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황제에서 시민으로 (상, 하)
From Emperor To Citizen
푸이 / 문학과비평사 / 1988.12.1
1950년 마흔네 살의 푸이가 중국인 전쟁범 800명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간 후 수인번호 981을 달고 자기비판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황제였던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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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간의 국공 내전이 끝나고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도시가 된 하얼빈 역. 1950년 5년간에 걸친 소련의 억류에서 풀려나 송환된 중국인 전범들이 가득한 가운데, 한 남자가 자살을 시도한다. 삶에서 멀어지며 옅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어릴 때의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이 남자가 바로 청나라 최후의 황제였던 선통제 아이신교로 푸이였다.
1908년 황극전에서 태황태후인 서태후에게 광서제의 후계자로 지명받았고 붕어한 광서제의 뒤를 이어 겨우 네 살에 황위에 오른 푸이는 즉위 3년 만에 중국을 뒤흔든 신해혁명의 물결에 휩쓸려 황제 칭호와 사유 재산만 인정받은 채 퇴위당한다. 황후와 후궁을 맞이하게 되고, 영국인 가정교사의 영향으로 신사상에 매료된 그는 서양으로의 유학이라는 꿈을 갖는다. 황실 재산의 좀을 먹는 환관들을 축출하고 새로운 인물을 기용하는 등 나름대로 황궁 내의 개혁을 시도한다.
1924년 군벌 풍옥상의 쿠데타로 그는 결국 자금성에서 쫓겨나 청나라 황제의 칭호를 빼앗긴다. 만주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위한 일본인들의 획책에 넘어간 나머지 그는 유학의 꿈을 접고 만주국의 황제로 우뚝 올라선다. 그러나 만주국의 황제라는 칭호는 허울에 불과하였고 실권은 일본인들이 쥐고 있었고 푸이의 우매함에 격분한 황후는 아편 중독에 빠진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자 푸이는 일본으로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만주국에 이미 들어온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중국으로 넘겨진다. 만주국 포로를 수감하는 형무소에서 사상교육을 받고 출소한 그는 평범한 정원사로 지내며 일생을 마친다.
이 책에는 세 가지 버전이 있다.
.초판 (1960) : 푸이의 남동생 Pujie가 작성한 것으로, 1957년 완성해 1961년 1월 신화 서점에서 출판되었다.
.제2판 (1964) : Wen-Da Li (李文達)의 저작으로 1964년 Qunzhong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정식버전 (2007) : 제2판이 출판되었을 때 사회적 환경과 여러 정치적 이유로 인해 원고는 약 16만 단어가 삭제되었다. 2007년에는 삭제본을 복원했다.
한국에서는 문학과 비평사에서 1988년 이윤양 씨의 번역으로 출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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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아이신 교로 푸이 (Aisin Gioro Pu I, 愛新覺羅溥儀, 1906 ~ 1967)
아이신 교로 푸이 (Aisin Gioro Pu I, 愛新覺羅溥儀, 1906년 2월 7일 ~ 1967년 10월 17일)는 청 제국의 마지막 제12대 황제 선통제 (宣統帝, 재위 : 1908년 ~ 1912년, 황제의 칭호는 1924년까지 유지)이자 만주국의 집정 및 황제 (재위 : 1932년 ~ 1934년, 1934년 ~ 1945년)이다.
만주국 집정으로는 대동왕 (大同王, 다퉁왕), 황제로는 강덕제 (康德帝, 캉더디)이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전국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위안스카이에게 청나라가 멸망하고, 시간이 지나 푸이는 자금성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에 푸이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옮겨 다니는 생활을 하였다.
1945년 푸이는 소련에게 체포되어 전범으로 하바롭스크에 억류되었다. 억류된 푸이는 시간이 지나 1950년 중국으로 압송되어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었다.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었던 푸이는 그대로 생을 마감하는가 싶었지만 마오쩌둥에 의하여 특별사면령으로 풀려난 후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일 하게 되었다.
푸이는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보다도 높은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하지만 푸이의 인생은 그리 쉽지 않고 오히려 절망적이었다. 이러한 푸이의 일생은 영화 ‘마지막황제’로 제작되었다.
저서로 자서전 ‘황제에서 시민으로’ (From Emperor To Citizen)가 있다.
– 역자 : 이윤양
○ 푸이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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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청나라 치하 몽골 마지막 대칸. 만주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이며 중국 최후의 이민족 황제이기도 하다. 불과 3살에 즉위했다가 3년 만에 퇴위했다. 평민으로서 살다가,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황제로 옹립되어 지내다가 종전 이후 전범으로서 옥살이를 하게 된다.
