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상주의 철학의 완성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1831)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년 8월 27일~1831년 11월 14일)은 관념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남성 철학자이다. 칸트의 이념과 현실의 이원론을 극복하여 일원화하고, 정신이 변증법적 과정을 경유해서 자연 · 역사 · 사회 · 국가 등의 현실이 되어 자기 발전을 해가는 체계를 종합 정리하였다. 1770년 독일 뷔르템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1778년부터 1792년까지 튀빙겐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 후 1793년부터 1800년까지 스위스의 베른과 독일 헤센주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는데, 이 때 청년기 헤겔의 사상을 보여주는 종교와 정치에 관한 여러 미출간 단편들을 남겼다. 첫 저술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가 발표된 1801년부터 주저 ‘정신현상학’이 발표된 1807년 직전까지 예나 대학에서 사강사 생활을 했다. 그 후 잠시 동안 독일 바이에른주 밤베르크 시에서 신문 편집 일을 했으며, 1808년부터 1816년까지 독일 바이에른주 뉘른베르크의 한 김나지움에서 교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2년 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한 후, 1818년 독일 베를린 베를린 대학의 정교수로 취임했다. 주요 저서로 ‘정신현상학’, ‘대논리학’, ‘엔치클로페디’, ‘법철학 강요’, ‘미학 강의’, ‘역사철학강의’ 등이 있다. 1831년 콜레라로 사망했으며, 자신의 희망대로 피히테 옆에 안장되었다.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출생: 1770년 8월 27일, 독일 슈투트가르트
.사망: 1831년 11월 14일, 독일 베를린
.직업: 철학자
.학력: 튀빙겐 신학원 철학 석사 (-1792), 예나 대학교 철학 박사 (-1790)
.경력: 뉘른베르크 김나지움 교장 (1808-1816),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 (1816-1818), 베를린 대학교 정교수 (1818-1831)
.자녀: 카를 폰 헤겔, 게오르그 루드윅 프리드리히 피셔, 임마누엘 토마스 크리스티안 헤겔, 더보기
.영향받음: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안셀름, 르네 데카르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바뤼흐 스피노자, 장 자크 루소, 뵈메, 이마누엘 칸트,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프리드리히 횔덜린, 비코, 요한 고트프리드 헤르더, 셸링
.영향줌: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아도르노, 바쿠닌, 바르트, 바타유, 바우어, 북친, 브래들리, 브랜덤, 브르통, 버틀러, 카뮈, 크로체, 단토, 들뢰즈, 데리다, 듀이, 딜타이, 에머슨, 엥겔스, 파농, 포이어바흐, 후쿠야마, 가다머, 젠틸레, 그린, 하버마스, 하이데거, 호르크하이머, 야스퍼스, 키르케고르, 큉, 라캉, 레닌, 레비스트로스, 로체, 루카치, 마르쿠제, 마르크스, 몰트만, 니체, 사르트르, 싱어, 스트라우스, 다비드, 스트라우스,레오, 스티르너, 찰스 테일러, 지제크
헤겔은 18~19세기 프로이센의 철학자이다. 칸트, 피히테, 셸링 등의 독일관념론 철학을 계승, 완성 시켰다는 평가를 듣는다. 감각과 이성,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하나의 체계 안에서 사유하려 했던 철학자로, 거대한 체계를 구상했다. 그 때문에 현대의 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철학자 셸링, 시인 횔덜린과 깊은 우정을 나눴다고 전해진다. 헤겔은 30대가 되고 나서도 가정교사 자리를 전전하고 있었다. 일찍 성공한 셸링은 듣보였던 헤겔을 추천해 대학에 입성하게 된다. 하지만 헤겔이 ‘정신현상학'(Phenomenologie des Geistes)을 통해 셸링을 비판하자 셸링은 격노했고 헤겔의 주요한 논적으로 돌아서게 된다. 헤겔은 “나는 셸링의 이론을 비판했을 뿐이지 셸링을 비판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후 헤겔은 셸링을 넘어서 최고의 지성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하다가 1831년 콜레라로 급사한다. 죽은 뒤엔 베를린 도르테엔 시립묘지의 피히테 옆에 묻힌다.
현대의 대표적인 헤겔주의자로는 위르겐 하버마스 (넓은 의미에서), 악셀 호네트, 찰스 테일러, 리차드 로티, 피츠버그학파의 로버트 브랜덤과 존 맥도웰 등이 있으며, 이외에 셀 수 없을 정도의 철학자들이 헤겔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헤겔주의자라고 자칭한다. 다만, 주류 학계와는 상이한 헤겔 해석으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 생애
다음은 헤겔이 손수 쓴 자신의 이력서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이 이력서는 1804년까지의 약력을 담고 있다;
“나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1770년 8월 27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출생. 나의 부모, 아버지 게오르크 루트비히 헤겔, 운송회계사 고문 그리고 어머니 크리스티네 루이제 프롬은 개인교수뿐만 아니라 고대어 및 현대어 그리고 학문의 기초를 가르치는 슈투트가르트의 공립 김나지움에서 수업을 받게함으로써 나를 학문적으로 교육시키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나는 18세에 튀빙겐의 신학원에 입학하였다. 나는 2년 동안 고전문헌학을 전공으로 하는 슈뉘러 (Schnürer), 철학과 수학을 전공으로 하는 플라트 (Flatt), 벡 (Beckh) 밑에서 공부를 한 후,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잇달아서 3년 동안 르 브레 (Le Bret), 울란드 (Uhland), 스토르 (Storr) 그리고 플라트의 지도하에서 신학과 관련된 학문을 공부한 끝에 슈투트가르트의 신교 총무원에서 실시한 신학과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신학과 지원생으로 등록되었다. 나는 부모님의 희망에 따라 설교사직을 선택하였으며 신학이 가진 고전문학 그리고 철학과의 연계성을 고려하여 신학 공부에 충실하였다. 신학과 졸업 후, 나는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직업들 가운데 실제 설교사직에 별로 구속되지 않는 직업, 이를테면 고전문학과 철학 연구에 필요한 여유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외국에서 상이한 조건 밑에 생활하면서도 짬을 낼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직업으로서 가정교사직을 나는 베른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찾았으며, 여기에서 내가 결정한 삶의 과제인 학문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 6년간 이 두 도시에서 시간을 보낸 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나는 철학에 마음과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예나 대학의 명성은 내 장래를 위해 보다 훌륭히 공부할 수 있고 그리고 교수직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엿보는 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이었다. 나는 피히테와 셸링 철학체계의 차이점, 전자의 불충분한 점에 관한 논문을 써 그 곳에 지원하였으며, 얼마 후 나의 박사학위논문, 행성들의 궤도에 관하여 (De orbitis planetarum)의 공개 변론을 통한 심사에서 그 곳 심사위원회로부터 교수 허가를 받았다. 나는 셸링 교수와 함께 ‘철학비판잡지’ (Das kritische Jurnal der Philosophie) 두 권을 간행하였으며, 이 가운데 나의 논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서문
.어떻게 상식이 철학을 취급하는가
.고대와 근대의 회의주의에 관하여
.칸트, 야코비 그리고 피히테의 철학
.자연법에 관한 여태까지의 개정
3년 전부터 철학과 사강사로 있으면서 나는 여러 강의를 하였으며, 작년 겨울에는 수많은 학생이 강의를 들은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지난 해 공작 관할의 광물학 협회의 제2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리고 최근에는 자연 연구 협회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었다. 수많은 연구 가운데 철학이 나의 천직으로 굳어졌기에 나는 친애하는 관계 당국으로부터 정교수로 채용되기를 갈망할 따름이다.” _ E. Moldenhauer와 M. Michel 이 편집한 헤겔 전집 I (1982년, 프랑크푸르트), 582쪽.
