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를 건립한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 (Romulus and Remus)

로물루스와 레무스 (Romulus and Remus)는 로마의 전설에 등장하는 쌍둥이 형제인데, 형제 가운데 로물루스는 전설적 로마의 건국자이자 초대 왕이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물로스와 레무스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늑대가 길렀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로마의 황제들이 여기에서 살기를 좋아했으며 그 궁전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게 로마의 고역사가 파비우스 픽토르(Fabius Pictor)의 설에 의한 것이다.
○ 로물루스와 레무스 탄생설화
파비우스의 설에 의한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후손은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한 알바 롱가(Alba longa)라는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다. 누미토르(Numitor)와 아물리우스 (Amulius)라는 형제는 씨족의 상속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동생인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장자권을 무시하고 무력을 써서 씨족의 우두머리가 된 후, 심지어 형의 딸 레아 실비아(Rhea Sivia, 혹은 일리아 Ilia)를 베스타 신전의 제사장으로 삼아 결혼을 못하게 함으로써 누미토르의 가계의 씨를 말리려고 하였다. 베스타 신전의 제사장은 성직자라는 종교적 위치덕분에 사회에서는 존경받았지만, 평생 동정과 신전의 불을 지킬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물로스와 레무스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늑대에게 길러졌다고 전해진다.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로마황제들이 여기에서 살기를 좋아했으며 그 궁전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가축을 치는 시종 파우스툴루스는 갓난아이들을 제거하라는 아물리우스의 명에 따라 쌍둥이를 바구니에 담아 테베레 강에 띄워 보냈다. 한편 비탄에 잠긴 실비아는 테베레 강에 투신자살 하였다고 한다. 아이들을 실은 바구니는 얼마후 강가로 떠밀려가 멈추어 섰다. 때마침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늑대 어미는 칭얼거리는 아이들에게 젖을 물렸으며, 그리고 딱따구리가 다른 먹을 것을 날아 주었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파우스툴루스는 그의 처 라렌티아와 함께 아물리우스의 명을 거역하고 몰래 자신의 집에서 쌍둥이를 양육하였다고도 한다. 하여간 무사히 성장한 이들은 카피톨이라는 일곱개의 언덕에 도시를 건설했고, 이 도시가 고대 로마이다.
○ 로마 명칭의 기원, 로물루스 (Romulus)
로마의 건국자이자 초대왕으로, 로마 7왕 중 한 명이다. 로마 (Roma)라는 이름부터가 로물루스 (Romulus)에접미사 ‘~a’를 붙인 명칭이다. 즉 ‘로마=로물루스의 땅’. 물론 어원적으로는 Roma에서 Romulus가 역성된 것이다.

– 생애
로마 건국신화에 따르면 어머니의 이름은 레아 실비아. 그녀의 본래 신분은 알바 롱가의 왕 누미토르의 외동딸로 공주였다. 하지만 누미토르의 왕위를 빼앗고 대를 끊으려 한 그의 동생 아물리우스에 의해 베스타 신전의 사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르스신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게 되어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동생인 레무스와 함께 태어나게 된다.
이후 그녀의 자식이 자신의 권력을 뺏어갈까 봐 두려워한 아물리우스 왕에 의해 바구니에 담겨 티베리스 강에 버려지게 된다. 바구니는 강을 따라 흘러가다 팔라티움 언덕 근처의 무화과나무 옆에 도달했고 암컷 늑대에게 건저져 키워지게 된다. 둘은 암컷 늑대의 젖과 딱따구리가 물어다주는 것을 먹으며 지내게 된다.
