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9년 8월 23일, 프랑스의 정치가•동물학자로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의 창시자 조르주 퀴비에 (Georges Cuvier, 1769 ~ 1832) 출생
장 레오폴 니콜라 프레데리크 퀴비에 (Jean Léopold Nicolas Frédéric Cuvier, 1769년 8월 23일 ~ 1832년 5월 13일)는 프랑스의 동물학자이자 정치가이다.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의 창시자이다. 슈투트가르트의 카롤리레 (카를수루에)의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해산동물을 연구하여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비교해부학 교수 (1795), 콜레주 드 프랑스의 박물학 교수를 지냈다 (1799).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어 장학관으로도 근무하였고, 제국대학 총장도 역임하였다. 그는 연체동물 ·어류 ·화석 포유류의 동물계 전반에 걸쳐 연구하였다. 주요저서인 《동물계》(1817)에서는 동물을 척추동물 · 연체동물 · 관절동물 (關節動物) · 방사동물 (放射動物)의 넷으로 나누고, 동물계 전체를 한 형 (型)으로 보는 E.G.생틸레르와 과학 아카데미에서 논쟁을 벌였다 (1830). 그는 실증적 생물학의 확립자이며, 그 입장에서 진화론에 반대하여 라마르크설을 비판하고 천변지이설 (天變地異說)을 주장하였다.
한편 국회의원 (1814) · 내무장관 (1832) 등을 지냈고, 주요저서로 ‘비교해부학 강의 (1801 ~ 1805)’ ‘동물계 (1817)’, ‘철학사전’ (임석진 외 편저, 중원문화, 2009) 등이 있다.

– 조르주 퀴비에 (Georges Cuvier)
.출생: 1769년 8월 23일, 프랑스 몽벨리아르
.사망: 1832년 5월 13일,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학력: Karlsschule Stuttgart
.부모: 장 조지 퀴비에, 앤 클레멘스 샤텔
.자녀: Clémentine Cuvier
조르주 퀴비에 (Georges Cuvier, 1769 ~ 1832)는 정밀한 실험 방법을 통해 ‘비교 해부학’과 ‘고생물학’ 체계 확립에 기초를 세웠다.
가정교사를 하면서 바다의 생물을 연구하였다. 그 후 생틸르의 소개로 파리 박물관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동물계를 4부문 15군으로 나눈 분류표를 작성하였다. 또 비교 해부학적 연구에 의하여 화석을 조사하고 고생물학을 창시하였다. 그는 라마르크의 진화론을 부정하여 종의 불변을 고집하고 “천변지이설”을 주장하였다. 동생인 프레데릭 퀴비에 역시 동물학자로 활동하였다.

○ 생애 및 활동
장 레오폴 니콜라 프레데리크 퀴비에 (Jean Léopold Nicolas Frédéric Cuvier)는 1769년 8월 23일, 몽펠리에에서 출생하였다.
1769년 8월 23일생인 퀴비에는 대학에서 경제를 전공했지만, 바다동물 연구를 하면서 주목받자 자연과학으로 눈을 돌렸다.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 때문에 자연사 개론을 공부한 것이 도움이 됐다. 나폴레옹의 신임으로 장학관도 지냈던 그에게 나폴레옹 군대의 전리품은 큰 도움이 됐다. 해외 원정에서 입수한 화석 자료는 퀴비에에게 이른 시일 안에 다양한 동물학적 유물을 확보하게 해주었다.
그는 이를 이용해 연체동물 · 어류 · 화석 포유류 등 동물계 전반에 걸쳐 연구했다.
주요 저서 ‘동물계’ (1817)에서는 동물을 척추동물 · 연체동물 · 관절동물 · 방사동물로 분류하기도 했다. 고지식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퀴비에는 그의 업적 때문에 주변에서 그를 과학의 창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비유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1812년에는 “새로운 동물을 발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선언하기도, “흑인이 영장류에 접근해 있다.”고 이야기해 논란을 자아내기도 했다.

– 주요 연구활동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을 확립했다. 1784~88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카롤리네 (카를스루에) 아카데미에서 비교해부학을 공부하고 해부방법을 배웠다. 졸업 후 가정교사를 하면서 (1788~95) 해양 무척추동물, 특히 연체동물에 관한 독창적인 연구서를 저술했다. 그는 논문들을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동물학교수 É. 조프루아 생 틸레르에게 보냈고 생틸레르의 권유로 그 박물관의 교수가 되었다. 잠시 동안 두 과학자는 공동으로 연구하여 1795년 포유류 분류에 관한 저작을 출판했지만 두 사람의 견해는 결국 다르게 발전했다.