이 이력서를 쓴 지 1년 후 1805년 헤겔은 예나 대학의 원외 교수 철학자로 채용된다. 1807년에는 헤겔 관념론의 핵을 이루는 정신현상학이 출판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사생활 면에서 헤겔은 살고 있던 셋방의 주인이 사망한 후 그의 아내 샬로테와 정을 맺어 그녀로부터 아들 루트비히 피셔를 얻지만, 1811년 22살된 처녀인 마리 폰 투허 (Marie von Tucher)와 결혼을 한다. 이 사이에 1808년 뉘른베르크 김나지움의 교장직을 받아 들인다. 1812년 논리학이 빛을 보게되며, 181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교수 자리를 옮긴 후 다음 해에 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 (엔치클로패디)을 출판한다. 1816년 드디어 베를린 대학의 피히테의 후임 교수로서 초빙되어 여기서 사망할 때까지 연구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날리게 된다.
○ 헤겔 철학의 기초
헤겔 철학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독일 관념론의 거성인 칸트 철학에서 출발하여 이를 마무리 지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칸트 철학의 근간은 인식론이며 이를 기초로 하여 칸트는 소위 ‘심리 철학’, 윤리학 그리고 우주론과 신학에 접근하였다. 칸트의 인식론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은 인식의 주체인 ‘자아’인데, 이 개념은 이미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에 의해서 철학적 연구 대상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코지토’ (cogito: 나는 생각한다)의 문제는 칸트에게 물론 지대한 관심을 끌었지만 그는 결코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서 ‘자아’의 문제를 별도로 다루지 않는다.
자아의 문제와 관련하여 헤겔은 칸트 철학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헤겔은 ‘개념’의 문제, 다시 말해 인간 사유의 산물 자체를 독자적인 그 무엇으로 간주한 것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 인식론에 접근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개념’은 헤겔 철학에서 일종의 ‘논리적 범주’로서 스스로 운동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와 같은 개념의 운동은 여러가지 헤겔 철학 용어로 풀이되는 바, Idee (개념, 이념), Natur (자연), Geist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용어가 도대체 어떤 뜻으로 쓰이며 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 변증법
헤겔은 정반합 (正反合)의 개념으로 변증법을 정형화 하였다. 헤겔의 이러한 변증법은 후 일 헤겔 좌파 철학자들을 거쳐 카를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변증법은 만물이 본질적으로 끊임 없는 변화 과정에 있음을 주창하면서 그 변화의 원인을 내부적인 자기부정, 즉 모순에 있다고 보았다. 원래의 상태를 정 (正)이라 하면 모순에 의한 자기부정은 반 (反)이다. 만물은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운동하며 그 결과 새로운 합 (合)의 상태로 변화한다. 이 변화의 결과물은 또다른 변화의 출발점이 되고 이러한 변화는 최고의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된다.
헤겔은 정반합 (正反合)이라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의 변증법을 설명하기 위해 하인리히 샬리베우스 (Heinrich Moritz Chalybaus, 1796~1862)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헤겔은 정반합이라는 표현 대신, ‘즉자-대자-즉자대자’, 혹은 ‘긍정-부정-부정의 부정’ 이라는 표현을 썼다.
– 절대 이성
헤겔에게 절대 이성은 변증법에 의해 도달되는 최고의 지점, 즉 더 이상 변화될 필요 없는 최고의 위치를 뜻한다. 얼핏 보면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과 고정화된 절대 정신은 상충되는 맥락이 있지만, 이러한 헤겔 철학의 전제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노에시스 노에세오스 (noēsis noēseōs)개념을 차용하여 절대 이성은 순수 사유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사유로서 이러한 모순점을 논리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 역사의 종말
헤겔은 세계사를 절대정신(이성)이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하였다. 헤겔은 인간의 역사 역시 변증법적 발전을 겪는다고 파악하였으며 그 결과 이성이 최고의 발전 단계에 이르러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 없는 상태를 역사의 종말이라 명명하였다. 헤겔은 당대 독일이 역사의 종말 단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하였다가 많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이 개념은 나중에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유명한 논문에 등장한 후 동명의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 헤겔과 법철학
법은 객관적 정신의 즉자적 (卽自的 : an sich) 현실화인 저차원 (低次元)의 단계의 것(그 속에는 소유·계약·불법의 부정의 변증법적 삼발전 단계가 있다)으로서, 참다운 (보편적) 자유를 목표로 하여 도덕의 단계, 다시 도의태 (道義態)의 단계로 변증법적인 발전을 하여 간다. 이 도의태의 단계에서 정신은 사랑 (愛)의 공동체인 가족으로부터 그것의 부정인 개인주의적 이익 공동체로서의 시민사회로 전진하고, 다시 시민사회의 부정을 매개로 하여 국가라는 최고의 단계에 변증법적으로 발전하여 간다. 이 국가라는 완성 단계에서 정신은 완전한 자기실현 (보편적 자유)을 얻는다. 국가를 이념과 현실의 완전한 합치, 최고 최종의 것으로 보는 헤겔의 사상은 국가 절대주의에 빠지고 당연히 국제법 질서까지도 부정한다.
○ 헤겔 철학과 종교
경우에 따라서는 헤겔 철학의 절대지성을 종종 종교적인 의미에서 신 개념과 연관을 짓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헤겔은 루터교 신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헤겔은 자신의 역사철학강요에서 중세 철학에 대한 설명을 건너뛴다. 헤겔 연구가인 클라우스 뒤징 (Klaus Düsing)은 헤겔은 철학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신학에 기대었던 중세 시대에 대하여 높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고 본다. 헤겔은 신학과 철학을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 사상 요약
헤겔은 특히 철학자 중에서도, 철학 체계가 방대한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독일 현지를 제외하면 그의 철학적 면모들 중 일면만이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때 영국에서 유행하던 헤겔은 그의 논리학적 일면이었고,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헤겔이었다.
독재에 대항하던 운동권들이 마르크스를 추종하던 경우가 많았던 한국에서 가장 널리 퍼진 헤겔은 역사철학에서의 헤겔이다. 즉, 마르크스 사상적 스승으로서의 헤겔과 헤겔 철학의 기저를 이루는 방법론인 변증법이다.