그 후 양치기 파우스툴루스가 둘을 발견해 키우게 된다. 어느 날 레무스가 도둑맞은 양떼에 대한 분쟁에 휘말려 외할아버지 누미토르 앞에 서게 된다. 이를 알게 된 파우스툴루스는 그들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었고, 그들이 타고 온 아기 바구니를 누미토르에게 보여주어 레아 실비아의 아들임을 증명하게 된다. 이후 세력을 키운 두 쌍둥이는 아물리우스 왕에게 반감을 품은 사람들을 동원하고 알바 롱가 성 안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아물리우스는 결국 굴복하였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들은 알바 롱가의 왕위를 외조부 누미토르에게 돌려주고 파우스툴루스에게 발견되었던 자리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로 한다.

하지만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도시를 세울 자리를 두고 언쟁을 벌이게 된다. 로물루스는 로마 광장이 있는 팔라티움 언덕을,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을 주장했고 독수리 점을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아벤티누스 언덕에 있던 레무스의 머리 위로 6마리의 독수리가 먼저 날아갔지만, 팔라티움 언덕의 로물루스의 위에는 12마리의 독수리가 날아갔다. 그들은 먼저 본 사람이 우선인지, 많이 본 사람이 우선인지 다투다가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이 전쟁에서 레무스가 죽게 된다.
레무스가 죽은 후 로물루스는 팔라티움 언덕에 도시를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고 이름짓게 된다. 건국 당시 로물루스는 토스카나에서 불러온 사람들과 고서적들을 통해 신성한 풍습을 비롯한 여러 규칙을 정한다. 건국일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오가지만 고대 로마의 철학자인 마르쿠스 바로의 견해에 따라 기원전 753년 4월 21일로 여긴다. 이날 로물루스는 흰 암소와 수소에 쟁기를 매서 깊은 도랑을 팠고 이를 도시 성벽의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이 경계는 성역으로 지정되었고 후에 ‘포메리움’으로 명명되었다.
로마의 왕이 된 로물루스는 로마에 성인 남성은 많지만 여성의 수가 부족한 것을 보고 이웃 나라들에 사절을 보내 혼인 관계를 맺을 것을 청했다. 하지만 모두 거절당하자 여성들을 납치하기로 한다. 로마의 종교적인 축제에 이웃의 사비니 인들을 초대했고, 축제 도중에 여성들을 납치하고 나머지는 추방하게 된다. 이에 사비니 인의 도시 쿠레스의 왕 타티우스가 이끄는 연합군이 로마를 공격하게 되었다. 몇 년간 지속된 로마-사비니 전쟁은 로마에 정착하게 된 사비니 여성들에 의해 끝나게 되었고, 양국은 합병을 하게 된다.
죽기 전 팔라티움 언덕에 창을 박아넣으며 이곳이 로마라고 선언했고, 그 창에서 자란 나무는 로마의 흥망성쇠를 같이 겪었다는 전설이 있다. 다른 전승으로는 어느 날 천둥 번개가 몰아치며 번개 (혹은 짙은 구름)가 그를 감싸며 데리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전승도 있다.
로마 신화에 따르면 그는 갑자기 사라지고 나서는 율리우스 프로쿨루스 (Julius Proculus) 앞에 나타나 신이 되었다는 말을 남겼으며, 이 신은 퀴리누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인들에게 중요한 신앙의 대상 중 하나가 되었다.
○ 로마 건국초기 형 로물루스에 대립하다 죽은 레무스
양치기 파우스툴루스는 쌍둥이 형제를 각가 로물루스와 레무스라고 이름지었다. 이들이 자라서 자신들의 출생에 얽힌 사연들을 알게 되자 이들은 당장 알바 롱가로 달려가서 반란을 일으켜 아믈리우스 왕을 처단하고는 늙은 외할아버지 누미토르를 왕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추종자들을 이끌고 먼 길을 떠났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늑대가 자신들을 발견한 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자리를 잡았다. 그 주변에는 언덕이 두 개 있고 그 사이로 테베레 강으로 흐르는 냇물이 있었다. 이 언덕은 팔라티노와 아벤티노였다.
