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480년 9월 22일, 살라미스 해전 (Battle of Salamis, BC 480)에서 테미스토클레스의 그리스 연합함대가 크세르크세스 1세의 페르시아 함대 격파
살라미스 해전 (Battle of Salamis, 고 그: Ναυμαχία τῆς Σαλαμῖνος)는 페르시아 전쟁이 한창인 기원전 480년 9월에 아테나이 인근 사로니코스 만의 섬인 살라미스와 육지 사이의 해협에서 일어난 아케메네스 왕조가 통치하던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해전이다. 이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함대가 승리를 거두면서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정점을 이루었다.

– 살라미스 해전 (Battle of Salamis)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일부
.날짜: 기원전 480년 9월
.장소: 살라미스 해협
.결과: 그리스의 결정적인 승리, 페르시아가 펠로폰네소스 정복에 실패
.교전국: 그리스의 도시국가 / 아케메네스 왕조
– 배경
BC 492년부터 479년까지 4차에 걸쳐 페르시아 전쟁이 단속적으로 지속되었다. 페르시아의 2차 침공을 마라톤 전투에서 격퇴한 아테네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는 다시 대규모 원정을 준비하였으나 전비 조달을 위해 이집트에 중과세를 하는 바람에 기원전 486년 반란이 일어났다. 이를 진압하던 도중에 다리우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Xerxes)가 왕위를 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리스 원정 준비를 시작하여 기원전 480년 제3차 침공을 감행하였다. 헤로도투스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페르시아군은 병력 264명이었지만, 실제는 약 35만명과 함선 1207척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밀티아데스 (Miltiades)가 실각하고, 테미스토텔레스 (Themistocles, B.C. 527?-460?)와 아리스토티데스(Aristotides)가 집정관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티데스는 지상전 위주의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기원전 482년에 추방되어 해전 위주의 항전을 주장하던 테미스토클레스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480년 봄에 200여척의 함선을 건조하였고, 약 4만명의 수병을 양성하였다.

– 제3차 페르시아전쟁의 전개
기원전 480년 봄 페르시아군이 헬레스폰트해협을 건너 침공해 들어왔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Leonidas)가 지휘하는 7000 ~ 8000명의 중갑보병과 경장비병으로 구성된 육군은 테르모필레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아테네의 해군은 스파르타의 유리비아데스 (Euribiades)를 함대 사령관으로 하는 해군은 총 330여척 (이 중 아테네 함대가 180척, 스파르타 함대가 10척)으로 구성되어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맞았다.
크세르크세스는 폭풍으로 페르시아 함대의 도착이 늦어진 데다가 대병력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그리스군이 항복할 것으로 기대하여 4일 동안 군사작전을 벌이지 않고 대기하였다.
그러다가 5일 째 되는 날 공격을 감행하여 레오니다스를 비롯한 스파르타군을 전멸시켰다.
테르모필레전투에서 페르시아군도 2만명이 사망하였다.
한편 페르시아 함대는 마그네시아 반도의 동해안을 돌아 남하하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함선 400척을 상실한 뒤 이틀 뒤에 아프에테에 도착하였다.
그리스측의 함대사령관인 유리비아데스는 페르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였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일째인 8월 30일 페르시아 함대와 그리스 함대간에 아르테미지움 (Artemisium) 해전이 벌어졌지만, 서로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전투 도중 테르모필레 패전 소식이 그리스 함대에 전해지자, 그리스 함대는 유보에아 해협 중 가장 폭이 좁은 에우포리스가 페르시아의 수중으로 넘어가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살라미스로 퇴각하였다.

– 살라미스 해전
페르시아군의 진격을 막기 위하여 소규모 그리스 군대가 테르모필레의 고갯길을 막았으며, 그러는 사이 주로 아테나이 출신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연합 함대가 아르테미시온의 해협 근처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교전을 벌였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그리스의 후위 본대가 궤멸되었고,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도 그리스는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하였다.
그리하여 페르시아는 보이오티아와 아티케를 정복할 수 있었다. 그리스 함대는 살라미스 섬 근처로 물러나 집결하는 한편 연합군은 코린토스 지협을 지키기 위해 준비하였다.
수적으로 훨씬 열세였던 그리스 연합군은 교전을 포기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테나이의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은 지휘관인 에우리비아데스를 찾아가 페르시아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해상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다시 페르시아 함대와 싸우기로 설득하였다.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 역시 결정적인 전투를 원하고 있었다.
– 살라미스 해전 과정
테미스토클레스의 속임수로 페르시아 함대는 살라미스 해협에 진입하여 두 입구를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해협이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군함들이 이동하려 하면서 흩어져버려 오히려 이들의 수적 우세는 장애가 되어버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 함대는 전열을 이루어 페르시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최소한 200여척이 넘는 페르시아 함선이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다.
그리하여 크세르크세스는 군대 대부분을 이끌고 아시아로 물러나고, 마르도니오스만 남겨 그리스 정복을 완수하게끔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그리스에 남은 페르시아군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격퇴당하고, 미칼레 전투에서 페르시아 해군이 무너졌다. 그 뒤 페르시아는 더이상 그리스 본토를 정복할 시도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전환점이었으며, 이때부터 그리스의 폴리스 연합은 반격에 나섰다.
여러 역사가들은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가 고대 그리스를 발전케하였으며, 그 자체로 ‘서구 문명’을 확대하여 살리미스 해전을 인류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투로 주장하게 되었다.