헤겔은 이성이 인류를 진보로 이끌며 이성이 진보를 일궈내는 메커니즘이 바로 변증법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예를 들어 그리스의 자유로움과 로마의 외적 율법주의 (엄격한 법치)가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현대 서유럽의 법체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어떤 국민이 있다. 그런데 아주 나쁜 독재자가 나타나서 국민들을 탄압한다. 분노한 국민들은 독재자를 몰아낸다. 여기서 처음의 국민들은 ‘정’이고, 나쁜 독재자는 ‘반’이다. 이후 독재자를 몰아낸 사회는 처음의 사회와 비슷해 보이지만, 독재자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그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과 경험과 제도를 얻은 더 나은 사회는 정과 반이 만나 얻은 ‘합’에 해당한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고 민주화도 이루어지자 운동권도 점차 세를 잃으며 자연스레 헤겔도 인기를 잃어갔다.
하지만 헤겔 철학은 역사철학에 대한 변증법의 활용만으로 단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당히 오랫동안 기존 문서에서는 변증법이란 것은 대립되는 두 축 가운데 하나를 택하면서 다른 하나를 부정하는 방법론이라고 서술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해석은 오히려 헤겔의 변증법을 역사에 적용하면서 나타난 양상에 대한 서술에 가깝다.
헤겔의 철학에서 등장하는 ‘변증법’이라는 개념은, 영어로대강 따지면 conversation이 아니라 dialogue에 가깝다. 말하자면 변증법은 부정과 긍정이 교차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싶을 텐데 그리스 어 dialetike를 연상하면 약간 편할 수 있다. 설명하면 dialetike라는 것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좋아하는 대화법, 혹은 교육 방침이다. 질문에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서 어떤 사실을 부정하고 어떤 사실을 긍정해가며 참다운 정의에 다다르게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는 이 변증술을 통해 직각삼각형 같은 수학적 개념을 모르는 사람이 그 개념을 깨닫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계속해서 얘기하지만 헤겔에게 있어서 ‘변증법’이란 학문이 나타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논리에 불과하다.
헤겔은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될 수 있는 인식과 지식을 관찰해 보고자 했다. 헤겔 이전에 철학계의 입장은 ‘우리가 어떤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즉, 우리의 시각이나 촉각, 후각 등을 통해 전해지는 이미지는, 사물의 실상 그 자체와 비교해 보면 한 차례 걸러지면서 왜곡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접근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 대해 헤겔은 기존의 철학자들을 “쫄았냐?” 라고 비웃으며 그들은 쫄보인 나머지 실수가 두려워서 물자체에 대해 알 수 없다던가, 전지전능한 신이 모든 걸 전해준다던가 등등의 이런저런 개념만 전제하면서 정신이 펼쳐지는 모습을 그저 관찰하고자만 했다고 주장하였다.
헤겔은 정신의 양태를 부정과 긍정이 교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알거나 인식하거나 생각하거나 할 때 결국 감각에서부터 시작한다. 사과를 보고 빨간 색이라고 알거나, 사과를 만져보고 매끈거린다고 느끼거나, 먹어 보고 달다고 느낀다. 이런 인간 정신이나 개념에 있어서 시초를 따져 보면 결국 감각과 경험에서부터 비롯됨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이 느낌들은 분명 언어로는 정확히 환원될 수 없는 어떤 느낌이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은 정확하지 않고 착각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므로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옳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물자체란 것이 우리의 개념과 분리된 어떤 실체가 될 수 없다. 이른바 물자체란 것 또한 개념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물자체란 것이 있고 이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상정한 이후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개념에 대해서만 논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물 자체란 것은 개념이 아닌가?
어차피 개념밖에 논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물자체를 설정하는 것은 실패할까 조마조마해하는 쫄보들의 작태다. 감각 경험 역시 개념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감각을 느끼며 이것이 언어나 개념과 불일치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말하려는 순간 이 감각은 언어가 되고 개념이 된다. 즉 개념화, 이성의 작용이라는 것은 1차적으로 부정이 된다는 것이다.
이성으로 개념을 만든다는 것이 부정이라니 무슨 말인가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이 부정이라고 하는 것이 곧 규정이자 개념이라고 한다. 우리가 감각을 지각하고 이를 생각하며 분류하는 것은 뜨거운 것도 아니고, 단 것도 아니고, 쓴 것도 아닌 여러 감각들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헤겔은 이성을 써서 무엇인가를 규정함이 곧 부정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부정은 어떤 사태가 단순히 부정되었다고 해서 없어지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나무위키를 단순히 감각적으로 바라 볼 때 나무위키를 단순하게 ‘이것’ 이라 표현했다 한다면, 이는 가장 개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각적으로 치부한 이러한 인식유형은 조금 엄밀하게 분석하면 부정된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것으로 표현된 ‘이것’은 아주 보편적인 의미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금’과 ‘여기’라는 단어에는 시간성과 공간성을 포함하기 떄문에 내 방에서 밤늦은 시간에 나무위키의 이상한 내용을 수정하며 문서를 작성하는 것도 ‘지금’과 ‘여기’라 할 수 있고 내가 내방을 나가서 아침시간에 PC방에서 타이핑을 하며 문서를 작성하는 것도 그때 시점에서는 ‘지금’과 ‘여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단순히 개별적으로 표현했다고 치부한 ‘이것’은 모든 것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의미를 포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헤겔에게 있어서 이러한 감각적 확신의 인식형태에서 이러한 부정은 단순히 부정되어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차원의 인식형태에 이행 될 때, 가령 경험적인 지각의 인식유형에서 논의될 때 감각적 확신에서 부정된 내용은 이미 지각의 대상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것이 이성이라는 것은 고전 그리스 철학부터 이어진 유산이다. 그리스 어에서 이성이란 말은 곧 언어를 뜻한다. 이것은 인류에게 공통된 인식이기도 하다. 헤겔에게서 이 이성과 언어의 작용이란 것은 부정인 동시에 긍정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인식 등을 다루던 당대 학문의 경향에 있어서, 헤겔이 말하는 지식의 참된 획득 방법은 감각이 들어오면서 앞으로 나갔다가, 이성과 언어로 이를 규정하면서 뒤로 한 번 후퇴하고, 그것은 또한 동시에 이성이자 언어이자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한 걸음 나가는 작용이다. 다른 것과 구분하면서 부정이 이루어졌지만, 동시에 그 결과로 인해 하나의 지식을 얻는다.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정반합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라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과 통하며 동시에 파르메니데스의 사상과도 통한다. 무슨 말이냐면 모든 것을 종합했다고 일컬어지는 헤겔답게 대강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이면서 말이 되는 걸 하나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변증법 요소 중 하나는 아우프헤벤이다.
