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1월 22일, 영국의 기독교 작가 C. S. 루이스 /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 1898 ~ 1963) 별세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 1898년 11월 29일 – 1963년 11월 22일)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성공회 (Church of England)의 평신도이다. 또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철학과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쳤다.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까운 친구에게는 잭 (Jack)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부모의 사망을 계기로 무신론자가 되기도 했지만, 로마 가톨릭 신자인 J.R.R. 톨킨과 다른 친구들의 영향으로 30세 때인 1929년 성공회 신앙을 받아들여 성공회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평생 신앙생활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 동아리인 잉클링스의 멤버였으며, ‘반지의 제왕’의 저자인 톨킨과 우정을 유지했다. 그는 개신교도였지만 개신교, 로마 가톨릭교회 등 기독교의 교파를 초월한 교리를 설명한 루이스의 삼단논법과 같은 기독교 변증과 소설, 특히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하다.
–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
.출생: 1898년 11월 29일,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사망: 1963년 11월 22일
.국적: 영국, 북아일랜드
.종교: 성공회
.본명: Clive Staples Lewis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경력: 옥스퍼드 대학교 개별지도교수 및 평의원, 케임브리지 대학교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 교수
.직업: 소설가, 시인, 문학비평가, 수필가, 방송인, 평신도 신학자, 기독교 변론가
.배우자: 조이 다비드만 (1956~1960년)
.영화: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 나니아 연대기 – 캐스피언 왕자 등
C. S.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 1898~1963)는 1898년 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생으로,1925년부터 1954년까지 옥스퍼드의 모들린 칼리지에서 강의하다가, 1954년 케임브리지의 모들린 칼리지 교수로 부임하여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쳤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신앙을 버리고 완고한 무신론자가 되었던 루이스는 1929년 회심한 후, 치밀하고도 논리적인 변증과 명료하고 문학적인 문체로 뛰어난 저작들을 남겼다. 1963년 작고했다.
지성적이며 논리적인 신학자로 개신교, 성공회, 로마 가톨릭 등 기독교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로 영국 3대 판타지 소설가로 꼽히는 유명한 작가이다. 그는 확고한 무신론자였다가 로마 가톨릭 신자이자 소설가인 톨킨과 다른 친구들의 영향으로 30세 때인 1929년 성공회 신앙을 받아들여 성공회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평생 신앙생활을 하였다.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선 “잭 Jack”이라 불린 그의 본명은 클리브 스태플스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이다. 1898년 11월 29일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3년 먼저 태어난 형 워런 Warren은 역사학자였고 그의 평생에 걸친 절친한 친구였다.) 9살 때 어머니 플로라 Flora 여사를 암으로 여읜 루이스는 기숙사가 딸린 학교들 몇 군데를 전전하다가, 커크패트릭 W. T. Kirkpatrick이라는 가정 교사에게로 보내졌는데, 엄격한 이성주의적 무신론자였던 그에게서 엄밀한 논리적 사고 훈련을 받았으며, 본래 성공회 배경을 가졌던 루이스는 이 무렵 확고한 무신론자가 된다.
어린 루이스는 사람을 닮은 동물을 매우 좋아했고, 비트릭 포터 이야기에 빠지기도 했으며, 때로는 자신이 직접 동물 이야기를 상상해서 글로 쓰기도 하였다. 루이스는 형 워니와 함께 동물들이 다스리는 ‘복센 세계’를 창작하기도 했다. 그는 독서를 매우 좋아하였다. 루이스의 아버지 집에는 많은 책들이 있었는데, 루이스가 읽지 않은 책 한권 찾기는 풀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어렵다고 하였다.
