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의 한서 (漢書) – 본기 (本紀)
6. 무제기 (武帝記)
무제기 (武帝記)는 반고의 한서-본기의 여섯 번째 기록이다.
무제기 (武帝記)는 한 세종 효무황제 유철 (漢 世宗 孝武皇帝 劉徹, 기원전 156년 7월 30일 ~ 기원전 87년 3월 29일)로 전한의 제7대 황제 (재위 기원전 141년~기원전 87년)다. 아명은 체 (彘), 자는 통 (通)이다. 열한 번째 경제의 아들이며 효경황후 왕씨 (孝景皇后 王氏)의 소생이다. 그는 유학을 바탕으로 국가를 다스렸으며, 해외 원정 통해 흉노를 크게 무찌르고 남월, 위만조선 등 멸망시켜 요동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으며, 한족 역사상 두 번째로 넓은 영토로 확장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는 진 시황제·강희제 더불어 중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 무제기 (武帝記)
효무황제 (孝武皇帝)는 경제의 아들 중 한 명이고, 어머니는 왕미인 (王美人)이다. 4살 때 교동왕 (膠東王)이 되었다. 7세에 황태자가 되고, 어머니는 황후가 되었다.
16세, (경제) 후 3년 (BC 141) 정월, 경제가 붕어했다.
갑자일, 태자가 황제에 즉위하여, 황태후 두씨 (竇氏)를 높여 태황태후라 하고, 황후를 황태후라 하였다.
3월, 황태후의 동모제 (同母弟)인 전분 (田 ) · 전승 (田勝)을 봉해 모두 열후로 삼았다.
건원 (建元) 원년 (BC 140) 겨울 10월, 승상·어사·열후·중 2천석·제후상에게 조칙을 내려 현량방정하고 직언과 극간하는 선비를 천거하게 했다. 승상 위관 (衛관)이 주청하길 “현량한 선비를 천거한다는 것이 혹 신불해 (申不害) · 상앙 (商앙) · 한비 (韓非) · 소진 (蘇秦) · 장의 (張儀)의 언술 (言術)로 다스려 국정을 어지럽힐 수 있으니, 청컨대 (그 조칙을) 모두 파하십시오”라 했다. 주청을 가납했다.
봄 2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작 1급씩 하사했다. 나이가 80이면 2명의 산 (産)을 면해주고, 90이면 갑졸(甲卒)의 부역을 면해주었다. 삼수전(三銖錢)을 발행했다.
여름 4월 기사일, 조칙을 내려 이르길 “옛날에 교화를 세움에 향리(鄕里)에선 나이로 하고 조정에선 작 (爵)으로 하여 세상을 도와 백성을 인도하는 것에 덕보다 선한 것이 없었다. 그러한 즉, 향리에선 기애(耆艾)를 먼저하고 나이가 많은 이를 받드니, (이것이) 옛날의 도이다. 지금의 천하의 효자와 순손(順孫)이 스스로 힘을 다해 그 부모를 잇고자 원해도, 밖으로는 공사(公事)에 핍박당하고, 안으로는 재물이 궁핍하니, 이는 효심을 막는 것이라, 짐은 이를 매우 애통해 한다. 백성의 나이가 90이상이면, 이미 수죽법(受粥法)이 있다해도, 복자(復子)에서 복손(復孫)이 되는 자까지 그 자신이 처첩을 거느리고 (부모를) 공양하는 일을 이룰 수 있게 하라”고 했다.
5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하해(河海)의 윤택함은 천리나 되니, 사관(祠官)에게 영을 내려 산천의 사당을 수리하고, (祈農을) 세사(歲事)로 삼으며, 그 예를 더하게 하라”고 했다.
오·초(吳·楚) 7국의 난 때, 주동자의 처자로 관노비가 된 자들을 사면했다.
가을 7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위사(衛士)를 옮겨 송영(送迎)의 일을 하는 2만명을 두었는데, 그 중 1만 명을 줄이라. 원마(苑馬)를 파하고, 이를 가난한 백성들에게 하사하라”고 했다.
명당(明堂)을 세울 것을 의논했다.
사자(使者)에게 편안한 수레와 곡식·비단을 더해 보내어, 노(魯)나라의 신공(申公)을 불러오게 했다.
건원 2년(BC139) 겨울 10월, 어사대부 조관(趙 )이 태황태후에게 정사를 주청치 말도록 청한 일에 연좌되고, 이 일이 낭중령 왕장(王藏)에게도 미쳐 모두 하옥되어 자살하였다. 승상 두영과 태위 전분이 면직되었다.
봄 2월 병술일, 날이 어두워지고 일식이 있었다.
여름 4월 무신일, 해 같은 것이 있어 밤에 나타났다.
처음으로 무릉(茂陵)읍을 두었다.
건원 3년(BC 138) 봄, 하수가 평원(平原)지방에 범람하니 큰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
무릉으로 옮긴 자에게 호(戶) 당 20만 전과 전(田) 2경(頃)씩 하사했다.
처음으로 편문교(便門橋)를 지었다.
가을 7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제천왕(濟川王) 명(明)이 태부(太傅)·중부(中傅)를 살해한데 연좌되니, (그를)폐하여 방릉(防陵)으로 옮겼다.
민월(민越)이 동구(東구)를 포위하니, 동구가 위급함을 알려왔다. 중대부 엄조(嚴助)에게 부절을 지니고 가 회계(會稽)의 병사를 내어 바다로 떠가서 동구를 구원하게 했다. 채 이르지도 않았는데, 민월이 달아나니, 군대를 되돌렸다.
9월 병자일, 날이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건원 4년(BC 137) 여름, 바람이 붉은 것이 마치 피 같았다.
6월, 가물었다.
가을 9월,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건원 5년(BC 136) 봄, 삼수전을 폐지하고, 반냥전(半兩錢)을 발행했다.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었다.
여름 4월, 평원군(平原君; 무제의 외할머니)이 훙했다.
5월, 큰 누리(大황)가 들었다.
가을 8월, 광천왕(廣川王) 월(越)과 청하왕(淸河王) 승(乘)이 모두 훙했다.
건원 6년(BC 135) 봄 2월 을미일, 요동(遼東)의 고묘(高廟)에 불이 났다.
여름 4월 임자일, 고원(高園)의 편전(便殿)에 불이 났다. 황제가 5일간 소복을 입었다.
5월 정해일, 태황태후가 붕어했다.
민월왕 영(영)이 남월(南越)을 공격했다. 대행(大行) 왕회(王恢)는 병사를 거느리고 예장(豫章)에서 출병케 하고, 대사농(大司農) 한안국(韓安國)은 회계에서 출병해 민월을 치게 했다. 아직 이르지도 않았는데, 월인들이 (민월왕) 영을 죽이고 항복하니, 환군(還軍)하였다.
원광(元光) 원년(BC 134) 겨울 11월, 처음으로 군국에 영을 내려 효렴(孝悌·廉潔) 각 1인 씩 천거하게 했다.
위위(衛尉) 이광(李廣)을 효기(驍騎)장군으로 삼아 운중(雲中)에 주둔케하고, 중위(中尉) 정불식(程不識)을 거기장군으로 안문(雁門)에 주둔케 했다가, 6월에 파했다.
여름 4월, 천하에 사면을 내리고, 백성들 중 장자(長子)에게 작 1급씩 하사했다. (오초) 7국의 종실로 전일에 (종실의) 호적에 속해있다 끊어진 자들의 적을 회복시켜 주었다.
