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홍길복 목사 강사로 ‘미국과 미국인들의 사고와 행위의 바탕을 찾아서 : Pragmatism을 중심한 미국철학 이야기 2, 3’ 11월 온라인 종강모임 가져 [강의 전문포함]
송년모임은 12월 5일 (오후 5시) 이스트우드 원산으로 장소 변경
시드니인문학교실 (The Humanitas Class For the Korean Community in Sydney)에서는 11월 모임을 4일과 18일 (목) 오후 7시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를 강사로 ‘미국과 미국인들의 사고와 행위의 바탕을 찾아서 : Pragmatism을 중심한 미국철학 이야기 (2, 3)’로 가졌다.
강사로 선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는 4일 강의 서두에 지난 시간의 강의 내용 ‘미국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 생각 사이에서의 갈등과 균형잡기’, ‘American Context’, ‘미국철학의 3대 기둥 (THREE P) : PURITANISM, PIONEER SPIRIT, PRAGMATISM’을 개관하며, ‘PURITANISM : 초기 청교도정신’에서는 ‘청교도정신의 핵심’, ‘역사적 배경’, ‘출발’, ‘초기 청교도의 출발 요약’, ‘PURITANISM (청교도 사상)’, ‘Puritanism의 부정적 측면’과 이어 ‘PIONEER SPIRIT (FRONTIER SPIRIT) : 중기 서부 개척정신’에서 ‘간단한 역사적 배경’, ‘긍정적 의미’, ‘부정적 측면’ 등을 살폈다.
이어 18일 강의에서는 ‘PRAGMATISM : 후기 실용주의와 미국인들의 사고’에서는 ‘프라그마티즘의 배경과 확장’, ‘프라그마티즘이란 무엇인가?’, ‘프라그마티즘의 대표적 이론가들 : 찰스 샌더스 퍼스 (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 1842-1910), 존 듀이 (John Dewey, 1859-1952), 리처드 로티 (Richard Rorty, 1931-2007)’ 등을 살핀 후 ‘프라그마티즘의 현대적 흐름 : 조지 리처 (George Ritzer, 1940 ~ )를 중심으로’으로 나눈후 토론과 코멘트 시간을 가졌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우리 시대 과연 사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며, 함께 그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싶어 하는 분들을 초청, 2월부터 5월까지, 8월부터 11월까지 1년 8달, 첫째와 셋째 목요일 저녁 7시부터 모임을 갖는데 지난 11월 18일이 올해의 종강모임이었다.
한편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올해 송년모임을 오는 12월 5일 오후 5시, 이스트우드 원산에서 개최한다.
– 시드니인문학교실 송년모임 안내
.일시: 2021년 12월 5일 (일) 오후 5시
.장소: 이스트우드 원산
.문의: 0430 248 201
시드니인문학교실 (11월 4일, 18일 강의 전문)
제 32 ~ 33강 미국과 미국인들의 사고와 행위의 바탕을 찾아서
(Pragmatism을 중심한 미국철학 이야기)
I. 들어가는 말
유럽적 배경을 지닌 서구인들은 우리네 동양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자세히 세분화하지 못하고 대체로 Chinese라는 틀로 묶어서 봅니다. 우리는 어딜 가든지 <Are you Chinese?>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그들은 한국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 베트남사람, 말레이시아사람을 자세히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서양사람이라면 모두 하나로만 봅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는 물론이고 보통 미국사람, 영국사람, 네덜란드사람, 독일사람, 프랑스사람, 이탈리아사람, 그리스사람, 스페인사람, 포르투갈사람, 스웨덴사람, 핀란드사람, 노르웨이사람, 덴마크사람, 러시아사람, 슬로바키아사람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냥 서양사람들은 모두 똑같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사실 셈족에 속하는 한국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 몽골사람도 모두 그 전통, 역사, 문화, 인종적 성격, 언어, 음식이 제각기 다릅니다. 이는 야벳족속인 서양의 인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모두 다른 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의 셈족, 함족, 야벳족, 힌두족, 폴리네시안, 멜리네시안, 애보리진과 다양한 아프리카인종을 비롯하여 백색인종들도 코카서스족, 라틴족, 슬라브족, 발칸족, 알프스족, 아나톨리안족, 노르딕족 등 참 많은 인종들이 있어서 제각기 다른 문화, 역사, 전통, 언어, 생활습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냥 단순하게 피부색깔 하나로만 모든 것을 묶어서 ‘똑같다’고 판단합니다.
