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간디 자서전 : 정신적 지도자 간디의 위대한 생애
마하트마 간디 / 파주북 / 2017.5.20
보편적인, 그리고 모든 것에 내재되어 있는 진실의 정신과 직접 만나려면 사람은 가장 미미한 창조물까지도 동일한 존재로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생활 분야와도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자기 정화 없이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동일시할 수 없다. 신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자 속에서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기정화는 생활의 모든 행위 속의 정화를 의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정화는 전염되기 매우 쉬운 자아의 정화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주위에 대한 정화가 되어가는 것이다.
내 자신을 무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사람은 자유의지로 자신을 동포들의 가장 후미에 서도록 하지 않는 한 구원은 얻을 수 없다. 불살생은 겸양의 극한인 것이다.
– 비폭력 · 불복종으로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정신적 지도자 간디의 위대한 생애를 담아낸 『간디 자서전』
보편적인, 그리고 모든 것에 내재되어 있는 진실의 정신과 직접 만나려면 사람은 가장 미미한 창조물까지도 동일한 존재로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생활 분야와도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자기 정화 없이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동일시할 수 없다. 신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자 속에서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기정화는 생활의 모든 행위 속의 정화를 의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정화는 전염되기 매우 쉬운 자아의 정화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주위에 대한 정화가 되어가는 것이다.
○ 목차
화보 4
머리말 26
제1부
출생과 부모님 39
학생 시절 43
결혼 52
우정의 비극 56
도둑질과 속죄 65
아버지의 병과 죽음 70
종교를 엿보다 74
영국행 준비 78
배 안에서 84
제2부
런던에서 91
영국 신사를 따라서 96
몇 가지 변화 100
내성적인 성격, 내 마음의 방패 106
허위의 독(毒) 109
종교에 가까이 116
인도로 돌아오다 120
생활의 시작 127
최초의 타격 131
제3부
남아프리카에 도착 139
프리토리아로 142
프리토리아에서의 첫날 153
기독교도와의 접촉 156
인도인 문제 163
소송사건 168
사람이 제안하고, 신이 처리한다 171
나탈 인도인회의 174
3파운드 세 178
인도에서 181
제4부
남아프리카에 도달한 폭풍 189
아이들의 교육과 간호 199
간소한 생활 202
회상과 참회 205
보어 전쟁 208
위생 개량 212
고가의 선물 215
회의파와의 첫 만남 220
로드 커즌의 접견 227
봄베이에서 230
다시 남아프리카로 236
제5부
기타에 대한 연구 243
『인디안 오피니언』 지 247
신비한 매력을 지닌 책 251
피닉스 농원 255
가족 259
줄루 족의 반란 264
브라마차리아 268
카스투르바의 용기 272
가정에서의 사탸그라하 277
자기억제를 목표로 281
법정에 대한 회상 287
제6부
사탸그라하의 기원 293
투옥 296
습격 302
사탸그라하의 재개 308
톨스토이 농장 311
여자들도 투쟁에 참가 316
노동자의 행렬 322
대행진 327
사탸그라하의 승리 337
대전에 참가 342
제7부
푸나에서 347
산티니케탄에서 351
삼등 객차 승객의 비애 354
도장의 건설 359
인디고의 염료 365
불살생에 직면하여 371
철회된 소송 375
마을으로 들어가다 380
제거된 오염 384
노동자와 접촉하며 387
단식 392
케다 사탸그라하 396
파 도둑 399
케다 사탸그라하의 종말 403
제8부
신병 모집 운동 409
죽음 일보직전 417
롤럿 법 423
그 기념할 만한 주일 428
히말라야의 오산 439
『나바지반』 지와 『영 인디아』 지 443
킬라파트는 암소 보호에 반대하는가? 447
암리차르 회의파 연차대회 453
제9부
카디의 탄생 463
유익한 대화 471
만조 475
나그푸르에서 480
작별의 인사 483
미주 . 연보 487
○ 저자소개 : 마하트마 간디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Mahatma Gandhi / 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 ~ 1948)
마하트마 간디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Mahatma Gandhi / 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년 10월 2일 ~ 1948년 1월 30일)는 인도의 정신적 · 정치적 지도자로, 인도 민족 운동의 지도자이자 사상가로 비폭력운동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서부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나 18세 때 런던에서 법률을 배우고, 1891년 귀국하여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893년의 남아프리카 여행에서 백인에게 박해받는 인도인들을 보고 1915년 귀국할 때까지 인도인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위해 투쟁을 시작했다.