루이스가 십대 소년일 때, ‘노던니스 (Northernness)’라는 스칸디나비아 고전 문학의 시나 전설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전설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루이스는 ‘기쁨 (joy)’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루이스는 자연에 대한 애정도 컸다. 루이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은 곧 북쪽 (the North) 이야기였고, 북쪽 이야기는 곧 자연의 아름다움이었다. 십대 때 쓴 글은 복센 이야기로부터 멀어졌고, 북유럽 신화나 자연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담은 서사시나 오페라 같은 다른 형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커크패트릭에게 배우면서 그리스 문학과 신화에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논쟁과 추론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1916년 옥스포드 대학교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장학금을 받고, 이듬해 1차 세계대전에 영국군으로 자원입대하였다. 19번째 생일날 프랑스의 섬므 밸리의 최전선에 나가 참호전을 겪었으며, 서머셋 보병 연대 서드 배탈리온에서 장교로 복역하였다. 엉덩이에 영국군 포탄의 파편 조각이 박히는 부상을 입어 요양캠프에서 치료를 받다가 전쟁이 끝나자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한다. 루이스는 장교훈련 기간 중 알게 된 패디 Paddy라는 친구가 전사하자, 약속한 대로 그의 어머니 무어 부인 Mrs. Moore을 자신이 평생 보살폈다.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 동아리인 잉클링스의 멤버였던 그는 1923년 옥스퍼드를 세 부문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유니버시티 칼리지 (University College)에서 잠시 철학을 강의했으며, 1925년부터 모들린 대학 (Magdalen College)에서 30여 년간 영어와 문학을 가르친다. 1954년부터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 교수로 재직했는데, 이 무렵 『실락원 서문 : A Preface to “Paradise Lost”』 『사랑의 알레고리 : The Allegory of Love』 등 뛰어난 영문학 학술서적들을 여러 권 저술한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접근을 늘 의식하고 있던 루이스는, 1929년 어느 날 밤 마침내 신 앞에 항복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날의 회심은 ‘복음적 신앙’으로의 회심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유신론’으로의 회심이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31년 어느 가을 밤, 옥스퍼드의 동료 교수이자 가톨릭 신자인 톨킨 J. R. R. Tolkien과 성서와 신화를 주제로 나누었던 긴 대화를 통해 마침내 기독교 신앙의 핵인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 루이스는 자신의 소명은 교회 밖 (언저리)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교파에 국한되는 교리가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믿어 온 기독교의 정수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를, 전문 신학 용어가 아닌 현대인의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생생한 언어로 표현해내고자 노력했고, 그러한 분투는 결국 그에게 “회의자를 위한 사도”라는 별명을 안겨준다.
루이스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루이스보다 열여섯 살 연하였던 조이 (Joy Gresham)이다. 그는 여러 권의 시집과 소설들을 발표한 미국 작가로서, 애초 무신론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였으나 그의 저술들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기독교로 회심하게 되었다. 시인이며, 재치와 지성미를 갖춘 여인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던 루이스는 58세에 그녀에게 떿국 시민권을 얻게 해주기 위해 조이와 결혼을 한다. 이때 조이는 이미 불치의 골수암에 걸린 상태였음이 뒤늦게 알려지고, 죽음의 신이 연적이 된 상황에서 조이에 대한 루이스의 사랑은 급속히 깊어졌다. 1957년 3월 조이의 병실에서 성공회 (Anglican) 혼인예식에 맞게 결혼식을 올렸으나 4년만에 결국 사별로 끝나고만 이 아름답고 가슴아픈 사랑 이야기는 훗날 연극으로 만들어졌고, 또 그 연극 대본을 기초로 하여 영화 ‘섀도랜드 (Shadowlands)’가 제작된다.
루이스가 아내를 잃은 슬픔을 이기기 위해 일기 형식으로 적었던 글인 『A Grief Observed』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가명으로 출판된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던 같은 날, 루이스는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홍성사가 역간한 루이스의 저작으로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예기치 못한 기쁨』, 『천국과 지옥의 이혼』, 『헤아려 본 슬픔』, 『시편 사색』, 『네 가지 사랑』, 『인간 폐지』,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개인 기도』, 『기적』, 『영광의 무게』, 『루이스가 메리에게』, 『피고석의 하나님』, 『루이스가 나니아의 아이들에게』, 『기독교적 숙고』, 『당신의 벗, 루이스』, 『순례자의 귀향』, 『세상의 마지막 밤』, 『실낙원 서문』, 『오독』, 『침묵의 행성 밖에서』, 『페렐란드라』, 『그 가공할 힘』이 있다.
○ 약력
루이스의 어린시절 루이스는 1898년 11월 29일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루이스의 아버지 앨버트 제임스 루이스 (1863 – 1929)는 사무 변호사였고, 루이스의 할아버지 리처드 루이스는 19세기 중반에 웨일즈에서 아일랜드로 이사했다. 루이스의 어머니 플로런스 어거스터 루이스 니 해밀턴 (1862 – 1908)은 아일랜드 성공회 (Church of Ireland) 사제의 딸이었다. 루이스는 한 명의 형이 있었고, 워런 해밀턴 루이스이다. 루이스가 4살 때 그의 개 잭시 (Jacksie)가 차에 치어 죽었는데, 그 때부터 루이스는 자기 이름을 잭시라고 했고 나중에는 잭 (Jack)으로 알려졌다. 그 후 루이스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잭이라고 불렸다. 루이스가 7살 때 루이스의 가족은 벨파스트 동부 스트랜타운에 있는 ‘리틀 레아’로 이사했다.