그런데 문제는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을, 레무스는 아벤티노 언덕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자고 고집을 부렸고 둘은 전혀 양보를 하지 않았다. 이들의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자 이들은 새를 많이 보는 쪽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기 위해서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자리를 잡았고 레무스는 아벤티노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첫 번째로 레무스의 오른쪽으로 독수리 여섯 마리가 날아 올랐다. 다음엔 로물루스의 왼쪽으로 열두 마리의 새가 날아왔다. 레무스가 새들을 먼저 보긴 했으나 새의 숫자와 날아가는 방향은 로물루스가 우위였다. 그들은 유피테르 신이 새로운 나라를 세울 인물로 로물루스를 선택했다고 받아 들였다.
내기에서 이긴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을 미래의 로마를 이루는 중심으로 삼고 암소와 황소에 쟁기를 달고는 새로운 도시를 이룰 신성한 경계선을 그었다. 그 경계선을 역사가들은 로마 콰드라타 (Roma Quadrata), 즉 ‘사각형의 로마’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레무스는 한걸음에 새로운 담을 뛰어 넘어 버림으로서 신성성 (神聖性)을 부정했다. 이에 화가 난 로물루스는 즉시 동생인 레물루스를 죽여버리고 그곳을 신성한 땅으로 선포했다. 이렇게 로마의 건국은 형제의 살해라는 끔찍한 피의 역사로 시작되었다.
동생을 죽임으로서 경쟁자를 제거한 로물루스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 나라를 세웠고 그가 세운 나라는 그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라만 있을 뿐 국민이 있어야 나라가 될 터인데 그 나라의 국민, 먼저 그 도시의 시민은 어디에 있는가? 로물루스는 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시민이라며 자신이 세운 도시를 ‘피난처’라고 선언하고 망명자, 도피자, 탈주 노예, 거처를 구하는 범죄자 등 누구든지 환영했다.

이렇게 해서 시민을 확보한 로물루스는 이들에게 아내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야비한 술수를 썼다. 축제를 열고 인근 주민들을 초대한 뒤 그는 신호를 보내 부하들이 축제에 온 여자 손님들을 업고 달아나게 했다. ‘사비니 연인들의 약탈’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이후 몇몇 화가들에 의해서 그림으로 남겨졌다 (니콜라 푸생은 로물루스의 신호에 따라 축제에서 여자들을 안고, 업고, 잡고 달아나는 남자들을 표현했다. 쟈크 루이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라는 그림은 쌍방이 무장한 남자들 가운데서 여인들이 싸움을 가로막는 장면을 그렸다).
세월이 흐르고 딸과 아내를 로마인에게 빼앗긴 사바니 사람들은 로마를 공격하기로 했고 로마의 팔라타노 언덕과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대결했다. 그런데 그때 로마인에게 잡혀 이미 그들의 아내가 되어 그들의 아이들까지 갖게 된 사비니 여인들은 무장한 아버지와 남편들 틈을 뚫고 들어가 싸움을 못하게 막고 있었다.
로마의 건국에 관한 이러한 생생한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른다. 기원전 753년이란 연대는 400년도 더 지난 후 기원전 350년 경, 로마의 학자들이 그렇게 신빙성이 있는건 아니지만 여러 가지 사실들을 종합하여 복잡한 계산 끝에 얻어낸 숫자이다.
그리고 그 연대는 도시의 초기 단계를 발굴한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증거와도 일치하는 점이 있다. 일곱 언덕의 가운데에 있던 로마 콰드라타라는 좁은 지역에서 형이 아우를 살해하며 시작된 로마. 로마는 이렇게 인구를 불려가며, 이웃 도시를 침략해 가며 영토를 늘렸고 후에는 북쪽의 스코틀랜드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 그리고 중동을 거쳐 페르샤의 국경에까지 이르는 한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제국은 동로마 제국까지 합친다면 2천년 이상 지속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 이후에도 1000년 이상 지속된 역사 내내 로마인들은 그들의 도시가, 나아가서는 그들의 나라가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말해왔고 또 믿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