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인생의 고민은 선택에 있다
인생의 고민은 선택에 있다. 어제의 선택이 오늘의 나를 만들고, 오늘의 나의 선택이 내일의 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샤르트르는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라고 했다. B(Birth)는 출생이고 D(Death)는 죽음이며 C(Choice)는 선택이다.
인생은 크고 작은 선택의 연속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3가지를 기준으로 선택한다. 물질 중심의 선택, 사람 중심의 선택, 하나님 중심의 선택이다.
물질 중심의 선택
아브람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다투는 일이 벌어졌다. 소유가 많아지다 보니 같이 동거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아브람은 롯에게 제안한다. 같은 골육이니 싸우지 말고, 우리 앞에 땅이 많이 있으니 내가 좌하면 내가 우할 것이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할 것이라며 롯에게 먼저 선택할 권한을 주었다. 롯은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보니 소알까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 같았다. 롯은 요단 들을 택하여 동으로 떠났고,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다. 롯은 보이는 물질 중심의 선택을 하였다. 롯은 그곳의 환경은 보았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롯이 선택한 지역인 소돔과 고모라 성은 멸망한다(창 19장).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의 원인을 아는가? 악인이 많아서가 아니라 의인 10명이 없어서이다. 세계 원유 매장량 1위는 베네수엘라이다. 최근 베네수엘라는 국가 지도자를 잘못 선택하여 거지가 되었다. 시드니 성시화 대회 2020의 강사인 임현수 목사는 호주에 오기 전에 선교차 브라질의 아마존에 갔었다. 여느 때와 달리 브라질 시내에 거지들이 즐비해서 물어보니, 베네수엘라에서 난민들이라고 한다. 원유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에서 자동차 주유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풍요 속의 빈곤, 군중 속의 고독, 자원 속의 저주가 아닌가!
사람 중심의 선택
사울은 왕위에 오를 때 겸손했다. 사울은 블레셋과 전투를 앞두고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다. 얼마 후 도착한 사무엘은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사울은 “백성들은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에 오지 않고, 블레셋 군대가 모여 치러 올 것 같아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리게 되었다”고 했다(삼상 13). 실망한 사무엘은 하나님은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지도자로 세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울이 아말렉과 전투를 앞두고 있을 때 사무엘은 사울에게 말한다. 사무엘은 “당신은 이 전투에서 이길 것이다. 그들의 모든 소유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했다(삼상 15). 백성들이 원해서 살찐 양과 소를 몰고 왔다고 했다. 하나님이 당신을 버렸다는 사무엘의 말을 듣고, 사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 15:24) 신약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가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민란이 두려워 십자가의 처형을 허락하였다. 그는 손을 씻었지만, 지금도 “빌라도에 의하여”란 단어는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 중심의 선택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가나안 땅에서 방황하는 백성에게 마지막 설교를 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갈멜산 전투에서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엘리야는 선택을 종용한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하나님보다 문제가 더 크다고 믿으면 두려움에 휩싸이고, 그 두려움은 우리의 사고를 왜곡시킨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세상의 풍속도는 너무도 달라졌다. 모이기를 두려워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서로를 바라본다. 기침이라도 한번하면 죄인 취급을 받는다. 마트는 물건을 사기 위해 몸싸움을 불사하고 있다. 자 이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오라 우리가 여화와 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시었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세아6:1)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요 산성이요 요새시고 피난처시다. 세상이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 문제보다 크시다. 문제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선택하기를 바란다. WWJD란 말이 있다. ‘What Would Jesus Do?’의 약자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그리스도라면 무엇을 했을까”를 깊이 묵상하고, 제자 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중심의 선택을 할 수 있기 바란다.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와 천국(Kingdom of Heaven)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와 ‘천국'(Kingdom of Heaven)은 동일한 개념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금기시하였다. 사복음서는 거의 ‘하나님 나라’로 표기하고 있으나 유태인을 위하여 쓴 마태복음에서는 네 곳(12:28, 19:24, 21:31, 43)을 제외하고, 34곳에서 ‘천국’이라고 기록됐다. 예수님의 첫번째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이고,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마 4:23) 다니셨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다. 주기도문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고 했다.