○ 영향
헤겔 이후의 철학은 그게 비판이 되었든 동의가 되었든 간에 헤겔이 뿌려놓은 씨 위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스스로를 “거꾸로 선 헤겔학도”로 표현했을 만큼 변증법적 방법론을 그의 체계에 도입하고 있지만, 청년 헤겔 학파 등에 대한 그의 무지막지한 비판 덕분에 종종 헤겔 안티로 오해받기도 한다. 블라디미르 레닌, 게오르크 루카치, 테오도르 아도르노 등의 철학은 변증법적 방법론을 마르크시즘에 적용시킨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이데거를 위시한 해석학도 헤겔에게서 출발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자크 라캉과 헤겔 철학 사이의 연결점을 파악하려 시도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라캉과 헤겔 사이에도 연결고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라캉이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그 유명한 헤겔 강의를 듣고 영향을 받았으니.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전집을 읽는것보다 데이비드 흄의 저서 한 페이지를 읽는것이 더 가치있다.”는 말로 헤겔에 대한 평을 일축해 버렸다. – 그외에도 헤겔을 비판한 대표적인 철학자들을 꼽자면 에드문트 후설, 쇠렌 키르케고르, 빌헬름 딜타이, 질 들뢰즈, 칼 포퍼가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영미철학계의 주류인 분석철학에서 헤겔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분석철학이 과거 철학자들의 작업에 거의 무관심한 것은 사실이고, 명료한 글쓰기와 철저한 논증을 중시하는 분석철학의 특성상 헤겔 철학과 상극인 것도 사실이지만, 분석철학사에서 헤겔주의에 대한 비판은 꽤 빈번히 나타나는 편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초기 분석철학이 헤겔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분석철학의 출발점은 프레게가 현대논리학을 개발하고 함수 개념을 언어 분석에 사용한 것인데, 프레게는 수학자로서 그의 작업이 칸트라면 몰라도 어떤 식으로든 헤겔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힘들다. 비트겐슈타인은 공학도 출신으로, 말년에 가서야 플라톤의 저작들을 읽어봤을 정도로 기존의 철학적 전통에 철저히 무관심했다. 논리실증주의의 형이상학 비판도 경험적 내용을 갖지 않는 기존 형이상학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이었지, 헤겔을 딱 집어서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헤겔주의가 분석철학에 미친 영향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러셀과 무어가 영국의 헤겔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한 일도 있었고, 러셀, 무어, 화이트헤드 등이 따랐던 신실재론 및 인식론적 일원론의 관점은 독일 관념론과 헤겔 철학을 비판하면서 탄생했다.
이후 분석철학에서도 헤겔을 분석적 방법으로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는 사람도 나타났는데, 이런 경향은 과거의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딱히 헤겔에 대해서만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연구자들은 헤겔의 관념론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의미의 재구성에 대한 부분을 주로 건드리고 있다. 가끔씩은 헤겔의 대논리학을 분석철학적 방법론으로 연구하는 경우도 있고.
좀 다른 이야기지만 동양 철학과 헤겔을 연결시켜보려는 시도도 있다. “의식의 절대적 도야”를 목표로 삼은 헤겔과 동양 철학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해보려는 것이다. 임석진의 “정신현상학” 번역본을 보면 헤겔철학과 동양사상의 접점으로 이끌 만한 논의들에 대해 제법 다양한 주석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확고한 목적론을 지닌 헤겔 사상을 무정형의 변화를 기본으로 하는 동양사상에 대입하는 것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어려운 것이라 하겠다.
한편 헤겔 철학은 한국과 일본의 운동권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양국의 운동권 대학생들은 마르크스주의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헤겔주의에 대한 지식 역시 함께 습득했는데, 이때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의 단계, 즉 주인-노예의 변증법이라는 구조가 마르크스주의적 운동의 대안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한국에서 헤겔 사상이 독재정권에 의해 어용철학으로 악용당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저항의 과정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활용되기도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점이다.
○ 비판
그의 사상은 국가, 종교, 철학을 아우르는 하나의 원리를 지향한다. 그래서 헤겔은 프로이센이라는 국가와 프로이센의 개신교 교리를 자신의 철학과 조화시키고자 했다. 헤겔의 철학은 국가를 절대정신이 구현된 완전한 전체로 보는 것은 물론, 프로이센이야말로 그러한 이상이 잘 실현된 보편국가라고 주장하였다.
국가를 긍정적으로 보는 헤겔의 철학은 프로이센 정부의 입맛에 매우 맞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프로이센 정부는 헤겔 철학을 권장하고 활용하였다. 이러한 헤겔 철학을 비판한 마르크스를 비롯한 청년헤겔학파들이 프로이센 정부의 탄압을 받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나폴레옹 프랑스 시기에 출간된 그의 초기 저서 ‘정신현상학’이 부정적 사고를 전제로 하는 변증법 개념을 전면에 도입했다는 점에서 그는 일면 진보적 철학자로 여겨졌으나, 말년에 프로이센의 새로운 지배층 육성을 위한 베를린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법철학’을 출간해 헤겔이 프로이센 독재를 옹호하는 관제 철학자가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어왔다. 이 논쟁은 그의 사후, 헤겔학파가 좌우파로 나뉘어지며 매우 중요한 쟁점이 된다.
그의 철학은 너무나도 낭만적이며 몽상적이라는 점 또한 그가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특히 그의 낭만적인 경향은 그와 교류했던 셸링이나 횔덜린 등의 낭만주의자들보다 한 발 앞서 나가는 수준인데, 대부분의 낭만주의자들이 신을 지향하면서도 결코 신에게는 이를 수 없다는 낭만적 아이러니를 중시한 것에 비해, 헤겔은 말 그대로 철학사의 운동을 통해 인간이 신과 같아질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포퍼는 마르크스주의를 싫어한 만큼이나 헤겔주의 역시 싫어했는데, 헤겔을 플라톤과 함께 전체주의를 정초한 권위주의적인 학자라고 비판했다. 실제로도 한국의 독재정권은 헤겔 철학을 어용 철학으로 악용했고, 심지어는 북한의 주체사상조차도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헤겔주의의 정신적 측면을 수용한 것이니 그런 비판도 받을 법하다. 또한 그는 헤겔이 칸트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헤겔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관념의 세계였고, 그가 자연을 탐구한 철학자가 아니었던 것에서 비롯된다. 그는 당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던 과학적 성과들에 집중하기보다 정신적인 관점에서 자연을 보았고, 그렇게 정립된 관념 체계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려 했다. 애초에 현실을 관념에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관념을 현실에 적용시킨 것이니 현실성에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쇠렌 키르케고르도 헤겔 비판에 한몫 했다. 아니 그의 책 상당수가 헤겔을 중심으로 근대철학을 까는 내용이다. 까는 요지는 보통 이렇다. 헤겔을 필두로 한 근대철학은 윤리를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는데, 이게 사람들에게 퍼지면서 모두 자신의 양심보다는 어떤 행동이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서 옳은지만 찾게 되었다. 그래서 개개인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하지 않은 채 역사 탐구에만 몰두하고, 심지어는 역사의 일부분을 축소하거나 과장하여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이것들에 대한 반대급부로, 현실에 존재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세계관을 들고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실존주의이다.
