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30년 전에 만났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처음 만난 것은 제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한 의료선교단체의 간사 일을 할 때였습니다. 그 때 제가 일하던 단체에 소속해 있었던 한 여자 의료선교사(간호사)가 방글라데시에서의 5년간의 선교를 끝내고 막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의료선교사가 한국에 다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의료선교사는 저에게 고맙다며 책 한권을 선물해 주었는데 그 책이 바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습니다. 그 때 20대 중반의 저는 신영복 씨가 어떤 분이었는지도 자세히 몰랐고, 선물한 사람의 정성과 제목의 신선함에 끌린 나머지 무심히 몇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수필조의 그의 글은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임에도 깊은 철학적 사색이 담겨있었고 인생의 깊은 경륜이 담겨있는 글임을 20대의 철없는 젊은이가 보기에도 금방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쉽게 읽혔지만 결코 쉽게 넘어가지지 않는,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인생과 인간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글이었습니다. 3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그 책의 내용중 어떤 것은 아직도 저의 기억에 또렷하게 박혀 있습니다.
두 번째 만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작년 “인문학과 책이야기” 강의에서 저희 ‘인문학친구들’이 공통의 책을 함께 읽고 나누자는 제안이 실천되어 저희 인문학친구들이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책으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선정되었습니다. 정확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30년만에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 초판으로 햇빛출판사에서 나왔던 책은 지금 증보판의 반 분량 밖에 되지 않은 부피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거두절미하고 저는 많은 내용이 증보된, 어떻게 보면 초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책의 분량에 놀랐으며, 20대에 만났던 신영복과 50대에 만나는 신영복은 또 다른 인생의 무게로 다가오기에 충분했습니다. 신영복 선생도 그런 말을 합니다. “독서는 삼독입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독자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저는 30년 만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다시 접하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지금 저의 삶에서 벌어지는 현실적인 아픔 때문인지 더 구구절절이 그의 글들은 제 가슴을 저미며 들어왔습니다. 가슴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제 짧은 생각으로 벌어졌던 일들이며, 얕고 유치한 행동들, 함부로 낭비했던 시간이며, 제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고 회한과 성찰이 책을 읽는 가운데 반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인문학
인문학의 목표는 키케로에 의하면 “인간으로 도달해야 할 가장 최선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다시 쉽게 말하면, 인문학은 “자기성찰”을 통하여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 실제 우리 삶에서 인간다운 탁월함(덕, 욕기, 성품 등)을 추구하는 것이 인문학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면 단어와 문장이 평이하지만, 행간에 숨어있는 그의 절제된 언어에는 인간의 깊은 고뇌와 치열한 성찰이 녹아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27세의 나이에 감옥에 들어가 사형수에서 무기징역수로 경감받고 정확히 20년 20일을 감옥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분이 이렇게 평화스럽고 편안한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 인생을 달관한 경지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영복 선생이 그가 ‘담론’에서 한말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입니다. 나는 20년의 수형 생활 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완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담론, p.14)
신영복 선생은 감옥에서 마치 “도”를 닦은 도인과 같이 느껴집니다. 아니 인문학적 표현을 빌자면 그는 감옥에서 인간으로서 도달해야 할 가장 최선의 상태에 대해 깨닫고 도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랬다고 확신합니다. 성공회신대에서 같이 가르쳤던 김창남 선생(더불어 숲 이사장)은 신영복을 이렇게 그립니다.
“그분을 책으로만 접한 독자들은 오랜 감옥 생활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치열한 정신으로 벼려내 마침내 세상을 달관하는 경지에 이른 고고한 선비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분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어울렸던 사람들은 이 고고한 선비가 보여주는 뜻밖의 편안함과 따뜻함, 격의없는 소탈함에 놀라게 됩니다. 고고한 선비의 모습과 소탈한 생활인의 모습, 선생은 한 몸으로 이 두 가지의 모습을 아무런 모순 없이 자연스럽게 보여주셨고, 그렇게 우리는 신영복이라는 거울 속에서 참된 스승과 좋은 친구의 모습을 함께 만날 수 있었습니다.”(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pp.6-7)
신영복은 감옥에서 인간이 도달해야 할 가장 숭고하고 최선의 상태를 깨달은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한 글자 한 글자 그리고 행간에 숨어있는 그의 정제된 침묵속에는 그 어떤 말보다도 인생의 많은 의미들과 케케로가 말하는 탁월함(Virtue, Arete)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실 그의 감옥편지는 검열관이 보는 앞에서 제한된 시간안에 써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편지 내용에 대해 그 시간에 골똘히 생각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편지를 쓰기 전 틈틈이 머릿속에서 편지를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고를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간수로부터 펜을 받으면 머리속에 간결하게 만들어 놓은 한 장의 편지를 막힘없이 깔끔하게 써내려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편지는 어떻게 보면 수백 번 아니 수천, 수만 번을 그의 머릿속에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해가며 치열한 성찰과 고민속에서 나온 그의 분신들입니다. 실제 그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노라면 평범한 일상 가운데 얻어지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살아온 우리의 우둔함을 회 한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그의 부드러운 자전적인 고백에 빨려 들어가며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모든 내용이 다 구구절절이 와 닿았지만 저는 특히 “청구회추억”(pp.31-52)을 읽으며 인간에 대한 깊은 감동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가슴 뜨거워지는 희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영복이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의 인간의 품격과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어찌나 맑고, 탁월한지, 한국에 살았을 때 왜 그를 직접 찾아가서 사사받지 못했나 후회까지 밀려왔습니다. 심지어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꼬마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초등학교 꼬마들을 제가 다 찾아주고 싶은 심정까지 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떤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가? 책을 읽으며 나도 이런 인간관계를 맺어야겠다고 이렇게 가슴 뛰어본 적은 처음일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통해본 인생의 편린들과 인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중 특히 제 인지의 세계를 넘어 가슴으로 들어왔던 글들을 적어 봅니다.
– 저마다의 진실 (p.256)
각각 다른 골목을 살아서 각각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한 방에서 혼거하게 되면 대화는 흔히 심한 우김질로 나타납니다. … 섬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지며, 산골 사람에게 해는 산봉우리에서 떠서 산봉우리로 지며, 서울 사람에게 있어서 해는 빌딩에서 떠서 빌딩으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섬사람이 산골사람을, 서울 사람이 섬사람을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 됩니다.
– 함께 맞는 비 (p.293)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 나이테 (p.381)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햇빛 한 줌 챙겨줄 단 한 개의 잎새도 없이 동토에 발목 박고 풍설에 팔 벌리고 서서도 나무는 팔뚝을, 가슴을, 그리고 내년의 봄을 키우고 있습니다.
– 여름 징역살이 (p.396)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 사랑은 나누는 것(p.424)
가운데 씨가 박혀서 좀처럼 쪼개질 것 같지 않은 복숭아도 열 손가락 잘 정돈해서 갈라 쥐고 단호하게 힘을 주면 짝하고 정확히 절반으로 쪼개지면서 가슴을 내보입니다.
하–트
복판에 도인(桃仁)을 안은 ‘사랑의 마크’가 선명합니다.
사랑은 나누는 것
복숭아를 나누고, 부채 바람을 나누고, 접견물을 나누고, 고통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고 …
26일부 편지와 돈 잘 받았습니다. 복숭아 사서 나누어 먹겠습니다.
주경식 교수(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