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성녀 잔 다르크 : Joan Of Arc
감독) 빅터 플레밍 / 주연) 잉그리드 버그만 / 1948년
성녀 잔 다르크 (Joan Of Arc)는 미국에서 제작된 빅터 플레밍 감독의 1948년 드라마, 전쟁 영화이다.
잉그리드 버그만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월터 와그너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맥스웰 앤더슨의 성공적인 브로드웨이 연극 Joan of Lorraine에 기반을 두며, 이 영화는 해당 연극에 기반을 둔 유일한 영화이기도 하다.
○ 제작 / 출연
– 제작진
감독: 빅터 플레밍
각본: 맥스웰 앤더슨, 앤드류 솔트
제작: 월터 와그너
출연: 잉그리드 버그만
촬영: 조셉 발렌틴
편집: 프랭크 설리반
음악: 휴고 프리드호퍼, 에밀 뉴먼
원작: 맥스웰 앤더슨
미술: 리처드 데이
국가: 미국
– 출연진
잉그리드 버그만
프란시스 L. 설리번
J. 캐롤 나이쉬
워드 본드
쉐퍼드 스트러드윅
진 로크하트
존 에머리
리프 에릭슨
세실 켈러웨이
호세 페레
○ 영화 이모저모
농부의 딸 잔 다르크에 관한 사료는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중세에는 평민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녀에 관한 영웅담이나 시, 연대기 등은 많다.
가장 객관적인 사료는 두 차례의 재판과정을 기록한 법정기록으로 원본이 전한다. 오를레앙 승전(1429) 이후부터 그녀에 관한 기록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때부터 이미 그녀의 유년기, 예지능력, 사명, 기적에 관한 전설들이 난무해 신화화 시작. 실존인물로서의 잔 다르크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관심은 19세기 이후. 중세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잔 다르크의 표상체계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이 더해져 다분히 문학적이며 신화적인 성격을 가진다.
- 잔 다르크와 영화콘텐츠
영화 포스터는 제목과 함께 관객에게 다가가는 최초의 시각 이미지이자 영화미학을 정지된 화면으로 구성하는 최초의 영상이다. 이 포스터들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잔 다르크의 이미지는 전사의 모습 (갑옷, 검, 깃발)이다.
칼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 (1928)은 태어난 지 30년밖에 되지 않는 영화가 문학 이상으로 감독의 가치관, 예술관 등 감독 자신을 송두리째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최고의 작가주의 영화이다. “삶에 대한 영혼의 승리에 바치는 찬가”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고백대로 이 영화는 잔 다르크라는 실존인물을 둘러싼 비본질적인 것들 (신의 계시, 전쟁, 남장여인 처녀 등)을 모두 제거하고, 화형당하기 직전 마지막 하룻동안의 잔에게 초점을 맞춘다. 당시 거리극 배우였던 르네 팔코네티가 드레이어가 보여주려고 한 잔의 고통받는 영혼을 완벽하게 구현한다.
플레밍 감독의 잔 다르크(1948, 잉그리드 버그만)는 우아한 여전사이며, 리베트의 2부작 『처녀 잔』과 『전투』와 뤽베송의 『잔 다르크』(1999)에서는 훨씬 더 중성적이다. 특히 밀라 요보비치는 짧은 머리, 부릅뜬 눈, 강 인한 남자의 몸을 연상시키는 구릿빛 갑옷으로 남성 전사의 모습을 연상시키는데,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잔의 이미지는 감독과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 잔 다르크와 기타 문화콘텐츠
문화콘텐츠 원형 발굴과 활용에 있어 프랑스의 경쟁력은 문화공간과 건축 분야에서 돋보인다. 실존인물일 경우, 이 인물에 대한 생생한 증거는 도서관의 고문서가 아니라 그 인물의 생가, 고향마을 등 그와 관련된 문화공간이 존재한다. 잔 다르크 관련 공간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한 것은 대혁명 이후 국가가 문화재관리에 총력을 기울이면서부터, 현대에는 앙드레 말로의 덕택이었다. 잔 다르크와 관련된 도시는 18곳이나 되며 성당, 박물관, 조각상, 잠시 묵었던 집, 화형장 등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잔 다르크 공간문화콘텐츠가 체계적으로 구축되어 있다.
동레미 고향마을 : 잔 다르크 생가가 연중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는데 입구에 무릎꿇고 기도하는 어린 잔, 내부에는 잔 다르크가 출생한 방이 중세풍으로 보존되어있다. 생가 옆에는 잔의 일대기를 모형, 사진, 영상으로 복원해놓은 잔 다르크 센터가 있다. 잔이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는 생 레미 교회, 잔이 신의 계시를 받은 것 으로 알려진 장소에 전 다르크 성당이 세워져 있다. 동레미 마을은 이처럼 잔의 스토리텔링을 기존의 건축 공간에 부여하거나 새로운 공간건축을 통해 구현함으로써 관광콘텐츠를 개발하였다.
