활동
– 집안 배경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정신과 의사인 칼 본회퍼와 파울라본회퍼 사이에서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513년 네덜란드에서 독일로 이주해온 중산층의 부잣집이었는데, 뛰어난 학문적 실력과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의 집안은 루터교회에서 신앙생활해온 전통적인 개신교 가문이었다. 할아버지는 프로이센 왕실에서 궁정 목사였고, 어머니 파울라도 자녀들에게 성서 이야기, 시, 노래를 가르칠 정도로 믿음과 교양이 모두 훌륭하였다. 하지만 정작 그의 아버지는 신앙에 무관심했다. 본회퍼가 신학자가 되려고 하자 형제들과 부모는 “종교는 부르주아에게 어울린다. 다른 학문을 하도록 하라”면서 반대했는데, “그렇다면 내가 바꾸겠습니다.”라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형제들과 부모는 본회퍼의 뜻을 존중했고, 본회퍼도 자신의 신념을 고집했다.
– 신학 수업
어려서부터 신학자가 되고 싶었던 본회퍼는 1923년 튀빙겐 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 (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베를린대학교 졸업시 ‘성도의 교제’ (communio sanctorum)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했다. ‘성도의 교제’는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가 칭찬할 정도로 훌륭한 논문이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나치에 저항하다가 처형당한 순교자이기 이전에 뛰어난 신학자였다는 사실은 신학을 공부할 때에 시대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비판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 곧 신학수업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목회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던 본회퍼는 로마에서도 공부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 (Liturgy, 예전)와 교의를 비판적으로 경험하였다. 베를린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한 그는 에스파냐의 독일인 루터교회에서 부목사로 1년간 목회하였다. 논문 ‘행동과 존재’ (독: Akt und Sein)을 발표하여 교수자격을 취득한 본회퍼는 베를린대학교의 신학부 강사로 임명되었으며, 25세부터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는 교회법에 따라 1년뒤에 루터교회의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진보 신학의 명문으로 불리는 유니언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유학시절에 그는 백인들에게 인종차별을 받는 흑인들의 삶 속에서 민중들과 어울린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유니언 신학교에서 본회퍼는 프랑스 개신교 성직자인 장 라셰르 (프: Jean Lasserre) 목사의 영향으로 예수의 산상수훈에 신학적 뿌리를 두는 기독교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 반나치 운동과 죽음
1933년 집권한 나치의 독재에 대해서 독일교회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영혼구원을 위해 예수를 보내 주셨듯이 지금 현재 독일의 “경제적, 사회적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히틀러를 보내주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히틀러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것이였고, 단지 히틀러를 우상으로 치부하여 숭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히틀러는 독일국민들을 히틀러라는 우상을 숭배하게 한다고 경고하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었고, 결국 방송은 중단 당하고 말았다. 신학자 칼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교회가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발표한 원고를 신문에 넣었다. 이때부터 본회퍼는 나치의 미움을 받기 시작하였다.
당시 독일교회에서는 본회퍼처럼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나치에 반대하는 신학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고백교회를 결성하여 그들의 양심을 실천했다. 하지만 나치의 탄압으로 고백교회 참여자들은 박해받았는데, 본회퍼의 경우 1943년 4월 체포되어 2년간 수용소를 전전했다. 이때 그가 친구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옥중서간’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본회퍼가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하였다는 증거가 확보되면서, 1945년 4월 9일 새벽, 플로센뷔르크 수용소 (Flossenbürg concentration camp)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유언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였으며, 그의 묘비에 새겨진 문장은 “디트리히 본회퍼–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 신학
– 고난을 함께 하는 신학
디트리히 본회퍼 신학은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삶의 실천이다. 디트리히 본회퍼에 대한 나치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었다. 개신교 신학자이자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일하던 라인홀트 니부어가 신학 교수 자리를 마련한 뒤, 초대장을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회퍼는 독일 국민들과 고난을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동참할 수 없다면서 이를 거부했다.
