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성스러움의 의미
루돌프 옷토, 오토 / 분도출판사 / 1999.4.30
‘신관념에 있어서의 비합리적 요소 그리고 그것과 함리적 요소와의 관계에 대하여’라는 부재를 단 이 책은 종교의 “누멘적 감정”이 지니고 있는 여러 측면들을 다각적으로 분석하여 신성 혹은 성스러움, 특히 그 비합리적 측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다.
‘거룩한 것’이란 독일의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 (Rudolf Otto, 1869~1937)에 의하면, ‘두렵고 떨리는 신비 그리고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신비’(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osum)이다. ‘거룩한 것’은 우선 ‘두럽고 떨리는’ 신비이다. 두려움은 단순한 무서움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두려움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그 밑바닥까지 뒤흔들어 놓고 떨리게 하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신비 앞에서 전적으로 압도되어 버리고 만다. 인간은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이 점점 더 작아지는 것을 느끼며, 마침내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무(憮)처럼 느끼게 된다. 반면에 ‘거룩한 것 ’ 그것은 모두이며 일체의 것으로 부각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없게 되며 그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룩한 것’은 동시에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신비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경험하는 인간을 열광케 하는 그러한 신비이다. 인간은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이 남김없이 채워지고, 한없이 행복감에 젖어 들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그에 완전히 사로잡혀 거기서 결코 떠날 수 없게 되고 만다.
‘거룩한 것’은 이와 같이, 한편으로 인간이 그 앞에서 견디어 낼 수 없기 때문에 도망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신비인 동시에, 다른 한편 인간은 그에 전적으로 사로잡혀 결코 그 앞에서 떠날 수 없는 그러한 신비이다. ‘거룩한 것’은 그 자체로 결국 하나의 ‘신비’ (Mysterium)이다. ‘거룩한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감추어 두고 있다. ‘어둠’이라는 장막 (帳幕)속에 숨어 있다. 우리 인간에게는 스스로 그에게로 접근해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 목차
1. 합리와 비합리
2. 누멘적인 것
3. ‘피조물적 감정
4. 두려운 신비
5. 누멘적 찬송들
6. 매혹성
7. 어마어마함
8. 유추적 감정들
9. 누멘적 가치로서의 거룩함
10. ‘비합리적’이란 무엇인가?
○ 저자소개 : 루돌프 오토 / 옷토 (Rudolf Otto, 1869년 9월 25일 – 1937년 3월 6일)
루돌프 오토 (Rudolf Otto, 1869년 9월 25일 – 1937년 3월 6일)는 저명한 독일 루터교 신학자, 철학자, 비교 종교가이다. 초기 20세기에 종교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학자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세계 종교의 중심에서 논의되는 심오한 감정적 경험, 즉 뉴미너스 (numinous) 개념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칼 바르트도 영향을 받았다.
루돌프 오토는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 감정으로서의 ‘누미노제’에 천착하고, 이러한 관점으로 세계의 종교를 거시적으로 연구하였다. 1917년 출간된 ‘성스러움의 의미’ (Das Heilige)는 일차 세계대전 직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역자 : 길희성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부에서 신학석사를 받았고,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부터 미국 세인인트 울라프대학교 종교학과, 1982년 귀국 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1984년부터 서강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인도철학사』『포스트모던사회와 열린 종교』『종교와 환경』『선불교와 그리스도교』『오늘에 풀어보는 동양 사상』『전통, 근대, 탈근대의 철학적 조명』등이 있다.
○ 책 속으로
확실히 종교에는 명확한 개념적 이해와 언어적 표현을 초월하는 어떤 비합리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옷토는 그의 분석을 시작한다. 그는 그것은 ‘누멘적 감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감정이 언어적 접근을 초월하는 비합리적 체험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어떤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대상, 즉 ‘누멘 혹은 누멘적 대상’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옷토가 이 책에서 주로 시도하고 있는 바는 이러한 누멘적 감정이 지니고 있는 여러 측면들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다각적으로 분석하여 신성 혹은 성스러움, 특히 그 비합리적 측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키려는 것이다. — 역자 서문 중에서
○ 학술 : 루돌프 오토와 ‘성스러움의 의미‘
– 이분법으로 가를 수 없는 ‘누미노제’의 두렵고 매혹적인 신비
.루돌프 오토와 ‘성스러움의 의미’
독일의 종교 철학자 루돌프 오토 (Rudolf Otto, 1869-1937)는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 감정으로서의 ‘누미노제’에 천착하고, 이러한 관점으로 세계의 종교를 거시적으로 연구하였다. 1917년 출간된’성스러움의 의미’ (Das Heilige)는 일차 세계대전 직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보통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법한 일이 없는 종교철학 분야에서 한 권의 책이 가져온 성공의 문화사적 의미에 대해서 여러 가지 후속 연구들이 진행되었을 정도로 이 책의 폭발적인 인기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불가언적인 성스러움의 경험과 초월적인 신적 원리에 대해ㅆ서 설명하는 이 두껍지 않은 책이 어떻게 그러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전쟁 후 정신적 공허함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갈구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하나의 작용 요인이었을 것이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쟁에서 경험한 인간사와 세계의 모순을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비합리적인 종교 체험이라는 것이 이론적이고 감정적인 설명체계로 작용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 저서는 출간 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영어, 불어, 일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지금까지 종교철학 분야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팔린 책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총 23장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 저서는 1917년 초판이 나온 후 계속적으로 관련된 논문들이 뒷부분에 추가되고 각주가 보충되면서 길어졌다.
