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3년 4월 9일, 잉글랜드의 왕 · 요크 왕가의 첫 번째 왕 ‘에드워드 4세’ (Edward IV, 1442 ~ 1483) 타계
에드워드 4세 (Edward IV, 1442년 4월 28일 ~ 1483년 4월 9일)은 잉글랜드의 왕이자 요크 왕가의 첫 번째 왕으로, 랭커스터 왕가의 헨리 6세의 삼종제 (三從弟)이다 요크 공작 리처드의 아들로서 프랑스의 루앙에서 태어났으며, 8촌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 4대 요크 공작, 7대 마치 백작, 5대 캠브리지 백작, 9대 얼스터 백작이었던 에드워드 4세는 부계와 모계 양쪽으로부터 요크 가문, 모티머 가문, 그리고 랭카스터 가문의 왕위계승권을 동시에 물려받으면서 정통성을 획득하였다.
1461년 랭커스터가의 헨리 6세를 모티머의 십자로에서 격파하고 즉위, 그 해에 다시 타우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그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왕비 엘리자베스의 근친자를 중용함으로써 1469년 귀족의 반란이 일어나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헨리 6세의 복위를 허용하였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왕위를 빼앗았다.
그는 신흥 상인계급이나 하급귀족을 자기편으로 삼고 대제후를 눌러 왕권의 강화에 힘쓰는 한편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 에드워드 4세 (Edward IV)
.출생: 1421년 12월 6일, 잉글랜드 윈저 윈저 성
.사망: 1471년 5월 21일 (49세), 잉글랜드 런던 런던 탑
.매장지: 잉글랜드 윈저 윈저 성
.왕조: 플랜태저넷
.가문: 요크
.부모: 부)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 모) 세실리 네빌
.배우자: 엘리자베스 우드빌
.종교: 천주교
* 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영주
.1차 재위: 1461년 3월 4일 – 1470년 10월 3일
.대관식: 1461년 6월 28일
.전임: 헨리 6세 / 후임: 헨리 6세
.2차 재위: 1471년 4월 11일 – 1483년 4월 9일
.전임: 헨리 6세 / 후임: 에드워드 5세
* 요크 공작, 케임브리지 공작, 마치 백작, 얼스터 백작
.재위: 1460년-1461년 3월 4일
.전임: 요크의 리처드 / 후임: 폐지 (잉글랜드왕위에 통합)
* 군사 경력
.참전: 백년 전쟁 – 랭커스터 전쟁, 장미 전쟁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으로 3대 요크 공작 리처드와 세실리 네빌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형들이 일찍 죽어 사실상 장남이었다.
그의 아버지 리처드는 에드워드 3세의 5남 요크 공작 에드먼드의 손자였고 할머니 앤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삼남 클라렌스 공작 라이오넬의 후손이었다. 1450년대에 헨리 6세에 대한 반란을 이끌었고 1460년 지지자들에 의해 헨리 6세의 후계자로 선포되었다. 사실상 이것이 저 유명한 중세 말 잉글랜드의 내전인 장미 전쟁의 시작이다.
12월 아버지 리처드가 전사하자 에드워드 4세는 웨일스에서 군대를 모아 헨리 6세의 지지자들을 무찔렀다.
– 리처드 네빌과의 알력
그대로 헨리 6세를 폐위시키고 즉위한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 가문을 소탕하는데 열을 올렸다. 원래 에드워드 4세는 별로 신뢰가 없었고 싸움, 술, 여자, 겉치레에만 관심이 있던 한량이었다.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계기는 킹메이커였던 사촌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덕분이었는데 실제로 에드워드 4세 집권 초기 가장 큰 세력을 누렸다. 그러나 잘생긴 외모와 매력 때문에 많은 친구들을 얻게 되자 리처드 네빌을 떨쳐 내려고 시도했다.
1464년 5월, 젊은 미망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몰래 결혼하여 자신을 프랑스 공주와 결혼시키려던 리처드 네빌 및 다른 요크 가문 귀족들의 분노를 샀다. 에드워드 4세는 엘리자베스가 첫 남편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및 그녀의 다섯 남자 형제와 일곱 자매를 총애하여 네빌 일가에 맞설 만한 세력을 형성했다.
