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모든 사람은 혼자다 : 결혼한 독신녀 보부아르의 장편 에세이
시몬 드 보부아르 / 꾸리에북스 / 2016.10.10
보부아르가 실존주의 윤리학에 대해 쓴 첫 번째 철학 에세이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근대적인 관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긴 하지만, 매우 독특하며 그들의 작품에 환원되지 않는 뛰어나면서도 고유한 작품이다. 실제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예를 들어가며 간명하고 이해하기 쉽게 쓰여진 글들은 사르트르 ‘존재와 무’의 난해함과 대비되면서 실존주의 입문과정에서 최고의 책이라는 찬사를 듣는다.
보부아르는 인간의 상황은 각 개인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자신의 가치와 목표, 기투를 선택하게 하고 그것들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에게 있어 각각의 인간에게 속하는 것은 가치와 목표, 기투를 수립할 자유, 선택할 자유이다. 그 기투는 그것을 완료할 때까지 “그의” 것이다.
그래서 보부아르의 실존주의 윤리학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선이 되도록 이 특정한 종류의 자유를 향상시켜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후에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애매성의 윤리학』에서 서술하듯 자신의 의지뿐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증진해야만 나의 자유도 증진된다고 주장한다.
– 인간의 모든 행위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원초적 질문을 던지다
인간은 나무를 심고, 집을 짓고, 나라를 정복하며, 소망하고, 사랑한다. 그리고 언제나 반드시 “그다음은?”이 있다. 매 순간 그는 항상 새로운 정열을 품고 새로운 기획 속에 몸을 던진다. 돈 후안이 한 사람의 여인을 버리는 것은 다른 여인을 유혹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돈 후안조차도 언젠가는 피로감을 느낀다. 어차피 자기 집에 돌아오기 위해서라면 출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중지해야만 한다면 시작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일 내가 어디서 멈춰야 할지 처음에 정해두지 않았다면, 출발한다는 것은 더욱더 허무하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해야만 한다. 멈추거나, 아니면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정지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만일 출발한다면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의 척도는 무엇일까? 인간은 어떤 목적을 세울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인간에게는 어떤 희망이 허용되는 것일까?
○ 목차
프롤로그 13
제1부
캉디드의 뜰 21
순간 31
무한 45
신 50
인간 60
상황 78
제2부
타인 87
헌신 91
소통 115
행동 138
에필로그 149
역자 후기 155
○ 저자소개 :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 1908 ~ 1986)
1908년 1월 9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1913년 엄격한 가톨릭 학교인 데지르 학원에 입학해 수학하고, 1926년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3년 후에는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고, 1등으로 합격한 장폴 사르트르를 처음으로 만나 그와의 계약 연애를 시작했다. 이 만남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일이 되었다. 두 사람은 평생을 연인이자 사상을 공유하는 지적 동반자로 살아갔다. 이후 1931년 마르세유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 루앙과 파리를 거쳐 1943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소재로 한 소설 『정신적인 것의 우위 (Primaute du Spirituel)』를 완성하지만 1979년이 될 때까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다. 1943년 『초대받은 여자 (L’Invitee)』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해, 1945년 사르트르가 잡지 [현대 (Les Temps Moderns)]를 창간하자 그 일에 협력하며 실존주의 문학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독일에 대한 레지스탕스의 저항을 그린 『타인의 피 (Le Sang des Autres)』(1945), 죽음과 개인의 문제를 취급한 『인간은 모두 죽는다 (Tous les Hommes sont Mortels)』(1946)를 연달아 발표하고, 1954년에 출간한 『레 망다랭 (Les Mandarins)』 으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수상한다.
이 밖에도 소설 『아주 편안한 죽음 (Une Mort Tres Douce)』(1964), 『아름다운 영상 (Les Belles Images)』(1966), 『위기의 여자 (La Femme Rompue)』(1967) 등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 간다. 또한 평론 · 기행문 등을 꾸준히 발표하여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문학가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철학적 글쓰기의 대표작인 1949년에 발표한 『제2의 성』은 역사적 · 철학적 · 사회적 · 생리적 분석을 통해 여성문제를 고찰한 작품으로, 전 세계 페미니즘 운동의 참고 도서가 되었고, 이후 『특권 (Privileges)』(1955), 『노년 (La Vieillesse)』(1970) 등 다수의 철학적이고 논쟁적인 에세이를 집필했다.
