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450년 10월 31일,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출신으로 스페인에서 활동한 탐험가 · 항해사 · 콩키스타도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1450 ~ 1506) 출생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1450년 10월 31일 ~ 1506년 5월 20일)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이자 항해가이다.
흔히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지만, 아메리카는 무주지가 아니었고 원주민 문명이 존재했으므로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유럽인 입장에서의 시각일 뿐이다. 또 유럽인 중에서조차 북유럽의 바이킹이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한데다, 아메리카로 인식한 것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의 지속적 교류 계기를 만든 유럽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출생: 1450년 10월 31일,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사망: 1506년 5월 20일 (55세), 카스티야 연합왕국 바야돌리드
.국적: 제노바 공화국
.경력: 서회 항로 개척
.직업: 탐험가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콜럼버스는 근대 이후 오랜 시간 유럽인들에게 위인이자 영웅적인 모험가로서 추앙받았으며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 터잡은 신생 독립국가 미국은 자신들의 건국 서사시를 마련하고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문화・예술계의 각 분야에서 콜럼버스의 항해에 관한 신화를 발굴하고 재창조하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정치적으로도 수도를 ‘컬럼비아 구’로 명명한다든지, ‘콜럼버스의 날 (Columbus Day)’이 국경일로 정해져 있는 등 아직까지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러한 경향은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독립국에게도 전파되었다.
“콜럼버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목적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닻을 올렸다는 것이다.” – 빅토르 위고
○ 생애 및 활동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1450년 10월 31일 ~ 1506년 5월 20일)는 1450년 생으로 보통 많이 알려졌지만 1447년 생이라는 주장도 많다. 또한 콜럼버스는 제노바 공화국 출신임에도 스페인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어식인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Cristoforo Colombo)과 함께 스페인어식인 크리스토발 콜론 (Cristóbal Colón)으로도 알려져 있다. 유럽언어권에서는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이 인물의 인명을 표기할 때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식이 아닌 자국어식으로 바꿔 표기하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있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영어식 표기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로 널리 알려지게 됐고 국립국어원에서 제시하고 있는 규정용례도 각각 영어와 스페인어식 표기를 따른 ‘콜럼버스, 크리스토퍼’와 ‘콜론, 크리스토발’이다.
그러나 콜럼버스에서 파생된 미국의 지명인 Columbia의 규정용례는 ‘컬럼비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명인 Columbus 역시 영어식 표기에 근거한 것이므로 컬럼버스로 표기해야 하나 이 경우에는 관용을 존중한 표기인 ‘콜럼버스’를 규정용례로 제시하고 있다. 다만 언중에서는 Columbia를 콜럼비아로도 표기하며 Columbus의 경우도 콜롬비아의 영향 때문에 콜롬버스로 잘못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콜럼버스는 동생인 바르톨로메오 콜롬보와 지도 제작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동방견문록을 읽고 기존의 관념과는 다르게 지구는 둥글고 세상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바다 서쪽 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닌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둥근 지구를 서쪽으로 계속 항해 하면 언젠가는 세계를 한바퀴 돌아서 중국과 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으며, 지중해를 점거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거치지 않고 교역과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후원자를 구하며 포르투갈, 영국,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의 지도자에게 지원 요청을 하지만 대부분 거절당했다.
– 콜럼버스의 탐험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스페인으로 갔다. 당시 스페인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던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콜럼버스가 ‘1.기사와 제독 작위, 2.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 3.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이라는 실현 가능성없는 조건을 제시하자 포르투갈에서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 교회의 성직자들은 포르투갈 교회에 대한 경쟁 의식으로 더 넓은 선교지를 필요로 했고, 때문에 콜럼버스를 위해 여왕을 설득했다. 결국 이사벨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였고, 그가 발견하는 것의 10%를 콜럼버스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 하에 선박 2척 (핀타호와 니나호)을 내주고 과거에 죄를 지은 자들은 면죄해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해 주었으며, 또 팔로스항 (Palos)에 사는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의 선박인 산타 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계약 후에도 이사벨 여왕이 계속 지원을 미뤘기 때문에, 실질적인 항해까지 걸린 시간은 6년이나 되었다 (당시 콜럼버스의 나이는 39세였다).
– 서회 항로 탐험
콜럼버스가 탐험을 시작한 것은 당대 유럽인이 가지고 있던 중요한 사명인 기독교의 전파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순수한 탐구심이 아닌 각종 향신료의 수입을 위한 인도의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금과 보물이 가장 큰 이유였다. 실제로 콜럼버스의 항해 일지를 보면 금과 보물에 대한 언급이 10일 분량에 수백 차례나 등장한다. 또한 이사벨 여왕과의 계약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부의 축적이었다. 콜럼버스는 총 4차례나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항해하였는데, 아메리카에 상륙한 것은 그 가운데 제1차 항해 때의 일이다.
