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3년 6월 5일, 영국의 정치경제학자•윤리철학자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 ~ 1790) 출생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년 6월 5일 ~ 1790년 7월 17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철학자이다.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심화를 제공했다.
애덤 스미스 (Adam Smith)는 고전경제학의 대표적 이론가로 자본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사상가다. 1723년 스코틀랜드의 커콜디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1737년부터 1740년까지 글래스고 대학에서 라틴어, 희랍어, 자연철학, 도덕철학을 배웠고, 1746년까지 옥스퍼드 대학에서 언어학과 고전을 연구했다. 1748년부터 1751년에는 에든버러에서 수사학과 미문학에 관해 공개강의를 했으며, 이것이 큰 호평을 받아 글래스고 대학의 논리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그 뒤 도덕철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751년부터 1764년까지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교수로 활약하면서, 1759년 『도덕 감정론』을 발간했다. 1764년부터 1766년까지는 교수직을 버리고 귀족의 개인교수로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중농학가와 교류했으며, 귀국 후 커콜디에 10년간 머물면서 드디어 1776년에 『국부론』을 내놓았다. 『국부론』의 발간과 더불어 당시 최고의 사상가로 존경받았으며, 각계 각층의 인사들과 교류했다. 1778년에는 에든버러의 관세위원이 되었고, 1787년에는 글래스고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1790년 7월 17일 에든버러의 캐넌게이트에서 평생을 총각으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 애덤 스미스 (Adam Smith)
.출생: 1723년 6월 5일, 스코틀랜드 커스칼디
.사망: 1790년 7월 17일 (67세)
.국적: 영국
.모교: 글래스고 대학교
.영향줌: 자본주의, 국부론
.기여: 자본주의의 개념 정립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慈悲心)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 애덤 스미스, ‘국부론’ 제1편 제2장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년 6월 5일 ~ 1790년 7월 17일, 67세)는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경제학자, 윤리철학자이다.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의 저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애덤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의 기초를 제공했다.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파이프 커콜디의 세무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일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23년 6월 5일 커콜디에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는 애덤 스미스가 세례받기 약 6개월 전에 사망했다. 4살경에 집시 무리에게 납치되었지만 그의 삼촌에 의해서 구출되어 어머니 마거릿 스미스 (결혼 전 성은 더글러스)에게로 돌아왔다.
14살에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였던 프랜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철학을 공부했다. 1740년 옥스퍼드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옥스퍼드의 생활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1746년에 자퇴했다. 1748년에 케임스 경의 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공개강의를 하게 되었고, 강의에 대한 호평이 계기가 되어 1751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강좌의 교수가 되었고, 이듬해 도덕 철학 교수가 되었다. 1750년경 데이비드 흄을 만났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1759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된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발표했다. 명성을 얻자, 돈이 궁했는지 1764년부터 스미스는 타운젠트 공작의 장남의 개인 교사가 되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받고 교수직을 사임한다. 그의 개인교사로서의 임무는 이 소년과 여행을 같이 다니면서 견문을 넓혀주는 것이었다. 2년에 걸쳐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시찰하고 중농주의 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했다. 이렇게 여행하는 동안 그는 심심풀이로 책을 쓰기 시작했고 여행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와 1776년에 책을 한 권 냈으니 이것이 바로 《국부론》이다.

국부론에서 그는 정부는 민간의 경제 생활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판할 당시, 각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지금처럼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 않았다. 국가가 개인의 경제 활동을 통제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겨졌고, 세금, 수출입 규제 등은 체계적인 이론적 바탕 없이 자의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애덤 스미스는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내버려두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국가의 경제 발전이 보다 많이 이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국가의 기능을 최소한으로 축소시켜 정부의 역할을 소극적인 경찰관의 지위로까지 낮춘 야경 국가론을 펼쳤다. 이에 따르면 정부의 필수적인 의무를 세가지로 주장한다. 1) 국가는 다른 나라의 폭력과 침략에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보유해야 한다. 2) 국가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다른 구성원의 불의나 억압에서 보호하기 위해 사법제도를 엄정하게 세워야 한다. 3) 국가는 사회 전체에는 큰 이익을 주지만 거기서 나오는 이윤이 비용을 보상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개인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없는 공공사업과 공공기구를 건설하고 유지해야 한다 (공공재). 또한 국제적인 경제 질서에서도 자유 방임주의를 주장하여, 당시 각국의 정부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수입을 제한하고 있는 것을 자연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비난하고, 자연의 법칙에 맞는 경제 질서는 국제적 분업에 입각한 자유 무역이라고 강조했다.