오를레앙 市 : 1429년 4월 24일에서 5월 9일까지 잔다르크가 머물렀던 집이 2차대전 중에 소실되었다가 앙드레 말로의 발의로 복원되어 잔 다르크 시립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잔다르크 센터 (1974년 건립)에는 수 만 점의 문서자료와 수천 건의 사진자료, 55종의 영화 자료와 다큐자료가 소장되어 있는 잔 다르크 연구센터이다. 생트 크루아 성당은 잔이 승전한 뒤 기도를 올린 곳으로 알려졌으며 잔 다르크의 일대기를 형상화한 20점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1926년에는 잔 다르크의 시성을 기념하여 잔 다르크 성당 건립하였다.
루앙 : 잔이 감금되었던 필립 오귀스트 성은 탑 하나를 남기고 모두 소실되어 현재는 잔 다르크의 탑으로 불리고 있다. 잔이 화형당한 비유 마르셰 광장에는 잔다르크 박물관이 있는데, 지하에는 1431년 광장 모습과 화형대가 복원되어 있고 2층은 잔다르크 일대기를 담은 밀랍 박물관이 있다. 잔 다르크의 유골이 뿌려진 곳으로 알려진 루앙의 센 강에는 잔 다르크 다리가 있다.
그 외에도 잔 다르크의 발길이 닿았던 여러 마을에 이 인물에 대한 다양한 콘텐츠가 구축되어 있다. 잔 다르크와 연관된 공간/건축 콘텐츠에서 차용되는 이미지는 신앙심 깊은 성녀의 이미지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사보다는 기도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공간/건축 콘텐츠는 사료에 대한 충실한 연구, 그 연구에 토대를 둔 허황하지 않은 신빙성있는 스토리텔링의 개발과 그것을 형상화한 그림, 조각, 스테인드글라스의 예술품을 창조하는 종합적 노력에 의해 성공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 ‘성녀 잔 다르크’ 촬영 이후의 잉그리드 버그먼
잉그리드 버그먼은 ‘성녀 잔 다르크’ 촬영기 ‘세기의 불륜’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나는 성녀에서 창녀가 되었다가 다시 성녀로 돌아왔다. 단 한 번의 인생에서 말이다.”
스웨덴 출신인 잉그리드 버그만은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제작자 데이빗 셀즈닉에게 발탁된다. 셀즈닉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로 유명하다. 주옥 같은 영화들이 그의 이름 아래서 제작됐다. 그렇게 잉그리드 버그만은 <카사블랑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녀에게 첫 오스카 트로피를 안겨준 <가스등>으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가 된다. 이후 그녀는 그 유명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스펠바운드>, <오명> 등에 출연했다. <오명>에서 그녀는 캐리 그랜트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 히치콕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감독이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1940년대 중반 극장주들이 흥행성을 기준으로 투표로 뽑은 배우 순위 10위 안에 들 만큼 그의 지위는 확고부동했다. 탄탄대로를 걷던 화려한 할리우드의 스포트라이트를 걷어찼다. 1947년 뉴욕의 어느 작은 극장에서 본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이 영화들에 깊이 감동받은 잉그리드 버그만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이탈리아의 거장 로셀리니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로셀리니씨, 당신의 영화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을 봤습니다.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만약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그녀는 영어는 아주 잘하고, 독어는 아직 잊지 않았고, 프랑스어는 썩 잘하지는 않고, 이탈리아어는 오직 ‘당신을 사랑해’만 알고 있는 배우인데요, 저는 당신과 함께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갈 준비가 돼 있습니다. 잉그리드 버그만.”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은 네오리얼리즘의 기수로 세계적인 작가 감독이다. 아카데미 보다 칸영화제에 가까운 감독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상업영화와는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이다. 편지를 받은 로셀리니의 맨 처음 반응은 “버그만이 누구냐?”였다. 곧 버그만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바로 답장을 썼다. ‘이탈리아 말은 오직 ‘당신을 사랑해’(Ti Amo)라는 문장이 포함된 편지의 뉘앙스를 그는 모를 리가 없다. 왜냐면 그는 ‘이탈리아 남자’이니.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기쁘게도 나의 생일날. 당신의 편지는 가장 멋진 생일선물이었습니다. 난 당신과 함께 영화를 찍을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힘닿는 한 모든 걸 다 하겠습니다. 유럽으로 오겠습니까?