미국사람들에게도 철학이 있는가? 미국을 비하하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좀 더 냉정해질 질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을 지나치게 높이 보거나 반대로 미국을 너무 우습게보지도 말고 좀 객관적으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럽을 중심한 서구철학과 사상사를 주로 공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다른, 뿌리는 하나라고 할수 있겠지만 가지는 전혀 다른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과 사고방식과 그에 따른 삶의 태도와 행동방식을 비롯하여 그들의 역사를 함께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II. 미국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 생각 사이에서의 갈등과 균형잡기
역사적으로 우리에게는 미국, 혹은 미국사람에 대해 두 가지 극단적 생각이 공존하여 왔습니다.
첫째는, 반미사상 (反美思想)입니다. 이는 미국사람, 미국문화, 미국정부의 정책에 대해 반대하며 거부하는 사상이나 운동을 총칭하는 입장으로 흔히 영어로는 Anti-Americanism 혹은 Anti-American Sentiment라고 합니다. 세계 각국에는 다양한 반미사상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는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19세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쳐오면서 조선이 취한 서양종교인 기독교 (천주학)의 배척과 서양과의 문물교역금지를 통한 쇄국정책으로 인한 <서양오랑캐> 사상이 출발이라고 봅니다. ‘존화양이’ (尊華攘夷) – 중국을 존중하고 서양오랑캐는 물리친다 – 이 사상은 보수적 유생을 중심한 ‘위정척사파’가 주동이 되었던 것이지만 이후 대원군에 이르러서는 그 유명한 ‘척화비’에서 잘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사상은 이후 미제국주의의 식민지 약탈과정과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면서 군사적 침탈 및 경제적 지배 야욕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 부르짓는 America First 정책을 보면서 형성된 반미사상과 양키비하운동으로 까지 연결이 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미제국주의’ ‘미국은 침략자’ 라는 반미사상입니다.
둘째는, 이와는 정 반대되는 친미사상 (親美思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지니고 문화적으로는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나 음악, 음식이나 패션 등을 좋아하는 사상 모두를 포함합니다. 미국은 한국에 기독교 신앙을 심어주었으며 개화와 근대화, 민주주의와 경제개발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으며 더 나아가 6.25에 참전하여 5만 명이나 되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려가면서 우리나라를 지켜준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부정적 표현으로는 숭미사상 (崇美思想)이라고도 부릅니다. 개화 초기에는 서재필을 대표로하는 개화파 지식인들 중에 주로 친미인사들이 많았으며 신탁통치와 대한민국 정부수립 및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는 주로 개신교회와 종교 단체들이 친미적이었습니다. 이승만대통령 이후 오늘의 정부에 이르기 까지에는 친미와 반미가 혼재되어왔으며 지금도 세대별, 계층별, 혹은 지역적, 정치적 성향에 따라 반미와 친미가 섞여있다고 하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 정리되지 못한 갈등이 있습니다. 미국은 아니지만 미국과 흡사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호주에 와서 사는 사람으로써 반미를 표방하여 중국이나 북한에 가서 살 마음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선듯 친미, 친호주를 부르짖을 자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 한분도 공개적으로 ‘반미 좀 하면 않됩니까?’라고 했다가도 미국을 방문해서는 우호적으로 말하고 친미적 정책을 따라가기도 했었습니다. 가끔 호주 사람들 중에서 그들의 기독교적 사랑과 친절이 자본주의적 이기심과 탐욕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것을 볼 때 ‘도대체 알 수 없는 인간’을 다시 경험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반미도 말고 친미나 숭미도 아니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불가근 불가원’ (不可近 不可遠) 하며 그들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을 갖을 수는 없을까? 모든 대상은 너무 멀어도 잘 안보이고 너무 가까이 코앞에 갖다 대도 않보입니다. 미국으로 이민간 처음 2, 3년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그렇게 높게만 보이다가 한 5, 6년 쯤 되면 참 우습게 보이다가 다시 한 10여년이 넘으니까 정상적 높이로 보이더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추천도서 : “미국분, 미국인, 미국놈” 1, 2권. 현재는 품절. 백현락 지음, 청아출판사, 1994, 2004. 