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5월 8일, 프랑스의 후기인상주의 화가 ‘외젠 앙리 폴 고갱’ (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 ~ 1903) 별세
외젠 앙리 폴 고갱 (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년 6월 7일 ~ 1903년 5월 8일)은 프랑스의 후기인상주의 화가다.
프랑스인이긴 했지만 그의 가계는 거슬러 올라가면 페루를 통치하던 스페인 관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연고로 고갱의 어머니는 한때 어린 고갱과 함께 페루에서 산 경험이 있었다. 이때 경험한 페루 고대문명의 독특한 도자기들, 그리고 젊었을 적 견습 도선사로 각 항구를 돌며 보고들은 문물들은 고갱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고갱의 외할머니는 당대 과격한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아마 고갱의 외할머니가 살아서 고갱을 봤다면 경악했겠지만. 그러나 두 사람은 닮은 부분이 있었는데 글 쓰는 데에 재주가 있었다는 것과 과격한 성품이 닮았다.

– 외젠 앙리 폴 고갱 (Eugène Henri Paul Gauguin)
.출생: 184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03년 5월 8일 (54세),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Hiva-Oa Atuona
.국적: 프랑스
.전시 장소: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등
.예술 사조: 탈인상주의, 근대 미술, 인상주의, 원시주의, Synthetism, 상징주의
.사조: 탈인상주의 원시주의
.자녀: 폴라 고갱, 제르맹 휴에트, 장 르네 고갱, Emile Marae a Tai, 에밀 고갱, 알린 고갱 등
.영향: 에드바르 뭉크,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고갱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와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고갱 사후 파리의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두 번의 유작전을 파리에서 개최하였고 그제서야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고갱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회화뿐만아니라 조각, 판화, 도예, 저술 등의 다방면에서 작품을 남겼다.
고갱의 화풍은 클루아조니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표작들의 주제는 원시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 생애 및 활동
전업화가로 뛰어들기 전에는 도선사로 있다가, 1871년 모친상을 당한 후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사에 취직, 주식중개인으로 있으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덴마크 여인 메트 소피 가드와 결혼한 뒤에는 생활이 한층 안정되어, 여유로운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들처럼 주말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주말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훗날 인상파로 불린 화가 카미유 피사로 등의 그림을 팔아줬을 만큼 제법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35세에 돌연 처자식 내팽개치고 화가가 되었다. 초기에는 프랑스 서부 부르타뉴 지방 퐁타방에서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고 파리로 가서 미술계의 최신 트랜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고갱의 목적은 인상파들이 초기에 줬던 충격처럼 엄청난 쇼크를 주는 작품을 만들려 했지만 생각만큼 쇼킹한 작품을 내놓지는 못했다. 오히려 조르주 쇠라가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점묘법으로 미술계에 쇼크를 일으켜서 쇠라에게 이목이 쏠리자 쇠라의 점묘법을 가리켜 저주받은 점들이라고 칭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우키요에를 접하고, 어린 시절 본 페루의 도자기들을 사 모으면서 그런 경험을 살려서 도자기 만드는 작업도 했다. 이를 통해서 고갱은 유럽을 떠날 결심하고 매형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에서 근무한다는 것을 알고 파나마로 떠났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 공사는 개쪽이 나고 있었고 매형은 파산해서 고갱을 챙겨줄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파나마를 떠나 마르티니크 섬에서 몇 달 간 머물렀다. 이때 마르티니크 섬에서 고갱은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성과를 거둔다.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후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친구였던 것으로 유명하다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고흐가 고갱을 동경해서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있는 아를로 와주기를 간청했다. 여기에는 고흐의 이상인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결말은 좋지 않게 끝나고 말았다.
고갱은 고흐의 초청으로 아를에 있는 고흐의 집, 노란색 벽 때문에 노란 집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그곳에서 9주일 동안 고흐와 함께 지내며 작업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성격과 예술관의 차이 때문에 불화가 심해졌고, 결국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는 자해 사건이 일어나자 고갱은 노란 집을 떠났다. 두 사람은 이후에 다시 만나지는 않았지만 오만한 고갱도 고흐의 사건이 충격이었던지 파리로 돌아간 후 귀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의 모습으로 만든 도자기가 남아있다. 근래에 고갱이 고흐의 귀를 잘랐다는 설이 돌기도 했지만 고갱의 성향이나 여러 정황으로 봐서는 그냥 설에 불과한 듯하다.
이후 부르타뉴로 돌아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같은 걸작을 만든 후 1889년에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동남아시아와 일본, 태평양의 독특한 문화를 접한 고갱은 다시금 유럽을 탈출하면 영감이 솟구치는 이상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서 타히티로 떠났다. 심지어 타히티에 갈 때 고갱은 공식적인 초상화 화가로 자신이 파견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고갱의 퍼위를 몰랐던 게 타히티가 프랑스의 식민지이긴 했어도 머나먼 변방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따질 생각을 안했던 탓이 컸다.
고갱은 때묻지 않은 타이티의 원주민들과 교류하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는 문명화가 진행된 곳이었고 타히티의 원주민 소녀들은 무반응했다. 고갱 그림 속의 원주민 여성들의 표정이 그냥 무표정 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고 본다.
타히티에서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자신만의 그림을 체득한 고갱은 이후 프랑스로 돌아왔다. 의기양양하게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이 미술계에 충격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크지않았다. 게다가 고갱이 그림제목으로 붙인 타히티어들을 유치하다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보면 원초적인 그림과는 다르게 금테두리로 장식을 하였는데 자신의 그림이 대작이라고 확신한 고갱이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고전들처럼 화려한 장식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당대에 조소하는 이들이 있었다.