이후 아힘사 (불살생), 무소유, 무집착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적 바탕 위에 사티아그라하 (진리의 주장) 운동, 아슈람 공동체 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영국에 대한 비협력 운동의 일환으로 납세 거부 · 취업 거부 · 상품 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지도했다.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도 노력하였으며 그가 보인 평화정신은 세계인의 공감을 자아냈다.
그는 1947년 7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융화를 위해 활동하던 중 1948년 1월 30일, 반이슬람 극우파 청년이 쏜 흉탄에 쓰러지게 되었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R. 타고르로부터 ‘마하트마 (Mahatma, 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은 뒤로 ‘마하트마 간디’라 불려온 그는 인도인뿐 아니라 세계인의 가슴속에 위대한 영혼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그의 정신이 기려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도의 자치 (自治)’가 있다.
– 역자 : 박선경
○ 책 속으로
내가 지금까지 쓴 글 속에서 독자가 어떤 오만함 같은 것을 느꼈다면, 나의 탐구 속에 무엇인가 올바르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내가 본 반짝임도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라고 독자는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나와 같은 범인은 사라져도 상관없다. 하지만 진실은 승리해야만 한다. 나처럼 많은 과오를 범한 인간을 판단하기 위해서, 진실의 기준을 조금이라도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나는 다음의 각 장 속에 흩어져 있는 충고를 그 누구도 권위 있는 것이라고 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며, 또 그렇게 기원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실험은 전부 예증이라고 봐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에 비춰가면서 각자가 자신의 성향과 능력에 따라서 자신의 실험을 실행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범위를 한정해두면 이 예증이 실제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추한 것을 이야기할 경우에도 무엇 하나 숨기거나 변명할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독자들 앞에 나의 결점과 과오를 전부 드러내고 싶다. 내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내가 얼마나 선량한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한 한 엄격하고 성실하게 나 자신을 판단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나는 타인들도 또한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한 기준 위에 서서 나 자신을 측정하면서, 나는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처럼 건방지고 비천한 자 있을까
창조주를 저버린 나 나는 그렇게 불신의 무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내 생명의 한 호흡, 한 호흡을 주재하고 계시며 나 자신을 낳아주신 신, 그 신으로부터 내가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나의 끊임없는 고뇌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를 신에게서 멀리 떼어놓은 것이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사악한 욕정이라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이쯤에서 붓을 놓아야겠다. 다음 장에서부터 실제의 이야기를 다루기로 하겠다. – 1925년 11월 26일 사바르마티 아슈람15)에서 M. K. 간디 — 본문 중에서
○ 출판사 서평
– 비폭력 · 불복종으로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정신적 지도자, 간디의 위대한 생애!
보편적인, 그리고 모든 것에 내재되어 있는 진실의 정신과 직접 만나려면 사람은 가장 미미한 창조물까지도 동일한 존재로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생활 분야와도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자기 정화 없이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동일시할 수 없다. 신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자 속에서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기정화는 생활의 모든 행위 속의 정화를 의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정화는 전염되기 매우 쉬운 자아의 정화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주위에 대한 정화가 되어가는 것이다.