5월, 현량들에게 조칙을 내려 이르길 ” 짐이 듣자하니 옛날 당우(唐虞)가 있을 의복에 오형(五刑)의 모습을 그리니(畵象) 백성들이 법을 범하지 않아, 일월이 비치는 곳이면 백성들이 제 직분을 쫓아서 부리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한다. 주 나라의 성왕(成王)·강왕(康王)은 형벌을 두었지만 쓰지 않아서, 덕이 금수(禽獸)에까지 미치고 교화가 사해에 통하였다. 해외의 숙신(肅愼)이 내하(來賀)하고, 북으론 거수(渠搜)를 징발하며, 저강(저姜)이 내복(來服)하였다. 성신(星辰)엔 혜성이 나타나지 않고, 일월엔 식(蝕)이 없고, 산릉(山陵)은 무너지지 낳았다. 기린과 봉황이 교수(郊藪)에 나타나고, 하수와 낙수(洛水)에선 도서(圖書)가 나왔다. 아아, 어떻게 베풀면 이에 이를 수 있는가! 지금 짐이 종묘를 잡아 받들게 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며 구하고 밤에 잠들면 생각하지만, 마치 물을 건너는데 건널 곳을 모르는 것과 같다. 아르답고 크도다! 어찌 행해야 선제의 대업과 아름다운 덕을 밝혀, 위로는 요순(堯舜)에 아래로는 삼왕(三王)에 참배(參配)할 수 있겠는가! 짐이 불민하여 능히 덕을 멀리 미치게 하지 못하니, 이는 그대 대부들이 보고들은 바이다. 현량들은 고금의 왕사(王事)의 대체(大體)에 밝으니, 책명을 받아 이 물음을 살펴, 모두 서책을 대하여 죽편에 이를 쓰면, 짐이 친히 볼 것이다”라 했다. 이에 동중서(董仲舒)·공손홍(公孫弘) 등이 (죽편을)내었다.
가을 9월 계미일, 일식이 있었다.
원광 2년(BC 133) 겨울 10월, 옹(雍)으로 순행하여 오치(五 )에 제사지냈다.
봄, 조칙으로 공경들에게 묻기를 “짐은 자녀들을 꾸며 선우에게 짝지어 주고, 금같은 폐물이나 무늬있는 비단을 그들에게 아주 후하게 주었거늘, 선우가 조칙을 받음에 더욱 거만해지고 침략하여 도적질함이 끊이지 않는다. 변경에선 피해를 입고 있어서 짐은 이를 불쌍히 여긴다. 이제 군사를 일으켜 흉노를 공격코자 하는데 어떠한가?”라 했다. 대행 왕회가 마땅히 쳐야 한다고 건의했다.
여름 6월, 어사대부 한안국을 호군(護軍)장군으로, 위위 이광을 효기장군으로, 태복(太僕) 공손하를 경거(輕車)장군으로, 대행 왕회를 장둔(將屯)장군으로, 태중 대부(太中大夫) 이식(李息)을 재관(材官)장군으로 삼아, 30만 군대를 거느리고 마읍(馬邑)의 골짜기 속에서 주둔하고선 선우를 유인해 내어 습격하고자 했다. 선우가 변새(邊塞)안으로 들어왔다가, 이를 알아채고는 달아나 나가버렸다.
6월, 군대를 파했다. 장군 왕회가 주동하여 진격치 않기를 모의한 데 연좌되어, 하옥되어 죽었다.
가을 9월, 백성들에게 5일간 크게 모여 술마시게 했다.
원광 3년(BC 132) 봄, 하수의 물길이 옮겨져서, 돈구(頓丘)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渤海)로 들어갔다.
여름 5월, 고조의 공신 5명의 후손을 봉하여 열후로 삼았다.
하수의 물길이 터져 16개 군에 범람했다. 군졸 10만 명을 내어 터진 하수의 물길을 다스렸다. 용연궁(龍淵宮)을 세웠다.
원광 4년(BC 131) 겨울, 위기후(魏其侯) 두영(竇?)에게 죄가 있어, 기시형에 처했다.
봄 3월 을묘일, 승상 전분이 훙했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5월, 지진이 일어났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원광 5년(BC 130) 봄 정월, 하간왕(河間王) 덕(德)이 훙했다.
여름, 파(巴)·촉(蜀)의 (병졸을) 내어 남이도(南夷道)를 다스리고, 또한 병졸 1만명을 내어 안문 지역의 험준한 곳을 다스렸다.
가을 9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을사일, 황후 진씨(陳氏)를 폐위되었다. 무고(巫蠱)한 자를 체포해 모두 효수(梟首)하였다.
8월, 명충(螟蟲)이 들었다.
이민(吏民)들 중 당대에 힘쓸 바에 밝거나, 옛 성인의 술(術)을 익힌 자를 뽑아, 현에서 모아놓은 곡식을 보낼 때, 계부(計簿)와 함께 보내도록 했다.
원광 6년(BC 129) 겨울, 처음으로 장사하는 수레에 산(算)을 내게 했다.
봄, 운하를 뚫어 위수(渭水)와 통하게 했다.
흉노가 상곡(上谷)에 들어와 이민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거기장군 위청(衛靑)은 상곡으로, 기장군 공손오(公孫敖)는 대(代)로, 경거장군 공손하는 운중(雲中)으로, 효기장군 이광은 안문으로 출병케 했다. 위청이 용성(龍城)에 이르러 노획한 수급이 7백 개나 되었다. 이광과 공손오는 군사를 잃고 돌아왔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이적(夷狄)들이 무의(無義)하게 따라 내침한 바가 오래되었다. 요사이 흉노가 수차례 변경을 노략질하여, 장수를 파견해 군대를 위무케 하였다. 옛날에 (출병하면) 병사를 다스리고 (돌아오면) 군대를 진무하였는데, (지금)출사(出師)해놓고 오랑캐와 만나자마자 바로 환군(還軍)하여, 장수와 군리(軍吏)가 새로 만났는데 상하가 서로 모이지 못하였다. 이는 대군(代郡)장군 공손오와 안문장군 이광이 그 소임에 불초(不肖)하였으며, 교위(校尉)는 또한 의를 배반하고 망령되이 행동하여 군대를 버리고 북으로 달아났으며, 소리(小吏)들은 금령을 범했다. 용병의 법에 부지런하지 않고 교령을 내리지 않음은 장수의 허물이요, 교령이 선명한데도 능히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은 사졸의 죄라 했다. 장군은 이미 정위에게 내려보내 법에 따라 바르게 처리하라 했으니, 또 사졸들에게 법을 가하면 두 군데서 병행해 처리한 것이라, 이는 인성(仁聖)한 마음이 아니다. 짐은 뭇 사람들이 위해에 빠지는 것을 불쌍히 여겨, 치욕을 없애 행동을 고치고 다시 정의를 받들어 이 때문에 그런 일이 없게 하고자 한다. 안문과 대군의 군사 중 군법에 따르지 않았던 자들을 사면하라”고 했다.
여름, 크게 가물고 황충(蝗蟲)이 날아들었다.
6월, 옹(雍)으로 순행했다.
가을, 흉노가 변경에서 노략질을 했다. 장군 한안국(韓安國)을 보내 어양(漁陽)에 주둔하게 했다.
원삭(元朔) 원년(BC 128) 겨울 11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공경대부는 방략(方略)을 모으고 통류(通類)를 하나로 하며, 교화를 넓히고 풍속을 아름답게 한다.
무릇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삼아 덕을 감싸며 현자에게 복록을 내리고, 선을 권하고 폭란(暴亂)을 벌한 것은 삼왕(三王) 오제(五帝)가 창성(昌盛)한 까닭이다. 짐은 아침에 일어나거나 저녁에 잠들거나 천하의 선비들과 이 길에 이르는 됨을 기뻐한다.
