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891년 1월 11일, 프랑스의 도시계획가 조르주외젠 오스만 (Baron Georges-Eugène Haussmann, 1809 ~ 1891) 별세
조르주외젠 오스만 남작 (프: Baron Georges-Eugène Haussmann, 1809년 3월 27일 ~ 1891년 1월 11일)은 나폴레옹 3세가 주도한 파리 개조 사업에 공이 컸던 인물이다.
개조 사업은 처음에는 국민들로부터 막대한 공사 비용 때문에 비난을 받았으나 준공 이후, 영국 등의 다른 나라들이 파리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 조르주외젠 오스만 (Baron Georges-Eugène Haussmann)
.출생: 1809년 3월 27일, 프랑스 파리
.사망: 1891년 1월 11일, 프랑스 파리
.배우자: Octavie de Laharpe (m. 1838 ~ 1890)
.자녀: Valentine Haussmann, Henriette Haussmann
.학력: Paris Law Faculty (1831), Henri-IV School
.업적: 파리 개조 사업
– 파리 개조 계획 (Transformations de Paris sous le Second Empire)
.명칭 (프랑스어): 제2제국의 파리 개조 계획 (Transformations de Paris sous le Second Empire)
.유형: 도시계획
.진행기간: 1852 ~ 1870년
.장소: 파리 (Paris)
.계획자: 나폴레옹 III세 (Napoleon III), 조르주 외젠 오스만 (Georges Eugene Haussmann)
○ 부록 : 파리 개조 계획의 역사
파리 개조 계획은 황제 나폴레옹 III세 (Napoleon III)와 남작 오스만이 추진한 대대적인 건축사업으로서, 1852년~1870년 간 진행되며 파리의 근대화를 이루어 놓았다.
계획은 파리의 중심부부터 외곽지역 전체를 포함하였으며, 도로와 대로, 건물의 방향, 공원, 도로설비, 배수 및 급수시설, 편의시설과 공공 기념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개조사업은 막대한 자금 소모로 인해 엄청난 비난을 받았으나 한 세기가 지난 후부터 이러한 비난들은 모두 사그라 들었다. 계획은 당시까지 중세적 인상이 강한 2류 도시에 불과했던 파리를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근대적인 도시로 탈바꿈시켰으며, 그림같은 도로와 광장은 프랑스인은 물론 세계인들의 이목을 파리로 이끌었다.
– 1852년, 중세적인 수도에 대한 황제의 결정
19세기 중반, 다른 도시들과 달린 파리는 통념에서 벗어난채 아직까지도 중세 도시로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여러차례 재건축을 거쳤다고 하나, 18세기에서 산업시대인 19세기로 넘어오는 동안에 증가한 인구를 수용하기엔 루이 XIII세 (Louis XIII) 시절의 성벽은 너무나 좁았다. 좁고 미궁같이 얽힌 도로는 만성적인 교통혼잡을 불러일으켰으며 (1851년 당시 600km의 도로가 설치된 파리엔 6만 259대의 자동차 존재) 점점 증가하는 비위생적인 주택들은 질병의 주요 원인이 되었는데, 당시엔 좁은 거리와 높은 집들이 질병을 옮기는 “독기”의 순환을 막아주었다고 생각했다. 도시가 점차 지저분해짐에 따라 부유층은 점차 북서부의 교외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중심가는 점차 빈민화되어감과 함께 정치적 위험을 동반했으며 이는 당국으로 하여금 근본적인 해결책을 요구했다.
– 근대화의 초기 시도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전혀 없었던건 아니었다. 이미 18세기 초반부터 중앙부에서 시작된 파리의 확대를 위해 1780년대부터 프랑스에선 센 강의 다리들과 주택가들을 파괴했다 (물론 여기엔 위생적인 의도도 있었다). 프랑스 혁명 (Révolution française)이 한창이던 1794년, 예술가 위원회 (Commission des artistes)는 파리의 확장에 관련된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위원회는 현존하는 빅토리아 대로 (Avenue Victoria)를 따라 모든 도로를 국민광장 (Place de la Nation)으로까지 수직선으로 연결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이는 훗날 동서부를 잇는 주요 도로의 탄생을 예고했다.
프랑스 최초의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 I세 (Napoleon I)는 교회재산의 국유화를 통해 튈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 건설과 도로신설, 구획정리와 같은 여러 기념비적인 사업들을 펼쳤다. 훗날 제2 공화국 정부는 이때 건설된 리볼리 도로 (Rue de Rivoli)를 시청사까지 증축했으며, 이는 제2 제국 시절에서야 마무리 되었다. 많은 주택가의 파괴를 요구로 한 이 도로들은 당초 예술가 위원회가 계획했던 교통계획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발휘해냈다. 한편, 도로의 정렬화에 따라 앞줄에 위치하던 자신의 집이 붕괴되자 소유인들은 다시 그 뒷면에 새로이 주택을 건설하였는데, 이것은 오래된 법적 장치 덕분에 가능한 편법이었으나 곧 행정부에 의해 중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도로의 확대로 인해 매우 느리게 나타나는 과정 중 하나에 불과했다.