퀴비에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1798~1801) 때 박물학자로 초대되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비교해부학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박물관에 남았다. 1797년 널리 알려진 강의 노트를 기초로 한 최초의 저작 〈동물의 자연사에 대한 기본 조사 : Tableau élémentaire de l’histoire naturelle des animaux〉를 출판했다. 1800~05년에도 박물관에서의 강의를 기초로 〈비교해부학 수업 : Leçons d’anatomie comparée〉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한 동물 내의 모든 기관들은 서로 기능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각 기관의 구조적·기능적 특징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부분들의 상호관련성’ 원리를 제창했다. 더욱이 그는 해부학적 구조가 선행하며 이것이 특정한 생활양식을 요구한다고 주장한 생틸레르와는 달리 한 동물의 구조와 습성이 그 동물의 해부학적 특징들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동물군에 따라 해부학적 특징이 다른 것은 창조 이후에 종 (種)들이 변화를 겪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며, 각 종들은 기능적으로나 구조적으로 잘 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극심한 변화를 겪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각 종들이 각기 특정한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각 기관도 각각 특정한 기능을 위해 형성되었다는 입장을 계속 고수했다. 진화를 부정한 점에서, 퀴비에는 1809년 진화론을 출판한 그의 동료 J.-B. 라마르크나 1825년 악어의 진화에 관한 증거들을 출판한 생틸레르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았다. 퀴비에는 자연사박물관에서 동물학 연구를 계속하는 동안 교육분야의 주요한 개혁을 단행하고 공공교육의 임피리얼 장학관으로 재직했으며 프랑스의 지방대학 설립에도 조력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1811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1810년 그당시의 유럽 과학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한 〈과학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보고 : Rapport historique sur les progrès des sciences naturelles depuis 1789, et sur leur état actuel〉를 출판했다.
한편 퀴비에는 여러 부분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견해를 그가 발굴한 화석의 체계적인 연구에 적용했다. 미지의 네발 화석동물 골격을 완전하게 재구성했는데 이는 동물 종들이 멸종되었다는 놀랄 만한 새로운 증거를 제공해주었다. 또한 그는 발굴한 많은 생명체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결과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보다 오래되고 깊이 존재하는 지층일수록 현존하는 동물들과의 유사성이 적은 거대한 도롱뇽, 비행성 파충류, 멸종된 코끼리 등의 동물화석이 있고 최근의 지층일수록 유사성이 증가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1812년 소론 〈기본 강연 Discours préliminaire〉을 포함하는 〈화석 척추류의 골격에 대한 연구 : Recherches sur les ossements fossiles de quadrupèdes〉에서 자신의 결론을 최초로 요약 설명했고 위의 논문을 책의 형태로 확장하여 1825년 〈지각 변동에 관한 강연 : Discours sur les révolutions de la surface du globe〉을 출판했다.
그는 지구의 역사가 짧은 데도 불구하고 과거 지질시대 동안 엄청난 변화들이 일어났음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의 연구는 갑작스러운 지각 융기와 홍수 등 일련의 갑작스런 변동이 생물체의 모든 종을 파괴하고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체들을 만들었다는 격변설 (catastrophism) 개념에 새로운 권위를 부여했다. 가장 최근에 일어났고 가장 극적이었던 ‘노아의 홍수’와 같은 거대한 변동에 의해 버려진 지역은 변동작용을 받지 않은 지역으로부터 가끔씩 동물들이 이동하여 서식하게 된다고 믿었다. 격변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난 완만한 변화를 통해 지구상의 생명체를 설명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중요한 지질학적 원리로 인정되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기 직전인 1814년 최고 행정재판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817년 내각의 부총리가 되었다. 또한 1817년, 후에 출판된 판 (版)들과 카를 폰 린네의 분류체계를 크게 앞선 저서 〈구조에 의해 분류된 동물계 : Le Règne animal distribué d’après son organisation〉를 출판했다.
그는 동물들이 매우 다양한 해부학적 형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단일계보로 배열할 수 없음을 보였다. 대신에 그는 동물들을 특정 해부학적 척추동물·연체동물·체절동물·방사형동물 등 4개의 동물군으로 분류했다. 같은 군에 속하는 모든 동물들은 특정한 하나의 유형이 변화된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함께 분류되었다. 비록 그의 분류가 이제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지만 퀴비에는 모든 생물들을 가장 단순한 것에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인 계보로 배열하는 18세기의 관념을 타파했다.