‘성스러움의 의미’는 1911년 북아프리카 여행에서 얻은 영감으로 집필되었다. 오토는 지중해 주변 국가를 탐방하던 중 모로코의 한 도시에서 오래된 시나고그에 들어가고, 우연히 유대인들의 낯선 기도 소리를 듣게 되는 경험을 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더럽고 어두침침한 이국의 장소에서 울려 퍼지는 낯선 언어에서 ‘성스럽다’는 단어를 감지하고 종교적 감정의 보편성 문제에 착수하게 되었다.
진리(眞), 선함(善), 아름다움(美)에 더하여 성스러움(聖)은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이다. 이 중에서 ‘성스러움’은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sui generis) 해석적 범주이다. 성스러움은 통상 선함과 연결되어 이해되지만, 성스러움의 윤리적인 속성은 시간을 거치면서 철학적이나 신학적인 단계에서 개념화되고 합리화된 것이지, 결코 근원적이거나 본질적인 의미는 아니다. ‘성스러움’을 뜻하는 고대의 언어들을 보면 그러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인도게르만, 라틴어, 아랍어 계열 등에서 지금의 ‘성스러움’으로 번역되고 있는 언어들은 원래 윤리적인 차원과는 다른 언어적 기원을 보여주며, ‘힘’, ‘금지’, ‘구분’ 등을 나타낸다.
종교라고 하면 보통 교리와 윤리적 차원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한 접근은 오히려 생생한 종교적인 경험을 화석화하고 교조화할 수 있으며, 종교적인 삶이 지닌 경험적 독특함을 드러내지 못한다. 성스러움의 경험적 독특성은 합리주의자들이나 신학자들이 교리적으로 정당화하거나 개념적으로 이해 (begriffliche Erfassung)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합리적인 시도로는 접근할 수 없는 불가언적 (arreton)이며,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자류적인 영역이며, 철학이나 신학이 아닌 체험의 영역이다. 비합리적 (irrational)이라는 것은, 이성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을 뜻한다. 인간의 이성을 압도하고 초월하는 감정으로서의 종교적 경험에 관한 이러한 접근은 우리에게 ‘성스러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청한다.
.두렵고 매혹적인 신비
종교사가들은 고대적인 신 관념의 기원을 ‘귀신’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종교적으로 경배한다’로 번역되는 산스크리트어 ‘aradh’의 원래적 의미는 ‘화해시키다’ ‘신의 노여움을 위로한다’ 정도였다. 귀신과 영계란 무엇인가? 물질세계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에게 낯설고 괴기스러운 대상과 그 대상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이다. 성스러움에 대한 두려운 감정을 세속적인 영역으로 대입해 본다면, 흡사 우리가 공포 영화를 볼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전율을 느끼도록 두려운 것, 그러한 공포 속에서도 끌리게 되어서 제 정신을 잃는 매혹의 감정은 원초적 종교성과 맞닿아 있다. 누미노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대상에 대한 ‘성스러운 전율’과 ‘종교적 공포’는 독일어 단어 ‘무시무시함(Grauen)’이나 영어 단어 ‘awe’에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감정을 느낄 때 인간은 자연적 공포와는 또 다른 신체적 반응을 나타내는데, “찬물을 끼얹듯 소름이 끼친다”거나 “등골이 오싹하다”는 표현이 종교적인 두려운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성스러움의 의미, 52쪽)
누멘적인 두려운 감정들은 합리적으로 교리가 발전해 가면서 신학화되고 윤리적인 개념으로 바뀌기도 한다. 성스러움을 느끼게 되면 절대적인 대상 앞에서 두려운 위압성 (tremenda majestas)을 느낀다. 그 압도적인 두려운 대상에 대한 대조로서 스스로는 왜소해지고 함몰되는 경험을 하면서 무화(無化)되는 것처럼 느낀다. 이것이 사실 종교적 ‘겸손’의 감정을 이루고 있는 누멘적 원료이다.
