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편
나는 왕 (王) 이로소이다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 (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 하는 그 소리였지마는,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님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님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날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는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발가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 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 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 버렸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우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 열나흗날 밤, 맨재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 (命)이나 긴가 짜른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러웁게 놀리더이다. 모가지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무꾼의 산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넛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두꾼*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면은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쫓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 (烽火) 둑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련 (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홍사용, ‘백조’ 3호, 1923.9.)
- 시왕전 : 저승에 있다는 10여 명의 왕을 모신 절간의 법당
- 상두꾼 : 상여를 메는 사람
- 감중련 : 팔괘의 하나인 감괘의 상형. 방위는 정북. ‘물’을 상징. 여기서는 ‘태연히 함’의 뜻.
홍사용의 초기 시세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1923년 9월호 『백조 (白潮)』에 「그것은 모다 ᄭᅮᆷ이엇지마는」 등과 함께 발표되었다. 전체 9연 45행으로 되어 있으며, 산문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 내용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왕’은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이며,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시왕전 (十王殿)’에서도 쫓겨난 ‘눈물의 왕’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은 비록 농군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동심의 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지존 (至尊)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전적 서술로 운행되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눈물의 왕’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날 때 울부짖는 ‘으아’ 하는 소리로부터 차츰 인생에 대한 허무를 의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때 ‘어머니를 따라서 흘리는 눈물’은 인생의 죽음이나 허무를 의식한 눈물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고 철없이 흘리는 눈물이다.
‘눈물의 왕’은 열한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우는 ‘눈물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 나무꾼의 산타령을 따라가다가 그 앞을 지나는 상두꾼의 구슬픈 노랫소리와, 할머니의 산소를 찾던 날 어머니께서 흰옷을 입히시던 일을 통해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비극의식은 점차로 심화되어간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내리신 울음의 금지령 때문에 ‘눈물의 왕’은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이 이 시의 간추린 내용이다.
- 의의와 평가
‘눈물의 왕’인 화자 (話者)가 비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내면으로 향한 죽음이나 허무의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그 시대 우리 민족이 처하였던 암담한 현실과 실국 (失國)의 한이 깔려 있다.
3·1운동 당시 홍사용은 학생운동의 선두에 섰다가 잡힌 적이 있었다. 그것으로 인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봉화 (烽火)○’을 거닐며 ‘○기인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바위 미테 돌부처’도 모른 체 ‘감중련’ 하고만 있는 버려진 이 땅에 많은 ‘왕의 눈물’을 싣고 간 뜬구름을 ‘장군바위’에서 바라다보는 시인의 내면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정한 (民族的 情恨)과 허무의식을 기조로 한 비애와 서정은 이 시의 특색일 뿐만 아니라 백조파 동인들의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경향을 대표하기도 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