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11월 12일, 중화민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 (孫文, 1866 ~ 1925) 출생
쑨원 (孫文, 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은 중국의 외과 의사이자 정치가이며 신해혁명을 이끈 혁명가, 중국국민당 (中國國民黨)의 창립자이다.
호 (號)는 이셴 (逸仙), 본자 (本字)는 더밍 (德明), 별명은 중산 (中山) 또는 나카야마 (일: 中山)이다.
쑨중산 (孫中山) · 쑨이셴 (孫逸仙)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청나라 광둥성 샹산 출신으로 홍콩에서 의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혁명에 뜻을 품고 1894년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하여 이듬해 광저우에서 최초로 거병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망명하면서 삼민주의를 착상, 이를 제창했다.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1911년 쑨원은 난징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북양군벌의 거두 원세개와 타협, 같은 해 3월 1일 원세개에게 실권을 위임하였고 급기야는 같은 해 3월 10일 원세개에게 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제2혁명’에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여 반원 (反遠, 반 원세개) 운동을 계속했다.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9년 중화혁명당을 개조, 중국 국민당을 결성했다.
1924년 국민당대회에서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3대 정책을 채택,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 이어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국민혁명’을 제창, 국민회의를 주장했으나, 이듬해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쑨원의 묘는 난징에 있다.
오늘날 중화민국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마오쩌둥 다음가는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쑨원은 한국의 독립 운동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창립에 커다란 일조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를 인정받아 1968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등급)을 추서받았다.
– 쑨원 (孫文)
.출생: 1866년 11월 12일 (음력: 동치 5년 10월 6일), 청나라 광동성 향산현 취정촌
.사망: 1925년 03월 12일 (58세), 사망지 중화민국 징자오 지방 협화병원
.본관: 광동성 동완현
.학력: 홍콩 화인서의서원 (현 홍콩대학)
.정당: 흥중회 → 중국 동맹회 → 국민당 → 중화혁명당 → 중국 국민당
.배우자: 원처 노모정 (1884년-1915년), 계처 대월훈 (1903년-1906년), 계처 송경령 (1915년-1925년), 첩실 진수분 (1891년-1906년), 첩실 천전춘 (1897년-1902년)
.자녀: 적자 1남 2녀 (손과, 손금원, 손금완), 서자 1녀: 대월부미자
.휘: 문 (文)
.아명: 제상 (帝象)
.보명: 덕명 (德明)
.자: 재지 (載之)
.세례명: 일신 (日新)
.가명: 중산초 (中山樵)
.호: 일선 (逸仙)
.종교: 회중교
* 중화민국의 기 중화민국의 육해군대원수
.임기: 1923년 2월 21일-1925년 3월 12일
.전임: 쑨원 (비상대총통) / 후임: 호한민 (대리)
* 중화민국 중화민국의 비상대총통
.임기: 1921년 5월 5일-1923년 2월 21일
.전임: 쑨원 (육해군대원수) / 후임: 쑨원 (육해군대원수)
* 중화민국 중화민국 호법군정부의 육해군대원수
.임기2: 1920년 11월 28일-1921년 5월 5일
.전임: 육진동 (주석총재) / 후임: 손일선 (비상대총통)
.임기1: 1917년 9월 10일-1918년 5월 20일
.전임: (신설) / 후임: 잠춘훤 (주석총재)
* 중화민국 중화민국의 제1대 임시대총통
.임기: 1912년 1월 1일-1912년 3월 10일
.전임: (신설) / 후임: 위안스카이
* 중국 국민당 중국 국민당의 당총리
.임기: 1919년 10월 10일-1925년 3월 12일
.전임: 쑨원 (중화혁명당총리) / 후임: 장정강 (중앙집행위 주석)
* 중국 국민당 중화혁명당의 당총리
.임기: 1914년 7월 8일-1919년 10월 10일
.전임: 쑨원 (국민당이사장) / 후임: 쑨원 (중국국민당총리)
* 국민당의 이사장
.임기: 1912년 8월 25일-1914년 7월 8일
.전임: 쑨원 (중국 동맹회 총리) / 후임: 쑨원 (중화혁명당 총리)
* 중국 국민당 중국 동맹회의 총리
.임기: 1905년 8월 20일-1912년 8월 25일
.전임: 쑨원 (흥중회 회장) / 후임: 쑨원 (국민당 이사장)
* 중국 국민당 흥중회의 회장
.임기: 1900년 1월 24일-1905년 8월 20일
.전임: 양구운 / 후임: 쑨원 (중국 동맹회 총리)
1912년 2월 12일,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 출범
중화민국은 1912년 2월 12일 쑨원이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신해혁명을 일으키며 최초로 건국되었다.
쑨원은 안정적인 지배력 확보를 위하여 당시 유력 군벌이었던 위안스카이와 손을 잡았고,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즉위하였다. 위안스카이 총통은 자신의 주력인 북양함대를 기반으로 하여 독재 체제를 굳혀나갔고, 1912년 1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쑨원 주도의 중국 국민당이 승리를 거두자 결국 국민당의 지도자였던 쑹자오런을 암살시켜버리고야 만다. 위안스카이는 북양함대를 바탕으로 독재 정치를 펼쳤고, 이 시기의 중화민국을 북양정부라고 부른다. 위안스카이는 이후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시민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자 결국 황제에서 스스로 퇴위하였다. 1916년에 위안스카이마저 세상을 떠나자 북양정부 체제는 곧바로 무너졌고, 북양함대에 소속되어 있던 군벌들은 독립하여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쟁탈전을 벌였다. 이 시기를 군벌 시대라고 칭한다.
군벌 시대가 도래하며 중국 대륙에 혼란이 가중되던 와중, 1921년에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광저우에 국민정부를 세웠고, 1925년에 쑨원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은 장제스 총통이 북벌을 실시하여 1928년에 마침내 부패한 북양정부를 무너뜨리는 데에 성공하였다. 1927년 4월에는 난징에 수도를 둔 통합 정부를 구성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1928년에는 4•12 사건을 일으켜 상하이에서 공산당의 세력을 쓸어버리고자 하였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본격적인 국공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중국은 1930년대 동안 중화민국 주도의 산업화를 겪으며 나름대로 비약적인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고질적인 군벌 간의 세력 다툼, 부정부패, 그리고 일본 제국과의 전쟁 때문에 그 성장에 제동이 걸렸다. 일본 제국은 침략 전쟁을 일으키며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대군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침공하면서 대대적인 전면전이 터졌다. 중일전쟁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하며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지속하였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중국 측에서는 청나라 시절에 일본에게 빼앗겼던 펑후 열도와 타이완 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중화민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1946년에는 공식 헌법까지 제정하면서 안정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일찍 찾아오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일당들이 세력을 일으켜 국공 내전을 다시 지속하였고, 결국 1949년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이들에게 패전하는 모습을 보이며 중화민국은 점차 중국 대륙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중화민국은 수도를 난징에서 광저우로, 충칭으로, 청두로, 결국에는 타이완 섬으로 건너가면서 타이베이로 천도하였고, 1949년 이래 타이베이를 실질적인 수도로 삼고 있다. 이로 인해 중화민국은 중국 본토에 대한 영향력 대부분을 상실하였으나, 하이난 섬은 1950년까지, 티베트 지방은 1951년까지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화민국은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의 창립 회원국으로, 1971년에 중국 대표권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UN에서 상임이사국 지위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만국우편연합과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