1830년대 동안, 지사 클로드 필리베르 바르텔로 드 랑뷔토 (Claude-Philibert Barthelot de Rambuteau)는 구 시가지에서 발생하는 교통 및 위생문제를 목격하였으며, “파리인들에게 물과 공기, 그리고 그늘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남작 랑뷔토의 언행록 (Memoires du Comte de Rambuteau) 일부 -그리고 1836년, 프랑-부르주아 도로 (Rue des Francs-Bourgeois)와 성 외스타슈 교회 (Eglise Saint-Eustache) 사이엔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생겨난다. 한편, 파리의 대중폭동으로 인해 연극계는 체제의 심각성을 걱정하게 되었으며, 1830년 7월 혁명 (Revolution de Juillet)이 발생함에 따라 랑뷔토는 파리의 질서와 위생에 대한 계획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다행히도 이후 중앙부의 경계면이 확장됨에 따라 시청사는 위험으로부터 격리되었으나, 정부는 아직까지도 징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841년 5월 3일, 얼마동안 개정을 위한 시도가 이어졌으나 법은 여전히 주주들의 입장에 서있었고, 이들은 건물의 철거때 마다 고액의 보상금을 방패로 삼았다.
이후 제2 제국이 들어섬과 함께 프랑스엔 1841년 공익사업에 대한 새로운 조항 (Loi de 1841 sur l’expropriation pour cause d’utilite publique)이 도입되었는데, 이것은 징발의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함과 동시에 황제가 새로운 센 지사 (Prefet de la Seine)를 임명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Louis-Napoleon Bonaparte)
1848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반란을 통해 1852년 12월 2일 나폴레옹 III세로 즉위하였다.
나폴레옹 III세의 자신 큰 소원은 바로 파리의 근대화였다. 그는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 산업혁명을 거치며 변화한 근대적인 도시의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다. 런던에는 수많은 공원들과 가로수들, 근대적인 설비들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도시 전체를 미적으로 아우르는 도로망은 그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랑뷔토에 의해 구체화 된 나폴레옹의 생각들은 프랑스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파리의 빈약한 주택 상황을 향상시키고자 했는데, 당시 파리의 일부 구획에선 평방 킬로미터당 10만여 명이 밀집해 있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작업이 진행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 밖으로 밀려나자 나폴레옹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1851년 파리 외곽지역에 86채의 주택을 건설하였고, 이것은 후일 사회주택의 시초가 되었다 (파리 시의회에서의 예산안 통과가 무산되자, 주택의 자금은 대리무역과 산업의 후원을 통해 마련되었다).
한편, 샤를 푸리에 (Charles Fourier)의 원칙에서 영감을 얻은 사회주의자 에티엔 카베(Etienne Cabet)는, 1867년 개최되는 만국박람회에서 도메닐 대로 (Avenue Daumesnil)에 위치한 노동자 계급층들을 불러모은 뒤 자신의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789년 이래로 대중봉기로 흔들리던 체제는 당국의 강력한 통제앞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지주들은 자신들의 구획과 재산의 성장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이것은 곧 부대의 움직임이 용이한 넓은 도로의 등장을 예고했다.
그러나 이러한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황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했으며, 무엇보다도 주변의 어떠한 방해에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을 인물이 필요했다.
나폴레옹은 곧 대규모적인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은 조르주 외젠 오스만에 의해 엄격하게 진행되었으며, 1853년 7월 센 지사로 임명된 그는 “도시의 환기와 미화, 통일”의 임무를 지니게 되었다. 1870년까지 황제가 오스만을 모든 적수들로부터 보호하면서, 오스만은 자신이 지닌 모든 지식, 재산까지 동원하며 작업에 대한 헌신을 들어냈으며, 나아가 그는 생 제르맹 대로에 대한 계획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작업은 수많은 관련인들의 참여를 요구로 했다. 오스만을 나폴레옹에게 소개한 내무장관 빅토르 드 페르시니 (Victor de Persigny)는 기업가인 페레르 (Pereire) 형제를 도와 재정문제를 해결했다. 기술자 장 샤를 알팡 (Jean-Charles Alphand)은 원예가 장 피에르 바릴레 드샹프 (Jean-Pierre Barillet-Deschamps)와 함께 파리의 공원과 농원을 조성하였다.
