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12월 20일, 폴란드 태생 미국의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Arthur Rubinstein, 1887 ~ 1982) 별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Arthur Rubinstein, 1887년 1월 28일 ~ 1982년 12월 20일)은 폴란드에서 태어난 미국의 피아니스트이다.
루빈스타인은 1887년 폴란드 입헌왕국의 우치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럽 국가 언어에 능통하는 등의 재능을 보였고, 특히 이미 2세 때부터 절대음감을 보였다고 하며 누나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피아노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이후 4세 경 루빈스타인의 아버지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을 소개해 주며 바이올린을 가르치려고 했는데, 루빈스타인은 바이올린을 배우기를 거부하고 화성과 다성 음악을 더 충실히 구현할 수 있는 피아노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요제프 요아힘은 카를 하인리히 바르트에게 루빈스타인을 추천했고, 루빈스타인은 바르트에게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레셰티츠키 ·브라이트하우트 ·파데레프스키에게도 사사하였다.
11세 때 시절이던 1898년 요제프 요아힘의 지휘로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연주하여 독일 제국 베를린 악단에 데뷔하였고, 이후 세계 각지에서의 연주로 명성을 떨쳤다.
이후 59세 시절이던 1946년 미국에 귀화했고,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힘있고 능숙한 기교와 깊은 음악성을 함께 지닌 그는 쇼팽 음악의 연주자로서 당대의 제1인자로 꼽혔다. 또한 고전 음악으로부터 근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터리로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에도 능하다. 파데레프스키와 함께 세계 제일의 피아니스트로 꼽히며, 1967년 한국을 방문하여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Arthur Rubinstein)
.출생: 1887년 1월 28일, 폴란드 우쯔
.사망: 1982년 12월 20일, 스위스 제네바
.배우자: 아니엘라 루빈스타인 (1932년–1982년)
.자녀: 존 루빈스타인, 에바 루빈스타인, 알리나 루빈스타인, 폴 루빈스타인
.손주: 데이빗 코핀, 마이클 웨스턴, 잭 루벤스테인, 에이미 코핀, 알렉산더 코핀, 제시카 루빈스타인 등
.형제자매: 스타니슬라브 루빈스타인, 헬레나 루빈스타인 랜도 등
.앨범: Beethoven: Sonatas No. 21 In C (Waldstein) And No. 18 In E Flat 등
연주 스타일은 당당하며 열의에 차 있고 이해하기 쉽다고 평가됐으며, 쇼팽의 작품과 모차르트의 협주곡 뿐 아니라 비창, 월광, 열정 등 베토벤의 소나타도 훌륭하게 연주하였다.
○ 생애 및 활동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Artur Rubinstein)은 폴란드 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로 20세기에 가장 사랑받았던 낭만주의의 거장이다.
루빈스타인은 1887년 1월 28일 폴란드의 로지에서 유태인 사업가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2살 때 절대음감을 보인 루빈스타인은 3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 4살 때는 연주회에 출연할 정도로 대단한 신동이었다.
6살에 처음 연주회를 열고, 8살 때 바르샤바음악원에 입학하였다.
1897년 10살 때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 (Joseph Joachim, 1831~1907)의 추천으로 베를린 음악 아카데미에서 리스트의 제자였던 카알 하인리히 바르트 (Karl Heinrich Barth, 1847 ~ 1922)에게 피아노를 사사하였으며, 로베르트 칸 (Robert Kahn, 1865 ~ 1951)과 막스 브루흐 (Max Bruch, 1838 ~ 1920)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 해 러시아 순회공연을 떠나 안톤 루빈스타인 (Anton Rubinstein, 1829 ~ 1894)이 다시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으며, 1899년에는 독일과 폴란드 연주여행을 계속했다.
1900년 13살 때 베를린에서 아르투르 니키쉬 (Arthur Ni´kisch, 1855 ~ 1922)의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닉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여 데뷔하였다.
또한 프리츠 크라이슬러 (Fritz Kreisler, 1875 ~ 1962), 페루치오 부조니 (Ferruccio Busoni, 1866 ~ 1924), 오이겐 달베르 (Eugene D’Albert, 1864 ~ 1932), 외젠느 이자이 (Eugene Ysaye, 1858 ~ 1931)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과 교류하였다.
루빈스타인은 요하임의 추천으로 레셰티츠키 (Theodor Lecshetizki, 1830 ~ 1915), 파데레프스키 (Ignacy Jan Paderewski, 1860 ~ 1941)에게도 사사하였다.
1904년 17살 때 파리에서 데뷔무대를 가졌으며, 루빈스타인의 연주를 들은 생상스 (Saint Saens, 1835 ~ 1921)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연주가”라고 경탄하였다.
파리에서는 모리스 라벨,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파블로 카잘스 등의 많은 작곡가들과 교분을 쌓았다.
1906년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데뷔무대를 가졌으나 호평을 받지는 못하였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통역관으로 근무하면서 바이올리니스트 외젠느 이자이와 함께 연합군을 위한 30회의 연주회도 열었다.
1916년 스페인 순회연주를 통해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4차례의 공연계획이 무려 120회까지 연장되었다
1919년 처음으로 미국 연주여행을 떠나 75회의 연주회를 통해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당시 루빈스타인은 폭발적인 연주 효과를 겨냥하여 세부의 복잡한 음은 빼어먹고 연주하는 등 비평가들로부터는 호평을 받지 못했다.
