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202년 10월 19일,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짓는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자마 전투 (Battle of Zama)에서 로마의 스키피오 승리
자마 전투 (Battle of Zama)는 기원전 202년 10월 19일 카르타고 남서 지방에 있는 자마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짓는 결정적인 전투로 로마 공화정 지휘관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Laelius Scipio Africanus) 였고, 카르타고 측 지휘관은 한니발 (Hannibal Gaius) 이었다.
전투는 로마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고 이어 종전협상에서 카르타고는 항복하였다.
○ 배경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의 놀라운 전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동맹국들의 봉기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급기야 지원군으로 오던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도 메타우로 전투에서 죽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또 다른 동생 마고네도 부상을 입고 제노바에서 꼼짝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승리에 이어 북아프리카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나 신중을 기하는 원로원의 반대로 카르타고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시니사와 함께 서부 누미디아의 시팍스를 물리치고 기병을 획득하자 스키피오는 자신감을 얻고 공세에 나섰다.

그사이 양쪽은 강화를 위해 협상이 오고 가고 있었다. 로마는 아프리카 이외의 모든 영토의 포기, 5천 탈란트의 전쟁 배상금, 그리고 카르타고 해군의 해체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한니발과 마고네는 카르타고 본국에서 송환명령이 떨어져 역전의 용사 1만2천 명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마고네는 돌아오는 항해중에 사망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갑자기 강경론이 우세해지고 협상을 결렬시켰다.
이제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각각 국가의 운명을 걸고 북아프리카에서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전투 전날 두 사람은 단독으로 대면했다고 한다.
이 단독 회담에서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일을 상기시키면서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니 위험한 도박을 피하고 여기서 그만두자고 말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로마의 강화조건을 거듭 주장하며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고 말하여 결전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대들의 과거의 전투를 가슴에 새기고, 그대들 자신과 그대들의 조국에 부끄러움 없이 용감히 싸우라. 그대들의 눈앞에 이것을 그려라. 만약 그대들이 적을 무찌른다면 그대들은 의심의 여지없는 아프리카의 지배자가 될 뿐만 아니라, 그대들 자신과 조국을 세계 위에 군림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전투의 결과가 그렇지 않다면, 조국을 위해 용감히 쓰러져간 사람들은 영원히 영광 속에 묻히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들의 남은 인생을 비참함과 치욕 속에 보낼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그대들이 안전한 곳은 없다. 그리고 만약 카르타고군 손에 떨어진다면 그대들에게 어떠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두들 너무나 잘 알 것이다. 그대들 중에 누구도 그런 운명을 맞지 않기를 나는 기도한다. 지금 운명의 여신은 우리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의 대가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단지 생에 대한 애착으로 이 엄청난 선물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겁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바보에 가까울 것이다. 이제 나가서 적과 싸우라. 우리 앞에는 승리가 아니면 죽음뿐이다. 목숨을 버릴 각오로 전투에 나가는 군대는 항상 승리한다.” – 전투를 앞둔 스키피오의 연설
○ 경과

