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30년 8월 10일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Cleopatra VII Philopator, BC 69 ~ BC 30) 타계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Cleopatra VII Philopator, 그: Κλεοπάτρα Φιλοπάτωρ, 기원전 69년 ~ 기원전 30년 8월 10일)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이다.
–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Cleopatra VII Philopator)
.제호: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Κλεοπάτρα Φιλοπάτωρ, Cleopatra VII Philopator)
.이명: 클레오파트라 테아 네오테라 (Κλεοπάτρα θεα νεωτερα)
.출생: 기원전 69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알렉산드리아
.사망: 기원전 30년 8월 10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가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부모: 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 모) 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 (짐작)
.배우자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테르, 프톨레마이오스 14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자녀: 카이사리온,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마우레타니아 왕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프톨레마이오스 16세 필라델포스
* 이집트 파라오
.재위: 기원전 51년 ~ 30년
.전임: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 / 후임: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리온
.공동재위자: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테르, 프톨레마이오스 14세,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리온
클레오파트라는 고대 그리스어로 κλέος (클레오스, “영광”)와 πᾰτήρ (파테르, “아버지”)가 합해진 ‘아버지의 영광’ (Κλεοπάτρα)을 의미한다.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의 남성형 형태는 클레오파트로스 (Κλεόπᾰτρος)나 파트로클로스 (Πᾰ́τροκλος)가 될 수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와 더불어 그리스 신화에서 멜레아그로스의 아내인 클레오파트라 알키오네의 이름이기도 하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와 클레오파트라 1세 시라 (셀레우코스 왕조의 공주) 간의 결혼을 통해,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도 들어서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채택한 칭호인 테아 필로파토라 (Θεᾱ́ Φιλοπάτωρα)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여신”이라는 의미이다.
고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실질적 마지막 군주이자, 사실상 마지막 파라오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딸. 또한 고대 이집트에서 공식적으로 ‘파라오’로 즉위한 마지막 인물이다. 이 인물을 끝으로 ‘독립 국가 이집트의 군주’로서의 파라오는 완전히 명맥이 끊긴다. 이집트를 지배하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이집트에선 파라오의 칭호를 사용하고 이집트의 파라오식 즉위 행사를 행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였으며, 이마저도 훗날 기독교의 확산에 따라 중단되었다. 또한 로마 제국 이후 이집트를 다스린 군주들은 파라오 칭호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서 남자 통치자들은 전부 프톨레마이오스란 이름을 썼고, 여자 통치자들은 클레오파트라, 베레니케, 아르시노에라는 이름을 돌려썼다. 그러다보니 당대에는 이름 뒤에 붙이는 별칭으로 구분하기도 했는데, 클레오파트라의 별칭 테아 네오테라는 ‘새로운 여신’이라는 뜻이다.
○ 생애 및 활동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Cleopatra VII Philopator, 그: Κλεοπάτρα Φιλοπάτωρ)는 기원전 69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했다.
기원전 51년,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이집트의 당시 전통인 근친 결혼에 따라 18세 나이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미 멸망의 징조가 진행되고 있었다.
멸명의 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타국과의 전쟁에서 이겼지만 정작 내치에 부족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여서 측근들의 부정부패를 막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급사하여 어린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정세는 더욱 복잡해져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외 영토들을 차지하기 시작하는걸 시발점으로 해서 해외 영토들을 서서히 빼앗긴다.
와중에 로마의 개입과 동맹으로 힘을 얻나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 시절 기원전 170년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에게 다시 패배한 후 로마 덕에 목숨을 보전하는데 성공했지만 동생 에우에르게테스가 왕위를 주장하며 서로 다투는 사이에 또 다시 로마의 개입을 초래했다.
그 결과 이집트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고, 외세가 자꾸 개입하다보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왕위를 지켰으나 그도 다른 전투에서 전사한 후 사실상 로마의 보호국 수준으로 전락할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피지배인인 기존 이집트인들이 무려 20여년에 걸친 장기적인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고, 피지배층과 이렇게 지나치게 괴리된 상태에서 지배층 내에서도 암투와 내분이 난무했고 부정부패와 착취도 많았다.
클레오파트라가 태어나기 수십 년 전부터 이러한 상황이 이어져 오던때가 클레오파트라의 시대였다.