그래서 기로(耆老)에게 은혜를 더하고, 효경(孝敬)한 자를 우대하며, 호걸·영준(英俊)을 뽑아 문학을 강습해, 정사에 참고하여 민심에 나아가 구하고, 이를 집사(執事)하는 자에게 알려 청렴하고 효도하는 자를 천거케 하였더니, 무릇 (이것이) 거의 풍속이 되어 선제의 성업(聖業)을 밝혀 아름답게 하였다. 무릇 열 집의 마을이라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자가 있으며,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되는 자가 있다고 했다. 지금 혹 모든 고을에 이르러 한 사람이라도 천거치 않음이 있다면, 이것은 교화가 아래로 이르지 못하고, 수행을 쌓은 군자가 위로 주달할 길이 막혀 있는 것이다. 2천석 관리는 이렇게 기강과 인륜을 펴서, 장차 어찌 짐을 보필해 숨은 뜻을 밝히고 착한 뜻을 권하며, 뭇 백성들을 연마해 향당(鄕黨)의 가르침을 숭앙케 하겠는가? 또 어진 이를 나아가게 하면 위로는 상을 받고, (그를) 가리우면 드러내어 노륙당하는 게 옛날의 법도이다. 여러 2천석 관리와 예관·박사들은 천거치 않은 자의 죄를 의논하라”고 했다.
유사가 주의(奏議)하길 “옛날에 제후가 선비를진공(進貢)함에, 한 번 그런 이를 얻으면 이를 좋은 덕이라 하였고, 두 번하면 어질고 어질다라고 하였으며, 세 번하면 공이 있다 하여 이에 구석(九錫)을 더해주었습니다.
무릇 아래로 부회하고 위로 기망(欺罔)하는 자는 죽이고, 위로 부회하고 아래로 속이는 자는 형을 내리고, 국정에 참여함에 백성들에게 이로움이 없는 자는 쫓아냈으니, 이는 선을 권하고 악을 내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조서을 내려 선제의 성업을 밝히고, 2천석 관리에게 효렴을 천거하란 영을 내리신 것은, 착한 뜻으로 교화하여 풍속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효행하는 자를 천거치 않음은 조서를 받들지 않은 것이니, 응당 불경죄로 논해야 합니다. 청렴한 자를 살피지 않음은 제 직임에 뛰어나지 않은 것이니, 마땅히 파면해야 합니다”라 했다. 주의를 받아들였다.
11월, 강도왕(江都王) 비(非)가 훙했다.
봄 3월 갑자일, 황후 위씨(衛氏)를 세웠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짐이 듣건대 천지가 변하지 않으면 교화를 베풂을 이루지 못하고, 음양이 변하지 않으면 만물이 무성해짐에 통하지 않는다 한다. <역경>에 “그 변화에 통달해 백성을 게으르지 않게 한다”고 했고, <시경>에 “무수히 변하나 거듭 관통하니, (선을) 가렸다고 말한 것을 안다(九變復貫 知言之選)”고 했다. 짐이 당우(唐虞)를 기뻐하고 은주(殷周)를 즐겨서, 옛 일에 의거해 새 것에 귀감으로 삼는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려 백성들과 다시시작하라. (관의) 재물을 잃었거나 그에 관한 송사가 경제 후 3년 이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모두 치죄하지 말라”고 했다.
가을, 흉노가 요서에 침입해 태수를 죽였다. 어양·안문에 침입해 도위를 패배시키고, 3천여 명을 죽이고 약탈했다. 장군 위청(衛靑)을 보내 안문으로 출병하고, 장군 이식(李息)은 대로 출병하여, 적의 수급 수천여 개를 노획했다.
동이의 예군(예君) 남려(南閭) 등 28만명이 항복하니, (그곳을)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
노왕(魯王) 여(餘)와 장사왕(長沙王) 발(發)이 모두 훙했다.
원삭 2년(BC 127) 겨울, 회남왕(淮南王)·치천왕(치川王)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고, 입조하지 않도록 했다.
봄 정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양왕(梁王)과 성양왕(城陽王)이 동생을 사랑하고 자애하여, 봉읍을 아우들에게 나눠주길 원하니, 이를 허락한다. 제후·왕이 자제들에게 봉읍을 주길 청하는 자가 있으면, 짐이 장차 친히 살펴보아 열위(列位)에 있도록 하겠다”라 했다. 이에 번국들이 비로소 나눠져서, (제후의) 자제들이 모두 다 후(侯)가 되었다.
흉노가 상곡·어양에 들어와 이민 천여 명을 죽이고 약탈해갔다. 장군 위청과 이식을 보내 운중으로 출병케 하니, 고궐(高闕)에 이르고 마침내 서쪽으로 부리(符離)까지 이르러 적의 수급 수천 개를 노획했다. 하남(河南)의 땅을 몰수하고, 삭방군(朔方郡)과 오원군(五原郡)을 두었다.
3월, 을해일, 날이 어두어지며 일식이 있었다.
여름, 백성을 모아 삭방으로 10만 명을 이주시켰다. 또한 군국의 호걸 및 재산 3백만 (전) 이상인 자를 무릉(茂陵)으로 옮겼다.
가을, 연왕(燕王) 정국(定國)에 죄가 있어 자살했다.
원삭 3년(BC 126) 봄, 창해군을 파했다.
3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무릇 형벌은 간사함을 막기 위해서이고, 문덕(文德)있는 자를 친내(親內)하며 숭장(崇奬)함은 그 인애(仁愛)의 도리를 보이기 위함이다. 백성들이 아직 교화에 합치되지 못하였지만, 짐은 사대부들과 그 일을 일신(日新)함을 기뻐하여, 삼가 게으르지 않았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려라”고 했다.
여름, 흉노가 대에 들어와 태수를 죽였다. 안문에 들어가 천여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6월 경오일, 황태후가 붕어했다.
가을, 서남이(西南夷)를 파하고, 삭방성을 쌓았다. 백성들에게 5일간 크게 먹고 마시게 했다.
원삭 4년(BC 125) 겨울, 감천으로 행차하였다.
여름, 흉노가 대·정양(定襄)·상군에 침입해 수천명을 죽이고 약탈했다.
원삭 5년(BC 124) 봄, 크게 가물었다. 대장군 위청이 장군 6명과 10만여 병사를거느리고, 삭방·고궐로 나아가 적의 수급 1만 5천개를 노획했다.
여름 6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무릇 듣자하니 예로써 백성을 인도하고 악(樂)으로써 교화한다 했으나, 지금은 예악이 무너져, 짐은 몹시 가슴 아프다. 천하에 도(道)에 박문(博聞)한 선비가 있으면, 모두 조정에 천거하라. 예관에게 영을 내려 학문을 권장하고 이를 강의하여 흡문(洽聞)케 하고, 유일(遺逸)된 글월을 올려 예학을 흥하게 하며, 이를 천하의 급선무로 삼으라. 태상(太常)이 나와 더불어 박사·제자에 대해 의논하였으니, 향당의 교화를 숭앙하고 현명한 인재를 장려(奬勵)하게 하라”고 했다. 승상 공손홍이 박사를 위해 제자의 관원을 두길 청하니, 학자가 더욱 늘었다.
원삭 6년(BC 123) 봄 2월, 대장군 위청이 장군 6명과 10여만 기를 거느리고 정양으로 나가 3천여 급을 참수했다. 돌아와 정양·운중·안문에서 병마를 쉬게 했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여름 4월, 위청이 다시 장군 6명을 거느리고 사막을 바로 건너가, 크게 이겼다.
전장군(前將軍) 조신(趙信)의 군대는 패하여 흉노에 항복했다. 우장군 소건(蘇建)은 군대를 잃고, 자기 혼자 탈출해 돌아왔으나, 속금(贖金)하니 서인으로 삼았다.
6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짐이 듣기로 오제(五帝)는 서로의 예를 회복하지 않고, 삼대는 법이 같이 하지 않아서, 다른 길로 비롯되었지만 덕을 하나로 세웠다 한다.