루이스는 처음에는 개인 가정 교사에게 교육을 받았고, 어머니가 암으로 죽기 직전인 1908년에 위니어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루이스의 형은 3년 먼저 그 학교에 등록해서 다니고 있었다. 그 학교는 얼마후 학생 수가 감소하여 폐교되었고, 로버트 캐프런 교장은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그 학교는 “벨슨” (Belsen, 나치의 수용소)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그 당시 윈야드 학교의 분위기로 인해 루이스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는 작가 앨런 제이콥스의 견해가 있다. 윈야드 학교가 폐교된 후, 루이스는 집에서부터 1마일 거리에 있는 캠벨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호흡기 질환 때문에 몇달 뒤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요양원 마을 워스터쉐어 맬번으로 갔다. 그곳에서 루이스는 체르보그 하우스 학교를 다녔다. 체르보그 하우스 학교는 루이스의 자서전에 ‘차트레스’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1913년 9월에 루이스는 맬번 칼리지에 입학하여 다음 해 6월까지 다녔다. 이 기간동안 15살 루이스는 어린시절의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신화와 초자연적인 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루이스는 맬번 칼리지를 떠난 후, 루이스 아버지의 옛 스승이면서 러건 칼리지의 학장인 윌리엄 커크패트릭에게 배웠다.
소년 루이스는 사람을 닮은 동물을 매우 좋아했고, 베아트릭스 포터 이야기에 빠지기도 했으며, 때로는 자신이 직접 동물 이야기를 상상해서 글로 쓰기도 하였다. 루이스는 형 워런과 함께 동물들이 다스리는 ‘복센 세계’를 창작하기도 했다. 루이스는 독서를 매우 좋아하였다. 루이스의 아버지 집에는 많은 책들이 있었는데, 루이스가 읽지 않은 책 한권 찾기는 풀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어렵다고 하였다.
루이스가 십대 소년일 때, ‘노던니스’ (Northernness)라는 스칸디나비아 고전 문학의 시나 전설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전설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루이스는 ‘기쁨’ (joy)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루이스는 자연에 대한 애정도 컸다. 루이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은 곧 북쪽 (the North) 이야기였고, 북쪽 이야기는 곧 자연의 아름다움이었다. 십대 때 쓴 글은 복센 이야기로부터 멀어졌고, 북유럽 신화나 자연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담은 서사시나 오페라 같은 다른 형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커크패트릭에게 배우면서 그리스 문학과 신화에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논쟁과 추론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 내 아일랜드 삶
아일랜드 컨트리다운의 방고의 공원 벤치에 달려있는 패에, 루이스는 영국 잉글랜드에 도착했을 때 어떠한 문화적 쇼크를 경험했다고 표현되어 있다: “어떤 잉그랜드 지방 사람도 나의 잉글랜드에 대한 첫인상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루이스는 예기치 못한 기쁨 에서도 계속해서, “내가 둘러 쌓여있는 그 이상한 영국식발음 (잉글랜드지역)은 악마의 목소리 같이 들렸다. 하지만 더 심한 것은 영국의 지형이었다. … 나는 이때부터 그 언쟁을 해왔다; 평정심을 되찾기 까지 오랜 시간 걸리게 된 영국 (잉글랜드지역)에 대한 혐오를 그때 품게 되었다.”라 표현했다.
소년시절부터 루이스는 노르웨이나 그리스신화에 빠져있었고, 후에는 아일랜드 신화 와 문학 그리고 아일랜드 언어에 관심을 보였다. 그렇긴 하지만 그가 얼마나 그쪽 분야에 기여를 했는지에 관한 증거는 없다. 그는 아일랜드 시인이자 문학가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에대해, 특별히 그의 시에 표현된 아일랜드의 켈트적 영향으로 인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친구에게 쓰는 편지에 루이스는 “여기서 나는 내 심정을 정확히 달래주는 저자를 찾았는데, 너도 분명 예이츠를 좋아할 거라 확신해. 그는 보기 힘든 아일랜드 신화의 영혼과 아름다움을 다룬 극과 시를 쓰고 있어.” 1921년에 루이스는가 예이츠를 두번 만난 이후로 예이츠는 옥스포드로 이사했다. 루이스는 영국 잉글랜드 동료들이 예이츠와 켈트 회복운동 에 대해서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음을 보고 놀랐다고 기록했다. “나는 자주 얼마나 예이츠가 내가 만난 그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는가를 보면서 놀란다. 아마도 그가 어필하는 것은 순수히 아일랜드 적인 것일 것이다. – 그렇다면 내가 아일랜드 사람이라는 것이 다행이지.”