오스만은 기본적인 원칙인 공공업무를 강조했다. 건축가이기도 했던 드샹프의 철저한 감독 아래 설정된 신 도로 구간에 대해, 오스만은 “기하학적이며 사실적인 설계가 스스로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냈다.”고 언급했다. 이외에도 르 알 (Les Halles)에선 빅토르 발타르 (Victor Baltard)가, 삼위일체 교회(Eglise de la Sainte-Trinite)는 테오도르 발뤼 (Theodore Ballu)가 작업을 맡았으며, 가브리엘 다비우(Gabriel Davioud)는 샤틀레 광장 (Place du Chatelet)의 극장을 설계하였다. 노련한 건축가였던 자크 이토르프 (Jacques Hittorff, 야코프 히토르프)는 북부역 (Gare du Nord)의 설계를 담당했다.
– 공공과 민간부문의 협력
생 시몽주의 (Saint-simonisme)의 영향을 받은 나폴레옹과 그의 기술자 미셸 슈발리에 (Michel Chevalier), 페레르 형제와 같은 기업가들은 사회적 변화와 빈곤의 감소를 위해선 경제적 의지주의가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믿음들은 곧 권위주의 (또는 독재)를 형성하였고, 이것은 파리 시 전체 (특히 빈곤층)가 계획에 착수하도록 격려하였다. 경제체제의 초점은 어느정도 발달을 거친 은행이었으며, 이러한 원칙들은 개조사업에 이상적인 범위를 제시했다. 한편, 오스만은 부족한 자금을 사비를 통해 채우고 장비를 구매함으로서 직접적인 작업감독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오스만 제도
프랑스 정부가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징발하던 초기, 지주들은 국가의 원대한 계획에 대해 찬사를 보내며 기꺼이 토지를 헌납했다. 건물들이 철거된 이후 그곳엔 새로운 도로들과 급수시설, 가스공급, 하수처리 등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랑뷔토와 달리, 오스만은 매해 5천만에서 8천만 프랑에 달하는 거금을 개조사업을 위해 대출받고 있었다. 예상했던대로 1858년부터 파리에선 금전적 지원이 가장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고, 이에 정부는 분할한 토지를 세세한 건축계획도를 가지고 있던 부동산업자들에게 판매하였다. 이러한 제도 덕분에 프랑스는 파리 시 매해 수입의 두배에 달하는 건설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도 역시 천천히 붕괴되어가기 시작했다. 막대한 대출금에서 발생한 이자로 인해 1870년 채무금은 1조 50억 프랑에 달했으며, 이는 위대한 작업의 신용도를 떨어뜨렸다. 이에 대해 1867년, 쥘 페리 (Jules Ferry)는 개조사업이 거대한 경제적 구멍이라 비난하는 내용의 인쇄물 – ‘오스만의 기상천외한 셈법 (Les comptes fantastiques d’Haussmann)’ – 을 발간하기도 했다.
.공공규제
오스만은 골조공사 규정에 대한 입법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새로운 도로에 대한 안정성을 보장해주었다.
1852년 3월 26일, 파리의 거리에 대한 법령이 포고됨에 다라 오스만은 자신의 임용 1년 전부터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였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요 조항: 행정부는 징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였다. 주요 도로의 건설에 따라 행정부는 이전 소유인을 추방하여 구식적인 도시구조를 제거함으로서 파리 시의 부가가치를 높혔다 (그러나 쫓겨난 이들에 대한 보상에 대해선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매우 고가이지만, 동시에 매우 효과적인 공공정책이었기에 오스만이 의존했던 것이다. 이러한 법적 도구들은 시도와 모든 구획, 샤틀레와 아르시 (Arcis) 구획 시청사 사이에 자리잡은 고밀도의 인구를 감소시켰으나, 1860년 이후 국무원 (Conseil d’Etat)이 행정부의 결정권을 축소시킴에 따라 징발은 난항을 겪게 되었다.
-10년마다 건물 주인은 건물 외관을 청소해야했다.
-규정에 따라 건물들을 도로와 함께 일직선으로 배치하였으며, 하수관을 연결시켰다.
정부는 건물에 대한 규정뿐만 아니라, 외적인 면에 까지 직접적으로 간섭하였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59년 규정에 따라 건물의 높이는 지면에서부터 20m 이상은 되어야 했는데, 오스만 이전까지 파리에서 높은 편에 속하는 건물들의 평균 높이는 17.55m 였다. 한편, 지붕의 각도는 반드시 45도를 유지해야 했다.
-기술의 발달에 따라 석재로 제작된 새로운 도로를 따라 건설된 건물들은 특별한 양식의 출현을 의미하였는데, 주택들은 모두 “같은 높이와 같은 간선, 같은 외관”을 지니게 되었다.