거기에 더해 그녀의 바로 전대에 왕위에 앉았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역시 선대 왕들이 망쳐먹은 내치를 수습하기는 커녕 악화시켜놓은 암군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자기 시대에서 점점 거세지는 로마의 압력이나 내정의 혼란을 신경쓰지 않고, 태평하게 지냈기 때문에 ‘피리부는 사람’이라는 뜻의 아울레테스라고 불리며 야유받았다.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가 정통인 후계자가 아니며 권력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로마의 세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은 고려해봐야 한다.
그런데도 로마에 뇌물을 주거나 많은 공납을 바치는 행위 등은 이집트 사람들의 세금부담을 가증시켰다.
또한 남동생이 통치하던 키프로스의 섬을 로마에 빼앗기는 것을 방치했는데 결국 시민들의 쌓였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왕은 이 와중에 로마로 도주하였고, 베레니케 4세가 잠시 즉위해서 비어버린 본국의 왕좌를 채웠으나 그는 폼페이우스가 돌아와서 베레니케 4세를 처형이란 방식으로 제거하고 자기가 다시 왕좌를 찾았으나 크게 한 건 없었다.
그리고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과 딸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사망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이 연신 누적된 덕에 나라가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일단 남동생과 함께 왕좌에 올랐으나, 이후 어린 남동생을 배제하고 전권을 차지하려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정치적 움직임은 큰 반발을 샀다.
그 결과 권력 투쟁에서 패하여 지방으로 쫓겨났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전권을 차지했다.
하지만 기원전 47년에 이집트를 방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만남으로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재기의 발판을 얻었다.
마침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로마의 내전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에 피난 왔던 자신의 정적 폼페이우스를 암살한 것이 “비겁한 행동”이라며 분노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였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만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때 카이사르의 나이는 50대 초반, 클레오파트라 7세는 20대 초반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융단을 선물 받았는데 그 융단을 풀어보니 안에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의 눈을 속이기 위해 클레오파트라가 잠입한 것이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시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분쟁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를 지원했다. 이를 알렉산드리아 전쟁이라고 한다.
부왕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죽기 전에 ‘남매의 공동 통치’를 유언으로 남기고, 로마인들에게 유언의 집행을 맡겼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현직 집정관으로서 부왕의 유언대로 공동 통치로 되돌아갈 것을 결정한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를 지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패장이었다고는 하나 로마의 전직 집정관이었고, 전직 집정관 (프로콘술)은 공화정 로마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는 지도층 인사였다.
이런 사람을 살해한 왕을 동맹국 (사실상 속국)의 단독 국왕에 앉혀놓는 것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집행에 앙심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은 펠루시온에 주둔하고 있던 2만 명의 병력과 72척의 갤리선을 활용해 카이사르가 소수 병력만 이끌고 있는 것을 노려 그를 공격했으나, 로마에서의 원군 도착으로 패배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살해당했고, 클레오파트라 7세는 막내 남동생과 재혼하여 그를 명목상의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4세로 세운 뒤 실권을 장악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의 나이가 10세에 불과했기에 권력은 완전히 클레오파트라의 것이었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카이사리온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후 카이사르를 따라 귀빈으로써 로마에 방문하기도 했다.
BC 46년 카이사르의 개선식에 참석한듯 하며 카이사르는 40마리의 코끼리를 대동하고 카피톨리움 언덕을 내려왔다 한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카이사르의 장례식에도 참석했으나 이집트에서 공동 통치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이집트로 급히 돌아와서 자기 아들 카이사리온을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세웠다.
또한 로마 내의 카이사르 파와 반 카이사르 파의 내전에도 관여하여 카이사르 파를 지원하려 했지만 폭풍으로 실패하였다.
기원전 41년에는 킬리키아의 타르소스에서 제2차 삼두정의 선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났으며, 그 역시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에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에 쓰일 자금을 얻기 위해 만남을 요청했으나, 곧바로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진다. 이후, 둘 사이에서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가 태어났다.