스미스는 인간의 더 큰 만족을 추구하는 공통적인 성향 (propensity) 및 교역 본능을 억압하기보다는, 본래 이기적인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것 대신 남들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게끔 유도하는 시장을 통해 본능을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개인뿐 아니라 일반의 부를 추구하는데 유리하다고 지적했다. 공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자라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공익에 이바지하게 된다는 주장도 여기서 나왔다.
그는 당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컸던 중상주의에 대해서 특히 비판을 아끼지 않았는데, 중상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국민의 부는 금은 화폐의 보유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작업 능률에 비례하고, 작업능률을 높이기 위한 필수 요소가 바로 분업이라고 보았다. 도시의 산업에 과도한 특혜를 부여한 중상주의에 맞서, 농업만이 유일하게 부를 창출하는 산업이며 상공업은 불임적이며 비생산적인 산업이라고 주장하던 중농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인류에게 무해했고, 앞으로도 무해할 학문체계의 오류를 (중상주의처럼) 길게 검토할 가치는 없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짤막히 비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책도 스미스 생전에 베스트셀러가 되긴 했지만 정작 본인은 <국부론> 보다는 1759년에 쓴 <도덕감정론>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스미스 본인은 늘그막에 지인들에게 이 책들을 두고 졸작이라고 말할 정도로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도 살아생전 인정받아서 대학교수로 역임되었고 글래스고 대학의 학장이 되면서 부와 명예를 누렸다.

○ 생애 및 활동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피페의 커크칼디의 세무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일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23년 6월 5일 커크칼디에서 세례를 받았다. 애덤의 부친은 스미스가 세례받기 약 6개월 전에 사망했다. 4살 경에 일단의 집시들에게 납치되었지만 삼촌에 의해서 구출되어 모친에게로 돌아왔다. 스미스의 전기 작가인 존 레이는 장난스럽게 애덤 스미스는 별로 쓸 만한 집시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첨부한다. 스미스의 부친은 연합조약의 영향으로 스코틀랜드 해안에 밀수가 급증한 것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것을 지켜본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거짓됨의 참람함을 깨닫고 정부의 법과 규칙을 강화하는 방법 즉, 관세보호등을 찾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국부론’을 쓰는 계기가 된 것이다.
14살에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였던 프랜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철학을 공부하였다. 1740년 옥스퍼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옥스퍼드대의 생활은 그의 삶에 큰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1746년에 자퇴하였다. 1748년에 케임스경의 후원하에 에든버러에서 공개강의를 하게 되었고, 강의에 대한 호평이 계기가 되어 1751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강좌의 교수가 되었다. 1750년경 데이비드 흄을 만났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1759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된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발표했다. 1764년부터 귀족인 타운젠트의 아들을 데리고 가정교사를 하며 유럽여행을 시작한다. 2년에 걸쳐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시찰하고 중농주의 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하였다. 귀국후 저술활동에 전념하여 1776년 유명한 ‘국부론’을 발표하여, 국가가 여러 경제 활동에 간섭하지 않는 자유 경쟁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발전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은 경제학 사상 최초의 체계적 저서로 그 후의 여러 학설의 바탕이 된 고전 중의 고전이다. 1778년 스코틀랜드의 관세 위원이 되고, 1787년 글래스고 대학 학장을 지냈다. 그는 영국 정통파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윤리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스미스는 시장 경제야말로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모두에게 만족스런 결과를 낳으며, 사회의 자원을 적절하게 배분할 수 있다고 보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술도가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그는 시장의 가격은 공정한 룰안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시장의 적절한 가격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독점이나 제3자의 개입에 의한 어떤 것도 반대하였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통한 자유무역과 노동분업이 왕이나 군주보다는 보통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의 중앙계획경제 체제에서는 정치권력이 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데 반해 시장경제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위정자들 범법자들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
스미스의 사상은 두 가지의 계몽주의의 융합이었다. 하나는 프랜시스 허치슨으로 부터의 부드러운 면으로, 사람 내의 선함에 대한 믿음이며, 인류를 교육을 통하여 계몽과 자유롭게 하며, 자연법에 호소하는 확신이었다. 다른 하나는 케임즈 경과, 데이비드 흄으로 부터 오는 냉정하고 회적인 인간의 의향과 동기이다. 이 두가지 사상의 영향을 적당히 융합하여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며 현대 경제학의 기본 뼈대를 구성하였다.