그가 일을 시작했을 무렵, 루이스는 그의 원고를 더블린의 주요 출판사에 보낼 것을 고려 했다: “내가 내 일을 출판사에 보낼 일이 있다면, 나는 Mausel, 더블린 사람들과 추진해야 할거야. 그래야 내가 분명히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 그가 기독교로 개종 한 이후, 그의 관심은 이도교적 켈트적 신비주의에서 기독교의 정신성/영성 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는 영국 잉글랜드지방에 사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모임을 찾아 다니고, 북아일랜드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고, 심지어 그의 허니문 또한 1958년 올드 인의 크라우포드즈번 (Crawfordsnurn)에서 보냈다. 그는 이에 대해 “내 아일랜드 삶”이라 일컬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루이스가 그의 고향 벨파스트의 종파적 갈등에 관한 실망이 결국은 그를 전 기독교적인 길로 이끌었다고 본다. 한 평론가가 말하기를 루이스는 “ 반복적으로 모든 종파의 기독교 신앙의 미덕에 대해 극찬하고, 가톨릭 저자 G. K. 체스터턴이 말한 ‘단순한 기독교’는 모든 교파가 공유하여 믿는 핵심적 교리를 중심으로 화합하는 것이 절실하다 강조하였다.”
한편, 토론토대학의 폴 스미스가 C. S. 루이스에 대해 서술하기를 “루이스의 단순한 기독교는 1950년대와 1960년대 북아일랜드에서 영국의 철수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벨파스트에서 태어난 중산층의 오래된 얼스터 지역 신교도의 정치적 선입견들을 커버했다.” 말한다.
– 1차 세계대전
1916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장학금을 받은 다음 해, 루이스는 1차 세계대전에 영국군으로 자원입대하였고, 서머셋 보병 연대 서드 배탈리온에서 장교로 복역하였다. 루이스의 19번째 생일날 프랑스의 섬므 밸리의 최전선에 나가 참호전을 겪었다.
1918년 4월 15일, 루이스는 독일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여 쉬는 동안 아일랜드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우울증을 겪었다. 그 후 10월에 복귀하여 영국 앤도버로 발령을 받았다.
– 결혼, 그리고 사별
1952년 9월 루이스는 조이 데이빗먼 (Joy Davidman)이라는 여성을 처음으로 만난다. 그녀는 젊은 시절에는 무신론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조이는 미국의 소설가인 빌 그레셤 (Bill Gresham)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시인이었던 조이의 결혼 생활은 이미 파경을 걷고 있었고, 부부는 잠정 별거에 합의한 상태였다. 두 사람의 교류가 시작된 것은 1950년에 조이가 루이스에게 편지를 쓰면서부터이다. 1946년경 조이는 미국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마르크스주의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을 하는데 루이스의 책이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편지는 명민함과 섬세함이 돋보이는 지적인 것이어서, 루이스의 눈에 금방 들어왔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지적 교류의 차원이었다. 조이는 1953년에 두 아들과 함께 미국에서 영국으로 이주한다. 조이가 이혼을 한 것은 이듬해인 1954년의 일이었다. 단순한 우정을 넘어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은 이 무렵의 일로 알려져 있다.
1956년 영국 정부가 조이의 비자를 더 이상 연장해 주지 않자 루이스는 그녀에게 영국 시민권을 얻게 해주기 위해 혼인 신고를 하기로 했다. 쉰 살이 넘도록 독신으로 살아온 루이스를 곁에서 지켜 본 친구들 가운데는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루이스는 혼인 신고가 조이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956년 10월 조이가 골수암 판정을 받게 되자 루이스는 깊은 충격에 빠진다. 루이스의 어머니 또한 그가 어렸을 때 암으로 사망했다. 루이스의 문학적인 표현을 빌자면, 죽음의 신이 연적이 된 상황에서 조이에 대한 루이스의 사랑은 급속히 깊어졌다. 두 사람은 1957년 3월 조이의 병실에서 성공회 (Anglican) 혼인예식에 맞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조이의 죽음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결혼식 이후 한때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1959년 가을에 골수암이 재발했다. 조이 데이빗먼 루이스는 이듬해인 1960년 7월 세상을 떠난다.