무릇 공자는 정공(定公)을 대하여선 멀리서 내복(來服)함을 얘기하고, 애공(哀公) 을 대하여선 신하에 대해 논하고, 경공(景公)을 대하여선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것을 얘기하였지만, 그 요지는 같지 않은 게 없고 다만 달리 급히 힘써야 할 바를 말한 것이다. 지금 중국이 하나로 통일되었으나, 북변은 평안치 못한지라, 짐은 이를 매우 슬퍼하는 바이다. 얼마전 대장군이 삭방을 순행하며 흉노를 정벌해 머리를 베거나 노획한 것이 1만 8천 급이나 되었지만, 여러 금고(禁錮)에 처해졌거나 과실이 있는 자는 모두 후한 상을 입어 그 죄를 감면할 수 있었다. 지금 대장군이 거듭 적을 이겨, 머리를 베거나 노획한 것이 1만 9천 급이나 되어, 작과 상을 받았지만,(이를) 바꿔 팔려고 하는 자는 그렇게 옮기지 못한다. 이를 의논해 영으로 만들라”고 했다.
유사가 무공상(武功賞)의 관을 두어, 전사(戰士)를 총애하자고 주청했다.
원수(元狩) 원년(BC 122) 겨울 10월, 옹(雍)으로 행차해 오치(五 )에 제사지냈다. 흰 기린(白燐)을 잡아 <白燐之歌>를 지었다.
11월, 회남왕(淮南王) 안(安)과 형산왕(衡山王) 사(賜)가 모반하다 주살되었다.
그 무리 중 같이 죽음을 당한 자가 수만 명이었다.
12월, 큰 비와 눈이 내리니, 백성들이 얼어 죽었다.
여름 4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정묘일, 중 2천석 관리에게 우서장(右庶長)을, 백성들 중 그 아비의 후사가 되는 자에게 작 1급씩 하사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짐이 듣건대 고요(咎繇)가 우(禹 )임금을 대하여 말하길 ‘지인(知人)은 있지만, 지인은 슬기로워서 요임금이라 하더라도 대하기 어렵습니다’라 했다고 한다. 무릇 임금은 마음이요, 백성은 몸(支體)과 같아서, 몸이 상하면 마음도 아프고 슬프다. 일전에 회남왕·형산왕이 문학을 꾸미고, 재화를 유통시키며, 양국이 땅을 맞대고 있었는데, 간사할 말에 이끌려서 찬탈을 꾸미다 죽었으니, 이것은 짐의 부덕함이다. <시경>에 ‘마음을 걱정하는 것은 슬프고 슬프나, 나라를 염려하는 것은 가혹한 것이다’라 했다. 이미 천하에 사면령을 내려 (죄를) 씻어 없애 천하와 같이 다시 시작하였다. 짐은 효제·역전을 기뻐하고 늙은 부로와 환과고독을 애처로이 여기니, 혹 의식이 부족하다면 심히 불쌍하고 가슴아픈 일이다. 알자(謁者)를 보내 천하를 순행하며 그들의 안부를 묻고 하사품을 주어라. (그 조서에) 이르길 ‘황제께서 알자를 시켜 현(縣)삼로(三老)와 효도하는 자에게 1인당 비단 5필씩, 향(鄕)삼로와 (형을) 공경하는(悌) 자와 역전에게 비단 3필씩, 나이가 90이상 및 환과고독인 자에겐 비단 2필과 솜 3근씩, 80이상인 자에겐 알곡(米) 3석(石)씩 하사하게 하였다. 원통한 일이 있어 제 상직(常職)을 잃은 자는 사자를 시켜 이를 들어주게 하라. 각자 현·향에 나아가 하사하여, 따로 모이게 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했다.
원수 2년(BC 121) 겨울 10월, 옹으로 행차하여 오치에 제사지냈다.
봄 3월 무인일, 승상 공손홍이 훙했다.
표기(驃騎)장군 곽거병(藿去病)을 보내 농서(농西)로 나가, 고란(皐蘭)에 이르러 8천여 급을 참수했다.
여름, 말이 여오수(余吾水) 중에서 나왔다. 남월이 순상(馴象; 길들인 코끼리)와 말할 수 있는 새를 바쳤다.
장군 곽거병·공손오가 북지(北地) 2천여 리에 나와 거연(居延)을 지나 오랑캐의 목 3만 여급을 베었다.
흉노가 안문에 들어와 수백명을 죽이고 약탈했다. 위위(衛尉)
장건(張蹇)·낭중령 이광을 보내 모두 우북평(右北平)으로 나가게 했다. 이광이 흉노 3천여 명을죽였지만, 그 군사 4천명을 다 잃고, 혼자서 탈출해 돌아왔으며, 공손오와 장건 또한 후일을 기약해 (그냥 돌아와서) 마땅히 참수해야 하나, 속금하고 서인으로 삼았다.
강도왕 건(建)에게 죄가 있어 자살했다. 교동왕(膠東王) 기(寄)가 훙했다.
가을, 흉노의 혼사왕(昆邪王)이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그 무리 4만 명을 합쳐거느리고 항복해오니, 5 속국(屬國)을 두어 거기에 살게했다. 그 땅을 무위(武威)·주천(酒泉)군으로 삼았다.
원수 3년(BC 120) 봄,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여름 5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교동 강왕(康王)의 작은 아들 경(慶)을 세워 육안왕(六安王)으로 삼았다. 옛 상국 소하(蕭何)의 증손 경(慶)을 봉해 열후로 삼았다.
가을, 흉노가 우북평·정양에 침입해, 천여 명을 죽이고 약탈했다.
알자를 보내 수재가 난 군에 숙맥(宿麥)을 심도록 권했다. 이민들 중 빈민들에게 (곡식을) 잘 빌려줘 이름 난 자를 천거하게 했다.
농서·북지·상군의 수병(戍兵)을 반으로 줄였다.
적리(謫吏)를 징발해 곤명지(昆明池)를 뚫었다.
원수 4년(BC 119) 겨울, 유사가 관동(關東)의 빈민 중 농서·북지·서하(西河)·상군·회계로 옮겨간 이가 무릇 72만 5천명인데, 현관(縣官)의 이식으로 그들의 생업을 일으켜 주고 있으나, 용도가 부족하다 말하고, 은과 주석(錫)을 거둬 백금(百金) 및 피폐(皮弊)를 만들어 용도를 풍족히 하자고 청했다. 처음으로 민전(緡錢)에 산(算)을 매겨 세금을 내게 했다.
봄,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여름, 긴 별(長星)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대장군 위청은 장군 4명을 거느리고 정양(定襄)으로 나가고, 장군 곽거병은 대(代)로 나갔는데, 각자 5만 기를 거느렸다. 보병이 그 군의 뒤를 이었는데, 수십만 명이었다. 위청은 사막 북쪽에까지 이르러 선우를 포위하고, 적의 목 1만 9천급을 베었고, 전안산(전顔山)에 이르러 이내 돌아왔다. 곽거병은 좌현왕(左賢王)과 전투를 벌여 적의 목을 베거나 노획한 것이 7만 여급이나 되었고, 낭거서산(狼居胥山)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고(封) 이에 돌아왔다. 양 군사중 전사한 자가 수만명이었다. 전장군 이광(李廣)과 후장군 조이기(趙食其)는 모두 약속한 기일에 늦었다. 이광은 자살하고, 조이기는 속금을 사죄를 면하였다.
원수 5년(BC 118) 봄 3월 갑오일, 승상 이채(李蔡)에게 죄가 있었는데, 채가 자살했다.
천하의 말이 적어, 평범한 숫말 한 필이 20만전이나 되었다.