문제는 잉그리드 버그만은 스웨덴 치과의사와 22살에 결혼한 유부녀였다. 딸도 있었다. 로셀리니 감독도 유부남이다. 할리우드는 발칵 뒤집어졌다. 자신들이 키운 스타를 이탈리아 그것도 예술영화 감독에게 뺏겼이니…. 히치콕 감독도 큰 배신감을 느꼈다. 어쩌면 로셀리니보다 자신이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버그만을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일종의 삼각관계라고 볼 수도 있을까…
이탈리아에서 버그만은 로셀리니 감독과 결국 결혼했다. 아들 1명과 쌍둥이 딸을 낳았다. 쌍둥이 가운데 이후 배우로 유명해진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있다. 두 사람은 이탈리아에서 <스트롬볼리>, <유로파>, <이탈리아 여행> 등 3편의 영화를 촬영했다. 물론 버그만이 주연이다. 미국에서는 두 사람의 간통을 좋게 보지 않아서 이 영화들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평단의 평가는 달랐다. 이 3편의 영화는 현대영화의 포문을 여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불륜의 끝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버그만과 로셀리니는 파경에 이르렀다. 로셀리니와 헤어진 버그만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복귀작은 <아나스타샤>다.
- 헐리웃으로 가다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과 할리우드를 내동댕이친 댓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남들은 불륜이라고 했지만 자신은 두번 다시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을 유일한 사랑이라 믿었기에 그 고통은 극에 달했다.
그녀가 로베르토 롯셀레니 (Roberto Rossellini, 1906~1977)를 만난 것은 1949년 겨울, <염소자리, 1949년>를 끝내고 막 촬영에 돌입한 <스트롬볼리, 1950년>에서였다. 롯셀리니의 진지하면서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그녀는 빠져들었고 자신이 유부녀라는 현실을 망각했다.
1946년 구스타프 몰란더(Gustaf Molander, 1888~1973)의 <인터메쪼>로 서방세계에 알려진 후 그녀는 스크린의 여왕이 되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헐리웃의 거물 제작자, 셀즈닉의 초대에 응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1941년>, <카사블랑카, 1942년>, <무기여 잘있거라, 1943년>와 자신에게 첫 오스카를 안겨준 <가스등, 1944년>,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1899~1980)을 만나 <스펠바운드, 1945년>와 <오명, 1946년>을 함께 했고 빅터 플레밍(Victor Fleming, 1889~1949)과는 <잔다르크, 1948년>에서 작업을 하는 등, 40년대를 빛는 황금같은 작품들에서 히로인을 연기하며 헐리웃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여배우로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 로베르토 롯셀리니와의 불륜, 헐리웃에서 매장
하지만 언제나 ‘자신은 여자다’ 라며 입버릇처럼 뱉곤 했던 그녀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은 세인들의 지탄을 받음에도 끝내 물러 설줄을 몰랐다.
결국 그녀는 불륜의 댓가로 헐리웃에서 거의 쫓겨나듯 도망쳐 롯셀리니와 함께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지를 돌며 겨우 자신의 연기 경력을 이어갔다.
그 기간동안 그녀는 남편이 된 롯셀리니와 <유로파 51, 1952년>, <이탈리아 여행, 1953년>, <불안, 1954년>, 그리고 <잔다르크의 화형, 1954년>을 함께 작업하면서 흐트러진 마음을 달래야했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매달렸던, 영원 할 것만 같았던 롯셀리니와의 사랑도 1956년 아나톨 리트박 (Anatole Litvak, 1902~1974)의 <아나스타샤>를 찍고 있을쯤 거의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7년만에 끝이났고 그와의 사랑이 끝나고서야 헐리웃에 다시 돌아가는 아이러니같은 삶이 이어졌다.
1957년 그녀는 자신의 두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고 주마등처럼 지나간 회환의 시간들을 떠올리듯 한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녀는 그제서야 불륜녀라는, 주홍글씨같는 오명으로부터 벗어났다.
- 복권, 그리고 오스카상 3번의 수상
하지만 이미 전성기를 지나버린 그녀의 연기인생은 화려했던 40년대의 영광을 결코 재현해내지 못했다.
자신에게 두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던 아나톨 리트박 감독의 <굿바이 어게인, 1961년>, 안소니 퀸 (Anthony Quinn, 1915 ~ 2001)과 공연한 <방문객, 1964년>, 알랭 들롱 (Alain Delon, 76세)과 공연한 <노란색 롤스로이스, 1964년>는 단지 그녀에 대한 추억이고 향수일뿐이었다.