도로는 건축 도로 관리인에 의해 관리되었는데, 사업이 진행될수록 프랑스 내에서 기술자들의 중요성은 한층 더 높아져갔다.
– 계획의 진행
그 엄청난 작업량은 제국의 발전속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1859/1860년 까지 권위주의적 정부는 2만여 채의 가옥을 철거하였으며, 도로가 정비된 1852년에서 1870년 사이에 4만여 채의 건물을 새로이 건설했다. 한편, 이러한 계획들 중 몇몇 작업들은 황제가 폐위된 이후인 제3 공화국 시절까지도 계속되었다. 1844년, 아돌프 티에르 (Adolphe Thiers)가 건설해둔 “방비시설(Fortifications)”은 1860년에 계획에 따라 파리 교외지역과 통합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파괴는 1919년부터 였다). 작업 이후, 12개였던 구획은 20개 지구로 증가하였다.
.주요 도로망의 정비
랑뷔토가 파리시 중심에 새로운 대로를 개통했을 당시, 파리인들은 13m나 되는 대로의 넓이에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오스만은 곧 그에게 새로운 2차 도로의 건설을 맡겼고, 랑뷔토는 넓이가 20~30m에 달하는 도로를 건설해냈다. 이후 이 도로는 파리의 도시구조의 척추와도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남북부와 동서부간의 격차
1854년부터 1858년까지, 권위주의적인 나폴레옹의 정부 아래 오스만은 파리 시와 프랑스 역사에 길이남을 작업을 약 10년간 진행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파리 중앙에 거대한 교차로를 창조해냈다.
건설작업은 세바스토폴 대로 (Boulevard de Sebastopol)과 성 미셸 대로 (Boulevard Saint-Michel) 까지 이어지는 북부-남부를 축으로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파리에 존재했던 수많은 뒷골목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두 대로의 건설은 곧 샤틀레에 위치한 리볼리 도로와 함께 거대한 교차로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제국은 튈르리 궁전 (Palais de Tuileries)을 따라 나폴레옹 시대에 이어진 생 앙투안 도로 (Rue Saint-Antoine)를 확장시키기도 했다.
그사이, 발타르는 랑뷔토와 함께 시장의 미관에 대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시도는 대규모의 재개발을 겪게 되었으며, 교량들은 재건되거나 중요한 작업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1854년, 샤틀레 광장에 위치한 파리 시장의 좌측엔 시장로 (Rue des Halles)가 개통되었다.
오스만은 중앙부에 위치한 거대한 교차로를 쿠론 대로 (Couronne de boulevard)와 연결시켰으며, 좌측 제방엔 렌 도로 (Rue de Rennes)가, 우측 제방엔 오페라 대로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센 강을 따라 자리했던 렌 도로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쿠론 대로의 완성
오스만은 루이 XIV세 (Louis XIV)의 작업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이에 따라 대로와 건물들의 폭은 점차 넓어졌으며, 새로운 도로 넓이 규정에 따라 리샤르-르누아 대로 (Boulevard Richard-Lenoir)가 새로이 건설되었다.
몇몇 도로들은 페르미에 성벽 (Mur des Fermiers generaux)과 이어진 루이 XIV세 시절의 도로들과 연결되었다. 오스만 대로와 라 파예트 도로 (Rue La Fayette)는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있었으며, 일부는 1870년대에 오페라 구역과 외곽지역을 위해 건설된 것들이었다. 이와 함께, 국민광장에서 시작된 불테르 대로 (Boulevard Voltaire)는 중앙부로의 이동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좌측 제방에는 이탈리아 광장 (Place d’Italie)과 당페르-로셰로 광장 (Place Denfert-Rochereau), 몽파르나스 (Montparnasse)를 통과하는 “중앙대로 (Boulevards du midi)”가 설치되었는데, 이곳은 중앙부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동부와 서부를 이동하기 위해선 반드시 지나야하는 도로였다. 에콜 도로 (Rue des Ecoles)의 건설과 함께 오스만은 또 하나의 개인적인 작업을 추진하였는데, 좌측 제방에 우측 제방의 대로를 따라 뻗어있는 생 제르맹 대로 (Boulevard Saint-Germain)의 건설이 그것이었다.
.제3 도로망: 외곽지역
그의 임기 마지막 해인 1860년, 오스만은 지역사회에 대한 통합과 개발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19, 20, 12 지구에서 매우 긴 굽은 길을 만들어냈는데, 푸에블라 도로 (Rue de Puebla) – 지금의 시몬 볼리바르 대로 (Avenue Simon-Bolivar) – , 피레네 도로 (Rue des Pyrenees), 미셸 비조 장군 대로 (Avenue du General-Michel-Bizot)가 이에 해당한다.