사르트르 사후 그의 말년을 기록한 『작별 의식 (La Ceremonie des Adieux)』(1981)과 생전 그에게서 받은 수많은 편지를 엮은 책 『비버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s au Castor)』(1983)를 출간했다. 1986년 4월 14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 (Les Temps Moderns)]지의 편집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편, 알제리 독립이나 낙태 합법화 등 셀 수 없이 많은 다양한 시위에 참여하며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주요 저서로 『얌전한 처녀의 회상』, 『나이의 힘』, 『사물의 힘』, 『결국』 등 자서전과 소설 『초대받은 여자』, 『제2의 성』, 『레 망다랭』, 『대장정 : 중국에 관한 에세이』, 『인간은 모두 죽는다』, 『실존주의와 국가의 지혜』, 『거물들』, 『노년』 등이 있다.
– 역자 : 박정자 (朴貞子)
소비의 문제, 계급 상승의 문제, 권력의 문제, 일상성의 문제 등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한 일련의 책들을 썼다. 미술작품과 영화를 통해 하이데거,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 등의 철학을 해석한 『빈센트의 구두』, 현대인의 소비 행태를 계급 상승의 열망과 결부시켜 해석한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권력의 문제를 시선이라는 모티프로 풀어 쓴 『시선은 권력이다』, 일상생활을 포스트구조주의 철학 개념들로 설명한 『마이클 잭슨에서 데리다까지』, 화가 마네에 대한 푸코의 독특한 관점을 해설한 『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 조각』, 푸코의 르네 마그리트론 (論)을 플라톤 이래의 ‘시뮬라크르’ 개념과 연결 지은 『시뮬라크르의 시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을 들뢰즈의 관점으로 해석한 『눈과 손, 그리고 햅틱』,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전후의 시사적인 사건들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한 『이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등이 그것이다.
번역서로 사르트르의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상황 제5권 식민주의, 신식민주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 등과, 푸코의 『성은 억압되었는가?』 (『성의 역사』 1권), 『비정상인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만화로 읽는 푸코』, 『푸코의 전기』, 『광기의 역사 30년 후』, 앙리 르페브르의 『현대세계의 일상성』, 앙드레 글뤽스만의 『사상의 거장들』 등이 있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를 했다. 박사 논문은 “비실재 미학으로의 회귀: 사르트르의 ‘집안의 백치’를 중심으로”. 상명대학교 사범대학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 책 속으로
P.33
고착되어 있는 순간은 결코 새롭지 않다.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순간은 새로워진다. 바로 지금 출현한 형태는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배경이 뚜렷하고 분명해야만 자신의 모습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무 그늘의 시원함이 귀중한 것은 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대낮의 길가에서이다. 휴식은 고된 일과를 마친 뒤의 편안한 긴장 이완이다. 작은 산꼭대기에서 나는 내가 돌아다녔던 길을 바라본다. 내 성취감의 기쁨 속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길 전체이다. 이 휴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보행이다. 그리고 이 한 잔의 물을 귀중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갈증이다.
P.39
인간이 기투企投인 이상, 인간의 행복은 인간의 쾌락과 마찬가지로 기획일 수밖에 없다. 행운을 잡은 사람은 곧 다른 행운을 잡으려고 한다. 파스칼이 정확하게 말했듯이, 사냥꾼이 흥미를 가진 것은 토끼가 아니라 사냥 그 자체이다. 자기가 그 안에서 살 생각도 없이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그런 행위를 비난할 수 없다. 목적지는 저쪽 깊숙한 곳에 있을 경우에만 목적지일 수 있다. 목적지에 이르면 그곳은 곧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P.42
스키 선수는 오로지 내려가기 위해 올라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단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운동을 아무렇게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 혹은 계곡의 바닥을 목표로 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종합적 의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의 행위의 모든 요소들은 그 의미들을 향하여 스스로를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오르내림은 산보나 운동을 위한 초월적 행위인데, 이와 같은 좀 더 넓은 총체의 관념을 배척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결정이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스키를 타는 사람이지 냉소가가 아니다.
P.51
신이 완전히 주어져 있지만, 인간은 신을 향해 자신을 초월하지 못한다. 인간은 존재의 표면 위에 있는 무관심한 우연성에 불과하다. 이 지상에서, 인간은 마치 사막에서 길을 잃은 탐험가와 같다. 오른쪽 혹은 왼쪽 어디나 자기 좋은 데로 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어디에도 못 간다.