‘종교적 신비’의 또 다른 측면은 매혹이다. ‘매혹성 (das Fascinans)’은 두려움과 더불어 성스러움의 다른 한 축을 설명한다. 그것은 경탄스러운 것(das Wundervolle)으로서 그 감정을 묘사한다면 “감각을 혼란케 하는 것과 더불어 감각을 홀리고, 빼앗아 가고, 이상하게 황홀케 하며, 도취와 흥분으로 격앙” (성스러움의 의미, 80-81쪽)시킨다. 누미노제의 매혹적인 요소는 압도적이고 위압적인 두려움 (tremendum)과 대조를 이루면서 누미노제를 보충한다. 두려움과 매혹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의 신비는’어마어마함 (Ungeheuer)’과 ‘장엄성(augustum)’으로 이어진다.
정리하자면 성스러움의 속성은 ‘두렵고 매혹적인 신비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로 정의된다. 두려움과 매혹이라는 종교적인 감정이 점차적으로 합리적 표상과 개념들로 도식화되면서 자비, 사랑, 은총 같은 개념으로 ‘신학화’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초적·종교적 감정에 깃든 누멘적인 요소를 느낄 때 인간은 종교적인 감정의 진수를 맛보는 것이다.
.’누미노제’의 의미
고대의 신화나 전설들, 종교 경전들 속 이야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문명적으로 요리되지 않은 날것’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안에서 우리가 종교적인 것에 기대하는 것 -정확히 말하면 윤리적인 가르침- 보다 낯선 것, 음울하고 어두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직면한 ‘진실’을 무시하기는 상당히 불편하다. 한편으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 너머의 것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에 경외를 보내기도 한다.
인간이 몸담고 살아가는 물리적 세계와 경험 세계의 빈곤함은 우리의 상상력을 신화와 종교의 세계로 이끈다. 경험 세계 너머의 실재 (reality)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인간의 의식은 그 실재를 만들어 내면서 현실 세계를 딛고 일어나거나 ‘초월’하여 이 세계를 상대화시킬 ‘다름’을 상상하게 한다. ‘성스럽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영역의 독특한 인식적, 해석적, 가치적 범주이다. 오토의 저작은 성스럽다고 할 때의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오토는 종교를 지나치게 합리적으로 곡해하거나 교리적으로 해석하면, 종교의 살아 있는 체험을 ‘묽게’ 하고 그 생동감이 약화되며 지적으로 포착할 수 없음을 주목했다. 개념 (Begriff)과 교리가 있기 전에 먼저 인간의 약동하는 경험이 있다. 어떤 순간의 말할 수 없는 기이함, 전율의 느낌, 숭고함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존의 자연적인 용어에서 차용하여 종교적인 용어들을 만들었다. 이러한 종교적 경험을 나타내는 의성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일반적이고 세속적인 용어로 해석되기도 한다. 오토가 놓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언어로 표현되기 힘든 이러한 종교성의 본질적인 특징과 그 생생한 경험적 실재를 잡아내는 것이었다. 오토가 보여준 박진감 넘치는 종교적 세계의 탐구는 다양한 영역에 학문적 영향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현대 종교학의 거장 미르치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의 종교현상학과 칼 구스타브 융 (Carl Gustav Jung)의 심층심리학에 대한 학문적 전제로서 사용되고 있다. 누미노제는 종교 감정과 인간 심층 심리를 설명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이 책의 메시지가 가지고 있는 독특성과 신비주의에 대한 통찰은 인간의 종교성이 지닌 심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좋다/나쁘다’, ‘행복하다/불행하다’, ‘긍정적이다/부정적이다’, ‘선하다/악하다’와 같은 이분법적 수식들은 누미노제적인 경험에서 빛을 바랜다. 특히 모든 삶의 영역에서 지나치게 윤리적인 것으로 재단하거나 이분법적인 대립이 종교적 영역을 침투한 한국적인 현실 (보수/진보, 우파/좌파, 열광적 개신교/’개독교’ 담론)에서 종교적인 경험이 가지는 다층적이고 깊이 있는 탐구는 우리의 정신적 시야를 넓힌다. 현실 종교와 정치에서 ‘선’과 ‘악’은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동시에 윤리적으로 사람들을 편 가르게 하고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문법으로 사용된다. ‘악의 축’,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같은 성찰되지 않은 종교적 수사는 오히려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숨막히게 한다. 정신세계와 세상의 다양성을 한 편으로 모는 것에서 한 발자국 나와서 인간 정신의 다면성과 거대함을 보여주는 종교적 고전이 필요하다. — 최정화 교수(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 독자의 평
R. 오토의 <성스러움의 의미>는 종교학이나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만큼 명성이 자자한 책이다. C.S. 루이스는 동시대에 출간된 책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준 책 중에 하나로 이 책을 지명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순전한 기독교>에 그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루이스가 ‘누멘적인 것’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데서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20세기 최고의 종교학자 M.엘리아데는 이 책의 주제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불후의 명작 <성과 속>을 구성했다.