칸나에 전투 (기원전 216년) 보다 14년 후에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자웅을 겨룬 자마 전투 (기원전 202년)는 ‘칸나에 전투의 재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칸나에의 승리자’였던 한니발이 자마에서는 처참한 ‘패배자’였다는 사실만 다를 뿐이다.
14년의 시간은 전투 현장의 보병과 기병의 전력 구성 비율을 완전히 바꾸어놓아 버렸다.
칸나에 전투에서는 로마에 대해 압도적인 기병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자마에서의 한니발은 오히려 로마보다 훨씬 취약한 기병으로 전투에 나서야 했다.
반면 로마의 스키피오는 ‘한니발 학습 효과’에 따라 기병 전력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켰다. 자마 전투에 나선 양 진영의 보병과 기병의 구성비율을 보면 한니발이 총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은 보병 4만 6천 명, 기병 4천에 코끼리 80마리였고, 스키피오가 총지휘하는 로마군은 보병 3만 4천 명에 기병 6천 명이었다.
스키피오군은 보병 전력은 열세였지만 기병 전력에서는 한니발군보다 우위에 있었다.
기병 전력이 취약했던 한니발은 명장답게 혁신적인 전술을 세웠는데, 그것은 중앙부대를 파격적인 방법으로 배치하는 것이었다.
즉 맨 앞줄에 코끼리를 세우고, 다음 줄에 경무장 보병을 세우고, 그 다음 줄에 중무장 보병을 세우고, 그 다음 줄은 빈 공간으로 남겨둔 다음 다시 중무장 보병대를 세우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미와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한니발 자신과 이탈리아에서 싸웠던 노련한 병사들을 세웠다.
한니발은 전투 초반, 코끼리를 돌진시켜 적의 진영을 흩뜨려 놓은 다음 둘째와 셋째, 넷째 줄의 보병대를 투입시켜 로마군 전력의 핵심인 중무장 보병대를 지치게 한 다음, 맨 마지막 줄에 대기하고 있던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자신의 정예병력으로 승리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한니발은 이 전술이 자신의 장점인 기병 전력이 로마보다 취약한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이라고 판단한 듯싶다.

그러나 한니발의 불행은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이 로마인 중 유일하게 자신의 ‘눈’으로 한니발이 지닌 병법과 용병술의 천재성과 함께 그 치명적 약점까지도 꿰뚫어볼 수 있었던 사람, 바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다는 점이다.
스키피오는 우세한 기병 전력을 두 개로 나누어 측면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전투 대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중앙의 보병 부대들은 작은 단위의 소부대들로 나누어, 단위 소부대들 사이에 공간을 남겨두었다.
그래서 한니발군의 코끼리부대가 돌진해와도 전투 대형은 전혀 깨지지 않도록 했다. 실제 한니발의 코끼리부대는 스키피오의 보병 부대에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그냥 대열을 통과해버렸다.
코끼리부대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양 진영의 보병 부대가 격돌했는데 병력으로는 카르타고군이 우세했지만 전투력은 고대 세계 최강의 조직력을 자랑했던 로마군이 단연 우세했다.
그러나 칸나에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마 전투의 승패를 결정적으로 가른 것은 ‘기병 전력과 기병대의 역할’이었다.
로마군의 기병은 카르타고 군의 기병을 압도해버렸고, 이로써 카르타고군 중앙 보병부대의 양 측면은 완전히 비어버리게 되었다.
스키피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마군 전력의 핵심인 중무장 보병을 동원해 카르타고군을 정면과 양 측면의 세 방향에서 공격했다.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한니발은 스키피오의 용병술과 기병 전력의 열세 앞에서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한니발은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신과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정예병사들을 투입해 전투의 형세를 돌려놓고자 했다.

그러나 스키피오의 전술에 말려 14년 전 로마가 맛보았던 ‘칸나에의 비극’, 즉 자신이 가장 아끼던 부하 병사 1만 5천 명이 로마군에게 무참하게 살육당하는 장면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 전투의 승리는 카르타고의 기병이 약해지도록 계략을 꾸미는 한편으로 자신의 기병 전력이 한니발군보다 우위에 있도록 한 스키피오의 병법과 용병술의 승리였다.
따라서 스키피오는 칸나에 전투에서의 한니발을 모방함으로써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물리쳤다고 말할 수 있다.
○ 결과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의 피해는 전사자, 포로 모두 합해 4만 명이었고, 로마군은 최소 1,500명에서 최대 4,000여 명이었다.
이 전투로 16년을 끌어온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종결을 맞는다.
카르타고 의회는 로마가 제시한 강화조건을 승인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이후로 로마의 징벌적 휴전조항에 의해 카르타고는 다시는 지중해에서 군사강국이 되지 못했다.
약 70년후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지만 그때도 카르타고는 자신의 영토를 간신히 지킬만한 군사력만 가질 뿐이었다.
결국 이 전투의 영향으로 인하여 카르타고는 쇄락과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