이런 비판을 계기로 루빈스타인은 4년 동안 연주활동을 중단하고 스위스의 한 작은 마을에서 자신의 음악에 변화를 주며 새롭게 태어났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무미건조한 것, 고상하거나 의미없는 것을 배격하면서 테크닉을 넘어선 참된 경지를 탐구했다.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올 때까지 자신의 음악관과 기술을 연마했다. 그리고 1922 ~ 1937년까지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주법을 개선하였다.
그 결과 힘차면서도 맑은 음향으로 가득 찬 그의 새로운 쇼팽 연주는 1937년 미국 카네기홀의 연주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으며, 평론가 올린 다운즈 (Olin Downes)는 “6개의 손과 30개의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라고 루빈스타인의 기교를 절찬하였다.
1932년 폴란드의 명지휘자 밀나르스키 (Emil Mlynarski)의 딸인 아니에라 밀라르스키와 결혼했다.
1937년 50살 때 미국에 정착하고 1946년 시민권을 얻었으며, 하이페츠 (Jascha Heifetz), 피아티고르스키 (Gregor Piatigorsky) 등과 함께 전설적인 ‘백만불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에서도 그의 명성을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1956년 미국 데뷔 50주년 기념연주회부터 1976년 은퇴할 때까지 100여개의 도시에서 매년 100회가 넘는 연주회를 열었다. 머리 위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찍는 듯한 손동작은 여전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고, 어떤 작품이든지 유려하고 낭만적인 감수성을 자아냄과 동시에 짜릿한 흥분을 선사했다.
1966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1974년 이스라엘은 ‘루빈스타인 국제 피아노 콩쿨’을 창설하였으며, 2005년 한국의 손열음이 제11회 루빈스타인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3등으로 입상한 바 있다.
1982년 12월 20일 95살의 나이로 제네바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예루살렘에 안장되었다.
<나의 젊은 시절 (My Young Years)> (1973) 과 <오랜 나날들 (My Many Years)> (1980)을 자서전으로 남겼다.
루빈스타인은 화려하고 능숙한 기교와 단정하고 유려한 내면적인 깊은 음악성으로 낭만적 정취를 피아노에 듬뿍 담아 쇼팽음악의 최고 연주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또한 고전 음악으로부터 근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터리로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에도 능했다.
힘차면서도 서정적인 그의 톤은 화려한 생명력을 머금고 높은 표현력을 발산한다.
자유롭지만 호소력 있고, 선이 굵으면서도 윤기있는 그의 음색은 원숙한 인간미가 곁들여져 최고의 예술적 경지를 보여준다.
자신있게 연주한 쇼팽곡 뿐만 아니라 모든 곡에서 당시 유행한 안이한 템포 루바토 (tempo rubato)에 따르지 않고, 균형 잡힌 구조 속에서 어택이나 음색에 의하여 선율 (旋律)을 조성한 연주법은 지금도 인정받고 있다.
루빈스타인은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호로비츠와 레퍼토리에 있어서는 쇼팽을 제외하고 거의 겹치지 않았다.
물론 호로비츠의 경이로운 테크닉에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더 나은 음악가’라고 언급했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에 덧붙여 인생을 즐길 줄 알고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행복한 피아니스트로 청중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호로비츠의 연주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와 같이 음표 하나하나의 울림과 쉼표까지 듣는 이로 하여금 머리카락이 쭈삣하게 서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는 반면 루빈스타인의 연주는 자연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따스한 미풍과도 같이 편안한 감동을 자아낸다.
루빈스타인의 레코드는 거의 RCA에서 나왔으며 많은 명반을 남겼는데, 특히 쇼팽의 연주는 정평이 높다.
스크로바체프스키 (Stanistaw Skrowaczewski, 1923~ )의 지휘로 뉴 필하모닉이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유진 오먼디 (Eugene Ormandy, 1899~1985)의 지휘로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이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 제2번>, <폴로네이즈 선집>, <발라드>, <마주르카>, <녹턴>, <왈츠> 등은 불후의 명반들이다.
그 밖에 라인스도르프 (Erich Leinsdorf, 1912 ~ 12993)의 지휘로 보스턴 교향악단이 연주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4번>,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슈베르트의 <방랑 환상곡>과 유진 오먼디의 지휘로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등도 명반으로 남겨져 있다.
○ 수상 및 서훈
– 수상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기악 독주자 퍼포먼스 (1960, 78)
레오니 소닝 음악상 (1971)
케네디 센터 공로상 (1978)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실내악 퍼포먼스 (1975, 76)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포함 그래미상 5회 수상 (1994)
– 서훈
성 제임스의 검 훈장 (1958)
성 제임스의 검 훈장 (1972)
미국 자유훈장 (1976)
명예 대영 제국 훈장 2등급 (honorary KBE, 외국인대상 정원외, 1977)
○ 앨범
1.Arthur Rubinstein – Ludwig Van Beethoven Piano Sonatas
2.Arthur Rubinstein – Chopin 19 Nocturnes
3.Rubinstein Collection, Vol.48 – Chopin / Polonaises
4.Rubinstein Collection, Vol. 35 – Rachmaninoff Chicago Symphony Orchestra, Fritz Reiner, Conductor
5.Rubinstein Collection, Vol. 31 – Franz Liszt, Anton Rubinstein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