아도르노는 헤겔 비판을 총체적으로 완성한다. 아도르노는 헤겔철학의 핵심인 ” ‘정반합의 결과로 얻어진 절대 정신’은 다수의 헤게모니 (패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헤겔철학은 필연적으로 ‘절대 정신을 가진 대다수’와 ‘그렇지 못한 소수’로 나뉘어지게 되며, 소수의 비판은 다수의 절대 정신에 덮혀서, 이로 인한 ‘소외와 배제가 발생’한다. 아도르노는 이런 헤게모니화된 헤겔의 논리로 인해, 나치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고 극렬히 비판하였다.
○ 저서 및 관련문헌들
– 저서 (생존시 출간)
《피히테와 셸링 철학체계의 차이》,(Differenz des Fichteschen und Schellingschen Systems der Philosophie, 1801) / 임석진 역(1989)
《정신현상학》, (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 / 임석진 역(1983), 허우현 역(1970)
《대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 1812-16) / 임석진 역(1994), 임석진 역(1982)
《철학강요》, (Enzyklopädie I-III, 1830) / 서동익 역(1983), 김계숙 역(1955), 전원배 역(1954)
1권 논리학
2권 자연철학 / 박병기 역(2008)
3권 정신철학 / 박병기 역(2000)
《법철학》,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820) / 임석진 역(1990), 윤용탁 역(1976), 이동춘 역(1976), 윤용석 역(1972)
– 저서 (사후 출간)
《종교철학》(Philosophie der Religion) : 청년 헤겔의 신학론집(정대성 역, 2005), 김종호 역(1972)
《역사철학강의》,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I-III, 1817) : 임석진 역(1987), 정영오 역(1983), 김종호 역(1970)
《미학》, (Ästhetik), 호토 전면 재편집, 두행숙 역, 1996.
1820/21년 강의 : ‘예술철학으로서 미학(Ästhetik als Philosophie der Kunst)’, 아셰베르크 기록, 국내 미출간
1823년 강의 : 《헤겔 예술철학》(Vorlesungen uber die Philosophie der Kunst), 호토 기록, 한동원 역, 2008.
《세계사의 철학》, (Philosophie der Weltgeschichte, 1824-31).
《인륜성의 체계》, (1802-03) : 김준수 역
《김나지움 논리학 입문》, (1808-11) : 위상복 역
《철학사》(Geschichte der Philosophie) : 임석진 역
《역사속의 이성》(Die Vernunft in der Geschichte) : 임석진 역(1976)
《믿음과 지식》 : 황설중 역
《헤겔 예나 시기 정신철학》 : 서정혁 역(2006)
《행성궤도론》 : 박병기 역(2003)
《변증법과 회의주의》 : 황설중 역(2003)
《교수 취임 연설문》 : 서정혁 역(2004)
《자연법》 : 김준수 역(2004)
– 헤겔 소개서
쿠르트 슈타인하우어, 헤겔 연구서적 (Kurt Steinhauer, Hegel Bibliographie. Materialien zur Geschichte der internationalen Hegelrezeption und zur Philosophiegeschichte, München 1980).
오토 푀겔러 (Otto Pöggeler), 헤겔철학 입문, 1977, 뮌헨.
로젠크란츠 (Karl Rosenkranz), 헤겔의 생애, 1969, 다름슈타트.
○ 부록 : 헤겔주의 (Hegelianism)
헤겔주의 (독: Hegelianer, 영: Hegelianism)는 협의에는, 1830년대를 중심으로, 독일 관념론의 철학자 헤겔에 직접 사사 혹은 다대하게 영향을 받아 그의 철학이 유파를 이어받고, 철학을 전개한 사람들의 일로이다. 당시는 대체로 70명의 학자가 일원이 되고 있었다. 광의에는, 헤겔 철학에 어떠한 형태로 영향 혹은 연구를 한 사람의 일로, 전술의 제1차의 그룹 외, 19세기 후반의 제2차, 20세기 전반의 제3차 (신헤겔주의),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나중에 현재에 이르는 제4차 그룹이다. 또, 파벌을 고집하지 않고, 헤겔 철학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사람도 포함되기도 한다. 영어권의 학자의 경우는, 영어 읽기의 헤겔리언으로 불리기도 한다. 단지, 통상은 헤겔주의라고 칭했을 경우, 1830년대에 등장한 제1차의 것을 가리킨다.
– 헤겔주의의 탄생
헤겔의 사후, 1835년에 헤겔주의 신학자 다피트 스트라우스에 의해서 쓰여진 ‘예수의 생애’의 견해에 의해서, 헤겔주의가 분열했다 (이 근처의 사정은 청년 헤겔파의 항 등을 참조). 스트라우스는 ‘예수의 생애’에서 주장된 것과 같은 기독교의 해석을 인정하는 것이 좌파 (청년 헤겔파),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중앙파, 부정하는 것이 우파 (우 헤겔주의)로 구분했다. 이 시기, 헤겔주의에 속하고 있던 학자는 70명 이상에 달했다. 덧붙여 파벌의 구분은 반드시 엄밀한 것이 아니고, 파 내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물은 것이었다.
그 후, 주도적으로 된 것은 청년 헤겔파이며, 젊은 마르크스도 여기에 일원이 되고 있었다. 그 후 우파는 충실히 헤겔의 저작의 간행, 학설의 해설 등에 노력했지만, ‘죽어가는 개’가 되고 있는 헤겔의 철학을 고집해, 정치적으로도 시대의 궤도에 오르는 것이 늦었다. 또 중앙파는 그 후, 헤겔의 생각에 준거하고, 철학사의 편찬에 종사했다. 이와 같이 분열 후, 여러가지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우파, 중앙파는 그 후 맥들 헤겔의 철학의 전승에 의무 19세기 후반의 제2그룹에 계승했다. 좌파는 정치적 · 역사적인 본연의 자세를 둘러싸고, 조속히 파로서의 통일성을 잃어, 1840년대 반에는 소멸하며 갔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후 다양한 학자에 의해서,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는 표현을 해야 한다.