서부 지구에서 계획은 아주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었는데, 에투알 광장 (Place de l’Etoile)과 만나는 12개의 대로 건설이 그것이었다.
이외에 도메닐 대로 (Avenue Daumesnil)나 말제흐브 대로 (Boulevard Malesherbes)와 같은 도로들이 건설됨에 따라 각 지구는 파리의 중앙부와 연결되었다.
.교차로
각 대로들이 서로 연결됨에 따라 파리는 더 많은 면적의 광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대표적인 예로는 가브리엘 다비우에 의해 설계된 르 샤틀레 (Le Chatelet)가 있는데, 샤틀레는 파리의 남부와 북부,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주요 교차지점이었다. 오스만 역시 파리에 더 넓은 광장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산물로서 에투알 광장, 레옹-블륑 광장 (Place Leon-Blum), 공화국 광장 (Place de la Republique), 알마 광장 (Place de l’Alma)이 들어섰다.
.기차역
오스만은 또한 기차역을 건설하도록 명령하였는데, 1855년 프랑수아 알렉시 센드리에 (Francois-Alexis Cendrier)에 의해 리옹 역 (Gare de Lyon)이 건설되었으며, 1865년엔 히토르프의 설계에 따라 북부역 (Gare du Nord)이 들어섰다.
오스만은 철도를 통해 각 역을 연결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미 각 역들은 도로를 통해 연결되어 있던 상태였다. 일례로 리옹 역 (Gare de Lyon)은 리옹 도로 (Rue de Lyon)와 리샤르-르누아 대로, 마젠타 대로 (Boulevard de Magenta)를 통해 동부역 (Gare de l’Est)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후 동부역 근처엔 두개의 평행도로 – 라 파예트 도로, 오스만 대로 – 가 연결되었으며, 성 라자르 역 (Gare Saint-Lazare)이 신설되었다. 오늘날의 몽파르나스 탑 (Tour Montparnasse)에 해당하는 좌측 제방에는 렌 도로와 파리 몽파르나스 역 (Gare de Paris-Montparnasse)이 건설되었다.
.기념물
나폴레옹과 오스만은 사회기반시설의 진열을 강조하였는데,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을 건설한 샤를 가르니에 (Charles Garnier)와, 샤틀레 광장과 그 일대의 극장 두개를 설계한 다비우는 모두 좌우가 평행이 되도록 건물을 설계하였다. 이외에도 파리엔 디외 공관 (L’Hotel-Dieu, 병영, 훗날 경찰청사로 개조)과 20개의 신설 지구의 각 구청이 새로이 건설되었으며, 시도에 위치했던 중세의 시장구획는 무역소가 대체하게 되었다.
나폴레옹과 오스만은 또한 기존까지 다른 건물들에 의해 가려져 빛을 잃은 유적들을 위해 인근 건물과 도로에 대한 재배치를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가르니에 건물엔 그 화려함을 돋보이게 해줄 오페라 대로 (Avenue de l’Opera)가 건설되었으며 – 그러나 대로가 건물에 너무 가까이 건설된 탓에 극장은 오히려 주변의 높은 건물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 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파리 성모 대성당 (Notre-Dame de Paris) 주변에 포진해있던 가옥들은 성당의 미관을 훼손한다는 명목으로 인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되었다.
제국은 종교건축물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았는데, 성 외젠 교회 (Eglise Saint-Eugene) – 지금의 성 외젠-성 세실 교회 (Eglise Saint-Eugene-Sainte-Cecile), 삼위일체 교회, 성 앙브루아즈 교회 (Eglise Saint-Ambroise), 성 오귀스탱 교회와 같은 건축물들은 주요 교차로나 도로등에 노출되도록 하였다. 이후, 앞에서 언급한 교회들은 건축기술의 발달과 철제 지지대의 개발 덕분에 지지대가 없는 높은 천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근대적인 공공시설
파리 시에 대한 개조사업은 전역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여기엔 외관과 교통뿐만 아니라 주택의 위생과 안전한 급수, 공기의 순환 등이 포함되었다.
첫 번째 작업은 식수공급에 관한 작업이었다. 1852년 당시 파리의 식수는 주로 증기기관을 이용해 센 강과 우르크 (Ourcq) 강에서 공급되었는데, 이것은 매우 비위생적이었다. 오스만은 기술자 외젠 벨그랑 (Eugene Belgrand)으로 하여금 수도에 대한 새로운 식수공급 방법을 고안해내도록 명령했고, 이에 따라 1865년부터 1900년까지 파리엔 약 600km에 달하는 수로가 건설되었다. 뒤 수로 (Aqueduc de la Dhuis)에선 근처의 샤토 티에리 (Chateau-Thierry) 강에서 물을 끌어올렸으며, 수로를 통해 모아진 물들을 저수지로 흘러가 다시 수도로 공급되었다. 한편, 벨그랑은 수도 내 몽수리 공원 근처에 거대한 몽수리 저수지 (Reservoir de Montsouris)를 건설하기도 했다.