생틸레르와 퀴비에 사이의 심화되어가던 이론적 차이는 동물계가 동일한 해부학적 구조를 공유하는 정도, 특히 척추동물과 연체동물이 같은 유형에 속하는지에 대한 공개토론회가 열린 1830년 과학 아카데미에서 정점에 달했다. 생틸레르는 이들이 같은 유형에 속하며, 모든 동물들이 단지 한 유형의 유사물들이라고 생각한 반면 퀴비에는 그가 나눈 4가지 유형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논쟁의 쟁점은 동물에서의 유사성과 다양성을 설명하는 방법이었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유사한 동물들이 공통조상으로부터 진화해왔고 다양성은 유전적 변화가 일어난 것임을 보임으로써 이 문제를 분명하게 설명했다.
퀴비에의 업적은 자연에 관한 18세기의 견해와 진화의 원리에 의해 19세기 후반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견해 사이에 선을 긋는 전이를 이룩한 것으로 간주된다. 동물들을 4가지 분리된 무리로 분류하기 위해, 연속적인 계열로 동물들을 배열하는 18세기의 방법을 거부함으로써 그는 동물들이 해부학적으로 다른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비록 퀴비에의 격변설이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고생물학을 확실하고 경험적인 토대 위에 자리잡게 했다. 이는 화석을 동물분류에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암석층과 그 속에 포함된 화석 잔해 사이의 점진적인 관계를 보이고, 비교해부학과 화석 골격의 재구성을 통해 기능적 관계와 해부학적 관계의 중요성을 밝힘으로써 이룩된 성과였다.

– 최초의 공룡학자
퀴비에는 박물학이 인생의 전부였다.어려서 부터 스케치북에다가 여러 종류의 동물을 그렸던 그는, 중등을 마치자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과학원에 들어가 자연과학을 공부했다. 19세에 과학원을 졸업한 그는 노르망디 해안 근처의 코 지방에서 1788년부터 1795년까지 어느 백작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1795년 여름 파리로 떠난 얼마후 왕립자연사 박물관의 조수가 되었고 1802년 마침내교수가 되었다.
가정교사 시절 노르망디 에서많은 동물을 수집하고, 해부하는 과정에서 얻은 충분한 학술적 경험은 비교학의 원리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화석에도 관심을 가져, “현존하는 코끼리와 화석 코끼리의 종류에 관한 보고서”를 썼고, 여기에서 퀴비에는, 코끼리는 원래 화석이 발견된 장소에서 살았으며 이들의 죽음은 점진적인 기후변화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기후변화 탓이였다는 주장을 했다. 이 주장은 현재의 공룡멸종설과 일맥상통 하고있어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과학적, 학술적, 논리적인 면이 남달랐음을 알수 있는것이다.
퀴비에는 이후에도 화석연구를 계속하여 그 성과물을 1812년에 “화석 뼈의 연구” 라는 책으로 정리했다. 전 유럽에 산재한 화석표본과 자료를 설렵하고, 새로운 종의 화석에도 늘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곤 했다. 이러한 신념과 생활이 퀴비에로 하여금, 화석을 통해서고생물학의 세계로 이끌려 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화석을 복원하는 일에도 비교해부학의 원리를 이용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과거의 동물을 복원 하는데 성공할수 있었다. 수많은 화석동물들이 그의 손을 거쳐 과거로부터 되살아났다.
퀴비에는 화석을 연구하던중 지질학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 과거로 부터 소생한 동물들을 연대 순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퀴비에는 지구와 생물의 역사를 “대 이변설”과 “종의 불변설” 로 설명 하였다.그러나 종의 불변설 만큼은 그의 생각이 잘못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나온 박물학자들이 그러한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1800년 그가학술논문에서 언급한 중생대 파충류의 척추골 화석은 박물학자인 바슐레가 옹플뢰르 지방에서 채집한 것인데. 1808년 퀴비에는 이 화석을 두 종류의 신종 악어의 것이라고 소개하였다. 확실히 이들 화석의 일부는 악어의 것이였으나 육식공룡의 골격도 함께 기록하여 그림으로 남겼다. 이는 퀴비에가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한 실수였다. 그러나 그가 밝힌 익룡 (Pterosaurs)의 모습은 기리남을 업적이다.