고려대 재학중 소아마비 다리를 이끌고 미국으로 유학, 공인회계사가 되어 일하며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쓴 책. – 막연한 동경, 적대적 감정을 넘어서, 선의와 적의, 장점과 단점을 넘어 미국인들의 사고방식과 의식구조를 알아보려는 노력 중 하나라고 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포함하여 우리 한국인들은 19세기 말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뜻에서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미든 친미든,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과 다양한 인연과 관계를 맺어왔고 그런 각도에서 우리는 그들의 영향을 받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에 대하여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 감정이나 호, 불호와는 관계없이 정치, 경제, 군사, 교육, 종교 등 우리 삶의 여러 부분에 걸쳐 미국이라는 나라와는 퍽 많이 연계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개인적 유학, 이민, 취업, 결혼, 방문, 관광 등등의 관계 때문에 생길 수 있는 한계와 편견, 혹은 세대적, 지역적, 종교적 경험이나 혹은 학습적 한계로 인한 제한성을 넘어서 가능한 한 미국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도대체 미국이란 나라와 미국인이라는 사람들은 어떤 사상적 바탕 위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일까? 미국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사람들 중에는 <미국놈들에게도 무슨 철학이나 사상이라는 것이 있는가?>라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존재와 인식>이라는 틀에 따른 전통적 서구철학의 시각에서 볼 때 미국철학은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효용성만을 따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III. American Context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책 <총, 균, 쇠>에서 ‘모든 사상과 문화는 그 시대의 환경이 만들어낸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환경>에는 주어지는 자연적 환경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만 기타 그 사회를 인위적으로 구성하는 인적, 물적, 사회적 여러 환경들도 내포된다고 봅니다. 미국과 미국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American Context입니다. 저는 여기서 미국적 상황 이해의 범위를 좁혀서 America Indian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생략하려고 합니다. 17세기 이후를 중심하여 볼 때, 미국의 상황은 유럽을 떠나 새로운 땅,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개척자적 모험, 도전, 정복, 침략, 살륙, 전쟁, 질병 그리고 이어지는 건설, 안정, 이민, 다문화 같은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고 보겠습니다. 새로운 미지의 땅 미국은 다양한 인종, 언어, 문화, 전통들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과 충돌을 지나 곧 이어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어, 피차 이해하고 타협하며 공존하는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melting pot system이었습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하나의 ‘용광로와 같다’는 것 입니다.
여기에서 첫째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결코 그 무엇이든 하나, 혹은 몇 가지만 가지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고 이해가 않되는 나라”라는 점입니다. 미국은 오래전 부터 이미 America Indian들이 자리를 잡았던 땅이면서 동시에 17세기 유럽의 여러 나라와 인종들이 몰려와서 형성되기 시작한 근대국가입니다. 그들은 이후 21세기에 이르기 까지 남미와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비롯하여 주변의 여러 나라와 인종, 수 많은 국가적, 인종적, 사상적, 종교적 다른 배경을 지닌 이들이 모여서 하나의 커다란 용광로 속에 들어와서 새로운 모습을 빚어낸 나라입니다. 한 두 가지로는 설명이 않되는 나라 – 이게 미국입니다.
둘째로 미국은 복합성을 지닌 나라입니다. 영어로는 Mixed Society입니다. 음식으로 말하면 잡탕밥, Mixed Food 입니다. 우리에게는 한식이라는 고유한 음식이 있지만 미국에는 미국식이라는 음식이 따로 없습니다. 미국이란 얽히고설킨 나라입니다. 인종, 언어, 문화, 전통, 역사, 생각하는 방식, 삶의 태도가 복잡합니다. 나쁘게는 잡탕국가라고 비하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치적으로는 <미합중국>입니다. 영어로는 A Union of States입니다. 우리는 흔히 state를 주, 주정부라고 하지만 본래 State란 나라, 국가입니다. 여러개의 독립된 국가들이 연합한 나라, United States of America가 미국입니다. 주정부 마다 독립된 국가처럼 입법, 사법, 행정이 독립되어있습니다.