반냥전을 파하고, 오수전(五銖錢)을 발행했다.
천하의 간활(姦猾)한 이민들을 변경으로 옮겼다.
원수 6년(BC 117) 겨울 10월, 승상 이하 2천석 관리에까지는 금을, 천석 이하부터 승종(乘從)에겐 비단(帛)을, 만이(蠻夷)에겐 무늬비단(錦)을 각자 차등있게 하사했다.
빗물이 얼지 않았다.
여름 4월 을사일, 묘(廟)당 안에서 황자 굉( )을 세워 제왕(齊王)으로, 단(旦)을 연왕(燕王)으로, 서(胥)를 광릉왕(廣陵王)으로 삼았다. 처음으로 고(誥)를 지었다.
6월, 조칙에 이르길 “일전에 유사가 돈(幣)이 가벼워 간사한 일이 일어나고, 농사를 해치며 말업(末業; 상공업)에 종사하는 이가 많으며, 또 겸병(兼竝)의 혼탁함을 금해야 한다고 해서, 돈을 고쳐 간사한 일을 줄이도록 했다. 여러 지난 일을 돌아보니, 그 제도가 요즘 상황에 알맞다. 이를 폐지하는데 일년하고도 여러 달이 걸려, 산택(山澤) 중의 백성들이 그 뜻을 알려오는 게 보이지 않는다. 무릇 인이 행해지면, 선이 따라오고, 의가 서면 풍속이 바뀐다고 하는데, 명령을 받는 뜻에 백성을 인도함이 아직 분명치 않았기 때문인가? 장차 어찌 백성들은 다른 길로 나아가고, 교활하고 강포한 관리들이 이런 기세를 타서 뭇 백성들을 침학케 하겠는가!
어찌해야 그런 우환을 없애겠는가! 이제 박사 저대(저大) 등 6명을 나눠 천하를 순행(循行)하며, 홀아비·과부·폐질(廢疾)인 자를 존문케 하고, 스스로 생업을 일으킨 자에게는 진대(賑貸)함이 없게 하라.
삼로(三老)와 효제(孝弟)를 깨우쳐 백성들의 스승으로 삼고, 독실히 행하는 군자를 천거하여 불러 짐이 있는 곳(行在所)으로 보내라.
짐은 현자들을 기뻐하고 그 사람을 알게 된 것을 좋아한다. 그 천거하는 길을 넓혀 선비 중 특별히 불러들일 만한 자가 있으면, 거기에 나가있는 사자가 알아 보라.
은거해 있는 곳과 등용되지 못한 것 및 원통하게 상직(常職)을 읾은 일에 대해 상세히 물어보고, 간사하고 교활하여 해가 되거나 전무를 개간치 않고 각박하게 다스린 자를 들어 모두 주달하라. 군국(郡國)에 편하게 할 만한 것이 있으면, 위로는 승상·어사가 이를 알아 보라”고 했다.
가을 9월, 대사마 표기장군 곽거병이 죽었다.

* 참고할 내용
– 전한 무제
.지위: 전한의 제7대 황제
.재위: 기원전 141년~기원전 87년
.전임: 경제
.후임: 소제
.출생: BC156년 7월 30일(전한 장안현 미앙궁)
.사망: BC87년 3월 29일(전한 우부풍 주질현 오작궁)
.부친: 경제
.모친: 효경황후
.배우자: 폐황후 진씨 / 무사황후
○ 전한 무제(武帝)
– 황제가 되기까지
원래 한무제는 부황 한경제의 11번째 아들로 교동왕(膠東王)이었다. 경제는 박 황후에게서는 자식이 없었고, 대신 6명의 후궁에게서 14명의 아들을 보았다. 또한 무제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장자인 유영이 황태자로 있었으니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한 한나라에서 그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박 황후가 폐위된 뒤에 누구를 새 황후로 삼느냐가 문제가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무제의 어머니인 왕지는 경제의 유일한 친누나인 관도공주의 딸 진아교와 자신의 유철을 혼인시킨 후 관도공주가 경제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통해 자신이 새 황후가 되고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에는 당시 태자였던 유영의 생모 율희의 실수도 있었는데, 관도공주는 자신의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어 권력을 강화하려 하였고, 황태자 유영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 하였지만 율희가 이를 거부하였던 것. 아마도 경제에게 많은 후궁들을 보내던 관도공주에 대한 반감과, 자신이 이미 황태자의 어머니이니 황후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였던 듯하다. 그 외에 경제가 자신이 죽으면 율희에게 자신의 자식들을 잘 부탁한다고 하였을 때 도리어 황제에게 화를 내기도 하였다.
그 결과 경제는 율희에 대한 마음이 떠났고, 이러한 기회를 이용한 왕지와 관도공주의 공작의 결과 율희가 아닌 왕지가 새 황후가 되었으며, 유영은 태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유철이 새 태자가 되었다. 이후 경제는 황태자 폐위를 반대한 주아부를 유사하게 했고, 유영의 스승이자 효문황후의 조카며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한 두영은 중임을 맡기지 않았다. 한편 황태제를 노린 동생 양효왕 유무는 비록 어머니의 편애 때문에 대놓고 제거할 수는 없었으나 입조를 막는 등 냉대했다. 그 후에야 유철, 한무제는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16세 때 부황 경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으며, 유학자 동중서 의견 수렴하여 유학을 국가의 이념이자 학문으로 삼아 다스렸다.
한편 이복 형제와 귀족을 제거하여 황제권을 강화시켰다. 이복형제들을 물리치고 제위에 올랐으며, 강력한 경쟁자이며 제위 계승의 라이벌로 지목되던 중산정왕 유승을 계속 의심하였는데, 유승은 경제의 서자이자 무제의 이복형이었다. 유승은 이 의심을 피하고자 일부러 주색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여 한무제의 칼날을 피해갔다. 또한 즉위 후 전대의 권신들과 외척들을 숙청, 면직시키고 실력과 능력으로 어질고 겸손한 인재를 채용하여 관료의 자질을 향상시켰다.
그의 즉위 후 최대 사업으로 치세에 장건이 서역과 통하는 실크로드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후 치세기간 중 실크로드 건설 개척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고,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흉노를 소탕케 하였다. 인재 채용에 조건과 자격을 가리지 않아 서역 출신 노예와 흉노 출신 노예 중에서도 인재를 등용하였다. 흉노를 소탕하면서 곽거병이 사로잡은 흉노족 왕자 출신 노예 김일제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발탁하기도 했다. 그 외에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유학에 중점을 두고 학문을 강하게 하였으며, BC 127년부터 황제의 여러 아들들을 제후왕으로 분봉(分封)하여 중앙집권화하였다. 그외의 직할령은 전국을 13주(州)로 나누고, 주마다 자사(刺史)를 두어 군수를 파견하여 감독케 하였다.
– 정벌 사업
운하를 굴착하여 농지의 관개와 운송을 도왔다. 대외적으로는 장건을 대월지국(大月氏國)으로 파견하고, 장군 위청, 곽거병, 이광 등에게 흉노를 토벌시켜 흉노족 선우를 사살하고 다수 흉노족을 포로로 잡아왔다. 기원전 119년에는 위청을 시켜 흉노를 외(外)몽골로 내쫓고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여 2군을 두었다. 하서(河西)에 있던 흉노 혼야왕(渾邪王)도 항복했으므로, 그 곳에 무위·장액·주천·돈황 4군(하서사군)을 두어 중앙아시아와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서역 제국의 입공(入貢)이 계속되었으나, 기원전 104년에는 이광리(李廣利)에게 명해 파미르 고원 북서에 있는 대완국(大宛國:페르가나)을 정벌하게 했다. 흉노의 방위와 서역 유지를 위해 요지로 한인을 이주시키고, 또 둔전(屯田)을 두었다.