옥타비아누스와 관계가 틀어진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7년,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동방을 다시 방문했고, 아예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여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를 낳았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동방 원정을 지원한 공으로 “알렉산드리아의 기증”을 통해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 자녀들에게 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전부 나눠주었는데, 클레오파트라를 왕 중의 여왕으로 선언하고 카이사리온과 함께 이집트를 공동 통치하도록 했으며, 쌍둥이 중 남자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에게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를 주었고 쌍둥이 중 여자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에게 크레타와 키레나이카, 막내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에게는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주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관계는 악화일로가 되었고,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 침공을 선포한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맞섰으나 패배하여 도주한 뒤 알렉산드리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 악티움 해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집정관 임기가 시작되는 날인 기원전 33년 1월 1일 원로원 연설에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노예로서 로마의 자유와 영토 보전을 전복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이두정이 기원전 33년 12월 31일 만료되기 전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로 선언한다.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 편의 인물인 가이우스 소시우스와 그나에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집정관에 오른다.
이들 중 소시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어떠한 공직도 없는 민간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비난조의 연설을 하고, 옥타비아누스를 억압할 수 있는 내용의 법률을 제안한다.
다음 원로회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무장 경비원들과 함께 상원 의사당에 들어가 집정관들을 고발한다.
이러한 행위에 두려움을 느낀 안토니우스파 집정관들과 200명 이상의 원로들은 다음날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에게로 간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2년에 에페수스로 향하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제공할 수 있는 800척의 함정 중 200척을 제공한다.
옥타비아누스의 선전 내용을 의식한 아헤노바르부스는 안토니우스를 설득하여 옥타비아누스 정벌에 클레오파트라를 제외시키려 했다.
그러나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전쟁에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군주로서의 능력도 뛰어나다며 아헤노바르부스의 의견에 반대한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이집트를 방어하려면 그리스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막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하여 이집트로 돌아가라는 옥타비아누스의 요청을 거절한다.
결국 클레오파트라의 이러한 판단으로 인해 아헤노바르부스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등 저명한 로마인들이 안토니우스의 진영에서 이탈한다.
기원전 32년 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아테네로 향하는데, 여기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옥타비아에게 공식적인 이혼 선언서를 보내라고 설득한다.
플란쿠스는 이제 옥타비아누스에게 베스타의 여사제들에게 맡겨진 안토니우스의 유언을 확보해야한다고 간언한다.
신성한 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감수하고서 옥타비아누스는 베스타 신전에서 강제로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확보하는데, 이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한 선전전에서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에서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알렉산드리아 봉헌에서의 선언을 확증하고, 클레오파트라와 나란히 알렉산드리아에 묻히길 원하고, 로마 공화국의 새로운 수도로 알렉산드리아를 삼을 것이라는 내용을 발견해 선전에 활용한다.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는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자신의 영묘를 지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또한 기원전 31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됨으로써 이전에 문제로 제기되었던 옥타비아누스의 법적 지위 역시 해결되었다.
안토니우스의 유언을 공론화함으로써 전쟁 명분을 확보한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안토니우스가 아닌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에 대한 법적 명분은 클레오파트라의 영토 획득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데, 안토니우스의 삼두정치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이제 민간인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옥타비아누스보다 거대했지만, 병력들은 잘 훈련되지 않은데다가 일부는 상선의 선원들을 징발한 것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아드리아해를 건너 타렌툼이나 브룬디시움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봉쇄하고자 했지만, 이집트를 방어가 주목적인 클레오파트라는 이탈리아를 직접 공격하자는 안토니우스의 결정을 무시한다.
기원전 32년 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의 파트라이에 사령부를 세워 겨울을 보낸 뒤 이듬해 봄에 암브라키코스만 남쪽의 악티움으로 사령부를 옮긴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동맹국을 여럿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클레오파트라와 갈등을 겪었던 헤로데는 유다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지원군을 물린다.
나바테아의 말리쿠스 1세 또한 동맹군에서 탈퇴하는데, 이는 이후 전략적인 영향을 미쳤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1년 여름 악티움 주변에서 옥타비아누스와의 교전에서 몇 차례 패배한데 이어 안토니우스의 오랜 동료 델리우스, 갈라티아왕 아민타스, 파플라고니아의 데이오타로스 등이 옥타비아누스의 진영으로 망명한다.
결국 안토니우스의 진영에서 해전을 포기하고 내륙으로 후퇴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지만,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이집트에서 멀리 떨어뜨리는게 목적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해전을 계속 이어간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이끄는 옥타비아누스 해군은 악티움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 대치한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주력함인 안토니아스 호를 타고, 함대의 후방에 있는 암브라키코스만 입구에서 60척의 배를 지휘했는데, 안토니우스의 장교들이 전투에서 그녀를 소외시키기 위해 후방에 배치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안토니우스는 추격이나 후퇴에서 추진력을 얻기 위해 배에 돛을 달라고 명령한 적이 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이 추진력을 이용해 펠로폰네소스반도로 재빨리 철수하곤 했다.