1)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 나라’는 장소가 아닌 ‘통치’의 개념이다. ‘하나님 나라’란 곧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하나님 나라’는 ‘말쿠트’(malkeuth), 신약성경의 헬라어는 하나님 나라를 ‘바실레이아’(basileia)’라고 한다. 두 단어 모두 하나님의 ‘통치’ 또는 ‘주권’과 ‘왕권’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신들이 모이는 곳을 ‘왕국회관'(Kingdom Hall)이라고 한다. ‘여호와가 통치하는 곳’이란 뜻이다.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교회이다.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마 16:16)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하셨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되어, 성령이 다스리는 곳이다. 더나가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선교 공동체’이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선교’이고, 교회가 세상을 닮아가는 것은 ‘세속화’이다.
2)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 (막 1:15)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이란 ‘현재성과 미래성’을 의미한다. 성경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였고(Already), 재림 때까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Not Yet) ‘말세’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뜻하고, ‘말세지말’이란 재림이 점점 가까워졌음을 말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고 고친다고 했다. 예수님은 귀신도 스스로 분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하셨다. 누가복음 17장에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묻자,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고 대답하셨다. 헬라어 ‘entos’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안'(within)라는 뜻과 ‘가운데'(among)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 가운데도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에 대하여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말씀이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이셨다. 성경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3) 하나님 나라의 특징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곳에는 세상과 다른 3가지 특징이 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Righteousness)와 평강(Peace)과 희락(Joy)’이다. ‘오직 성령 안에서’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첫째, 특징은 ‘의’이다. ‘하나님의 의’는 ‘행위의 의’가 아니라 ‘관계적인 의’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자기 의란 행위의 의이고 하나님의 의는 믿음의 의이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아서 ‘이신칭의’라고 한다. 둘째, 특징은 ‘평강’이다. 최후의 만찬 후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언급하시며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처음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하셨다. 셋째, 특징은 “희락”이다. 희락은 쾌락과 다르다. 희락은 영적인 즐거움이고, 쾌락은 육적인 즐거움이다. 희락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얻지만, 쾌락은 세상을 통해서 얻는다. ‘쾌락의 역설’이란 말이 있다.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강도가 높은 쾌락을 원하게 되어 결국에는 고통과 근심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이라고 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으로 살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으로 산다. 육이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고, 영이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말한다. 인간은 육을 가진 영적인 존재이기에 육의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영의 것이 우선이 될 때 육의 것은 선물로 받는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자 이를 기뻐하신 하나님은 부귀와 영화는 보너스로 주셨다(왕상 3:13). 산상수훈에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약속하셨다.
– 묵상 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롬 14:17)
하나님은 인간과 제사로 언약을 맺었다.
언약은 맺는 것이 아니라 자른다는 의미다.
제사를 드릴 때 동물을 자르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구약의 언약은 제사장이 제물을 제단에 드림으로 이루어진다.
신약은 예수그리스도가 친히 제사장과 제물이 되시어
제단인 십자가에서 구속의 언약을 맺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언약을 맺은 자이다.
하나님은 언약공동체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겠다고 약속했다.
– 묵상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In reply Jesus declared, “I tell you the truth, no one can see the kingdom of God unless he is born again.”(요 3:3)
하루살이는 내일을 모르고, 메뚜기는 내년을 모르며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의 세계를 모른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다.