남방으로는 푸젠성에 있던 민월과 동월(東越) 두 왕국을 병탄·흡수하고, 기원전 111년에는 번우(番:廣東)에 도읍한 남월국을 멸망시켜 9군을 두고, 쓰촨성변경에서 윈난·구이저우 방면에 이르는 염(冉)·방(駹)·수(嶲)·작(莋)·야랑(夜郞)·전(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켜, 그곳에 6군을 두었다.
또한 기원전 112년부터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진국(辰國)과의 직접 교역을 반대하고 한나라에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는 고조선으로의 침략을 단행한다. 무제는 여러 차례 육로와 해로로 육군과 수군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모두 패하였다. 그러나 고조선은 내부의 분열로 한군에 투항자가 발생하면서 멸망하게 되었다(추측). 기원전 108년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요동지역에 낙랑·임둔·진번·현도의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 내정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 무제는 재정이 궁핍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소금과 철과 황, 술의 전매제를 시행하여 경제적 재력 확충을 시도하였다. 토지분배 정책에서는 둔전제를 강력히 시행·추진하였고, 둔전제의 일부를 개정하여 정복한 북방지역에 주민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면서 북방으로 이주한 백성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를 대전법(代田法)이라 한다.
외적에 성공한 반면, 궁전과 이궁을 짓고, 불로장생을 믿어 방사(方士)를 모아, 태산(泰山)에서 봉선의식(封禪儀式)을 치르고 각지를 순행했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고 군사비를 압박했다. 상홍양은 증세·신세(新稅)에다 소금·철을 전매하고 균수법(均輸法)·평준법(平準法)을 제정하였다. 균수는 관청에서 상업활동을 하는 것이고 평준은 물가를 조절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정책을 통해 부유한 상인의 매점매석을 근절해서 물가를 안정시켰다. 무공작(武功爵)을 팔기도 하여, 관리의 부정이 심해지고, 국민의 생활도 궁핍해져 각종 반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황제권 강화와 후계 인선
기원전 91년 수형도위 강충이 여태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을 하자 무제는 여태자를 의심하였다. 그러자 여태자가 강충을 살해하자 무제는 태자를 폐위시키고 체포를 명하였다. 체포에 불복한 여태자는 거병하여 관군과 대항하였으나 패하여 자결하였고, 여태자의 후궁인 사양제 역시 자결하였다. 뒤에 반군을 이끌던 손자 유진 내외 역시 자살하고 반군은 진압되었다.
무제는 위황후를 폐출하고 자결하게 하였다. 무제는 여태자의 장인과 장모, 처족, 위황후 일족에게 연좌율을 적용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여태자의 손자이자 무제의 증손은 여태자의 처조모의 친정으로 빼돌려졌다.
여태후의 친정 일가들의 폐단을 보았던 한무제는 여태자 일가를 역모로 처단한 뒤, 창읍애왕마저 기원전 88년 죽자, 구익부인 조씨 소생 전한 소제를 후계자로 결정한다.
총애하는 후궁이었던 구익부인이 14개월 또는 24개월 만에 아들을 낳자 요임금의 어머니가 14개월 만에 출산한 것을 예로 들어가며 총애를 더하였지만 아들 불릉을 황태자로 세운 뒤 어린 아들 뒤에 젊은 어미가 있으면 외척의 발호와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구익부인을 역모로 몰아 살해하였다. 만년에는 외정을 중지하고, 내치에 치중하였으며 세금감면 정책을 추진, 다시 먼 거리에 있는 윤대(輪臺: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둔전(屯田)을 폐지, 백성을 다스리는 데 힘썼다. 무제 때의 특색은 중앙집권화와, 밖으로 지역이 확대되고, 특히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교섭이 왕성하게 되는 기틀을 열어놓았다.
권신이나 외척을 배제하고 실력에 따른 인재등용을 하였다. 출신 배경이 한미한 관료들을 등용했고, 흉노족 원정시 포로로 잡혀온 김일제 등 이민족 포로 중에서도 능력이 되는 인재를 채용하였다. 그 뒤 임종이 가까워 오자 곽광(霍光)과 김일제를 불러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을 유언하고 사망하였다.
○ 관련 서적
.《사기》제12권 효무본기
.《한서》제6권 한무제기
○ 연호
무제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연호를 지정해 사용했다.
건원(建元) 기원전 140년 ~ 기원전 135년
원광(元光) 기원전 134년 ~ 기원전 129년
원삭(元朔) 기원전 128년 ~ 기원전 123년
원수(元狩) 기원전 122년 ~ 기원전 117년
원정(元鼎) 기원전 116년 ~ 기원전 111년
원봉(元封) 기원전 110년 ~ 기원전 105년
태초(太初) 기원전 104년 ~ 기원전 101년
천한(天漢) 기원전 100년 ~ 기원전 97년
태시(太始) 기원전 96년 ~ 기원전 93년
정화(征和) 기원전 92년 ~ 기원전 89년
후원(後元) 기원전 88년 ~ 기원전 87년
○ 평가
중국 전한 시대를 대표하는 군주이자, 역사가에 따라서 성군인지 폭군인지 아니면 혼군인지 평가가 갈리는 양면적인 인물이다.
한나라의 7대 황제. 흉노를 토벌하고 실크로드를 발견하는 등 굵직한 업적들이 꽤 있어 중국사 전체를 놓고 봐도 언급이 많이 되는 황제이며, 한국사에서도 고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켰기에 중요한 인물이며 마찬가지로 베트남사에서도 남월을 멸망시켰기에 중요한 인물이다. 또한 전한의 법령을 완성시키고 관료 체계를 완비하며, 염철 전매법, 균수법, 평준법 등의 경제 정책을 시행하였다. 무제의 정책은 후한 이후까지 두고두고 영향을 끼첬으며 유학 또한 그의 시대에 국학의 위치로 올라선다.
그러나 또한 소모적이고 거대한 대원정을 일으키고, 자신의 능을 짓는 등 큰 규모의 토목 공사를 단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낭비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증세와 세금 신설을 단행해 백성들의 삶이 고달파지게 하였다. 또한 초기에는 신비주의를 배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이에 빠졌다가 황후, 황태자와의 내전, 즉 무고의 화라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다. 큰 업적들도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 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문경지치로 이룩한 한나라의 국력을 대거 낭비하는 등 폐해도 상당히 남긴 황제이기 때문에 명군과 폭군의 경계선상에 애매하게 걸쳐져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어찌보면 가장 중국스러운 황제라는 평도 있다.
성격이 꽤나 다혈질이었는지 알고보면 큰 잘못도 없는 사마천을 고자로 만들어버리기도 하였고, 애먼 이릉의 일족을 몰살시켜 이릉이 흉노에 투항하게 만들고, 본의는 아니지만 괴철의 이름을 바꾼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중국 역사상 최초로 연호를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복잡다단한 인물. 그의 치세를 상징하는 단어로는 한무성세가 있으나, 그보다는 진황한무가 더 많이 쓰인다. 여러모로 진시황과 비슷하게 업적도 과오도 뚜렷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 한무성세(漢武盛世)
즉위 직후 널리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대책을 묻고, 여기에 응한 동중서의 대책을 채택함으로써 유교를 중국의 국교로 만드는 길을 열어 세계 최초로 유학을 관학으로 공인한 사람이기도 하다. 즉위 초에는 할머니 효문황후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녀가 죽자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최초의 유교식 학교인 명당(明堂)과 태학(太學)을 건립하는 등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기고, 효문황후의 친정 일족을 숙청해버렸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한 무제는 절대로 유학을 국가 전체의 시스템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나라는 문경지치를 포함하여 상당 부분 도가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효문황후는 이러한 통치 체제를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무제는 오히려 법가적 성향을 아주 강하게 드러낸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린 관리인 순리와 가혹하게 다스린 혹리를 각각 별도로 다루고 있는데, 이 가혹한 법가적 관리인 혹리들의 상당수는 바로 한 무제 시기의 인물들이었다. 육가와의 문답을 통해서 유교를 한나라에 받아들인 한고조의 목적이 유교 이념으로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위 아래가 없었던 초기 조정의 위상을 잡기 위한 것처럼, 한무제가 동중서의 제안을 체택한 것도 문경지치의 도가적 지침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한 무제는 유교라는 이름을 걸어놓고 실제로는 법가적 통치를 하였고, 이 모든 통치의 중심에 자신을 두었다. 다만 진시황의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건국된 한나라의 특성상 법가의 이름을 대놓고 걸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내놓은 것이 바로 유교였다. 이후 전한 시대에도 유교는 거의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원제가 유학에 심취하기 시작한 이래, 왕망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유교 논리가 국가의 통치논리와 합일되기 시작한다.