로마의 작가들은 이를 두고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쳤다고 적지만, 클레오파트라 군이 후퇴한 것은 적군의 봉쇄를 깨트리고 함대를 최대한 인양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그녀의 배에 옮겨탔는데, 안토니아스 호는 티리언 퍼플로 염색된 까닭에 쉽게 식별되어 두 사람은 전투를 피해 타이나론으로 후퇴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타이나론에 도착해 클레오파트라의 몸종들이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와 대화를 하라고 하기 전까지 클레오파트라와 대화하지 않았다고 한다.
악티움 전투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없이 9월 3일 아침까지 계속되었고, 많은 수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망명하였다.
– 안토니우스의 죽음과 옥타비아누스의 승리
서기 1세기 초 폼페이에 있는 주세페 2세 가문의 집에서 발견된 벽화로, 다이아뎀을 쓴 클레오파트라가 독약을 마시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아들 카이사리온 역시 다이아뎀을 쓰고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지키고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테네를 점령하는 동안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파라이토니온에 상륙한다.
그 후 안토니우스는 키레네로 가서 증원군을 모집한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가서 그리스에서의 마치 승리를 거둔 것 처럼 거짓말을 한다.
악티움 전투의 결과가 알려지면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때 클레오파트라는 과거 아르메니아에서 사로잡아온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처형하고 그 목을 아트로파테네의 아르타바스데스 1세에게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안토니우스에 의해 임명된 키레네 총독 루키우스 피나리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사절단이 총독부에 도착하기 전에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사절단을 처형하여 옥타비아누스의 곁으로 망명하는데 안토니우스가 얻고자 했던 자신 휘하의 4개 군단을 모두 데리고 갔다.
안토니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자살하려하지만 참모들에 의해 저지당한다.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있는 파로스섬에 인간혐오와 냉소주의 사상의 철학자 티몬의 이름을 따와 티모네이온이라는 오두막을 짓고 거기에 은거한다.
악티움 전투 이후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를 배신해야 한다고 충고했던 헤로데는 옥타비아누스를 만나기 위해 로도스로 갔고 안토니우스에게서 받은 왕위를 내려놓는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헤로데의 말과 충성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유대에서 왕위를 계속 유지하도록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1년 늦여름부터는 안토니우스를 카이사리온에 대한 방해물로 여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클레오파트라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지중해에서 홍해로 선단을 데려간 다음, 인도에서 회복할 시간을 가질 계획이었다. 하지만 말리쿠스 1세가 옥타비아누스 편인 시리아 총독인 퀸투스 디디우스의 조언대로 클레오파트라의 선단을 불태워 나바테아의 영토를 빼앗긴 것에 대한 해묵은 복수를 자행한 까닭에 클레오파트라는 떠나지 못한다.
이제 옥타비아누스의 자비를 구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옥타비아누스 측에서 퍼뜨린 소문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 시기에 클레오파트라는 죄수들과 하인들에게 다양한 독극물을 시험해보았다고 전해진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신전의 입단식을 통해 시민권을 획득하기 전 청년으로서의 의무가 부여되는 에페보스로 등록하는데, 콥토스에서 발견된 비석에 의하면 기원전 31년경에는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연대의 뜻으로 안토니우스는 풀비아에게서 낳은 아들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안틸루스 역시 입단식을 통해 에페보스로 등극시켰다.
이즈음 계속 로도스에 머물고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각각 사절을 통해 편지를 보냈는데, 클레오파트라만 답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집트를 상속하는 것을 허락할 것과, 안토니우스의 생존을 요구하며 상당한 선물을 보냈는데 만일 소원을 들어준다면 향후 더 많은 재화를 보낼 것을 약속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부하인 티르소스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보내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무덤 속에서 보물과 함께 분신자살하겠다며 협박한다.
티르소스는 살고싶다면 안토니우스를 죽이라고 조언하지만,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안토니우스에 의해 곤장을 맞고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 채로 옥타비아누스에게 돌아간다.