○ 그의 영향
스미스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적 사상은 영미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가진 시장중심의 철학은 시장경제라는 형태의 산업혁명의 기초를 낳았고 가격이 생산의 동기를 주는 가격은 시장이 결정한다라는 보이지 않는 손의 철학을 만들어 냈다. (내쉬평형 이론에 의해 개개인의 이익만을 극대화 되는 경우 사회 전체가 붕괴 된다는 사실이 증명 되어,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은 거의 사장되었다)
그의 국부론의 마르크스의 잉여 가치론에 큰영향을 줬다는 것과,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에도 어떤 형태로든 노동의 결과물을 보수로 받는것에 대한 설명에는 일관성을 잃는 점이 있다는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잉여 가치론은, 노동자 또는 노동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권리를 보장 받지 못하면, 초과된 잉여가치 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의 결과물은 100% 자본가에게 귀속 된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혹자들은 애덤 스미스를 보수 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자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애덤스미스는 위에도 서술 되어있듯, 독점과, 제3의 존재 개입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일정부분의 자유는 사회와 국가의 존립을 위해 일정부분 통제되어야 하며 반드시 자정 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사회적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는 선순환적 작용으로서 군주국이나, 계급사회에서 일반적인 사람들도 경제적 안락을 누릴수 있다고 표현하였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마저도 신분이나 출생, 성별, 인종, 연령, 계급, 등등의 이유로 박탈하는 사회구조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사회가 될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일정부분 사실로서 증명되었고, 일정부분은 부정적 요소 즉 자본 만능주의가 잘못 사용 되었을 경우 특정 집단의 대다수가 자본 잠식 상태에 빠질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특정 권력층에 권력과 자본이 몰려 있을 경우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수 있다는 사실은 설명하는 부분이 없다.
또한 자본시장을 통제하는 자들과 정치의 결탁을 일정 수준이상 견제하지 않으면 기형적이고 더욱더 계급화된 사회상을 갖게 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때 그의 이론은 일정부분은 오류가 있는듯 하다.

– 노동가치론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만큼 중요한 주장 중 하나는 그의 ‘노동 가치설’이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부가가치는 노동 일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마르크스와 달리 애덤스미스는 가치척도 수단으로서의 노동가치에 주목했다. 애덤스미스는 금가치가 불안정한 시대여서 각국간 생산물 가치를 금같이 불안정한 측정수단보다는 안정적 척도인 노동을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마르크스가 애덤스미스를 비판하고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판 노동가치설을 주창하였고 결과적으로 애덤스미스가잉여 가치론에 큰 영향을 준셈이다.
– 도덕 감정론
스미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나 자신을 두 개의 사람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하나는 관찰자이다. 그는 특정관점에서 나 자신을 그의 상태에 집어 넣어 나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 생각하는 자이며, 또 다른 하나는 내자신이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다. 첫 번째 사람은 판단자이며, 두 번째 사람은 판단을 받는 자이다. 도덕적인 인간은 본질상 두 개의 자아로 나뉘며, 양심의 소리에 하나가 된다. 그 양심은 바로 나를 바라보고, 듣고 판단하는 타자이다. 포스트모던의 도덕론에서는 ‘판단하지 말라’ 라고 하지만, 스미는에게 판단하는 것은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만드는 실체라고 여겼다.
○ 평가
알렉산더 칼라일은 스미스에 대해 ‘내가 본 사람중에 공적인 자리 (사교모임)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는 사람으로,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입술을 움직이며 혼자 중얼거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로 묘사하였다.
스미스는 중상주의를 반대하고 자유시장과 자유 무역의 옹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으로 잘 나타나는데,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를 교조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다. (중략) 그는 정부의 선의와 역량을 거의 믿지 않았고, 정부를 통제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자들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중략) 그럼에도 그는 만약 더 나은 수단이 없다면 개인이 하지 않을 것 같거나 할 수 없거나, 하더라도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여러 과제를 정부에 맡길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 제이콥 바이너
스미스는 자신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도덕감정론> 그 사례로 로마제국의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비판인데, 박애를 너무 중시한 나머지 지역과 민족, 복합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을 핀 나머지 로마제국의 혼란과 멸망을 초래했다는 비판이다. 또한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나오는 공정한 관찰자 (impartial spectator) 개념은 프로이트의 초자아 (superego) 개념과 유사한 것이다.