제1차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 (Bahamas)에서 과나하니 섬 (추정)에 도달했고, 이 섬을 산살바도르 (San Salvador, 구세주의 섬)이라 칭하였다. 이어서 그는 쿠바·히스파니올라(아이티, Haiti)에 도달하여, 이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칭하였다. 이후 항해 도중, 산타마리아호가 파손되어 한 섬에 약 40명의 선원을 남긴 후에 에스파뇰라 (Española, 후 스페인)라고 이름지었다.
제1차 항해 후 1493년 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제1차 항해 후 아메리카에서 그가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17척에다 1,200명의 대선단에 따른 제2차 항해 (1493년 9월 24일)는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히스파니올라에 남겨 두었던 식민지 개척자는 인디오의 저항으로 전멸해 버렸으나, 콜럼버스는 여기다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토지를 스페인인 경영자에게 분할해 주고 인디언에게는 공납 (貢納)과 부역 (경작과 금 채굴)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학대·살육하였으며 노예화하였다. 이 항해에서 스페인으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1496년) 문책당하였다.
제3차 항해 (1498년 ~ 1500년)에서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오리노코 강 하구 (河口)를 발견하였다. 콜럼버스는 제3차 항해에서 칼데아 신아람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선원 두 명을 데리고 갔다. 목적지인 남아시아에 다다르게 될 경우, 에덴 동산의 거주자들이 이 두 언어를 쓸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리노코 강 하구를 에덴 동산의 관문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신의 명으로 불꽃의 검을 들고 그곳을 지키고 있는 케루빔이 자신의 배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았다. 제3차 항해 도중,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시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제4차 항해 (1502년 ~ 1504년)의 허가는 바스쿠 다가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것 때문으로 보이나, 그 사정은 명백하지 않다.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 (地峽)을 발견하고 귀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몰락과 죽음
제3회 항해 (1498년 ∼ 1500년)에서는 트리니다드 섬과 오리노코 강을 발견하였으나,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가 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 (地峽)을 발견하고 가장 힘든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원자이던 이사벨 1세가 죽자마자 몰락하게 된다. 당연히 무수한 빚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결국 겨우 몇 해 사이에 그야말로 몰락하여 아들 디에고와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게 된다. 병명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으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였으며, 그의 직책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지 않았다. 다만 실제적인 직책의 세습은 인정되지 않았지만 명칭만은 대대로 가지게 된다.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세상을 떠난 후 그곳에 묻혔던 콜럼버스의 유해는 1542년 대서양 건너편 산토도밍고로 이장되었고, 1795년 프랑스가 히스파뇰라 섬을 점령하자 아바나로 이장되었으며,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쿠바가 독립하자 다시 스페인으로 옮겨져 세비야 대성당의 남쪽 익랑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언인 ‘죽어도 스페인 땅 안 밟겠다.’를 고려하여 그의 관은 현재 4명의 동상에 의해 지면으로부터 붕 떠서 받들려 있다. 스페인이 이처럼 시신을 운구한 이유는 비록 그의 행적에 대한 여러 논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가 스페인의 황금기를 개척한 공로자였기 때문이다.
○ 평가
– 긍정적 평가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1506년) 자기가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었는데, 그의 서회 항로 개척으로 인하여 아메리카 대륙이 비로소 유럽인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현재의 미국 (United States of America)이 탄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토대가 생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혹자는 선사 시대에 아시아인들이 이미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였고 그 전에도 바이킹들이 발견한 바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당시에 아메리카 대륙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 부정적 평가
두 번째 항해 동안 콜럼버스와 그의 부하들은 역사가들에 의해 ‘홀로코스트 (집단학살)’이라고 명명되는 정책을 폈다. 타이노 원주민들은 조직적으로 노예화되고 살해되었다. 수백 명이 유럽으로 팔려갔고 다수는 그 과정에서 죽어갔다. 나머지 인디언들은 금을 가져오게 하여 그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수족을 잘랐다. 실제로 금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많은 원주민들은 도망갔고, 스페인인들은 이들을 사냥의 방식으로 죽였다. 원주민들은 이에 저항하였으나 스페인의 무기가 훨씬 우수했기 때문에 스페인인들을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고, 유럽에서 옮아온 전염병은 그들의 삶을 파괴했다. 절망 속에서 원주민들은 자식과 동반집단자살 하였다. 25만 명에 달하던 타이노 원주민의 수는 2년 만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나머지는 노예화되고 사망률이 높은 대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60년 만에 타이노 원주민은 수백 명만이 남았고, 100년이 더 흐른 뒤에는 손에 꼽을 인구만이 남았다. 이러한 잔혹한 정복자로서의 콜럼버스의 모습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