위청, 이광, 곽거병 등의 명장들을 파견해 한고조 시절부터 한과 대립하던 흉노족을 박살내고, 남월과 조선을 정복하고, 장건을 서역으로 보내 실크로드를 발견하는 등, 여러모로 대활약했다. 또한 한 무제 당대까지도 이민족 국가의 영역이었던 푸젠 성과 저장 성 일대를 중국사의 영역으로 편입시킨것도 한무제의 공이다.
또 둔전제를 시행하여 군인들에게 변방을 지키는 동시에 현지에서 둔전을 개간하여 군수 물자를 확보하도록 했으며, 흉노로부터 빼앗은 북방으로 이주한 백성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를 대전법(代田法)이라 한다.
– 한무성세의 그림자
한무성세라는 말이 존재하면서도 한 무제가 후대 사람들에게도 비판의 주 대상인 것은 한 무제 본인과 한 무제의 통치 시기에 나타났던 문제점들이 너무나도 심각하고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들은 한나라 치세 내내 해결되지 않아 왕망의 신나라 그리고 위진남북조 시대를 탄생시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
.토목 공사
한 무제의 화려한 군사 원정과 로망을 자극하는 기린아 곽거병의 원정기는 후대 사람들에게 한 제국의 강대함과 위대함을 칭송하게 하며 한무제-곽거병 용비어천가를 부르게 하지만 한무제 당시의 백성들과 신하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백성들을 고통의 나락에 밀어 처넣어주신 폭군이다. 문제, 경제 시대부터 이어진 ‘곡식이 썩어나고 창고에는 온갖 재화가 가득한’ 태평성대를 거덜낸 원수에 가깝다. 즉위 초의 백성을 위해 베풀던 선정의 시절은 할머니인 효문황후의 간섭을 받던 시절이 대부분이며, 효문황후가 죽은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폭군으로서의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선, 즉위 2년째부터 자신의 능을 건설하게 했는데, 능을 일찍 건설하는 것 자체는 그 당시의 황제라면 당연히 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규모를 진시황의 여산릉에 버금갈 정도로 크게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말년에는 미앙궁과 장락궁을 놔둔 채 새로 크고 화려한 건장궁을 건축하고 또 별궁을 이곳 저곳에 지었으며, 거액의 비용을 들여 태산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했는데 천자의 위엄을 보이는 목적 외에도 그것이 불로장생과 연결된다는 속설이 작용했다고 한다.
기린아 곽거병의 우주를 뚫는 화려하고도 찬란한 대군을 이끈 군사 원정은 한 제국의 국고를 아낌없이 탈탈탈 털어주셨는데 여기에 추가로 한 무제 본인의 토목 공사들이 겹치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기만 하였다. 게다가 곽거병의 군사 원정이 한 제국의 엄청난 재정 낭비 부담을 덜어 줄 추가적인 재정 마련의 일환이 된 것도 아니었다.
.흉노 원정과 재정 문제
흉노를 격퇴했지만, 덕분에 거대해진 제국을 유지하고 계속되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무제는 새로운 농업 생산량 증대 기술을 도입하고, 소금과 철을 전매했으며, 물가 조절을 빌미로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실시해 심한 상업 통제로 부유한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박박 긁어 많은 원성을 샀다. 균수는 관청에서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이고 평준은 물가를 조절하는 것으로 이 점은 사마천이 엄청나게 까기도 했다. 이 정책은 이렇게 상업의 발전을 억누르는 원인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부유한 상인의 매점매석을 근절해서 물가를 안정시켰으며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제 사후, 이 정책의 당위성을 놓고 외조(찬성파)와 내조(반대파)가 사상적,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는데, 당시의 논의를 기록한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염철론”이다. 외조와 내조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아 결국 직접적으로 충돌하기에 이른다. 이때 술의 전매 제도는 폐지됐지만, 소금과 철은 무제 시기의 전매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정쟁은 국가 정책의 대립인 동시에 고명 대신들의 권력 투쟁의 장이었고, 소제는 내조의 수장인 곽광의 손을 들어주었다. 외조의 수장이었던 상관걸과 상홍양 등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 연왕을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으나 들키고 말았다. 상관걸과 상홍양을 비롯한 일족이 모조리 멸족을 당했고 균수, 평준을 비롯한 무제 시기의 신 정책들은 곽광의 측근인 두언년에 의해 대부분 폐기되고 만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염철의 국가 개입과 경제 정책의 국가 주도는 이미 제환공 시절 관중이 시행했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것이었고 후대 중국 왕조, 한국 왕조들도 사용해왔으며 현대 중국마저도 2010년대에 들어서서 더이상 소금을 국가가 이용하는 게 국가 재정과 소금업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야 폐지했을 정도로 오랜기간 사용되어 왔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한 무제의 지나친 씀씀이 때문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낭비를 거듭하다 보니 백성들에게 부담이 엄청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30년쯤 뒤 하후승은 그런 피해를 “온 백성이 유랑민이 되고 그 절반은 죽었으며, 풍년이 들어도 기아를 면치 못해 서로 아이를 바꾸어 잡아먹었다”고 묘사했다. 단, 그렇다고 아예 방조한 것은 아니고 무제 자신은 구난 사업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편이다. 문제는 구난 사업을 펼쳐도 자신이 백성들에게 입힌 피해가 너무 막대했기에 구난 사업이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그저 불만 달래기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점.
토목 공사에서 언급되었듯이 곽거병의 흉노 원정은 한 제국의 국가 재정에 기여분은 그냥 병아리 눈꼽조차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머나먼 원정을 성공한 기린아 곽거병의 군대의 공을 치하하는 데 아낌없이 상을 듬뿍듬뿍 내려줬기 때문에 한 제국의 재정 상태는 더욱더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신하에 대한 원칙없는 대우
또한 한 무제는 신하들을 대우할 때 심각한 인지부조화의 성격이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예가 바로 이릉과 사마천이다. 이릉은 해당 항목에서 나오듯이 소규모 병력으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펼치다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흉노에게 투항한 것이다. 게다가 그 절망적인 상황에 빠트린 것에는 제대로된 지원을 해주지않은 무제 본인의 책임이 컸다. 그럼에도 분노한 한 무제는 소식을 전하러 왔던 이릉의 부하 진보락의 책임을 물어 자살하게 하였고 평소 이릉과 안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에게는 감히 이릉을 변호하고 같이 출정한 이광리를 폄하했다는 이유로 처음엔 사형, 그 뒤엔 궁형으로 바꾸어서 처벌해버렸다. 이후 다시 후회하였는지 이릉 구출 작전을 시도하였지만, 오히려 이릉이 흉노의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헛소문을 듣고 경솔하게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킨다. 실질적인 책임은 무제 본인에게 있음에도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 이를 변호한 사람을 도리어 처벌한 것. 이 이릉과 사마천 이야기는 한 무제의 성격을 비판할 때 많이 인용하는 이야기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이렇게 이릉과 사마천을 천시하면서까지 한 무제가 편애했던 이광리는 훗날 흉노로 군사들을 이끌고 망명했다는 것. 물론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한 무제는 장안에 남아 있던 이광리의 일족을 몰살했다고 한다.
