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184년 6월 11일, 트로이아 전쟁 (Trojan War)에서 트로이아가 그리스의 오디세우스에게 함락
트로이아 전쟁 (Trojan War, 그: Τρωικός Πόλεμος, BC 1194? ~ 1184)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전쟁이다.
파리스가 그리스의 공주 헬레네를 납치해 시작되었다.

– 트로이아 전쟁 (Trojan War)
.날짜: 기원전 12세기 – 전통적 비정: 기원전 1194년~1184년 / 현대의 비정: 기원전 1260년~1180년
.원인: 트로이 제2왕자의 스파르타 왕비 납치, 에게 해의 영유권 분쟁
.장소: 트로이아
.결과: 아카이아의 승리
트로이아의 성벽은 강해서 그리스 병사들이 뚫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10년 동안 트로이아는 성공적으로 방어를 했으나, 지진에 의해 성 내부는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고, 그리스 연합군은 그 틈을 타서 공격해 트로이아 왕을 죽이고 도시를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헬레네는 다시 그리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트로이아가 정복될 무렵 망명한 트로이아인들도 적지 않았는데 아이네이아스가 대표적인 예였다.
이 이야기는 발굴 이전까지 신화로만 여겨졌으나, 1871년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아의 발굴에 성공하면서 실제 있었던 전쟁임이 밝혀졌다.

○ 호메로스의 기록
헬라스인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서 트로이 전쟁의 배경을 신화를 통해 기록했다.
모든 것은 올림포스의 세 여신인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누가 황금사과를 가질 것인가로 다툰 것에서 시작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에리스는 불화와 다툼을 관장하는 신이기 때문에 결혼식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입장을 거절당했고, 격분한 에리스는 황금사과를 선물로 보낸다.
불화의 신이 만든 작품답게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는 서로 황금사과를 가지려고 다투게 된다.
치열한 접전끝에, 셋은 승부를 내려고 인간 중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인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심판을 부탁한다.
파리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헤라는 최고의 부와 권력을, 아테나는 위대한 지혜와 모든 경쟁의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줄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트로이가 망조가 들었는지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조건을 받아들여 승자로 선언한다.
그래서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파리스에게 주지만, 그게 하필이면 유부녀인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부인 헬레네였다.
아내를 뺏겨 격분한 메넬라오스 왕은 자기 형인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과 함께 수많은 영웅들,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트로이로 쳐들어가게 된다.

○ 신화와 트로이아 목마
신화에서는 트로이아의 멸망이 목마 때문이라 되어 있다. 10년째 트로이아와 지지부지 싸우던 그리스측이 묘안을 내어 목마를 두고 철수하는 척 하였다.
트로이아측은 이 목마를 승리의 전리품이라고 생각하여 성 안에 들였으나, 그날 밤 목마 안에서 오디세우스를 선두로 그리스 특공대가 나왔고, 그리스측의 군사들은 밤에 다시 성밖에 와서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디세우스를 선두로 하는 특공대는 성문을 열고 그리스측의 본군을 들여보냈다.
그리스의 본군은 트로이아 왕을 죽이고 도시를 불태워버렸다.

○ 해석
전쟁사학자인 정토웅 육군사관학교 교수는 트로이아 전쟁을 그리스와 트로이아간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분쟁으로 해석하였다.
지중해 무역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그리스와 트로이아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고, 이러한 역사를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자신의 신화적인 세계관으로 설명한 것이다.
○ 영향
해당 전쟁에서 너무 많은 그리스/트로이의 영웅들이 죽고, 이로 인해 올림포스 신족의 피를 이어받은 영웅의 종족들은 거의 전멸한다. 이 때문에 사실상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절정” 부분에 해당하며, 인간의 다섯 시대 중 영웅 시대가 끝나고 온건히 인간의 시대, “철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그리스 작가들의 영원한 원천이 되었는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가장 대표적인 트로이 전쟁을 다룬 서사시다. 의외로 이 외에 트로이 전쟁에 관한 작품은 많지 않은 편이다. 되려 그 전후의 사건이 메인이 되는 일이 잦다. 스케일이 지나치게 큰 것이 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고대 이후 중세에는 트로이 전쟁사를 다룬 책도 여러 권 나왔다. 물론 거의 역사서 가깝게 지어졌지만. 또 중세에는 아킬레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영웅에 대한 이야기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도 특징이다.
특이한 건 단테의 신곡에서 트로이 측의 영웅들은 파리스 외 다들 림보에 있는 데 비해, 그리스 측 영웅들은 대부분 지옥에 떨어졌다. 이건 단테가 이탈리아인이라 로마 쪽을 더 옹호한 것도 있다. 거기다가 헥토르는 중세에는 ‘최초의 기사’라는 호칭을 얻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롤랑의 검 듀란달이 헥토르의 검이 이어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이다.

○ 역사상의 트로이 전쟁
많은 이들이 트로이를 호메로스의 서사시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도시로 여겼지만 호메로스에 감명을 받고 트로이를 찾아내겠다고 결심한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트로이가 1870년에 유적이 발굴되었다.
슐리만은 자신이 발굴한 제2층의 트로이를 트로이 전쟁 시대의 트로이로 생각했으며 이곳에서 발견한 황금유물들을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 부르며 빼돌리기까지 했지만, 후대 고고학자들의 발굴 조사 결과 슐리만의 착각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신화로만 생각하던 트로이 전쟁을 역사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로서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처음에 생각했던 제2층이 트로이의 유물은 아니었으나 결국 그 장소에 트로이 전쟁이 있었던 것은 확인되었다.
트로이 전쟁이 과연 실제의 전쟁이었는지 역사학자들은 의구심을 품었지만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유적에서 발견된 대량의 외교문서를 통해서 트로이 전쟁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히타이트 제국의 외교문서에 의하면 윌루사에 미케네인들이 쳐들어 왔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는데 학자들 중에는 히타이트 제국의 세력권인 윌루사가 곧 일리오스=트로이로 비정되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미케네인들이 쳐들어와 약탈하고 불태운 것이 트로이 전쟁의 실체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트로이 전쟁은 기원전 1250년 또는 기원전 1180년에 일어났던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목적으로 일어난 전쟁이라는 분석도 있다. 트로이는 입지적으로 험난한 다르다넬스 해협을 피해 소아시아로 육로수송이 가능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런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아카이아인들이 쳐들어와 트로이를 정복한 것이 트로이 전쟁의 실체였다는 주장도 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