내 자신을 무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사람은 자유의지로 자신을 동포들의 가장 후미에 서도록 하지 않는 한 구원은 얻을 수 없다. 불살생은 겸양의 극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쓴 글 속에서 독자가 어떤 오만함 같은 것을 느꼈다면, 나의 탐구 속에 무엇인가 올바르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내가 본 반짝임도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라고 독자는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나와 같은 범인은 사라져도 상관없다. 하지만 진실은 승리해야만 한다. 나처럼 많은 과오를 범한 인간을 판단하기 위해서, 진실의 기준을 조금이라도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나는 다음의 각 장 속에 흩어져 있는 충고를 그 누구도 권위 있는 것이라고 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며, 또 그렇게 기원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실험은 전부 예증이라고 봐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에 비춰가면서 각자가 자신의 성향과 능력에 따라서 자신의 실험을 실행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범위를 한정해두면 이 예증이 실제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추한 것을 이야기할 경우에도 무엇 하나 숨기거나 변명할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독자들 앞에 나의 결점과 과오를 전부 드러내고 싶다. 내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내가 얼마나 선량한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한 한 엄격하고 성실하게 나 자신을 판단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나는 타인들도 또한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한 기준 위에 서서 나 자신을 측정하면서, 나는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처럼 건방지고 비천한 자 있을까
창조주를 저버린 나
나는 그렇게 불신의 무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내 생명의 한 호흡, 한 호흡을 주재하고 계시며 나 자신을 낳아주신 신, 그 신으로부터 내가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나의 끊임없는 고뇌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를 신에게서 멀리 떼어놓은 것이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사악한 욕정이라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이쯤에서 붓을 놓아야겠다. 다음 장에서부터 실제의 이야기를 다루기로 하겠다. – 1925년 11월 26일 사바르마티 아슈람15)에서 M. K. 간디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인도인 거주민의 권익보호 운동에 참가했으며 귀국 후에는 영국으로부터의 인도 독립운동을 지휘했다. 운동의 형태는 민중의 폭동을 취한 것이 아니라 ‘비폭력·불복종’을 제창했다. 이런 사상(그 자신이 만들어낸 말에 의하면 사탸그라하, 즉 진실에 대한 파악이라 불렸다)은 인도를 독립시키고 대영제국을 영연방으로 전환시켰을 뿐만 아니라 정치사상으로써 식민지 해방운동과 인권운동 등의 영역에서 평화주의적인 수법으로 전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자신에게는 엄격했으며 타인은 늘 공평함과 관대함을 가지고 대했지만 친족들에게까지도 극단적인 금욕을 요구했기 때문에 반발을 사기도 했다. 또한 나치스트의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유대인들에게도 일관되게 비폭력·불복종을 권유했기에 시오니즘 지지자들 중에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 독자의 평
사실상 오늘날도 그때나 마찬가지로 3등 객실은 불결하고 변소 시설도 나쁘다. 3등 객실의 승객들은 양떼처럼 대접을 받고, 그들의 편리는 양의 편리 같은 것이다. 유럽에서도 나는 3등칸으로 여행을 했고 다반 한 번, 어떤 것인가 보려고 1등칸을 탔었는데, 1등칸과 3등칸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3등칸 승객은 주로 흑인들인데, 그래도 3등칸의 시설이 여기보다는 나는 이미 『기타』를 믿고 있었고, 거기 매혹되어 있었다. 매일 한두 구절을 따로 외우기로 결심을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아침 목욕시간을 이용하기로 했다. 거기 35분이 드는데 칫솔질에 15분을 쓰고 목욕에 20분을 쓴다. 첫번째 것은 서양식으로 곧추서서 한다. 그래서 맞은편 벽에다 『기타』의 구절을 쓴 종이를 붙여놓고 그것을 이따금 보면서 외웠다. 이 시간이면 그날 것을 외우고 이미 외운 것을 반복하는 데 충분했다. 그렇게 해서 열세 장을 외웠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기타』 외우기는 그 외의 다른 일과 사티아그라하는 지금도 그렇지만 내 모든 사색 시간을 다 차지해버렸다. 나에게 『기타』는 완전한 행동의 지침이 되었다. 이것은 내가 날마다 찾아보는 사전이 되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어가 있을 때면 영어사전을 찾듯이, 내 모든 난 문제와 시련에 대해 미리 준비되어 있는 해답을 얻기 위해 나는 이 행동의 사전을 찾았다. 아파리그라하 (무소유)나 사마바바 (한결같음, 평등관) 같은 낱말들이 나을 괴롭혔다. 평등한 마음을 어떻게 길러가며 지켜가느냐가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모든 소유를 내버릴 수 있을까? 내 몸부터가 훌륭한 소유가 아닌가? 내가 가지고 있는 책장도 다 부숴버려야 하는 것일까? 나는 내가 지닌 모든 것을 내버리고 ‘그이’를 따라야 하나?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이’를 따를 수 없다. 무소유나 평등관은 심정의 변화, 태도의 변화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청천백일같이 내 마음에 명확해졌다.