리처드 네빌은 점차 영향력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1468년 여동생 마거릿이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과 결혼식을 올리자 에드워드 4세는 매제 샤를과 함께 프랑스를 침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 위기와 반전
하지만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고무와 지원을 받아 반격에 나선 리처드 네빌은 1469년 7월 에드워드 4세를 사로잡는 기염을 토했고 그대로 구금했다. 하지만 이미 에드워드 4세의 지지자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오랫동안 가두진 못하고 그해 10월 석방했다.
리처드 네빌은 후환을 두려워 해서 프랑스로 망명하여 랭커스터 가문, 루이 11세와 손을 잡고 1470년 9월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이에 놀란 에드워드 4세는 지지자들과 함께 10월 네덜란드로 망명했는데 용담공 샤를의 지원을 받아 1471년 3월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함께 런던을 탈환하고 4월 바넛 전투에서 리처드 네빌을 죽였다. 같은 날 헨리 6세의 왕비 마가렛이 외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함께 상륙했으나, 투크스베리에서 격파당하고 에드워드는 피살되었다. 이로써 남아 있던 랭커스터 가문 인사들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처형되었으며 그 후 헨리 6세를 죽인 에드워드 4세는 평생을 안전하게 지냈다.
– 말년
1475년 프랑스 원정을 했는데 피키니 조약으로 철수하는 대신 금화 7만 5천 크라운을 일시불로 우선 받고 매년 5만 크라운을 연공으로 받기로 협약했다. 그의 재위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법 제도를 개선했는데 웨일스와 웨일스 경계 지방에는 왕실영지를 토대로 위원회를 만들어 아직 갓난아이였던 자신의 후계자 에드워드의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렇게 잉글랜드 영토였지만 자주 말썽을 부리던 웨일스는 완전히 잉글랜드에 복속하게 되었다. 그는 윈저에 세인트 조지 성당을 다시 짓고 서적을 대량으로 수집했는데 이 서적들은 나중에 대영박물관이 자랑하는 구 왕립 도서관의 기틀이 되었다.
1482년 프랑스의 루이 11세가 피키니 조약과 연공 상납을 거부하자 다시 프랑스 침공을 계획했으나, 폭식과 폭음, 난잡한 여자 관계 때문에 병이 들어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서 3남 7녀를 보았으며 6명의 사생아를 남겼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의 난잡한 여자 관계는 그의 사망 이후 장남 에드워드 5세와 차남 요크 공작 리처드 형제의 정당성에 대해 동생 리처드 3세가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고, 자식들과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위기에 처하는 데 큰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

○ 가계도
– 엘리자베스 우드빌 (Elizabeth Woodville)
엘리자베스 우드빌 (Elizabeth Woodville, 1437년 – 1492년 6월 8일)은 영국 요크 왕가의 국왕 에드워드 4세의 왕비로, 에드워드 5세와 후일 튜더 왕가의 국왕 헨리 7세의 왕비가 되는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생모이다. 영국 왕실 최초의 평민 왕비이다.
요크의 엘리자베스 (1466년 2월 11일 – 1503년 2월 11일), 영국 헨리 7세의 왕비, 헨리 8세의 생모
요크의 메리 (1467년 8월 11일 – 1482년 5월 23일), 조졸
요크의 세설리 (1469년 3월 20일 – 1507년 8월 24일), 웰즈 자작 부인, 마거릿 보퍼트의 이부동생 웰즈 자작 존과 결혼
에드워드 5세 (1470년 11월 4일 – 1483년 경), 런던 탑의 왕자들
요크의 마가렛 (1472년 4월 10일 – 1472년 12월 11일), 조졸
슈루즈베리의 리처드 (1473년 8월 17일 – 1483년 경), 요크 공작, 런던 탑의 왕자들
요크의 앤 (1475년 11월 2일 – 1511년 11월 23일), 하워드 영부인, 노퍽 공작의 후계자인 토마스와 결혼했으나 남편이 공작이 되기 전 사망하였다.
조지 플랜태저넷 (1477년 – 1479년), 조졸
오크의 캐서린 (1479년 8월 1일 – 1527년 11월 15일), 데번 백작 부인
요크의 브릿짓 (1480년 11월 10일 – 1517년), 수녀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