그나마 그녀의 존재감을 느끼게 했던 작품은 월터 매튜, 골디 혼과 공연한 <선인장 꽃, Cactus Flower, 1969년>이나 생애 세번째 오스카상이자 첫 오스카 조연여우상을 받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1974년>정도였다.
그리고 1978년 잉마르 베르히만 (Ingmar Bergman, 1918 ~ 2007)의 <가을 소나타>를 끝으로 스크린에서 물러난 그녀는 수년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유방암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1982년, 자신이 태어난 생일날, 영국의 첼시에서 67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여자로서는 큰 신장을 자랑했던 그녀는 자신보다 작은 상대역 남자배우들을 위해 기꺼이 레일 위에 올라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레타 가르보 (Greta Garbo, 1905 ~ 1990)와 더불어 스웨덴이 배출한 최고의 여배우로 한시대를 풍미했다.
롯셀리니와의 사이에서 배우이자 ‘랑콤의 뮤즈’ 인 이사벨라 롯셀리니 (Isabella Rossellini, 60세) 등 모두 세차례 결혼해서 네 자녀를 두었다.
게리 쿠퍼 (Gary Cooper, 1901~1961)와 공연하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 중, 모두 7편의 걸작들을 유산으로 남겨놓았다.
○ 잔 다르크 (Jeanne d’Arc, 1412 ~ 1431)
1412년 1월 6일 동레미 (Domrémy, 현재 로렌지방) 출생하였다.
이 당시는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시대로 북쪽과 남서쪽 대부분을 영국에 내어준 상태였고, 왕위계승권마저 영국에 빼앗긴 상황이었다.
잔 다르크는 13세에 성녀 카트린, 마르그리트, 미카엘 대천사의 “적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하고 왕세자를 왕위로 인도하라”는 계시를 받고 16세에 남장을 하고 고향을 떠나 왕세자 샤를르가 머물고 있는 쉬농성으로 갔다.
쉬농성에서 신하들 무리에 서 있던 왕세자를 알아맞히고 처녀성을 검증받은 후 신의 계시를 왕세자에게 전달하였다.
백합 문양이 새겨진 흰색 갑옷과 투구, 군대를 받고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던 오를레앙을 1429년 5월 7 ~ 8일 해방시켰다.
이후 오를레앙의 처녀 (La Pucelle d’Orléans)라고 불리게 된 잔다르크는 영국 지배 하에 있던 렝스까지 왕세자를 호위하여, 대성당에서 샤를르 7세 (King Charles VII) 대관식을 성사시켰다.
이후 영국과의 전면전을 피하려고 하는 샤를르 7세를 떠나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전투 계속하다 콩피에뉴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협력한 부르고뉴파에게 체포되어 (1430년 5월 23일) 루앙의 필립 오귀스트 성에 감금되었다.
재판에서 잔 다르크는 남장한 죄, 부모의 허락 없이 가출한 죄, 신의 계시를 교회의 허락 없이 실행한 죄 (이단)로 루앙의 광장에서 산 채로 화형 (1431년 5월 30일) 되었다.
25년 뒤, 백년전쟁을 끝내고 왕권을 강화한 샤를르 7세는 잔 다르크의 복권 재판을 통해 유죄판결 파기, 잔 다르크와 그녀의 가족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1920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성녀로 추앙되고, 1922년에는 프랑스의 수호 성녀가 되었다.
- 잔 다르크에 대한 말들
잔은 인류의 평범한 종족들 중에서 너무나 뛰어난 존재여서 천 년 동안 그녀와 필적할 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인간의 타고난 선함과 용맹함을 예사롭지 않은 완벽함으로 구현했다. 정복할 수 없는 용기와 무한한 동정심, 단순함의 미덕, 정의의 지혜가 그녀 안에서 빛났다. ― 윈스턴 처칠
그녀는 인류가 낳은 사람 중 단연코 가장 비범한 사람이다. ― 마크 트웨인
하느님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가 성인을 불태웠소. ― 레이시 볼드윈 스미스의 “바보들, 순교자들, 배신자들” (1997년)에 인용된 처형 이후 익명의 영국 군인.
잔 다르크는 아마도 세상에 살았던 이들 중 가장 놀라운 사람일 것이다.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도 이상해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법정에 있던 사람들, 그리고 그녀를 가장 적대시했던 적들로부터, 그녀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에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도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 앤드류 랑
때때로 역사의 결과는 군대의 힘으로 결정되기도 하고 우연한 사건으로 결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15세기 프랑스의 역사는 어린 소녀의 의지로 결정되었다. 이 소녀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전 군을 통솔한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