두 번째 작업은 위엄한 물에 대한 것이었다. 수로가 건설된 뒤에도 강에서 끌어올려진 물들은 거리청소와 녹지조성에 사용되고 있었으며, 시민들은 여전히 오물이 뒤섞인 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에 자극을 받게된 나폴레옹과 계획가들은 파리의 근대적인 식수공급시설에 대해 계획하기 시작했다. 1852년부터 각 도로엔 가정으로 연결된 하수도가 설치되었으며, 1854년~1870년까지 벨그랑의 지휘아래 파리 시엔 약 340km에 달하는 하수도가 연결되었다. 이후 빗물은 폐수처리장으로 모아졌으며, 하류인 아니에르 (Asnieres)에서부터 파리 중심부까지 하수도 설치와 배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알마 다리 (Pont de l’Alma) 아래엔 역흡수관 (역 사이펀)이 설치되었으며, 이를 통해 좌측 제방에서 흡수된 물들은 우측 제방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두 시설은 이후에도 계속 보수를 거쳤으며, 오늘날까지도 파리 시의 급수를 담당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파리 시의 기체연료 공급에 대한 개편도 실시했다. 1850년, 나폴레옹은 지불금을 댓가로 민간업체인 파리 기체 회사 (Compagnie parisienne du gaz)에 기체연료 공급을 위임했다. 이곳에선 가로등의 기체연료를 공급하였는데, 의미심장하게도 파리의 석탄과 기체연료 소비량은 7월 왕정에 이르면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다음은 농예화학자 앙젤름 파옝 (Anselme Payen)이 쓴 기록문이다.
”실제로 1848년과 1862년 사이인 14년 동안 통합된 지구, 교외지역을 포함한 파리 인구가 사용한 기체의 누출량은 절반도 채 안되었으나, 최근들어 이는 다섯배로 증가하였다. 이와 유사했던 사례로 추정해볼때, 아마 멀지 않은 미래엔 파리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식물에서 나오는 기체를 무료로 이용하게 될 것이다.”
같은 시기, 오스만은 다비우에게 공원과 도로시설에 대한 설치권한을 위임하였으며 이렇게 설치된 설비들은 오늘날까지도 파리 시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녹지조성
계획 이전까지 파리 시내에는 녹지가 매우 드물었다. 계속된 성장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중세시절의 좁은 시가지를 유지하며 도시가 스스로를 속박하도록 만들었다.
런런의 거대한 공원에 매혹된 나폴레옹은 이미 공화정 때부터 기술자 알팡으로 하여금 파리에 공원과 숲을 조성하라 명령했다. 황제의 명에 따라 도시의 서부와 동부엔 각각 불로뉴 숲 (Bois de Boulogne)과 빈센즈 숲 (Bois de Vincennes)이 새로이 조성되었다. 또한 티에르가 구획한 구 시가지 내에 뷔트 – 쇼몽 공원 (Parc des Buttes-Chaumont)과 몽수리 공원 (Parc Montsouris)이 들어섬에 따라 시민들은 시 외곽까지 나갈 필요도 없이 녹지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오를레앙 왕가 (Maison d’Orleans)의 사유지였던 몽쇠 공원(Parc Monceau) 또한 개조사업에 따라 구획별로 분할된 후 각 지구에 가로수들이 심어진 작은 광장들과 대로들이 들어섰다.
– 도시계획에 대한 비평
개조사업이 진행되자 샤를 가르니에와 같은 수많은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숨막힐듯한 단조로움에 대해 비난하고 나섰다. 정치인들과 에밀 프랑수아 졸라 (Emile François Zola)와 같은 작가들은 투기와 부패에 대해 고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몇몇 이들은 오스만의 재산을 부당하게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러한 수많은 비평들은 곧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도로의 무기화
나폴레옹이 비난받았던 데에는 사회적, 위생적 목적 아래 근본적인 정치적 의도를 숨기고 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당시의 비평가들은 넓게 수직으로 뻗어있는 도로가 소요사태로 인해 장애물이 설치되었을 경우 이를 쉽게 파괴할 수 있도록 해주며, 대포와 군대의 이동을 용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도로의 넓이가 나폴레옹의 개인적 안전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으며, 그 너머엔 근대적 설비를 기반으로 한 도로망의 극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도로설비들이 설치되고 건물과 신설 도로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여기엔 나폴레옹의 질서확립에 대한 근심도 어느 정도 담겨있었다. 이에 대해 오스만은 질서유지를 위해선 개방된 공간을 확보해야한다 설명했고 이는 파리 시의회와 지역 지주들이 계획을 장려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도로엔 전략적 차원의 의도도 담겨있었으나 이것은 파리 개조 계획에 포함된 수많은 의도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도로가 주요 병영들과 연결된 것은 아마 이와 같은 고려로 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오스만은 경찰을 위해 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빈약한 공중위생과 도로정비, 가로등 설치 등을 목적으로 경찰청장과 파리 지사에게 명령을 내리던 입장이었다.