거듭난다는 것은 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세 번 태어나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
육으로 태어나고, 영으로 태어나고, 사명으로 태어나야 한다.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라 (민수기 14:26-30)
민수기의 히브리 성경의 제목은 ‘광야에서’이다. 시내산에서 출발하여 모압평지까지의 38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의 방황한 기록이다. 시내산에서 가나안까지 10일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었지만, 백성들의 ‘불신과 불평’으로 38년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다. 민수기(民數記)란 이름은 ‘백성의 수를 계수했다’는 의미로,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의 제목이다. 민수기에는 두 번의 인구 조사를 했다. 시내산에서 출발할 때 출애굽 1세대의 인구조사와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모압평지에서 출애굽 2세대의 인구조사이다.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는 전투할 능력이 있는 20세 이상의 남자만을 계수한다. 1차 인구조사에서는 603,550명, 2차 인구 조사에서는 40년 전과 크게 변하지 않은 601,730명이다. 민수기 13장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낸다. 40일 동안의 탐지를 마치고 돌아온 정탐꾼은 서로 다른 보고를 했다. 10명은 “저들에 비해 우리는 메뚜기 같기에 가나안 땅을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민 13:33)고 보고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닙니다. 저들은 우리의 밥입니다”(민 14:9)라고 했다. 이들의 보고를 들으신 하나님은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겠다”(민 14:28)고 대답하셨다. 결국 출애굽 1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가나안 땅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듣고 행하시는 분이다.
말은 힘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도 말에 힘이 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잠 18:21)라고 했다. 야고보는 혀는 작지만 큰 배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키와 같고,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는 불과 같다고 했다. 세치도 안 되는 혀가 우리의 삶을 좌우한다. 전도서는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10:12)고 했고, 잠언에는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18:6)고 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일 없을 터인데 말을 해서 매를 버는 사람들이 있다. 말에는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고 죽이는 말이 있다. 창조적인 말이 있고 파괴적인 말이 있다. 긍정적인 말이 있고 부정적인 말이 있다. 적극적인 말이 있고 소극적이 말이 있다. 식물이나 동물도 좋은 음악이나 좋은 말을 들으면 더 잘 자라고 건강하다. 인간의 말은 인간은 물론이고 다른 피조물에도 영향을 준다.
말은 환경이다
인간은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격이 형성된다. 환경이란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외적 요인’이다. 가장 중요한 환경은 무엇일까? 언어환경이다. 좋은 가정이란 좋은 언어가 있는 가정이고, 좋은 교회란 좋은 말을 사용하는 교회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고 했다. 긍정적인 언어 환경에 노출된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부정적인 언어 환경에 노출된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부정적인 사람은 말만 부정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학습능력과 작업능률이 떨어지고 성격도 안 좋다. 버클리 대학 매리언 다이아몬드 박사는 “부정적인 자극이나 메시지를 계속해서 접하면 두뇌에 미세한 인식의 차이가 발생해 신체의 신호까지 나쁘게 바뀐다”고 했다. 말이 입안에 있을 때는 내가 말을 지배하지만, 말이 밖으로 나오면 말이 나를 지배한다. 인간은 말을 만들고, 말은 사람을 만든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었다. 마음이 건강해야 맘도 건강하고, 반대로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겅하다. 최근 스포츠 경기를 살펴보면 경기결과에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기술, 체력보다는 정신적인 요인이 더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심리적인 문제들을 과학적으로,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영역을 스포츠심리학(Sport Psychology)이라 한다. 역도 선수라면 먼저 마음으로 바벨을 드는 장면은 명상하고, 장대 높이 뛰기 선수라면 먼저 마음으로 장대를 넘어야 몸도 따라 넘을 수 있다.
말은 씨앗이다
말씨는 ‘말의 씨앗’이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 인간은 자신이 말의 씨를 뿌리고, 그 뿌린 씨를 거두며 산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 6:2) 언어에는 ‘부메랑의 법칙’이 있다. 타인에게 한 그 말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그대로 되돌아온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 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눅 10:5-6). ‘올드보이’라는 영화가 있다. 고교시절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가 세월이 흘러 부메랑이 되어 주인공인 오대수의 삶을 파멸시키는 이야기다. 우리의 현재 모습은 과거에 심은 말의 열매이고, 미래의 모습은 오늘 내가 하고 있는 말의 열매가 될 것이다. 미래의 나의 모습을 알기 원하는가?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살펴보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듣고 행하시는 분이다. 자신들을 ‘메뚜기와 같다’고 보고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었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보고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