“하늘을 나는 파충류는 아마도 두 종류라고 생각된다. 그들의 날개 역활을 했던 막은 단 하나의 손가락 만으로 지탱 되었으며, 뭔가에 매어달릴 때에는 다른 세개의 손가락을 사용했다. 또한 설 때에는 뒷다리 만을 사용했다. 얼굴에는 커다랗게 찢어진 입이 있었는데 이빨이 예리해서 곤충이나 작은 동물을 물기에 알맞았다.” 날아다니는 파충류, 익룡을 퀴비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독일의 바이에른 지방에서 발견된 뼈가 익룡의 것임을 확인 했다.
– 격변설 (catastrophim)
생물계의 역사에 대해 프랑스의 조르주 퀴비에가 체계화한 진화설. 현재의 지구는 조금씩 변하여 지금의 모습을 이룬 것이 아니라 과거 어느 때 엄청난 변화로 만들어졌다는 학설이다. 격변의 가장 큰 증거는 지구표면을 덮고 있는 퇴적층이다. 지구지각 전체에 퍼져 있는 퇴적층은 격변이 일어나 전 지구가 물로 덮였었다는 최고의 증거이다. 20세기 들어 퀴비에의 이론을 확장시킨 신격변론자들은 산맥 형성시 일정하게 작용하는 일련의 힘, 지반의 침강으로 육지가 바다에 잠기는 현상과 지반이 융기하는 일 및 현재 생물종의 진화와 절멸 등으로 지구의 역사를 해석하려 했다.

○ 저서
주요저서에 ‘비교해부학 강의 (1801 ~ 1805)’ ‘동물계 (1817)’, ‘철학사전’ (임석진 외 편저, 중원문화, 2009) 등이 있다.
‘동물’계에서는 동물을 척추동물 ·연체동물 ·관절동물 ·방사동물의 넷으로 나누었다. 실증적 생물학의 확립자이며, 그 입장에서 진화론에 반대하여 라마르크설을 비판하고 천변지이설을 주장하였다.
– Works
Tableau élémentaire de l’histoire naturelle des animaux (1797–1798)
Leçons d’anatomie comparée (5 volumes, 1800–1805)
Essais sur la géographie minéralogique des environs de Paris, avec une carte géognostique et des coupes de terrain, with Alexandre Brongniart (1811)
Le Règne animal distribué d’après son organisation, pour servir de base à l’histoire naturelle des animaux et d’introduction à l’anatomie comparée (4 volumes, 1817)
Recherches sur les ossemens fossiles de quadrupèdes, où l’on rétablit les caractères de plusieurs espèces d’animaux que les révolutions du globe paroissent avoir détruites (4 volumes, 1812) (text in French)
Mémoires pour servir à l’histoire et à l’anatomie des mollusques (1817)
Éloges historiques des membres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lus dans les séances de l’Institut royal de France par M. Cuvier (3 volumes, 1819–1827) Vol. 1, Vol. 2, and Vol. 3
Théorie de la terre (1821) ____ Essay on the theory of the earth, 1813; 1815, trans. Robert Kerr.
Recherches sur les ossemens fossiles, 1821–1823 (5 vols).
Discours sur les révolutions de la surface du globe et sur les changements qu’elles ont produits dans le règne animal (1822). New edition: Christian Bourgeois, Paris, 1985. (text in French)
Histoire des progrès des sciences naturelles depuis 1789 jusqu’à ce jour (5 volumes, 1826–1836)
Histoire naturelle des poissons (11 volumes, 1828–1848), continued by Achille Valenciennes
Histoire des sciences naturelles depuis leur origine jusqu’à nos jours, chez tous les peuples connus, professée au Collège de France (5 volumes, 1841–1845), edited, annotated, and published by Magdeleine de Saint-Agit
Cuvier’s History of the Natural Sciences: twenty-four lessons from Antiquity to the Renaissance [edited and annotated by Theodore W. Pietsch, translated by Abby S. Simpson, foreword by Philippe Taquet], Paris: Publications scientifiques du Muséum national d’Histoire naturelle, 2012, 734 p. (coll. Archives; 16)
Tableau élémentaire de l’histoire naturelle des animaux, 1797
Variorum of the works of Georges Cuvier: Preliminary Discourse of the Recherches sur les ossemens fossiles 1812, containing the Memory on the ibis of the ancient Egyptians, and the Discours sur les révolutions de la surface du Globe 1825, containing the Determination of the birds called ibis by the ancient Egyptians
Cuvier also collaborated on the Dictionnaire des sciences naturelles (61 volumes, 1816–1845) and on the Biographie universelle (45 volumes, 1843-18??)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