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년 1월 23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3세 (Otto III, 980 ~ 1002) 별세
오토 3세 (Otto III, 980년 ~ 1002년 1월 23일)는 오토 왕가의 네 번째 왕이다. 오토 1세의 손자이자 오토 2세의 아들로, 독일 국왕이자 이탈리아 국왕이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983년 아버지의 요절로 왕위를 물려받아 어머니 테오파누의 섭정을 받았다. 오토 3세는 정치적 조언을 통해 폴란드와 헝가리를 그의 영향권 안에 두었고 1000년에 폴란드 순례여행을 했다. 그리고 폴란드에 주교청을 신설하여 폴란드 교회가 제국의 교회에서 분리하게 했다. 헝가리에서는 그란 (현재의 에스테르곰)에 주교 통치 지역을 건설하여 이슈트반 1세를 헝가리의 왕으로 추대했다 (1000년). 1002년 미혼인 채로 사망해 육촌 형제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4세가 뒤를 이었다.
– 오토 3세 (Otto III)
.출생: 980년 6월/7월, 독일 왕국 케셀 인근
.사망: 1002년 1월 23일 (21세 사망), 신성 로마 제국 치비타카스텔라나
.매장지: 아헨 대성당
.가문: 오토 왕가
.부모: 부) 신성 로마 황제 오토 2세, 모) 테오파노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 신성로마황제
.재위: 996년 5월 21일 ~ 1002년 1월 23일
.전임: 오토 2세 / 후임: 하인리히 2세
* 이탈리아왕
.재위: 996년 4월 12일 ~ 1002년 1월 23일
.전임: 오토 2세 / 후임: 이브레아의 아르뒤노
* 독일왕
.재위: 983년 12월 25일 ~ 1002년 1월 23일
.전임: 오토 2세 / 후임: 하인리히 2세
오토 3세 (Otto III, 이: Ottone III)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독일 국왕, 이탈리아 국왕이었다.
오토 3세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자신들이 전체 유럽의 황제라는 명분으로 유럽 각국의 내정에 간섭했다.
그의 사후 이탈리아는 잠깐의 권력공백기간을 거쳐 현지인 출신 아르뒤노가 잠시 집권하기도 했다.
○ 생애 및 활동
오토 3세 (Otto III)는 980년, 독일 왕국 케셀 인근에서 출생했다.
3살에 즉위하여 11년간 섭정을 받았으며 14세에 친정을 시작했다.
재위 기간 동안 안팎으로 반란과 외침에 시달렸다.
카롤루스 대제를 흠모하여 수도를 로마로 옮기고 카롤루스 대제를 모방한 성을 짓고 그의 관례를 따라했으나 로마인들이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피난 와중에 21세의 나이에 급작스레 사망했다.
983년 아버지 오토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3살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아 어머니 테오파노의 섭정을 받았다.
그의 치세는 반란과 침략으로 점철되었다. 섭정을 받는 시절에는 어린 황제를 두고 독일 국내에서 유력 제후인 바이에른 공작의 반란에 직면했다.
열네 살 때 단독 통치를 시작했으나 슬라브족과 바이킹족의 침입과 전염병의 창궐 등으로 순탄치 않은 치세를 보냈다.
카롤루스 대제에 대한 동경이 컸던 소년 황제는 카롤루스 대제를 모방한 정치를 시도했다. 그는 제국의 수도를 로마로 옮겼고 카롤루스 대제를 모방하여 팔라티나 언덕에 왕궁을 지었다. 또 카롤루스 대제를 모방하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열두 사도의 종’이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게 했다.
수도까지 로마로 옮긴 그는 이탈리아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에서 큰 반발에 직면했다. 그는 자신의 측근을 교황으로 선출시켰으나 로마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여 대립교황을 내세웠다. 오토 3세는 결국 대립교황을 굴복시키고 자신이 세운 교황을 복권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002년 로마에서 젊은 황제에 반발하는 폭동이 일어났고 폭동을 피해 인근으로 피신했던 21세의 젊은 황제는 그곳에서 갑작스레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아직 결혼도 하기 전이었으므로 후사가 없어 육촌 형제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