○ 무신론에서 기독교로의 복귀
루이스는 아일랜드 성공회 에 다니는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그는 15세때에 무신론자가 되었고, 후에 그가 말하기를, 어린 시절 역설적으로 “하나님에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매우 화가 나 있었다”라고 했다. 그가 일찍이 기독교를 떠나게 된 것은 그가 종교를 하나의 의무감으로 하는 따분한 일로 보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 무렵, 그는 또한 그의 학업이 포함한 초자연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루이스는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질에 관해서, 5. 198-9)를 무신론의 가장 강력한 인용구로 소개했다. 신이 이세상을 창조했다면, 세상이 우리가 보듯 이렇게 볼품없고 불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루이스는 조지 맥도날드의 사상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것이 루이스를 무신론에 등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이스의 ‘위대한 이혼’의 9장에 어느정도 자서적인 주인공이 천국에서 맥도널드를 만났을 때의 그 부분에서 특히 잘 보여준다. … 그의 글들이 나에게 한 것들을 말하기 위해 노력했고, 넘어졌다.나는 내가 16살정도 되었을 즈음 어떻게 어느 서리 내린 오후의 레더헤드 역에서 처음 산 조지맥도널드의 몽상가의 카피본이 마치 나에게는 단테가 처음 베아트리체를 본 것이나 다름 없었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여기서 새로운 삶의 시작)에 관해 말하려 노력했다.
나는 단순한 지역적 이민이 (기독교에서 무신론으로의) 얼마나 길게 인생을 지연시켰는지에 관해 고백하기 시작했다 : 얼마나 천천히 그리고 마지못해 그의 전 기독교적임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얼마나 열심히 처음 만난 그 책에 있는 신성함, 진정한 가치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는지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그의 옥스포드 동창이자 친구이고, G.K. Chesterton의 ‘영원한 남자’를 통해 1926년 5월 11일 만나게 된 것으로 보이는 J.R.R. 톨킨의 영향을 받아 천천히 기독교를 다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개종하게 되는 그 순간까지 열심히 분투했고, “걷어차고, 발버둥치고, 분개했으며 도주를 위해 모든 각도에서 쏘아봤다”라고 기록하며 탕자처럼 기독교에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책 ‘예기치 못한 기쁨’에 그의 마지막 투쟁에 대해 기록하기를:
옥스포드의 모들린 대학의 한 방에서, 여러 밤을 지새며 내 마음이 내 일 쪽으로 기우는 그 순간에도, 진정으로 만나게 되지 않기를 열망하는 그에게로 끊임없이 천천히 다가가고 있는 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매우 두려워하던 그것이 마침내 내게 온 것이다. 그는 1929년 부활절 다음학기에 백기를 들고, 하느님이 하느님임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무릎 꿇고 기도했다.: 아마도, 그 밤이 전 영국을 통틀어 가장 실의에 빠져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힘든 개종이었을 것이다.
유신론으로 개종한 1929년 이후, 루이스는 1931년 늦은 밤 그의 가까운 친구인 J.R.R. 톨킨과 Hugo Dyson과의 산책에서 한 긴 토론 이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는 동물원에 가는 길 그의 형과의 대화에서 그가 기독교 신앙에 헌신하기로 했음을 명확히 했다고 기록한다. 그는 영국 성공회 (Church of England) 신자가 되었고, 그가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하기를 바랐던 톨킨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일 이었다.
루이스는 사과의 글을 통해 어떤 종파도 옹호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으며, 영국 성공회에 입교했다.
그는 후에 임종 무렵에 가톨릭에 보다 호의적이기는 했지만, 끝까지 개신교 성공회의 신앙을 지켰다.
그가 후에 쓴 글에서, 혹자는 그가 작은 죄들, 또한 영국 성공회 (특히 가톨릭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공회 신학인 고교회파)에서도 그러하지만, 대개 로마가톨릭에서 가르치는 대죄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까지도 사후에 연옥 (purgatory)에서 깨끗이 씻겨진다는 견해를 제시했다고 믿는다 (‘위대한 이혼’과 ‘말콤에게 쓰는 편지’에서).
루이스가 그의 생애 후반기에 그 스스로를 성공회에 속한다고 여기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질이 떨어지는 설교와 찬송가는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성만찬을 위해 예배에 참석했다. 그는 후에 허름한 차림으로 오셔서 모든 찬송과 성서의 절을 찬양하신 신실하신 그 분을 예배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 기독교 신앙
“기독교가 인간이라는 기계의 전체 설계도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설계도에서 이탈했고, 원래 설계도를 변경한 자신의 설계도야말로 진짜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적인 것에는 이런 반응이 거듭 나타날 것입니다. 즉 누구나 거기 (기독교)에서 끌리는 부분을 발견하지만, 오직 그 부분만을 골라낸 뒤 나머지는 버리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정반대의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자신이야말로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해 싸운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순전한 기독교, 141쪽]
요즘에 어떤 이들은 자선이 필요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기보다는 그런 가난한 자들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든 기독교의 도덕과 결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순전한 기독교, 143쪽]
청년 시절 그는 기독교를 믿지 않으려고 애썼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뒤에도 한동안 성찬식만 참여할 정도로 기독교 예식 전반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말년에는 싫어하던 찬송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고 한다.