– 일반적 고찰
.헤겔이 남긴 문제
독일 관념론의 정점인 헤겔의 철학체계는 철학의 모든 문제를 통일적으로 해결하려는데 있다. 헤겔은 특수한 관점을 뛰어넘는 사변적 관점으로 유일한 진리를 파악해야 하고 논리학 · 형이상학 · 자연철학 · 법철학 · 역사철학 · 예술철학 · 종교철학 등 철학의 모든 문제를 본래의 중심으로 되돌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태도는 내용과는 무관한 형식적 방법을 뛰어넘는 것이며 실재의 총체인 절대자, 즉 단순히 실체가 아니라 주체로서 절대자의 실질적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다. 절대자는 처음에는 자신의 내적 의식의 직접성 속에서 스스로를 정립하고, 다음에는 이러한 정립 행위를 부정하고, 마지막으로 유한 세계를 구성한 앞의 부정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복귀한다. 이러한 보편적 체계는 역사와 문화의 모든 문제에 대한 고려에 철학을 끌어들인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으나 동시에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는 요소들의 자율성을 박탈해버렸으며 모든 것을 절대정신의 자기 추구 과정이라는 한 과정의 상징적 현현으로 환원해버렸다. 더욱이 종교와 정치 문제 등 시대의 긴급한 문제들과 관련해서 이러한 대립물 사이의 사변적 매개는 결국 가장 시급한 이데올로기적 요구를 회피하는 결과를 가져와 모호하다든가 기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헤겔 해석의 역사적 단계들
헤겔주의의 발전은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1827~50년으로 독일에서 헤겔 학파가 직접적 위기에 직면한 시기이다. 이때 헤겔 학파는 헤겔 우파, 헤겔 좌파, 헤겔 중간파로 갈라졌다. 헤겔의 제자들로 구성된 헤겔 우파는 헤겔 철학이 자유주의적이고 범신론적이라는 비난에 맞서 헤겔주의가 복음적 정통 및 보수정책과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 헤겔 우파는 노년 헤겔 학파 또는 노년 헤겔주의자라고도 한다. 대부분 헤겔의 간접적 제자들로 이루어진 헤겔 좌파는 변증법을 ‘운동의 원리’라고 생각했으며 헤겔이 이성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동일시한 것을, 반동세력이 정당화 하고 있던 문화적·정치적 현실을 개혁하여 이성적인 것으로 만들라는 명령이라고 해석했다. 따라서 헤겔 좌파 또는 청년 헤겔 학파는 헤겔주의를 혁명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헤겔 중간파는 특히 논리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헤겔 체계를 그 발생과 의의의 측면에서 탐구하는 데 주력했다. 2단계는 헤겔주의가 다른 나라로 확산되고 중간파의 저작이 지배적인 역할을 한 시기이다. 신헤겔주의 단계로 불리기도 하는 이 단계에서는 변증법의 수정과 논리학이 주요관심사였다. 빌헬름 딜타이가 헤겔의 청년 시기의 미발표 원고를 발견한 뒤 독일에서는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헤겔 르네상스 시대라고 불리는 이 3단계는 문헌학에 대한 관심, 원본 발간, 역사적 연구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 단계에서는 헤겔 사상의 발생을 재구성하는 것이 강조되었고 특히 헤겔 사상의 문화적 모체인 계몽주의와 낭만주의가 중시되었다. 4단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데, 이때는 유럽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되살아나면서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특별한 고려 속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관계와 마르크스주의에 전해진 헤겔 유산의 가치에 관심이 모아졌다.
– 초기 헤겔 학파의 발전
초기 헤겔주의의 발전은 지배적인 관심사가 무엇이었냐에 따라 헤겔이 살아 있을 때의 논쟁 (1816~31), 종교 분야에서의 논쟁 (1831~39), 정치토론 (1840~44)의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헤겔이 살아 있을 때의 논쟁 (1816 ~ 1831)
이 시기의 논쟁은 헤겔 학파 내에서의 논쟁이 아니라 주로 사변적 유신론자들, 요한 헤르바르트와 그 추종자들, 요제프 폰 셸링의 제자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등 다양한 진영과 헤겔의 논쟁이었다. 헤르바르트는 헤겔이 합리론자인 바뤼흐 스피노자의 일원론과 지식 일반의 가능 조건을 탐구한 칸트의 선험주의를 뒤섞어놓았다고 비난했다. 헤겔은 자신의 제자 헤르만 힌리히스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쓴 책의 서문에서 신앙과 이성은 내용에서는 같고 형식만 다를 뿐이라고 말했다. 즉 신앙에서는 표상이, 이성에서는 개념이 핵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헤겔 우파의 기관지인 ‘과학적 비판 연보’ (Jahrbücher für wissenschaftliche Kritik, 1827 창간)에 실린 8편의 논문이었다. 그중에는 헤겔이 예상과는 달리 철학과 복음적 정통이 양립할 수 있다는 테제에 찬성하는 내용의 비평문과 헤르바르트의 주장에 간접적으로 응답한 비평문이 있다. 라이프치히의 크리스티안 바이세와 이마누엘 피히테와 같은 사변적 유신론자들은 헤겔 철학을 범논리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사고와 경험을 자유로운 신, 즉 창조주의 개념 속에 통합하라고 제안했다. 헤겔의 가장 충실한 제자로는 헤르만 힌리히스와 카를 로젠크란츠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신앙과 이성의 문제에 대한 헤겔의 해결을 옹호했다.
.종교논쟁 중심기 (1831 ~ 1839)
헤겔이 죽자 논쟁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복고 체제인 독일은 정치 토론의 개방을 금했기 때문에, 논쟁은 종교 영역으로 이동했고 영혼불멸론·그리스도론·일반 신학 등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헤겔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죽음과 불멸에 대한 고찰’ (Gedanken über Tod und Unsterblichkeit, 1830)을 출간했다. 이 저작은 헤겔 체계가 범신론이라는 비난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범신론자이자 종교 비판가인 요한 프리드리히 리히터가 2권의 책을 출간하자 마침내 헤겔의 제자들이 나섰다. 그들은 수많은 변증법적 개념을 동원해 헤겔의 주장을 영혼불멸에 관한 전통적 주장과 화해시키려 했다.
영혼불멸에 관한 논쟁에서는 제대로 드러날 수 없었던 역사적 견해 차이가 성서 해석자이자 급진적 신학자인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의 ‘예수 생애의 비판적 연구’ (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 1835~36)의 출간을 계기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성서 비평으로 얻은 관점에 서서 그리스도 본성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했다. 즉 그리스도론은 이제 더이상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원래 자료를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가, 그리고 문명 발전에서 그것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다. 복음의 설명은 신화와 얽혀 있다. 신화는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시적 집단활동의 산물이다. 신화는 부분적으로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의 산물이고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기억의 산물이고, 부분적으로는 현실적인 요소들이 변형된 결과이다. 신화의 목적은 철학과 종교의 내용이 같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고 유일한 진리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유일한 진리란 그리스도가 상징하고 있는 모든 인류의 정신 속에 나타나 있는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이 똑같다는 것이다. 슈트라우스의 저작은 활발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따라 우파 (괴셸과 몇몇 사람들) · 중간파 (로젠크란츠) · 좌파 (슈트라우스)로 갈라졌다. 반헤겔 진영의 바이세는 ‘복음의 역사’ (Die evangelische Geschichte, 1838)에서 슈트라우스처럼 복음의 이야기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신비적이고 범신론적인 견해와는 달리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로고스의 육화 (肉化)로 해석할 것을 제안했다.