.사회균형의 균열
부분적으로 나폴레옹의 생각이 그대로 구현된 파리 개조 계획은, 사회적 이상 (Ideaux)에도 불구하고 도시계획으로 인한 인구통계학적-사회적 영향으로 인해 동시대인들의 많은 비난을 받았다.
랑뷔토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파리의 거리에 대한 사전을 출간한 루이 라자르 (Louis Lazare)는 1861년 시 일간지에서 오스만의 계획이 파리 시의 불균형적인 인구성장을 촉진시키고 있다 추측했다. 실제로도 오스만은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리유입을 막기위해 일부러 작업속도를 늦추기도 했다.
비평가들의 비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50년대로, 작업이 파리의 사회적 구조에 영향을 줄 것이라 경고했다. 당시 파리인들은 계급에 따라 각기 다른 층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2층에 거주하였으며, 사무원이나 피고용인은 3, 4층에, 5층과 다락방엔 하인이나 학생 등이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획에 따라 자격이 주어지던 기존의 공동생활은, 공사 이후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마주대며 같은 건물에서 거주한다는 특성으로 인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파리의 주택분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도심가의 개발로 임대료가 상승함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은 시의 외곽지역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 인구도표에서 자세히 나타난다 (지구의 숫자가 클수록 외곽지역임을 의미한다).
지구 / 1861년 / 1866년 / 1872년
1 지구 / 89, 519 / 81, 665 / 74, 286
6 지구 / 95, 931 / 99, 115 / 90 288
17 지구 / 75, 288 / 93, 193 / 101, 804
20 지구 / 70, 060 / 87, 844 / 92, 712
-몇몇 계획으로 인해 사회적 불균형이 초래되면서 파리는 부유한 서부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으로 나누어졌다. 또한 16, 17 지구와 같은 동부지역에선 에투알 광장을 둘러싼 대로를 제외하곤 그 어떠한 성과도 거두지 못했으며, 계획은 가난한 이들이 이곳 지역으로 몰리는 것을 무시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오스만은 빈센즈 숲과 불로뉴 숲과 같은 복합적 창조물들을 강조하였으며, 그의 보호를 받던 소규모 자본가들은 빈민굴을 깨끗이 “청소”해냈다.
여전히 거주분포는 거주환경의 분포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주로 교외지역에서 나타났는데, 이는 중심부와 서부의 업무구획, 동부의 중산층 거주지를 제외하곤 산업적 활동으로 인해 주변의 거주환경이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자금제도의 위기
1860년대 후반, 자금제도는 오작동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미 몇몇 설비는 갖추어졌음에도, 인근 지역들이 통합됨에 따라 행정지구엔 더 많은 청사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예산은 이미 엄청나게 불어나버린 상태였다. 정부는 징발을 통해 위기를 해결하려했으나 국무원과 파훼원 (Cour de cassation)은 지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다른 한편으론, 지난 20년간 진행된 공사로 인해 자신들의 도시기능이 마비되어버린 것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도 있었다. 시민들은 외곽지역에서 벌어진 세바스토폴 대로와 생 제르맹 도로의 개통이 오히려 도로체계를 엉망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쥘 페리는 공사에 대해 ‘오스만의 기상천외한 셈법’란 제목으로 신문기사를 냈다. 기사에서 페리는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불확실한 자금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비난하였다. 실제로 작업은 대출이 아닌 자금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위임장 발행을 통해 마련된 기금이었기 때문에 의회의 통제권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1870년 초 작업에 복귀한 오스만은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파리 전 구역에 대한 작업을 끝마치려 하였으나, 실제로 채무가 신속하고도 완벽하게 청산된 때는 제3 공화국이 설립된 이후였다.
– 개조사업의 영향
.오스만의 미학: “뤼에 뮈르(Rue-mur, 성벽로)”
모서리 부분에 면이 위치한 것이 특징으로, 전형적인 오스만 고전주의 양식이다.