루이스의 핵심적인 기독교관은 기독교의 범주를 엄격하게 구분해야겠지만, 그 안에 속하는 여러 교파들간의 차이는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이의 차이에 비하면 미미하다 정도. 덕분에 루이스는 기독교로 회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갈등과 고뇌를 느껴야 했는데, 모더니즘적인 그의 성격상, 기독교에 투신한다는 것은 삶의 양식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공회 내의 저교회파/고교회파간 차이, 여러 개신교 종파간의 차이, 가톨릭과 동방정교, 신교 계열의 차이 같은 것들은 비교적 사소한 것으로 여겼다. 어차피 자세한 교리에 있어서 의견이 다른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한다’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받아들이냐 마느냐’가 진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순전한 기독교’는 이러한 루이스의 기독교관을 잘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예수가 잘난 인간이라면 모를까 초월적인 구세주라고 하기는 그렇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선을 긋고 반대하고 있다.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든지, 미친 놈 취급하든지 자유지만 그 중간은 없다’는 단호한 입장이다.
“유대인 가운데 한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하느님으로 자처하며 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줄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전부터 항상 존재해 왔다고 했습니다. 또 마지막 날 다시 와서 세상을 심판하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힌두교인 같은 범신론자라면 얼마든지 자기가 신의 일부라고 말하거나 신과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한테는 이 말이 하등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이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따라서 그가 말하는 하느님은 그런 범신론적인 신이 아니었습니다. (중략) 이 점을 생각한다면, 이 사람의 말이야말로 인간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인 말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주장 중에 이제는 우리 귀에 너무 익은 나머지 무심코 흘려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 그 어떤 죄라도 용서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하느님이 아니라면, 이것이야말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무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용서라는 것은 해를 입은 사람이 해를 끼친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제 발을 밟았을 때, 제 돈을 훔쳤을 때 제가 여러분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발을 밟히지도 않았고 자기 돈을 도난당하지도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발을 밟고 돈을 훔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무리 부드럽게 표현한다 해도 얼간이 짓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했으며, 그들의 죄에 피해를 입은 이들의 의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양 행동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정말 하느님일 경우에만 이해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모든 죄는 하느님의 법을 깨뜨리며 그의 사랑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아닌 존재가 이런 말을 했다면, 역사에 등장했던 그 어떤 인물보다 우스꽝스럽고 자만에 찬 짓을 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은 이상하고도 의미심장한 사실인데)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복음서를 읽을 때 그에게서 우스꽝스럽거나 자만심에 차 있다는 인상은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편견 없이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은 두말 할 나위가 없지요. 예수는 스스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고 (마태오 복음서 11장 29절), 우리는 그의 말을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인간에 불과할 경우, 온유나 겸손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해야 할 말들을 자주 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하지요.” _ ‘순전한 기독교’ 중에서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하느님이라는 주장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그 누구도 못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와 같은 주장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신병자-자신을 삶은 계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수준이 똑같은 정신병자-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일 것입니다.” _ ‘순전한 기독교’ 중에서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여겨 입을 틀어 막을 수 있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는 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_ ‘순전한 기독교’ 중에서
다만 이 논리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성경, 그 중에서도 예수의 언행을 다룬 복음서가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으며 신뢰할 만한 사실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을 전제할 때 유효성을 얻는다. 예를 들어서 무슬림들은 복음서를 믿지 않는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들의 종교 서적을 바탕으로 그 서적의 신뢰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미친놈인지 구세주인지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부당한 흑백논리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유명 무신론 인사들에게 통렬히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주장은 기독교 대 외부세계가 아니라 기독교 내적으로 보다 유의미한데, 논리적으로 볼 때 복음서의 내용을 취사 선택해서 받아들이는 신앙관에 대해 매우 강력한 반론이 되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내용에 따라 예수를 뛰어난 인간으로 인정하지만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자 인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건 좀 후대의 오바가 아닌가, 하는 식의 기독교 내적인 절충주의에 대해 루이스가 가하는 비판이 바로 저것인 셈. 해당 구절이 등장하는 저서 ‘순전한 기독교’의 목표는 무수한 종파로 나뉘어진 기독교의 공통적 본질을 제시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론을 부정하는 절충주의를 기독교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통찰을 주장의 형태로 제시한 것이 바로 위 제시문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하지만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을 납득 시키기에는 주장의 전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좌우지간 루이스의 저서에서 인간성에 대한 흥미 있는 통찰이나 근본주의 기독교와 운동화된 기독교 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성공회의 오랜 대립 문제인 고교회파와 저교회파에 대해서도 어느 한편에 서지 않았다. 말년에 상당히 가톨릭에 호의적인 태도로 있었다는 평가도 많고, 실제로 가톨릭계 서적들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인물이다.