한편 브루노 바우어는 복음 정통파 에른스트 헹스텐베르크와의 논쟁과 자신의 저서 ‘계시의 역사에 대한 비판’ (Kritik der Geschichte der Offenbarung, 1838)을 통해 좌파로 들어갔다. 1838년에는 좌파의 최초 기관지 ‘독일과학과 예술을 위한 할레 연보’ (Hallische Jahrbücher für deutsche Wissenschaft und Kunst)가 아르놀트 루게와 에히터마이어의 공동 편집으로 창간되었다. 처음에 이 잡지는 온건한 목소리를 유지했으며 중간파와 우파 헤겔주의자들도 글을 기고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루게가 청년 헤겔주의자들을 비난하던 사람을 공격하고 포이어바흐가 초기 헤겔주의자들을 공격하자 이 잡지는 민주주의적 자유주의 진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포이어바흐는 헤겔주의가 진리로 입증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감각적 현실과 지적 개념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을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겔주의 변증법은 세계와의 참된 매개를 상실한 ‘자신과의 독백’임이 드러났으며 헤겔 철학은 ‘이성적 신비’일 뿐이라고 포이어바흐는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이제 필요한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논리학과 형이상학 분야의 문제들과 관련해서는 요제프 폰 셸링에게로 관심이 모아졌다. 셸링의 영향을 받은 반헤겔적 비판들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들은 자율적 운동을 부여받은 순수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는 타당한 철학을 세울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셸링은 실재 자체를 발전의 주체로 볼 것을 제안했다.
.무신론적 · 정치적 급진주의 시기 (1840 ~ 1844)
고전 철학자이자 문헌학자 프리드리히 아돌프 트렌델렌부르크는 ‘논리 연구’ (Logische Untersuchungen, 1840)에서 헤겔 논리학에 대해 중요한 비판을 가했다. 헤겔의 견해에서는 존재에서 무, 무에서 생성으로의 이행이 논리학의 ‘전제 없는’ 순수한 출발점으로 정립될 수 있다. 그러나 트렌델렌부르크가 볼 때 이러한 이행은 의심스러운 경험적 전제를 그럴 듯하게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또 그는 헤겔이 A와 부정 A (~A)의 논리적 대립 혹은 모순을 A와 B 사이의 실재적 모순 혹은 반대와 혼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셸링은 신화학과 계시를 바탕으로 한 ‘적극 철학’을 계속 내세웠다. 따라서 셸링의 후기 철학은 좌파의 모든 비판의 과녁이 된 동시에 사변적 유신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셸링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고 실존주의의 창시자가 된 쇠렌 키르케고르의 종교적 개인주의는 헤겔주의가 독일 밖으로 확산되면서 나타난 가장 초기의 중요한 사상이다. 그는 헤겔이 모든 대립을 변증법적으로 조화롭게 화해시키려는 동기를 갖고 있었고 삶의 진정한 이율배반에 대한 보편적·범논리주의적 해결을 모색하는 데 전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이율배반이 단독자로서 개인의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고 개별적 인간은 결코 일반화될 수 없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이나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합리적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인간의 구원은 사변철학의 합리적 가치들의 역설적인 전도 (顚倒)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도약’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현존재로서 인간 조건의 특징을 이루는 문제들은 어떠한 다른 용어로도 환원될 수 없다는 키르케고르의 주장은 실존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이 시기에 중간파는 논리학과 역사 기술 분야에서 헤겔 체계를 수정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 인물인 쿠노 피셔는 변증법에서 존재와 무가 똑같이 정태적이고 상쇄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현실 운동은 존재와 무의 관계 속에 끼어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존재는 사고하는 존재로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등장하는 신헤겔주의 운동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견해에 응답하려는 시도의 결과였다.
1840년에 이르러 독일의 상황은 다시 보수화되어 자유언론과 반헤겔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운동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급진적으로 만들었다. 포이어바흐는 주요저서 ‘그리스도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s, 1841)에서 철학적 인간학을 확립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신적 속성으로 절대화된 인간 속성이 소외된 상징으로 해석했으며 신 · 삼위일체 · 성사 · 신앙 등의 개념에서 발견되는 신학의 모순들을 비판하면서 ‘인간이 인간에 대해 신이다’라는 명제를 최상의 원리로 하는 ‘새로운 종교’를 통해 인간 본질을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 브루노 바우어는 슈트라우스의 범신론적·신비적 실체 개념을 거부하면서 복음은 최초 공동체의 무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정신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정신의 자기의식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1841~43년 독일 정부의 탄압 조치가 더욱 강화되어 브루노 바우어와 포이어바흐는 강의를 할 수 없었고 루게는 라이프치히를 떠나 프로이센에서 ‘할레 연보’ (Hallische)를 발간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그는 잡지의 이름을 ‘독일 연보’ (Deutsche Jahrbücher로 바꾸었음). 그러나 이 시기에도 루게는 주요한 저작 ‘헤겔 법철학과 우리 시대의 정치’ (Die Hegelsche Rechtsphilosophie und die Politik unserer Zeit, 1842)를 펴냈다. 이 책에서 루게는 헤겔의 정치적 보수주의를 비난했으며, 헤겔의 사변적 이성은 현존 질서를 인정하고 현실을 개혁하려는 모든 노력을 배제하는 동시에 프로이센 국가를 이상국가의 전형으로 절대화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공격했다. 루게의 잡지는 1843년초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루게는 그해 3월 스위스에서 ‘최근 독일 철학과 정치적 저널리즘에 관한 일화집’ (Anekdota zur neuesten deutschen Philosophie und Publicistik)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바우어 · 루게 · 마르크스 · 포이어바흐 등의 글이 실려 있다.
다른 한편 포이어바흐는 ‘미래 철학의 근본 원리’ (Grundsätze der Philosophie der Zukunft, 1843)에서 사변철학의 방법은 주어와 술어를 전도함으로써 추상적인 것을 실체화하고 구체적인 것을 추상의 ‘논리적 우연’이나 속성으로 취급한다고 비판하면서 헤겔 철학의 부정을 통해 인간 본질을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헤겔 좌파는 서서히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프리드리히 엥겔스, 막스 슈티르너, 브루노 형제 등을 중심으로 한 ‘자유 베를린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사회적·역사적 문제들을 겨냥하면서 자기의식의 철학을 전개했다. 다른 한편에는 루게를 포함해 언론인 모제스 헤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카를 마르크스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아 급진주의를 표방했으며 당시 등장한 사회주의를 수용했다. 따라서 이들은 헤겔을 끌어들여 당대의 정치적 · 문화적 · 철학적 상태를 비판했다. 본래 바우어의 친구였던 마르크스는 좌파의 민주 계열에 속해 있었다. 마르크스는 1843년에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서 헤겔이 프로이센 국가를 이상국가로 절대화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헤겔 국법론 비판’ (Kritik der hegelschen Staatsrechts, 1843 여름, 1929)에서 헤겔이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관념적으로 파악하는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했다. ‘184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 (독어판 1932)에서는 이미 헤겔 변증법이 선험적 성격을 띠고 있고 현실과 관련해 전도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구체적·역사적 현실을 신비화하고 소외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공격의 화살을 자신의 과거 동료들이던 헤겔 좌파에게로 돌려, ‘신성가족’ (Die heilige Familie, 1845)에서는 바우어를, ‘독일 이데올로기’ (Die deutsche Ideologie, 1845~46)에서는 슈티르너를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만드는 것이 관념이고 관념론으로 혁명운동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본 바우어와 슈티르너를 비판하고 역사적 유물론을 제시했다.