‘누가 감히 저 태어난 바탕의 물결을 향해 이만큼만 하고(그 이상도 말고) 말할 수 있을까? 누가 감히 자기가 태어날 때의 인산을 지워버릴 수 있을까? 제 자식들이나 돌봐조는 것들에 대해 자기가 밟아온 진화의 방향을 반드시 따라올 것을 기대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희생과 간소한 생활의 이상이 점점 더 구체화되어가고, 일상생활 속에서 종교적 의식이 점점 더 생기를 띠어감에 따라 채식주의를 하나의 사명으로 알자는 열망이 더욱더 높아지게 되었다. 아무리 개혁을 열심히 하자고 하더라도, 제 역량에 넘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또 그렇게 말은 돈을 빌려주는 데서 나는 『기타』의 교훈, 즉 평등관을 가지는 사람의 의무는 결과를 바라는 마음 없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어긴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생활이 점점 더 간소해짐에 따라 의약을 싫어하는 생각이 더욱 심해졌다. 그 발기인들의 주장대로라면 영국 사람은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먹는다. 밤중이 될 때까지도 먹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에게 주는 돈이 많다. 이러한 꼴을 면하려면 적어도 아침은 안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나는 내가 이때까지 필요 이상으로 먹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책 속에서 신선한 과일과 견과를 인간의 자연적인 식물로 권하고 있었다. 나는 일생에 두 번 아주 중병을 앓아본 일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1천에 999는 음식 조절, 흙, 물 치료, 또는 그와 비슷한 가정요법으로 나올 수 있다. 조금만 아프면 곧 양의요 한의요 하며 의사에게 달려가고 식물성, 동물성의 가지가지 약을 삼키는 사람은 스스로 제 목숨을 단축시킬 뿐 아니라, 몸의 주인 노릇을 못하고 종 노릇을 하는 동안에 자제하는 힘을 잃어서 사람 노릇을 못하게 되고 만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쓴 것이라고 해서 이런 생각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내가 왜 앓았느니 그 이유는 내가 안다. 그 병들의 책임이 오직 내게만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때문에 능히 참아갈 수가 있다. 10년 동안, 그러니까 1914년까지 내가 감옥에서 억지로 쉬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내 논설을 싣지 않고 발행된 『인디언 어피니언』은 한 호도 없었다. 글자 한 자라도 생각 없이 썼다거나, 단순히 재미나게 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과장해서 썼다는 기억은 없다. 실로 그 신문은 나에게는 자제의 수련장이 되었고, 친구들에게는 내 사상과 끊임없는 접촉을 해나가는 매개체가 되었다. 비평가는 반박할 만한 것을 거의 찾아내지 못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사람 사냥이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런 종류의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질 것이고, 내가 만일 가정생활의 쾌락과 자녀의 출생과 양육에 빠져 있었더라면 나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한마디로 나는 육과 영을 다 따를 수는 없다. 가령 예를 들어서, 현재 내 아내가 임신중이라면, 나는 이 전란 속에 뛰어들 수 없었을 것이다. 브라마차리아를 지키지 않고는 가정 봉사와 사회 봉사는 양립이 될 수 없다. 브라마차리아를 지키면 둘은 완전히 양립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