P.60
인류가 소멸할 것이라고 단언할만한 근거는 하나도 없다. 개개인의 인간은 반드시 죽지만 인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P.66
사람은 무산계급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 일하면서 동시에 인류 전체를 위해 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무산계급을 위해 투쟁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산계급과 함께, 무산계급 이외의 인류에 대항하여, 어떤 기획을 추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산계급과 더불어 일한다는 것이 계급의 차이가 없어질 미래의 인류를 향하여 하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오늘날의 자본가로부터 한 세대 혹은 수 세대에 걸쳐 재산을 빼앗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그 이외의 사람들에 반反하여 일하는 것이다.
P.69
자기 행동의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쳤던가? ˝나는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노벨은 자신의 일이 과학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전쟁을 위해 일했던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학설을 뒷날 사람들이 향락주의라고 부를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니체는 니체주의를, 그리스도는 종교재판 같은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곧 역사의 밀물과 썰물에 떠밀려 새로운 순간마다 새로 만들어지고, 그 주위에 무수한 생각지도 못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
P.72
나의 행위가 완료되면 그것은 최초에 내가 바라던 바와는 다른 행위가 된다. 그렇다고 하여 그 행위가 완전히 낯설게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즉 그 행위는 자기의 존재를 완료하는 것이고, 이때 비로소 그 행위가 진실로 완성되는 것이다.
P.78
피뤼스는 정복하기 위하여 출발한다. 그러니까 그는 정복할 것이다. ˝그럼 그다음은?˝ 다음 일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P.79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한다. 그는 오늘 저녁 리옹Lyon에 도착하려고 서두른다. 그 이유는 내일 발랑스Valence에 가고, 모레 몽텔리마르Montelimar에, 그리고 그다음 날에 아비뇽Avignon에, 또 그다음 날은 아를Arles에 가기 이ㅜ해서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수도 있다. 아무리 해 보았자 실제로 그는 님Nimes이나 마르세유Mareille도 보지 못핫 채 집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니 말이다. 본Beaune이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는 자신의 여행을 할 것이다.
P.82
사람은 죽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장 폴 사르트르도 『존재와 무』에서 밝혔듯이 인간 존재는 사물처럼 응고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 순간마다 그는 자신을 존재시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기투이다. 인간 존재는 기투의 형태하에서 실존하고 있지만, 그 기투는 죽음을 향한 기투가 아니라 각기 개별적인 목표를 향한 기투이다.
P.84
한 순간을 경과하건 아니면 수 세기를 거치건 간에, 대상은 언제나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 존재의 충실성, 그것은 영원성이다. 언젠가 무너질 대상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잡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의 초월성이 관여하고 있는 이 대상을 그는 언제라도 새롭게 초월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파괴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대상은 언제나 우연적이고 유한한 것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또 언제나 초월해야 할 단순한 소여所與donné, the given 로서 나타난다. 대상은 나를 충만하게 하면서 자신도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반성反省은 초월성이 자발적으로 취하는 형태들 중의 하나이다. 반성의 관점에서는, 대상은 그냥 거기, 아무런 이유 없이 존재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는 인간만이 자기가 모든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허영에 도취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삶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는 인간만이 있는 게 아니다.
P.89
때때로 우리는 타인의 도움 없이 우리의 존재를 완성하려 한다. 나는 들판을 걸어간다. 풀을 꺾고, 발로 돌을 차고, 언덕에 오른다. 이 모든 것을 아무런 증인 없이 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평생 이러한 고독에 만족할 수는 없다. 산책을 끝내자마자 나는 친구들에게 그 산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칸다울레(BC 8세기 리디스의 왕) 왕은 왕비의 미모가 만인의 눈에 아름답게 비치기를 원했다.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몇 년동안 숲 속에서 혼자 살았지만, 그러나 숲에서 나와 『월든』을 썼다.
P.95
아들이 원하는 결혼을 막는 권위적인 아버지는 자신이 아들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 대신 이 상황 아닌 저 상황을 선택하여 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자기가 아들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에서 살짝 벗어나, 건간이라든가, 부라든가, 명예라든가 하는 기존 가치의 객관성을 제시한다.