결국 다시 타히티로 돌아간 고갱의 삶은 그야말로 궁핍의 연속이었다. 그림을 그려서 프랑스로 보내서 친구들에게 팔아서 돈을 부치라고 했고 친구들은 어렵게 그림을 팔아서 돈을 부쳐줬다. 하지만 고갱의 경제관념 부족으로 그렇게 부쳐진 돈은 며칠 안돼서 날리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타히티의 정치싸움에 끼어들어서 타히티에 건너온 중국인들을 비난하는 글을 현지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타히티의 중국인들은 고갱을 미워한다고 한다.
이후 타히티보다 좀더 문명의 손길이 덜 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로 옮겼지만 이곳에서는 앞서 정착해있던 가톨릭 주교와 다툼을 일으켰고 현지인들을 위한다고 총독을 비난하는 등 좌충우돌 했다. 결국 알콜중독과 악화된 매독의 증세로 1903년 5월 8일 고갱은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그곳에 있으며, 덕분에 고갱의 묘는 유명 화가의 묘역 중에서 찾아가기 가장 힘든 곳에 속한다.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색면, 실제 대상의 색깔과는 다른 강렬한 색채가 고갱 그림의 특징이다. 그는 자연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자신의 그림 속으로 녹여내서 그려냈다. 이 때문에 한때 고갱과 절친했던 카미유 피사로는 고갱을 격하게 비난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문명을 멀리하고 원시와 자연을 예찬했다는 특징도 있다.
부인과 다섯 명의 아이까지 뒀음에도 여자 관계도 꽤나 복잡한 편이었다. 타히티에 간 뒤로 몇 차례 현지 여성과 결혼과 동거를 거듭했고, 개중에는 15세 정도의 미성년자 소녀도 있었다. 첫번째로 타히티 생활을 하고 돌아온 뒤에 프랑스에서 머물던 시절에도 미성년자들과의 관계가 심각했다. 안나 자바네즈라는 동남아계 미성년자 소녀와 애인으로 동거하기도 했다. 다만 안나 자바네즈는 20대였음에도 고갱이 13살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사실 고갱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좀 가감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 그가 적은 글이나 작품에 대한 설명, 심지어는 미성년자 소녀들과의 관계조차도 말이다. 이는 고갱 본인이 상당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과시욕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갱이 화가로서의 인생 중 상당 기간을 보낸 타히티에는 고갱 박물관이 있다. 그런데 “Musèe Gaugain”에는 고갱의 진품이 없다. 고갱은 돈이 필요해서 그림을 그리면 모두 배편으로 프랑스로 보내 팔았기 때문에 당연히도 타히티에 남은 건 없다. 고갱이 직접 만든 것을 확대하면 도자기 하나, 목각 숟가락 세 개가 전부다. 고갱의 그림 말고, 고갱이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 작품들
보지라르의 채소밭, 1879년, 스미스 대학 미술관
겨울 풍경, 1879년, 부다페스트 미술관
누드 습작, 1880년, 글립토테크 미술관
고갱 부인의 초상, 약 1880 ~ 81년, 뷔흘러 재단, 취리히
보지라르 정원 (루 카르셀 정원에 있는 화가의 가족), 1881년, 글립토테크 미술관, 코펜하겐
과일과 레몬이 있는 일상, 1880년 무렵
목욕하는 여인들, 1885년, 국립서양미술박물관, 도쿄
브르탄의 양치는 소녀, 1886년, 레잉 미술 갤러리
브르타뉴 소녀, 1886년, 뷰렐 컬렉션, 글래스고
목욕하는 브르타뉴 소년, 1886 ~ 87년, 시카고 미술협회
브르타뉴의 양돈가, 1888년
레 알리스캄프 1888년
설교 뒤의 환영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88년