내용에 대한 분석은 지루할 소산이, 독후의 감에 치중하는 것은 지나친 주관으로 흐를 위험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전개해나가고자 한다.
이 책의 핵심 개념은 앞서 언급한 ‘누멘적인 것’이다. ‘누멘'(numen)은 라틴어로서,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는 자를 대할 때 자신의 ‘무'(無) 속으로 함몰되고 사라져 버리는 피조물들의 감정”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이사야가 야훼의 임재 앞에서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소리치며 느낀 감정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예컨데 옆방에 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물리적 두려움의 감정이라면, 옆방에 천사와 같은 초월적 존재가 있음을 알 때 느끼는 것이 바로 누멘적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누멘적인 감정은 두려움을 동반하는 특징을 지니지만 동시에 “독특한 힘으로 끌어당기며, 매료하며, 매혹하는” 특징도 갖고 있다. 예컨데 시편의 기자가 “주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시 84:10)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J.R.R. 톨킨의 매력적인 이야기 <니글이 그린 나뭇잎>에서도 이와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주인공 니글은 평생 나무를 그리면서 언뜻 자신이 그린 그림의 나뭇잎 사이로 진짜 햇빛이 비치는듯한 순간을 경험하곤 했는데, 그가 죽어 천국에 도착하자 자신이 평생을 그리고자 애썼던 바로 그 나무가 나뭇잎 사이로 찬란한 빛을 출렁이며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누멘적인 것의 매혹적 특징에 관한 더 없이 훌륭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두 가지 측면을 지닌 ‘누멘적인 감정’은 저자에 의하면 철저하게 선험적인 것(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인간의 다른 능력으로부터 진화되거나 도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곧 ‘종교적 인간'(homo religiousus)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서 누멘적인 감정이 선험적으로 주어졌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행 17:27 b)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와 동일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누멘적인 것은 철저히 비합리적(말도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철저히 비합리적이고 불가언적인 누멘은 선과 정의와 공의 같은 합리적 선(善)개념을 통해 도덕화가 이루어진다. 즉 시내산을 진동시키고 구름가운데 강림하신 두려운 야훼가 십계명(도덕)을 제정함으로써 지극히 선한 존재로 재계시되는 것과 같다. 비합리적인 누멘과 합리적 선의 두 요소가 야훼 하나님 안에서 내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며, 이는 또 하나의 ‘선험적인 종합적 인식’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깨달아지게 된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어떻게 태양신이나 월신, 혹은 어떤 으스스한 장소적 누멘과 같은 아직도 ‘조잡한’ 반유령적인 존재로부터 그것이 맹세와 진실성의 보호자이고 계약의 보증자이며, 환대, 결혼의 성스러움, 종족과 씨족적 의무 등의 보호자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겠는가?” 결국 이 두 가지 속성이 양립한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 수 없었다면 지금처럼 두렵고도 자비하신 하나님을 고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누멘에 대한 지식은 성서의 당혹스러운 본문들에 올바른 해석의 빛을 던져준다. 예컨데 예정론이 그 중에 하나다. 로마서 9장 18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예정론을 지지하는 듯 보이는 구절은 성서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는데 한 가지만 더 예를 들면 말라기서의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1:2b-2a)라는 기록이 포함된다. 예정론은 바로 이러한 구절들에 대해 철저한 합리적 설명을 통해 도출된 교리이다. 이는 즉, 비합리적인 누멘성을 간과한 해석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말하기를 이러한 예정론적 구절들은 이분법적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측량할 수 없는 신비와 기이함, 혹은 두려움을 느낀 성서기자의 감탄사로써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예수를 완전한 인간이시자 완전한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 역시 논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철저히 가려진 존재 방식에 대한 하나의 역설적인 감탄인 것과 같다.
점점 더 성서의 축자영감설과 같은 문자적 집착의 한계와 헛점이 분명해진다. 이 책을 통해 보수적 신앙관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반감이 논리적 근거를 갖추게 된 것 같다. 칼이 잘 갈렸으니 넉넉히 품을 수 있는 칼집만 마련하면 되겠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