– 19세기 후반 헤겔주의의 발전과 확산
독일에서는 19세기 후반 들어 헤겔주의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현실론과 신칸트주의 및 실증주의는 헤겔주의의 몰락을 재촉했다. 그러나 역사주의의 초기 대표자들의 이론은 여전히 헤겔주의의 영향을 보여주었다.
.정치적 · 문화적 문제 (동유럽과 미국)
헤겔주의의 확산은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정치적·문화적 문제들과 관련해 헤겔주의의 경험은 동유럽과 러시아에 수용되었는데, 폴란드의 종교사상가 아우구스트 키스초프스키, 유신론적 형이상학자 브로니슬로 트렌로프스키, 러시아의 문학비평가 비사리온 베린스키, 혁명적 작가 알렉산드르 헤르첸,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혁명가 마하일 바쿠닌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또 프랑스에서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과 같은 헤겔주의적 사회주의자도 등장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헤겔주의의 정치적 측면과 역사철학이 관심을 끌었다. 미국의 헤겔주의도 독일의 경우처럼 보수적 경향과 혁명적 경향으로 갈라져 각각 세인트루이스대학교와 신시내티대학교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문제 (이탈리아와 영국)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문제와 관련해서 헤겔주의는 이탈리아와 영국에 수용되었다. 이탈리아의 자유주의 철학자 베르트란도 스파벤타와 동료들은 종교적 독단론에 맞서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헤겔주의를 끌어들였다. 스파벤타는 헤겔 논리학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을 제안했다. 그의 시도는 20세기초의 관념론자 조반니 젠틸레에게 영향을 주어 헤겔주의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을 낳는 바탕이 되었다. 영국 헤겔주의의 선구자는 제임스 허치슨 스털링이었다. 스털링은 ‘헤겔의 비밀’ (The Secret of Hegel, 1865)에서 쿠노 피셔가 ‘칸트에서 헤겔까지’ 추적한 사상 계열을 재확인했으며 다양성 속에서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적·사변적 관계를 변증법의 핵심으로 관철하려 했다. 그밖에도 토머스 힐 그린, 존 케어드, 에드워드 케어드 등이 윤리·종교 문제에 헤겔주의를 끌어들였다.
– 20세기 전반의 헤겔주의
이 시기에도 헤겔주의는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영국과 이탈리아의 신헤겔주의
영국에서는 헤겔의 논리학에 관한 뛰어난 저작들이 출간되었다. 버나드 보즌켓과 존 엘리스 맥태거트는 헤겔의 저작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현실과 실재’ (Appearance and Reality, 1893)의 저자인 프랜시스 허버트 브래들리였다. 그는 관계들의 범주에 대한 비판을 통해 현상과 실재의 이원론을 주장했으며 사고를 통해 실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브래들리의 이와 같은 회의적 관념론은 미국의 절대적 관념론자 조사이어 로이스에게 영향을 주어 ‘세계와 개인’ (The World and the Individual, 1900~01)을 쓰게 했다. 영국의 신헤겔주의에서는 헤겔주의가 언제나 경험적 전통에 가까운 실험주의의 방법을 세련되게 하는 데 이용되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신헤겔주의가 실증주의의 전파에 대한 유심론적 반동의 형태를 띠고 등장했다. 이러한 반동은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한 방향은 베네데토 크로체의 역사주의였고, 다른 한 방향은 조반니 젠틸레의 활동주의 (actualism)였다. 크로체는 ‘헤겔 철학에서 산 것과 죽은 것’ (Ciò che è vivo e ciò che è morto della filosofia di Hegel, 1907)에서 대립물의 통일의 필요조건으로 헤겔의 변증법을 받아들이면서도 변증법의 체계는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헤겔의 체계는 실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를 뿐인 지식 형태들을 대립시킨다. 각각의 지식 형태는 고유한 영역 내에서 극복해야만 하는 변증법적 대립물을 갖고 있다. 따라서 자연철학과 역사철학의 가능성은 부정된다. 젠틸레는 행동의 생생한 변증법적 발전이 모든 객관적 사실보다 우위에 있다고 봄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역설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모든 고정된 견해를 그 대립물로 변형할 수 있는 온갖 가능성을 이용하는 절대적 주관주의를 끌어냈다.
.독일과 프랑스의 헤겔 르네상스
1905년 딜타이가 헤겔의 청년기 초고들을 재검토하고 헤르만 놀이 ‘청년 헤겔의 신학 논문들’ (Hegels theologische Jugend schriften, 1907)을 펴냄으로써 독일에서는 헤겔의 청년기 저작과 성숙기 저작을 비교하는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헤겔 학자들은 헤겔 체계보다는 윤리학·종교·역사 등에서 여러 문제를 다루는 데 매달렸다. 그러나 해석학적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특히 헤겔 철학과 변증법의 출발점 문제에 주목했다. 뒤이어 헤겔의 지적 문화의 역사적 모체인 후기 계몽주의와 초기 낭만주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 연구의 출발점이 된 것은 헤겔의 청년기 저작의 비합리주의적 측면을 지적한 딜타이의 글이다. 뒤이어 프란츠 로젠츠바이크는 ‘헤겔과 국가’ (Hegel und der Staat, 1920)에서 청년 헤겔의 정치사상을 발생학적으로 재구성하고 헤겔이 루소의 영향 때문에 ‘독일의 민족 철학자’가 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프랑스의 형이상학자·철학사가 장 발은 헤겔을 실존적으로 해석했다. 독일의 리하르트 크로너는 낭만주의와의 관련 속에서 칸트부터 헤겔까지의 발전을 연구했다.
– 오늘날의 헤겔주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가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거듭 접촉하게 되면서 헤겔주의의 정치적·윤리적·종교적 함축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독일의 역사·문화 철학자 카를 뢰비트는 헤겔을 현대 사상이 직면한 ‘역사주의적’ 위기의 진원지로 본다.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헤겔을 하이데거와 결합하려 하면서 ‘정신현상학’을 모든 소외로부터 ‘노예인 인간’의 해방을 알리는 선언으로 재해석할 것을 제안했다. ‘정신현상학’에 대한 뛰어난 주석서를 쓴 장 이폴리트는 예나 시대의 헤겔에 관한 인문주의적 해석을 제시한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기 헤겔의 변증법을 되살리고자 했고,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헤겔 좌파의 견해에 가까우며 신낭만주의적 무정부주의라고 비판받는 이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헤겔 해석에 관심을 보인 것은 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엥겔스는 헤겔 철학의 방법과 체계 사이의 모순, 즉 혁명적 ‘운동원리’인 변증법과 관념론적·보수적이기 때문에 반동적 성격을 띠는 체계 사이의 모순을 지적했는데, 마르크스주의의 헤겔 해석은 강조점의 차이만 있을 뿐 대개 이 해석을 추종해왔다. 게오르크 루카치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나치즘의 낭만적이고 비합리주의적 전제를 폭로하기 위해 계몽주의와 민주주의를 재평가했다. 루이 알튀세는 마르크스를 구조주의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을 일시적인 포이어바흐적 단계로 보며,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사회의 구조에 대한 과학적 관찰을 통해 이 단계를 뛰어넘었다고 주장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