한 무제가 인재 채용에 조건과 자격을 가리지 않아 곽거병이 사로잡은 흉노족 왕자인 김일제(金日磾)나 상관걸, 상인의 아들 상홍양, 이광, 장건 등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발탁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전반적으로 신하들에 대해서 가혹한 군주였고 이 정도의 인물 발탁은 다른 군주들도 그럭저럭 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이다. 곽거병, 곽광 형제나 위청, 이광리 같은 인물은 무제의 인척이었고,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는 애매한데 ‘박사’는 이미 전국 시대부터 각국에 설치된 관직이었으며 진에서도 이 제도를 따랐고 진의 제도를 받아 이은 한(漢)에서도 숙손통(叔孫通) 이후 여러 종류의 박사를 두었다. 이것이 오경박사에까지 진전시킨 것은 무제(武帝) 즉위 초년의 동중서(董仲舒)의 상주로 이루어졌고 각 박사관에 제자 50명을 증원하고, 유학의 교양이 있는 관리를 특히 승진시키는 방침이 취해졌으며 이로서 유학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성격이 별로 좋지 않고 우생학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신하들을 죽이거나 처벌하는 일이 많았다.
.여태자(戾太子) 사건(무고의 화)
게다가 그 스스로가 후궁에서의 음모의 결과로 옥좌에 앉았기 때문인지, 옥좌를 둘러싼 음모와 유혈 사태가 그치지 않았다. 기원전 122년부터 종실인 회남왕, 형산왕, 강도왕의 반역 음모가 차례로 발각되어 처형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한 자리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더구나 말년에는 노망이 나버려 오나라의 손권처럼 모함에 넘어가 자신의 딸인 제읍공주와 양석공주를 간통 및 저주 행위를 했다하여 참수형에 처하고 뒤이어 아들인 여태자 유거(劉據)를 죽음으로 내모는 과오를 범한다. 무제는 구익부인을 총애하여 그 와의 사이에서 늘그막에 어린 황자 유불릉을 낳았는데 태자를 바꾸려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
평소 강직한 성격의 태자를 싫어했던 수형도위(水衡都尉) 강충(江充)이 무당과 짜고 여태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을 하자 무제는 여태자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모함에 화가 난 여태자가 사전에 강충과 무당을 살해했고, 강충 일행과 작당을 하였던 소문이라는 환관이 장안에서 도망쳐 나와 무제에게 알린다. 이때까지도 무제는 “걔가 두려운데다 강충이랑 원수를 져서 한 일일 것이다.”라며 사신을 보내 태자를 다독이려고 한다. 하지만 사신은 두려워서 태자가 있는 장안에 들어가지 않고 무제에게 태자가 모반하였다고 거짓 보고를 한다. 이에 노발대발한 무제는 태자를 폐위시키고 체포를 명하였다.
하지만 체포에 불복한 여태자는 거병하여 장락궁과 호위 군사와 황후궁의 궁노수와 병사를 풀어 장안을 통제하려 했다. 무제는 보고를 받은 후 우선 사람을 보내 동태를 살피게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기세에 밀려 장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 태자가 기어이 반란을 꾸미고 있으며 사자인 자신도 죽이려고 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이에 진노한 무제는 군대를 파견해 장안을 포위하는 한편 성문을 굳게 닫아 장안 내에서 한 명도 도망쳐 나오지 못하게 했다. 이에 태자는 장안 내에서 간신이 난을 일으킨다고 선포했고 임안에게 북군을 장악하게 했다. 그러나 임안은 북군에 들어가자 군영의 문을 단단히 닫게 했다. 태자는 장안 동서남북 네 시장에서 인부들을 잡아 군사로 수만 명을 충당했다. 이 군대로 그는 진압군을 이끌고온 승상 유굴리와 5일간 혈전을 벌였다. 장안의 백성들은 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자 점점 유굴리에게 합류했다. 자신의 불리함을 안 태자는 장안 동쪽 복양문으로 나가 도망쳤다.
무제는 명을 내려 여태자의 어머니 위황후의 인끈을 회수하여 폐후로 만들었는데 이에 위황후는 자신의 말로를 예감하고 자살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 대신은 누구 하나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방의 한 장자가 무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부자간에 원수처럼 되지 말아야 하며 태자가 함부로 부친의 군대를 일으킨 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지 결코 모반은 아니라며 사면을 요청했다. 무제는 이 상소문을 보고 다소 감동은 했지만 그렇다고 태자를 용서하지는 않았다.
태자는 도망쳐 신발 장수의 집에 숨었으나, 결국 발각되자 목을 매어 자살하고 두 아들은 관군과 교전 중에 전사하였다. 태자와 아들들을 숨겨준 신발 장수도 관군에게 살해된다. 결국 태자의 후궁인 사양제(양제는 귀비같은것), 아들 유진, 며느리 왕씨, 딸을 비롯한 태자의 가족과 위황후의 친정을 비롯해 태자를 따르던 이들이 대거 처형당했다. 하지만 여태자의 손자이자 무제의 증손자로 아직 갓난 아기였던 유순(劉詢), 훗날의 선제는 다행히도 위씨 일족에 의해 목숨을 부지해 무제와 소제가 사망하고 폭군 창읍왕을 쫓아낸 원로 대신들에 의해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원래 여태자의 다음 서열은 제회왕 유굉이었으나 여태자보다도 일찍 죽었고, 창읍애왕 유박을 태자로 삼자는 여론도 있었으나, 그도 얼마 못 가 죽었다. 광릉여왕 유서와 연날왕 유단은 무제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막내 아들 유불릉을 태자로 삼았다.
이듬해에 조사를 거쳐 이 사건은 강충의 무고로 밝혀졌고 증거가 전부 조작에다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무제 역시 태자의 거병도 강충의 핍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거기에 전천추의 말을 듣고 감동한 무제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여 아들을 위한 궁궐의 건축을 명해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궁이라는 뜻의 ‘사자궁(思子宮)’을 지어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강충의 삼족을 멸하고 강충의 일당들을 불태워 죽였다. 하지만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충격이 심했는지 얼마 안 가 실의에 빠졌고 곽광과 흉노족 태자 출신인 김일제 등에게 후사를 맡기고는 BC 87년 세상을 떠났다.
사실상 진시황의 최후와 유사하다. 다른 점이라면 다행히도 한나라가 바로 멸망하지 않았다는 점뿐이었다. 사실 그러니까 한무성세니 하고 치켜세워 주는 것이겠지만, 그 한무성세를 위해 한나라는 큰 댓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후일담
조선의 세종은 “대체로 사람이란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진다. 아무리 강직한 사람이라도 마침내는 해이해지기 쉽다. 임금이란 부지런하고 검소해야 정치를 잘할 수 있다. 문제와 경제는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성공하였으나, 무제는 방종하고 지나친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평가했다.
한 무제의 무덤인 무릉(茂陵)은 지금도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는데, 한나라 황릉 중 최대 규모이다. 전한이 멸망하고 일어난 적미군이 무릉의 부장품을 꺼냈지만 전부 꺼내지 못했으며, 서진 말기 민제 사마업은 자금이 없자 무릉을 도굴해 확보했다는 기록도 있다.
국가의 번영은 절정을 달렸으나 대규모 공사, 원정 등으로 국가의 재정을 탕진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등 서서히 안으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청나라의 건륭제 시기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