– 값싼 은혜
본회퍼는 덴마크의 기독교 사상가 키르케고르의 영향으로, ‘나를 따르라’ (1937년 출간)에서 독일교회가 값싼 은혜를 나누고 있다고 비평했다. 그가 말하는 값싼 은혜는 “죄에 대한 고백이 없는 성만찬, 죄에 대한 회개 없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설교, (세례의 의미를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설명하는)예식을 무시한 세례, 회개가 없는 면죄의 확인”이다. 성례전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값싸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하는 값싼 은혜는 그리스도를 따름이 없는 은혜, 그리스도를 따름에 따른 고난이 없는 은혜, 성육신의 실천이 없는 은혜이기도 하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 없는 신앙은 싸구려 신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이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 은혜, 헐값의 용서, 헐값의 위로, 헐값의 성만찬이다. 그것은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몰지각한 손으로 생각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이다. (중략) 교훈과 원리의 체계도 값싼 은혜이다. (중략) 죄를 뉘우치지 않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세상은 자신의 죄를 감싸줄 값싼 커버를 값싼 은혜에서 얻는다. 값싼 은혜는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부정한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고 하는 것이다. 은혜가 홀로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 모든 것이 케케묵은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중략) 값싼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 취한 은혜에 불과하다. 싸구려 은혜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은혜에 불과하다.
– 무종교적 시대와 무종교적 기독교
본회퍼는 기독교를 세속화하는 데 첫 발을 내딘 자였다. 그는 기독교가 종교에서 벗어나 무종교적 시대에 무종교적 기독교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개념은 ‘성인된 세계’와 ‘성서적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이라고도 한다. 이런 그의 ‘혁명적’인 개념은 1960년대에 좌경화에 물든 남미와 미국, 아시아에 성경적 배경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당시 신학교에서는 본회퍼의 책이 불티나게 팔렸으며, 그가 제시한 종교가 아닌 기독교, 즉 세속화된 기독교가 신학교의 세속화를 부추겼다. 이것은 신학에서 성경의 하나님을 없애고 인간이 주체가 된 새로운 개념의 신학을 만들었고, 문자주의적인 보수적인 해석 보다는 성경의 해석의 주체가 사람이며 그 권위가 사람에게 있다는 자유주의 신학과 접목이 되어, 성인된 세계에 사는 기독교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성숙한 세계에서 타자를 위한 교회
본회퍼는 자신이 경험했던 반나치 운동을 통해서 이상적인 교회상을 끄집어 내었다. 그는 삐뚤어진 세상 즉, 독재가 가능한 그 당시의 현실에 저항하는 교회상을 그려 내면서, 신학적 교리를 배우고 논쟁하는 교회가 아닌, 세상의 불의와 싸우는 정의에 불타는 교회를 원했다. 그런 그의 생각에 신학을 맞추어 낸 것이 교회와 세상이 변증법적으로 통일되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위임들을 ‘노동’, ‘결혼’, ‘정부 혹은 문화’, ‘교회’의 네가지를 통하여 발견하였고, 교회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리자로 행동한다고 보았다.
○ 영향을 끼친 인물과 받은 인물
– 본회퍼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
이마누엘 칸트 : 본회퍼는 칸트의 주관주의 선험론과 구성설에 나오는 인간 인식의 특성들을 보다 자세하게 분석하고 설명하였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 헤겔은 칸트의 관점에다가 계몽주의의 낙관론을 가미하였다. 또한 이 낙관론이 변증법을 통해서 절대치를 획득할 수 있다고 예언하였다.
폴 틸리히
마르틴 루터 : 본회퍼는 인간 안에 내재된 헛된 교만을 루터를 인용해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마음’이라고 지었다.
라인홀드 니부어 : 본회퍼는 미국 방문시, 유니언 신학교 (뉴욕시)에서 니부어를 만나서 교회의 지평이 구체성에서 정체성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하였다.
– 본회퍼의 영향을 받은 인물
에버하르트 베트게 : 본회퍼 전기를 저술하였다.
존 A. T. 로빈슨 : 자유주의 신학을 형성하고 세속화 신학을 주장하는 데 본회퍼의 영향을 받았다.
김응교, 김기석, 강영안, 유해무, 임영수 등
○ 저서
나를 따르라
신도의 공동생활
행위와 존재 (Act and Being): 본회퍼는 하나님을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값진 보물로 만들며, 이것이 하나님을 초월적이며, 불가해적이며, 숨겨진 존재로 있도록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윤리학
저항과 복종
창조와 타락 (Creation and Fall :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3)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