“교만의 반대편에 선 미덕은 겸손이다. 겸손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겸손의 첫 단계라 말해주고 싶다. 적어도 이 단계를 밟기 전에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자신이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큰 교만이다.” _ 순전한 기독교 (라디오 방송 편집본)
진화론을 자신의 신앙과 융합시키려고 시도했던 그의 어록을 보자.
“… 신은 동물의 형상을 완성했고, 그것은 장차 인간의 매개체가 되고 신의 형상이 될 것이었다. (중략) 그러나 그것은 동물일 뿐이었다. 모든 물리적, 정신적 과정이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것들만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신은 이 유기체의 심리와 생리에 ‘나’ 라고 하는 새로운 의식을 심어주었는데, 그 의식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며, 신을 알고, 진실과 아름다움과 선을 판단할 수 있으며, 시간 너머에 존재하면서 흘러가는 시간을 감지할 수 있는 인식이었다. (중략) 우리는 신이 이런 창조물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 이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천국 같은 상태를 지속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머잖아 끝이 났다. 누군가는 또는 무언가는 자기들이 신이 될 수 있다고 속삭이기도 했다. (중략) 이들은 신을 향해 “이건 우리 일이지 당신의 일이 아니오” 라고 말할 우주 어딘가의 후미진 곳을 원했다. 그러나 그런 후미진 곳은 없다. 이들은 명사가 되고 싶었지만 단지 형용사에 머물렀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그 자기모순의 불가능한 소망이 어떤 행위에서 또는 일련의 행위들에서 표출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소망은 아마도 열매를 말 그대로 먹는 행위와 관련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_ C.S.Lewis (F.Collins, pp.210~211에서 재인용)
루이스는 ‘기독교’의 범주를 정하는 데 있어서는 완강한 편이었고 스스로 신앙을 가질지 판단하는 여부에서도 엄격했지만, 기독교 안으로 들어온 뒤로는 기독교 바깥의 사상이나 과학적 연구 등에는 상당히 열린 자세를 유지했다.
○ 학자
그의 아카데믹한 경력은 옥스포드 대학시절 3가지 분야의 학업을 망라하는 최고의 상인 triple first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루이스는 옥스포드의 매그단 대학에서 거의 30년 동안 교수 했고, 1925 ~ 1954년 그리고 그 이후에 캠브리지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영어에 관한 교수직을 맡는다.
또한 캠브리지의 매그단 대학에서는 이러한 그의 직분아래, 영국에서 르네상스란 것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학문적인 연구는 특히 후기 중세의 우화적인 것에 집중되었다.
그의 ‘사랑의 우화’ (1936)는 후기 중세의 장미설화 같은 작품의 묘사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는데 일조 하였다.
그의 책 ‘실낙원 서설’ (A Preface to Paradise Lost)은 현재까지도 가장 가치 있는 비평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의 마지막 학술 저서인 ‘버려진 이미지’ (The Discarded Image):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 소개’ (1964)는 그 칭호에서 말하듯 우주의 “버려진 이미지” 중세 세계관의 요약이다.
루이스는 다작하는 작가였다. 또한 그가 문학적으로 교류하는 친구들 그룹 또한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토론을 하는 모임으로, “잉클링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 모임은 J. R. R. 톨킨, Nevill Coghill, 로드세실, 찰스 윌리엄스, 오웬 바필드, 그리고 그의 형 워런 루이스가 멤버로 구성되어 있었고, 어떤 학자는 최소한 1929년에는 잉클링스가 출범했다고 한다.
루이스와 코그힐 그리고 톨킨의 우정은 그들이 톨킨이 창립해, 잉클링스의 출범 즈음하여 막을 내린 그 전 노르웨이작 읽기모임인 콜비타모임 시절에 돈독해졌다.