P.95
낳아주기를 부탁한 적이 없는, 지금은 건장하고 훌륭한 젊은이가 되어 있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만든 것이지˝라고 아버지는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아이에게 내 몸을 바쳤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타인이 결정한 목적을 내 목적으로 삼는 경우에만 헌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 목적을 타인을 위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다. 아들이 원하는 결혼을 막는 권위적인 아버지는 자신이 아들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 대신 이 상황 아닌 저 상황을 선택하여 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자기가 아들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에서 살짝벗어나, 건강이라든가, 부라든가, 명예라든가 하는 기존 가치의 객관성을 제시한다.
P.103
하나의 생명을 준다는 것은 생명을 받은 사람의 자유까지 좌지우지할 권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아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므로 아이에게 최대의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는 알고 있다.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이 현존해 있음에 의해서만 그에게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기획에 의해서만 자기 자신일 수 있다. 태생이나 교육은 그가 반드시 지양해야 할 사실성facticite일 뿐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해 준 일은 상황의 한 부분이며, 이 상황을 초월하는 것은 바로 그의 자유이다. 그는 이런 상황 혹은 저런 상황에 있게 될 것이지만, 그 어떤 상황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항상 다른 곳에 있는 존재이므로.
P.110
우리는 타인에게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칸트의 말처럼, 비둘기에 저항하면서 비둘기를 밑에서 받쳐주고 있는 공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의 장애물일 때조차 우리는 타인의 도구가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그에게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타인에 의해서이다.
P.111
만일 내가 이 길을 가지 않았고,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았고, 거기 없었더라면, 아마 타인의 삶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그의 인생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말이나 몸짓이 어떤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다. 그는 자유롭게 그 의미를 결정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주위에서 모든 것은 똑같이 충만되어 있었을 것이다.
P.114
부동의 자세이건, 아니면 마구 움직이는 자세이건 간에, 우리는 언제나 지구 위에 올라앉아 있다. 모든 거절은 선택이고, 모든 침묵은 목소리이다. 우리의 수동성조차 우리 의지의 소산이다. 선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선택해야 한다. 선택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P.121
˝철도나 비행기가 없었던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라신느Jean Baptiste Racine 없는 프랑스 문학, 또는 칸트 없는 철학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지금 현재의 만족을 넘어서, 자기 뒤로, 회고적으로, 하나의 필요를 던져 놓는다. 물론 그가 살고 있는 지금, 비행기는 하나의 필요에 부응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물건이 존재함으로써 생겨난 필요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의 존재로부터 사람들이 만들어 낸 필요이다.
P.124
우리들의 행위 하나에주어지는 칭송이 우리들의 전존재全存在를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란다. 이름은 대상 속에 마술적으로 집합된 나의 총체적 현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행위들은 분산되어 있다. 우리는 행위를 하고 있는 한에서만, 다시 말해 분열된 존재 속에서만 타인을 위하여 존재한다.
P.135
내가 정립할 대상들을 정의하는 것과 나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결국 동일한 기획이다.
P.136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세계 속에 하나의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 각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를 우선 내 주변에 출현시켜야만 한다.
P.137
나의 기획이 그들의 기획과 일치하느냐 혹은 저촉되느냐에 따라 그들은 동맹자로서 혹은 적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런 모순 또한 나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면서 그 모순을 존재시킨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P.148
이 미래의 위험들은 나의 유한有限성의 이면이고, 나는 나의 종말을 책임짐으로써만 자유롭다. 그리하여 인간은 행동할 수 있다.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는 자신을 초월함으로써만 존재한다. 그는 위험 속에서, 실패 속에서 행동한다. 당연히 그는 위험을 책임진다. 즉 불확실한 미래에 몸을 던짐으로써 그는 자신의 현존을 확실하게 설립한다. 그러나 실패는 자신을 책임지지 않는다.
○ 출판사 서평
– 프랑스 실존주의에 입문하기 위한 가장 쉬운 책
이 책은 보부아르가 실존주의 윤리학에 대해 쓴 첫 번째 철학 에세이다. 이후 그녀는 이 주제와 관련된 글을 계속 쓰게 되었는데, 이 책과 더불어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애매성의 윤리학』에서 그녀는 지속적으로 자유와 책임의 중요성, 그리고 삶의 진정한 애매성을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근대적인 관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긴 하지만, 매우 독특하며 그들의 작품에 환원되지 않는 뛰어나면서도 고유한 작품이다. 실제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예를 들어가며 간명하고 이해하기 쉽게 쓰여진 글들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난해함과 대비되면서 실존주의 입문과정에서 가히 최고의 책이라는 찬사를 듣는다.