아를의 야간 카페 (마담 기누), 1888년
황색의 그리스도, 1889년, 얼브라이트-녹스 미술 갤러리, 뉴욕 버팔로
라발의 초상이 담긴 일상, 1886년, 인디언폴리스 미술관
숲 속의 움막, 1887년, 개인소장, 워싱턴
바닷가 II, 1887년, 개인소장, 파리
연못에서, 1887년, 반 고흐 박물관, 암스테르담
수다스런 흑인 여성들, 1887년, 개인소장, 달라스
망고에 둘러쌓여, 1887년, 반 고흐 박물관, 암스테르담
폴 고갱 (붉은 베레모를 쓴 남자), 1888년, 반 고흐 박물관, 암스테르담
머리 모양의 물병과 일본 목판화가 있는 일상, 1889년
해변의 타이티 여인들, 1891년
꽃을 든 여인, 1891년, 글립토테크 미술관
유령이 그녀를 지켜본다, 1892년, 얼브라이트-녹스 미술 갤러리, 뉴욕 버팔로
빛나는 땅, 1892년
왕의 종말, 1892년
달과 지구, 1893년
퐁타벤의 물래방아, 1894년
낮잠, 1894년
십자가 위의 예수, 1896년 제작한 목제 실린더를 고무로 본뜬 뒤 찍은 판화, 보스턴 미술관

더는 안돼, 1897년, 코톨드 미술관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 ~ 1898
이브 (악몽), 1899 ~ 1900년, 모노타이프, J. 폴 케티 박물관
모성, 1899년
두 타히티 여인들, 1899년
두 여인, 1901년 또는 1902년
해변의 승마, 1902년, 개인소장
돼지와 말이 있는 풍경 (히바 오아), 903년, 아테네움 헬싱키
이국적인 새와 함께하는 일상, 1902년, 푸쉬킨 박물관
부채를 든 소녀, 1902년, 폴크방 박물관
태곳적 이야기, 1902년, 폴크방 박물관

○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우리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는 프랑스 예술가 폴 고갱 (Paul Gauguin)의 그림 작품이다.
고갱은 왼쪽 상단 구석에 원래의 프랑스어 제목인 D’ où Venons Nous / Que Sommes Nous / Où Allons Nous를 새겨 넣었다. 작가가 자신의 캔버스에 쓴 비문에는 물음표나 대시가 없으며 모든 단어가 이니셜에서는 대문자로 시작되어 표시됐다.
그림의 오른쪽 위 구석에서 그는 왼쪽 상단과 마찬가지로 노란색 바탕 코너에서 서명하고 날짜를 썼다 (P. Gauguin / 1897). 이 그림은 타히티에 다시돌아와서 1897년에 제작되었으며 현재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소재의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있는것으로 알려져있다.
유화 (oil painting)로 그려졌으며 캔버스 (canvas) 크기는 139cm (세로) × 375cm (가로) 1897 ~ 1898년 제작이다.
– 질문에 대한 프란시스 쉐퍼의 답
프란시스 쉐퍼는 그의 저서에서 이 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고갱이 자살하려고 시도하기 직전에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 대하여 쓴 것이로 말한다. 또한 그 질문의 대한 대답은 “온 곳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며, 갈 곳도 없다는 것이다.”로 말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