오스만은 거리의 시설과 기능을 설계하는데 그치지 않고 민간건축물에 대한 미적 효과까지 염두해두었다.
그는 거리의 정면에 같은 양식의 건축물을 배치함으로서 전체적인 효과를 주고자 했다. 이 때문에 건물은 자율적으로 건설되지 않았으며, 반드시 다른 건물과 조화를 이룸으로서 미관에 적합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구획은 항상 오스만적인 건물들과 이질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직 구획이 파괴되지 않은채 근대화된 구획들만이 오스만적 양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외의 구획들은 지난 1세기 간 새로이 건설된 건물들과 그 이전의 건물이 조화롭게 들어서있다. 한편, 파리에선 새 건물을 건설할 경우 시가지의 정렬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법원의 검사를 통과해야만 했다.
이후 파리도시규정 (Reglements d’urbanisme de Paris)에 따라 공공에 대한 강요는 어느정도 완화되었으며, 예형론의 확립은 파리 고전주의의 종말과 함께 ‘오스만 고전주의 (Haussmannienne classique, 오스만식 파리)’의 탄생을 의미했다.
다음은 오스만의 파리에 위치했던 가옥들의 공통된 주요 특징들이다.
-건물벽은 지면에서 2층 높이 이상이며, 모서리 부분은 굴곡이 져있다.
-한두개의 전망대가 위치한 2층엔 “귀족층”이 거주하며, 창문만 존재하는 3, 4층엔 그 외 계층이 거주했다.
-5층에는 장식이 없는 긴 전망대가 있다.
-지붕의 각도는 45도
건물의 외관은 수평선으로 둘러싸여있었는데, 처마 돌림띠 형식의 전망대는 그 어떠한 돌출부나 융기도 없이 완벽학 일직선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리볼리 대로는 파리 내 모든 대로들의 기준이 되었으나 이것은 각 지구들이 규격화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 벌채 및 운송기술의 발달은 “위대한 계획 (Grand appareil)”의 석재사용을 가능케 하였으며 이 덕분에 시 구획은 매우 거대해졌다.
장식된 건물들은 거리에 기념비적인 효과를 연출하였으나 조각들과 소조물들은 19세기가 끝나기 전까진 더이상 추가되지 않았다.
.오스만의 유산
오스만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서둘러 작업을 끝마치려 했다. 작업의 결과, 콜레라와 같은 주요 전염병 (결핵 제외)들이 사라지게 되었고 옛 건물들에 비해 훨씬 기능적으로 설계된 건물들은 금새 팔려나갔다. 그러나 작업이 완료되지 않은 구 시가지는 여전히 위험했으며, 한 세기가 지난 20세기에 들어서며 구 시가지는 몇몇 급진주의자들의 고향이 되었다.
제2 제국의 작업은 파리 시 역사의 영원한 흔적을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도시계획은 억지스러운 조화와 새로운 작업의 거부, 심지어는 기존 요소의 부활로 나누어진다.
오스만의 “순수한” 규정이 폐기된 시기는 1882년과 1884년으로, 규정이 사라짐에 따라 사람들은 더욱 이전보다 좀 더 자유롭게 건물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법률은 1902년에서야 완전히 정착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오스만 이후”라고 불리고 있는 상황이며 나폴레옹식 기준이 적용되지 않은 도로와 도시구획의 설계는 여전히 거부되고 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파리 시엔 새로운 양식의 건축물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드골파(Gaulliste)를 필두로 한 제5 공화국은 파리시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새로운 양식은 기존의 오스만의 유산을 완전히 거부한 것으로,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 샤를 에두아르 장레 그리 (Charles-Edouard Jeanneret-Gris) – 는 일직선으로 뻗어있으며 넓이가 제한된 도로 대신 도로의 규격을 더 넓힘으로서 자동차들과 사람들이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러한 신식 기준의 도입은 1970년대에 들어서며 다시 도전받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곧 오스만 유산의 재발견으로 이어졌다. 다기능적인 도로의 등장과 함께 도로규격제한의 부활이 이루어졌으며 일부 지구에선 제2제국 시절의 건축물에 대한 건축적 동질성 회복까지 시도되었다.
파리인들은 오늘날 오스만의 유산을 명백히 공화국의 관점에서 보고 있으며, 이시 레 물리노 (Issy-les-Moulineaux)나 퓌토 (Puteaux)와 같은 몇몇 교외지역에선 거주민들 스스로 거주지에 “오스만 구획 (Quartier Haussmannien)”이란 명칭을 붙히기도 했다. 오늘날 파리엔 오스만 이후에 건설된 20세기 초의 건축물들과 오스만 이전-제2 제국 시절의 건축물이 서로 다양하게 어우러져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