○ 소설가
그의 학자로서의 업적 이외에 루이스는 여러 인기 있는 소설을 썼고, 어른을 위한 공상 과학소설 공간 3부작이나 아이들을 위한 판타지소설인 ‘나니아 연대기’를 썼다. 대부분 그의 작품들은 암암리에 죄나 인류가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졌다가 구원받는 식의 기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 순례자의 귀향
루이스가 기독교인이 된 이후로 쓴 첫 번째 소설은 John Bunyan의 ‘천로역정’을 그의 기독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묘사한 ‘순례자의 귀향’ (1933)이다. 그 책은 당시 좋지않은 평을 받았지만, 루이스의 옥스포드 동기인 David Martyn Lloyd-Jones는 아주 값진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Lloyd-Jones가 언제 다음 책을 쓸 것인지 물어 보았을 때, 루이스는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때”라 답하였다
– 공간 3부작
‘공간 3부작'(‘우주 3부작’ 또는 ‘랜섬 3부작’이라고도 한다)은 비인간적 과학소설의 트렌드를 보는 루이스의 시선을 반영했다. 1편 조용한 혹성 밖에서는, 분명 그의 친구 J.R.R. 톨킨과 나눈 이런 트렌드에 관한 다음의 대화에 대해 기록되어있다. 루이스는 자신이 “우주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집필하고, 톨킨은 “시간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집필하는 것에 대하여 동의했다. 루이스가 만든 주인공 엘윈 로만솜의 캐릭터는 톨킨의 편지에서 어느 부분 톨킨의 캐릭터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암시하고 있다. 두 번째 소설 ‘Perelandra’는 금성의 새로운 에덴동산에 새로운 아담과 이브, 그리고 그들을 유혹하는 새로운 “뱀의 형상”을 묘사한다.
○ 한국 출판계에서의 위치
C. S. 루이스는 대한민국 기독교 출판계에서도 인기 있는 작가이다. 그 실례로 ‘순전한 기독교’ (The Mere Christianity) 등의 일부 저작들이 영국 C. S. 루이스 협회와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은 홍성사에 출판하고 있는데, 이는 홍성사 편집장 정상윤이 기획하고 이어서 홍성사 편집장이 된 옥명호가 새로운 체제로 편집한 결과물이다. 또한 2006년 4월호 기독교사상에 ‘순전한 기독교’를 번역한 이종태 목사 (장로교)와 C. S. 루이스 팬인 옥명호 등이 C. S. 루이스의 신학과 삶에 대해서 쓴 글이 실리기도 하였다.
○ 저서들
–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1950년)
캐스피언 왕자 (1951년)
새벽 출정호의 항해 (1952년)
은의자 (1953년)
말과 소년 (1954년)
마법사의 조카 (1955년)
마지막 전투 (1956년)
한국에서는 시공사의 어린이 출판부서인 시공주니어에서 번역 출판했으며, 규장 등 기독교계 출판사들이 관련서적을 출판하기도 했다.
– 기타 소설
순례자의 귀향 (1933년)
침묵의 행성 밖으로 (1938년)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The Screwtape Letters, 1942년, 홍성사)
페렐란드라 (1943년)
천국과 지옥의 이혼 (1945년)
그 가공할 힘 (1946년)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1956년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2007, 홍성사)
개인기도: 말콤에게 보내는 편지 (1963년)
– 비소설
사랑의 알레고리 (The Allegory of Love , 1936년)
고통의 문제 (The Problem of Pain, 1940년, 홍성사)
인간폐지 (The Abolition of Man, 1943년, 홍성사)
기적 (1947년, 1960년 개정, 홍성사)
영광의 무게 (The Weight of Glory, and Other Addresses [1949년, based on earlier radio broadcasts, enlarged edition 1980년]), 홍성사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1952년, 1943년 라디오 방송내용을 책으로 묶음, 홍성사)
English Literature In the Sixteenth Century Excluding Drama (1954년)
예기치 못한 기쁨 (Surprised by Joy, 1955년, 자서전, 홍성사)
시편 사색 (Reflections on the Psalms 1958년, 홍성사)
Studies in Words (1960년)
네 가지 사랑 (The Four Loves, 1960년, 홍성사)
세상의 마지막 밤 (1960년)
문학 비평에서의 실험 (1961년)
헤아려 본 슬픔 (A Grief Observed [initially published under the pseudonym “N. W. Clerk”], 1961년, 홍성사)
They Asked for a Paper (1962년)
The Discarded Image (1964년)
피고석의 하나님 (연대 미상)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