– 결과 및 영향
그리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줄 몰랐지만, 크세르크세스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전투를 지속할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마르도니오스에게 육군을 맡기고 자신은 페르시아 함대와 함께 철수했다. 그리스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의 후퇴를 알고 안드로스까지 추격했지만, 여기에 군략 회의를 열고, 향후의 대응에 대해 협의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즉시 크세르크세스를 쫓아 헬레스폰투스로 출동할 것을 주장했지만, 에우리비아데스는 크세르크세스의 귀로를 억제하면 오히려 페르시아 측이 필사적으로 반격에 나설 가능성을 시사하고 이를 충고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추격을 서두르는 아테네 함대를 제지하고, 크세르크세스에게 전령을 보내, 부하에게 자신이 페르시아 함대의 추격을 막았다고 알리게 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해군의 승리하자 페르시아 원정군의 진격은 중단되었고, 페르시아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페르시아군이 북쪽으로 후퇴했다고는 해도 그 세력은 건재하였고, 이듬해에 다시 아테네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의 전의는 꺾였고, 지리적 잇점을 가지지 못한 페르시아 원정군은 점차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살라미스 해전은 페르시아 전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의 견인차가 된 아테네에게도, 이 승리는 강력한 해상국가로 성장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당시의 아테네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이 전투의 승리에 크게 공헌한 테미스토클레스는 평정이 시작된 안드로스 섬을 포위하여 점령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페르시아 측에 선 다른 도서 지역의 폴리스에서도 금품을 뜯어냈다고 전한다.
또한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그리스 함대가 월동을 위해 파가사이에 정박해 있었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이것을 불태우고 아테네 함대만을 남겨두었다고 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함대의 건조 창시자였으며, 또한 이 전투 후 외항이 되는 페이라이에우스 (현재의 피레아스)를 정비하고, 이것과 아테네 시가지를 성벽으로 연결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독선적인 태도를 참주에 대한 욕망으로 간주하고, 경계한 아테네 시민에 의해 도편추방이 되었고, 게다가 반역죄로 기소당했기 때문에 적국인 페르시아로 피신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추방으로 고결한 인물로 알려진 아리스테이데스가 아테네의 지도자가 되었고, 페르시아 침략에 대한 대비책으로 폴리스의 연합체인 델로스 동맹을 성립시키게 되었다. 그는 함정을 제공할 수 없는 폴리스에 대해서는 대신 군비를 납부하도록 하였으며, 이후 그렇게 지급된 상납금은 아테네 독점하는 결과가 되어, 아테나이가 부상할 수 있는 자금원이 되었다.
– 살라미스 해전의 교훈
1) 살라미스 협수로는 협소하기 때문에 대규모 함대의 기동성을 제한한다. 이 점에서 그리스 측이 지리적인 이점을 잘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2) 첩보전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에 첩자로 시킨노스라는 자를 파견했는데, 이 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아들을 가르쳤던 자였다. 이 첩자의 밀서를 보고 크세르크세스는 공격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3) 반페르시아노선을 표방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어 집정관이 된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82년 육군주의를 표방하던 아리스테데스를 추방한 뒤 시의적절하게 함대를 건조하였다.
4) 기동성이 떨어지는 좁은 해역에서 효과적인 충각전술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5)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유능한 지휘관을 선출하고 따를 줄 아는 아테네 시민의 현명함을 들 수 있다. 마라톤 전투 이후 종전 분위기가 팽배하던 당시에 테미스토클레스는 대규모 전투가 시작될 것으로 예견하고 함대를 건조하였다. 아테네 시민들도 정치 지도자들간에 이견이 발생했고, 당시의 육군 중심이던 분위기와는 달리 해군을 중시하던 테미스토클레스를 지도자로 선출할 수 있는 현명한 정치감각을 갖고 있었다. [김주식, ‘서구해전사’, 연경출판사, 1997]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