만주족이 세운 왕조인 청나라의 황제였지만, 그가 할 줄 아는 만주어는 ‘일어서’라는 의미의 ‘일리’ 밖에 없었다. 사실 이건 19세기 중반부터 청조가 본격적으로 기울기 시작하며 만주족 대신 한인들이 득세하고 만한병용, 만한합벽의 원칙마저 서태후가 폐지한 후엔 관료 사회에서도 만주인 대신 한어를 쓰는 한인들이 주류가 되면서 점차 심해지는 현상이었으나, 유아기에 신해혁명을 맞이한 푸이는 만주어를 조금이나마 배울 기회마저 얻지 못했고, 만주어를 배울 기회는 평생 다시 오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멸망한 국가의 마지막 황제는 다음 왕조가 묘호 등을 결정하지 않을 경우, 폐제로 인정되어 공식적으로는 황제 취급을 하지 않는다. 신해혁명으로 공화제를 기반으로 한 중화민국이 세워졌고, 당시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선통제의 묘호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사실 자금성에 선통제를 살려둔 이유 자체가 청나라의 황제를 상징적 황제로 둔다는 명분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푸이는 명분이야 어떻든 만주사변 이후 괴뢰국 만주국이 세워지자, 일본에 협력했으므로, 묘호 같은 걸 줄 이유가 없다. 거의 모든 경우 푸이, 잘 불러 줘 봐야 선통제나 말제로 일컬어진다.
묘호는 두 가지가 있는데, 1967년에 대만에 있던 종친들로부터 헌종 (憲宗)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2004년에는 공종 (恭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시호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묘호와 시호 모두 인정하지 않고 손제 (遜帝)라는 칭호로 부르거나 그냥 푸이라는 이름 그대로 부른다.
한호(만주식 군주 칭호)는 거훙거 요소 한. 휘는 아이신기오로 푸이 (愛新覺羅 溥儀, 애신각라 부의). 만주어 발음으로도 푸이고 중국어 발음으로도 푸이이다. 헨리 (Henry)라는 영어 이름도 있는데, 푸이의 개인 교사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 (Reginald Johnston)이 헨리 8세의 이름에서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만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며,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본명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고, 제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에는 그냥 푸이 선생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은 잘 쓰이지 않았다.
푸이의 이복동생 푸런 (溥任, 1918년 8월 17일 ~ 2015년 4월 10일)은 이름을 한족식 이름인 진유즈 (金友之, 김우지)로 바꿨다. 즉, 이름을 바꾸면서 성도 진 (金) 씨로 함께 바꾼 건데, 현재도 많은 만주족들은 진씨 성을 사용한다.
연호는 만주식으로 거훙거 요소, 중국식으로 선통 (宣統). 만주국의 연호는 강덕 (康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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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동안 신해혁명, 군벌들의 전쟁, 국민혁명,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까지 중국 근현대사의 굴곡이란 굴곡은 모두 다 겪으면서 살아남고 황제만 2번을 한, 20세기 중국에서도 손꼽히게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인물이다.
○ 영화화
본서 ‘황제에서 시민으로’를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가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며 후에 만주국 황제로 즉위한 선통제 푸이의 생애를 그린 영화이다.
1987년에 개봉되었고, 일본과 대한민국에서는 1988년에 개봉되었다.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주연 존 론(John Lone)의 이탈리아, 중국, 영국 합작 영화다.
1988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9개의 상을 휩쓸었으며, 중국 당국이 자금성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것을 허락한 최초의 영화이기도 하다.
○ 독자의 평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사람이라면 누가있을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세상에 존재할테지만 나는 마지막왕조 청말 선통제 애신각라 부의를 말하고 싶다. 그는 황제였다. 만인을 우러러 보는 높은 자리에 있는 그런 직책.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존엄스러우며 가장 고독한 자리 바로 그런 황제의 자리에 올라있던 그였다.
사람들은 알고있을 것이다. 마지막왕조의 마지막왕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그랬다 그의 삶은 너무 비참하였다. 겨우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황제자리에 올라 몇년만에 강제퇴위를 당했으니 말이다.
황제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황제의 자리는 그를 권위적으로 만들었고, 평생동안 남의 시중만 받아온 그를 더욱 소외시키고 외롭게만들었다. 후에 그는 그것을 극복하였지만 그의 삶은 정말이지 비극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황제의 자리에 대한 욕구로 인해 일본이 세운 괴뢰정부인 만주국의 황제로 지냈다. 그러나 그는 꼭두각시였으며 일본의 희생양이었을뿐 이었다. 황제에서 일반 시민으로 그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일것이다. 나는 이책을 읽는 내내 숨을 졸였고, 그의 처지에 대한 동경과 슬픔의 눈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황제의 지위에서 보통사람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던 한 인간의 처절한 고백이었던 이책은 아마도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그런 책이될 것이다. 힘겹게 빌려서 본 이책은 역사에 관심있고 또 비극적인 그의삶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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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