셋째로 미국은 다양성을 지닌 나라입니다. 영어로는 Diversity와 Variety를 지닌 사회입니다. 인종적 다양성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본 자료는 좀 거리감이 있는 2012년 통계인데 당시 미국의 총 인구는 2억 8천만입니다 (지금은 3억이 넘습니다). 그 중 백인이 약 63%에 이르는 2억 쯤 됩니다. 그러나 앞에서 본대로 우리 눈에는 똑같은 백색인종이라 하더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다양한 인종적, 국가적, 문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백색 인종 중에서 인구 1000만 이상으로는 스코트랜드와 웨일스와 잉글랜드를 포함하는 영국계가 전체의 25%로써 약 5000만입니다. 독립전쟁 이전에 미국으로 건너와서 산 후손들로써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American이라고 주장하는 미국계는 약 3600만이고 그 다음 독일계가 약 3000만, 이탈리아계가 약 1600만, 프랑스계가 약 1400만, 러시아계가 약 1300만입니다. 100만 이상되는 민족만 추려보면 폴란드계가 약 900만, 네덜란드계가 약 500만, 노르웨이계가 약 450만, 스웨덴계가 약 400만, 스페인계가 약 350만, 아일랜드계가 약 320만, 우크라이나계가 약 200만, 기타 150만 안팎이 그리스계, 덴마크계, 벨기에계, 체코계, 포르투갈계, 헝거리계이며 기타 자신들을 그냥 유럽계라고 부르는 인종만도 1000만이나 됩니다. 물론 이 중에는 아랍계, 유대계, 이란계, 쿠르드계, 터키계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그리고 멕시코와 쿠바를 포함하는 히스파니아계가 2700만으로 약 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2017년, 한국계 미국인들은 약 250만 정도가 됩니다). 종교적으로도 물론 개신교와 천주교와 정교회, 몰몬교 등을 포함하는 기독교계가 인구의 70%에 이르지만 기타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무종교 등 다양한 종교적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듭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미국이라는 나라는 인종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다양성을 지닌 나라입니다. 그래서 한두 마디로 정의하거나 규정할 수는 없는 나라입니다.
한마디로 American Context의 핵심은 복합성 (複合性)과 다양성 (多樣性) 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념은 비슷하게 쓰입니다만 엄밀하게는 구분이 됩니다. 복합성이란 한 사회나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여럿이며 많다는 외형적 이해이고, 다양성이란 그 여러가지 복합성 속에는 여러가지 다른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 우리가 한 사회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던 어떤 하나의 생각이나 주장과 그에 따른 삶의 태도에 대해서만 절대성이나 완전성이나 영원성을 부여하거나 강조 할수는 없게 됩니다. 다양성 속에는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나 가치란 없습니다. 다양성 속에는 영원하거나 불변하는 실체란 없습니다. 다양성은 모든 것을 상대화합니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있지만 그것을 남들에게는 강요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카프치노를 좋아한다고 해서 너도 카프츠노를 마시라고 말해서는 않됩니다’ 모든 인간은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넓고 인종은 다양합니다. 뿐만이 아니라 같은 한 인간도 그의 삶의 여정 속에는 수많은 변화가 있게 마련입니다. 태어난 이후 죽을 때 까지 오직 하나의 생각과 신념에 따라 삶의 태도와 방식을 굳게 지키며 초지일관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일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 생각이나 신념의 가변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앞으로 Pragmatism을 공부하면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만 미국사람들은 이 복합성과 다양성의 토대 위에 서서 모든 일들을 매우 ‘실용적이며 동시에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IV. 미국철학의 3대 기둥 (THREE P) : PURITANISM, PIONEER SPIRIT, PRAGMATISM