지리한 협상 끝에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봄, 이집트를 침공한다. 새로운 동맹인 헤로데로부터 물자를 제공받기 위해 페니키아의 프톨레마이아스에서 잠시 머무른 뒤 곧이어 남쪽으로 이동하여 펠루시온을 빠르게 점령하는데, 동시에 키레네에서 동쪽으로 진군하던 코르넬리우스 갈루스는 파라토니온 근방에서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격파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재빨리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해 도시의 경마장 바깥쪽에서 휴식을 취하지만, 그새 돌아온 안토니우스에 의해 작은 패배를 맛본다.
그러나 8월 1일, 안토니우스의 해군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고 기병대가 그 뒤를 따른다. 클레오파트라는 측근들과 함께 무덤에 숨는데 이 때 안토니우스에게 목숨을 끊었다는 전서를 보낸다.
이에 절망한 안토니우스는 배를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어 53세의 생애를 마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숨이 붙은 채로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무덤으로 가서 클레오파트라에게 자신이 명예롭게 숨을 거두었고, 옥타비아누스의 동료중 가이우스 프로쿨레이우스는 믿을만한 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 프로쿨레이우스가 사다리를 타고 무덤에 잠입하여 클레오파트라를 사로잡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보화와 함께 불타죽을 용기조차 없다고 비아냥댄 것이다.
이렇게 붙잡힌 클레오파트라는 호송되기 전에 안토니우스를 자신과 함께 이집트의 전통 장례법에 따라 안장할 수 있도록 부탁하여 허가받는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들어가 왕궁을 점령하고 클레오파트라의 세 자녀들을 사로잡는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를 만났을 때 “개선식 앞에 서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육성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생존은 보장하지만 이집트 왕국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이들을 사흘 뒤 로마로 이주시킬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고서,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처럼 개선식에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 생각하고서 스스로 목숨을 끊겠노라 다짐한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8월 10일 39세의 나이로 자신의 무덤에서 목숨을 끊었다고 알려져있으나,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인인 에이라스와 샤미온과 동행했으며, 이들도 같이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비록 옥타비아누스는 이 사실에 분개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 옆에 왕의 위엄을 갖춘 채로 매장되었다 한다.
자살의 방법에 대해 주치의 올림포스가 직접 전하는 이야기는 없지만, 이집트 코브라에 물리는 방식으로 자살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플루타르코스는 몸에 독을 주입하기 위해 가시로 몸에 생채기를 냈다고 이야기하는데 비해, 디오 카시우스는 바늘로 독약을 주입했다고 말하고, 스트라보는 일종의 연고를 이야기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지막 순간에 카이사리온을 상이집트로 보내기로 결심했는데, 아마도 쿠시나 누비아, 에티오피아, 혹은 인도로 도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등극한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주리라는 헛소문에 속아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18일째 되는 날인 8월 29일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에 의해 처형당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세상에 시저는 한 명만 존재해야한다는 철학자 아리우스 디디모스의 조언을 이제 실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 멸망하면서 아이깁투스 속주가 설립되고, 헬레니즘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다.
기원전 27년 1월,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로 개명하고 세력을 축적하여 초대 로마 황제로 제국의 시대를 연다.
○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미모 관련
그녀의 최후는 코브라가 자신을 물게 하여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명한데, 이집트 코브라를 과일 바구니에 숨겨 가져왔다 한다.
다만 이는 후대에 붙인 이야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집트 코브라가 2m나 되어 숨기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린다고 해서 즉사하는 것도 아니고, 독사한다고 해도 2시간 뒤에나 사망하기에 말이 되지 않는다고.
그외에 음독 자살이라는 설, 안토니우스와 동반 자살했다는 설, 옥타비아누스가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흔히 엄청난 미인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빼어난 미모와 매혹적인 목소리, 재치와 지성을 갖추어 남자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그녀는 금으로 장식된 이동 닫집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누워 있었는데,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그림속의 비너스와 같았다.” _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중에서
“그녀는 여인의 아름다움이 꽃을 피우고 지성이 힘을 발휘하는 나이에 안토니우스를 향해 갔다.” _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중에서
“그녀는 언제나 관능적인 쾌락을 새롭게 찾아냈고, 그것으로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으며 잠시도 그가 한눈을 팔지 못하게 했다. 함께 주사위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냥을 했다. 안토니우스가 훈련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늘 함께했다.” _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중에서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모든 표면은 변했을 것이다.” _ 블레즈 파스칼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