– 사르트르의 연인이 아닌 사유하는 지성인 보부아르를 만나다
피뤼스 (Pyrrhus, BC 319~272)는 주변의 많은 나라를 정복한 고대 희랍의 왕이고, 시네아스Cineas는 왕의 끝없는 정복전쟁을 저지하고 싶어 하는 신하다. 그는 특히 로마 원정에 반대하였는데, 이때 왕과 나눈 대화가 유명하다. 시네아스는 끊임없이 “그다음에는?”이라고 묻다가 피뤼스가 마지막 정복 후에 휴식을 취하겠다고 말하자 겨우 질문을 끝낸다. 그리고는 원정의 허망함에 대하여 왕에게 충고한다. 그 모든 제국들을 정복하느라 고생하고 결국 나중에 돌아와 쉴 텐데 굳이 뭐하러 떠나느냐는 것이다. 결국 제 자리로 돌아오는 목적의 허망함을 설파한 이 고사에서 보부아르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의 단서를 찾는다.
시네아스의 질문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원초적 질문이다. 다시 내려올 텐데 왜 산에 오르는가? 다시 집에 돌아올 텐데 뭐하러 여행을 떠나는가? 나이 들어 퇴직하면 다시 아무런 직업 없는 백수 상태로 떨어지는데 평생 애써 일할 필요가 있는가?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시네아스가 현자로 간주되었다.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 단순하고 간소한 삶을 살았던 데이비드 소로도 근본적으로는 시네아스의 정신적 후계자이다. 시골 마을에서 자본주의를 굽는다느니, 심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느니 하는 현대의 한 트렌드도 분명 시네아스적이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피뤼스의 태도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무상적인 행동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존재 양식이기 때문이다.
– 인간 본연의 존재 양식을 묻다
보부아르는 인간의 상황은 각 개인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자신의 가치와 목표, 기투를 선택하게 하고 그것들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모든 완성의 단계에서 “그다음은”이라는 질문 자체가 떠오른다. 시네아스가 “지금 당장 휴식하기로 하자”고 한 제안은 존재론적인 저주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간의 한계와 기투에 관한 문제로서 시네아스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선을 그어야 할까? 충분히 수행했는지 혹은 이제 충분한지 언제 결정해야 할까?”
우리가 이 질문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인간의 한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극과 극의 잘 알려진 두 철학적 입장을 살펴보자. 자기 중심주의자들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의식이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다. 극기심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결정을 내릴 자신의 의지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자신의 내면성의 일부만이 그의 것이고 자신의 육체를 포함하여 나머지는 정반대에 놓여 있다. 즉, “인간과 그의 기투의 한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단지 실제적이고 우연적이며 불굴의 정신력이나 에너지에 관한 질문만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어떤 합의도 도달하지 못했던 철학적 질문이다.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에게 있어 각각의 인간에게 속하는 것은 가치와 목표, 기투를 수립할 자유, 선택할 자유이다. 그 기투는 그것을 완료할 때까지 “그의” 것이다.
그래서 보부아르의 실존주의 윤리학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선이 되도록 이 특정한 종류의 자유를 향상시켜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후에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애매성의 윤리학』에서 서술하듯 자신의 의지뿐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증진해야만 나의 자유도 증진된다고 주장한다.
보부아르에게 있어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한 존재이다, 늘 미래를 향하며 목표와 기투를 세우며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거나 실패한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그것들을 반복적으로 실행한다. 모든 새로운 목표와 기투는 멈춰지고 포기된다. 이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배신이다. 그런 점에서 피뤼스가 옳았다, 시네아스가 아니라.
–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한 존재
인간에게는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영역도 있다. 태어난 국가, 부모, 외모, 능력 등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강제적 조건이다. 이것을 사실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와 사실성이 합쳐진 존재이다. 그러나 이 주어진 여건을 어떻게 뛰어넘어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주체인 나의 선택과 자유에 달려 있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내 인생을 선택하거나 살아 줄 수 없다.
모든 결정을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순전히 내 판단으로 내려야 하고, 그 결정이 정당하다고 판결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 결정이 잘못되었을 때 그건 내 책임이 아니라고 변명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대자적인 삶이다. 이것이 자유다. 그 자유를 분명히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심한 불안을 느낀다. 자유에 눈 뜨는 것은 인간에게는 언제나 크나큰 고통이다.
실존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불안감이다. 그러나 동시에 빛나는 희망이기도 하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나는 뭐든지 내 뜻대로 할 수 있으므로.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