○ 기타
낯가림이 다소 심하고, 작은 키에 말을 더듬었으며, 얼굴을 계속 흔드는 버릇이 있었는데, 반면 우스꽝스러운 장난도 잘 치곤 했다고 한다. 하루는 친구들과 궁궐을 지나는데, 위엄있게 서있는 근위병을 보고 갑자기 지팡이를 쳐들고 근위병 쪽으로 가더니, 총을 쳐들고 늠름하게 움직이는 근위병 뒤에 붙어서 지팡이를 들고 그 행동을 따라했다. 친구 하나는 “원숭이가 사람 따라하는 꼴 같다.” 고 말했고, 근위병은 짜증난다는 얼굴로 바라보긴 해도 뒤에서 막거나 한 게 아니고 스미스가 꽤 이름있는 학자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그를 교수로 임명하던 것도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교수가 되면서 열심히 일했고 학장이 되기까지 연구를 끊임없이 거듭했기에 반대하던 이들도 결국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영국 수상과 고위급 정치인들마저 존경심을 표할 정도로 대가로 인정받았다. 애덤 스미스 본인은 그런 찬사에 매우 쑥스러워 했다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바로 여성공포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게 어머니 마거릿과 사촌누이 재닛이었는데, 어머니와 같이 살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론 재닛의 돌봄을 받으며 살았다. 그런데 뜻 밖에도 세 여성과 얽힌 적도 있었다. 이들은 스미스가 흄과 함께 프랑스 사교클럽에서 교류하면서 만난 여인들인데, 세련된 매너에 풍부한 학식을 가진 스미스에게 호감을 품었다는 것 같다. 한 명은 스미스와 같은 호텔에 머문 후작부인인데, 스미스를 유혹하려고 부단히 애썼으나 당연히 그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한 명은 스미스가 젊은 시절 만난 ‘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답고 교양 있는 여성이었는데, 스미스가 이 여인을 몇 년 동안 사랑했다고 한다. 이유는 몰라도 이 둘의 사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여인도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죽기 전에 ‘미발표된 많은 글들을 태워달라’고 친구에게 요청했는데, 죽기 전에 친구에게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내 눈앞에서 태워달라고 요구해서 친구들은 할 수 없이 20권 분량이나 되는 글을 불태웠다.

○ 저서
– 주요저서
1759년 『도덕 감정론 :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1776년에 『국부론 :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Work by Smith
[TMS] Theory of Moral Sentiments. Ed. A.L. Macfie and D.D. Raphael. Indianapolis: Liberty Press, 1982.
First published in 1759; subsequent editions in 1761 (significantly revised), 1767, 1774, 1781, and 1790 (significantly revised with entirely new section).
[WN]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2 vols. Ed. R.H. Campbell and A.S. Skinner. Indianapolis: Liberty Press, 1976.
First published in 1776; subsequent editions in 1778, 1784 (significantly revised), 1786, 1789.
[LJ] Lectures on Jurisprudence. Ed. R.L. Meek and D.D. Raphael. Indianapolis: Liberty Press, 1982.
Contains two sets of lectures, LJ(A), dated 1762–3 and LJ(B) dated 1766.
[LRBL] The Lectures on Rhetoric and Belles Lettres. Ed. J.C. Bryce. Indianapolis: Liberty Press, 1985.
Edition also contains the fragment: “Considerations Concerning the First Formation of Languages” in LRBL. Lecture dates, 1762–1763.
[EPS] Essays on Philosophical Subjects. Ed. W.P.D. Wightman and J.C. Bryce. Indianapolis: Liberty Press, 1982.
Contains the essays and fragments: “The Principles Which Lead and Direct Philosophical Enquires Illustrated by the History of Astronomy,” “The Principles Which Lead and Direct Philosophical Enquires Illustrated by the History of Ancient Physics,” “ThePrinciples which lead and direct Philosophical Enquiries Illustrated by the History of the Ancient Logics and Metaphysics,” “Of the External Senses,” “Of the Nature of that Imitation which takes place in what are called The Imitative Arts,” “Of the Affinity between Music, Dancing, and Poetry,” “Of the Affinity between certain English and Italian Verses,” Contributions to the Edinburgh Review of 1755-56, Review of Johnson’s Dictionary, A Letter to the Authors of the Edinburgh Review, Preface and Dedication to William Hamilton’s Poems on Several Occasions 261 and Dugald Stewart’s “Account of the Life and Writings of Adam Smith, LL.D.” First published in 1795.
[Corr.] Correspondence of Adam Smith. Ed. E.C. Mossner and I.S. Ross. Indianapolis: Liberty Press, 1987.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