미국과 미국인들의 사고와 행위, 생각이나 판단, 및 이에 따른 삶의 태도와 방식을 결정해온 것이며 동시에 미국의 정체성으로 미국이라는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 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에는 다음 3가지가 가장 큰 핵심이 된다고 봅니다. 첫째는 Puritanism입니다. <청교도 정신>이라고 번역합니다. 둘째는 Pioneer Spirit입니다. 보통 <개척정신>이라고 부릅니다. 셋째는 Pragmatism입니다. 흔히 <실용주의>라고 번역합니다만 저는 그 의미가 좀 더 포괄적이라고 생각하여 영어의 <Pragmatism>과 한글의 <실용주의>를 섞어서 쓰겠습니다. 대부분의 미국사와 미국철학책들은 두 번째로 말씀드린 Pioneer Spirit을 Frontier Spirit으로 주로 표기합니다만 저는 이 단어를 그냥 흥미롭게 영어의 비슷한 뜻을 지닌 Pioneer Spirit으로 고쳐서 Three P라는 조어를 만들어 좀 흥미있게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오늘 우리는 19세기 이후 오늘날 미국철학의 핵심이랄 수 있는 Pragmatism에 큰 비중을 두겠습니다만 그에 앞서 <미국적 실용주의>가 탄생되기까지의 역사적 뿌리가 되는 <청교도 정신>과 <개척정신> 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1. PURITANISM : 초기 청교도정신
1) 청교도정신의 핵심
청교도정신의 핵심부터 먼저 말씀드리고 이 사상이 형성된 과정을 이야기하겠습니다. 퓨리탄이즘의 핵심은 페리 밀러 (Perry Miller 1905-1963, 조나단 에드워드의 전기작가로 유명한 미국 초기의 청교도 역사학자로 하바드대학 교수를 지내면서 The Puritans, The New England Mind, Jonathan Edwards Biography, The New England Mind in Seventeenth Century 같은 명저를 남겼음)가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계약에 의한 정부 형성, 둘째는 양도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 셋째는 사유재산의 인정, 넷째는 폭력적 정부에 대한 저항권 – 페리는 이 4가지가 메이 플라워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 미국으로 온 초기 청교도정신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2) 역사적 배경
아시다시피 영국의 헨리 8세는 첫 부인이었던 아라곤의 캐서린이 애기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녀와 이혼하고 새로 생긴 애인 앤 불린 (Anne Boleyn)과 결혼할 수 있도록 교황에게 요청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음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 수위권을 거부하고 영국교회를 가톨릭으로 부터 독립시켰습니다. 요즘 말로 하지면 교단 탈퇴를 한 셈입니다. 그는 영국 내에서는 영국의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 된다고 선포하고 마침내 <영국 성공회, The Church of England, Anglican Church>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이런 조치는 가톨릭교회의 신앙이나 교리나 타락한 교권에 대한 항거나 부정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의 정치적 헤게모니에 대한 주도권 싸움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새로 만들어진 영국교회는 <로마의 교황을 인정하지 않고 영국의 왕이 교황이 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후 헨리 8세가 죽은 다음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제임스 1세를 거치면서 영국 성공회는 정치적 조직은 더욱 강화했지만 대륙 쪽에서 전개되는 루터의 종교개혁이나 칼뱅주의를 따라 신앙과 교회를 개혁하려는 의지는 전혀 보이질 않았습니다. 물론 영국 내에도 당시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출현했습니다만 왕과 왕권을 지닌 국교는 이들을 무참하게 탄압하였습니다.(영국의 대표적 종교개혁운동가들 중에는 William Tyndale, John Wycliff, Thomas Cranmer, John Knox, Thomas Moore 등이 있습니다.) 드디어 <왕권도 하나님의 법 아래 있다>고 부르짖던 이들은 더 이상 그 땅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마침 새롭게 발견된 미지의 땅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3) 출발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후 130여년이 지난 때인 1620년 영국에서는 일련의 비국교도들 (non-conformist) 102명이 신앙의 자유를 찿아 잉글랜드 남서부에 있는 작은 항구 플리마우스 (Plymouth)를 출발하여 66일간의 항해 끝에 북아메리카의 작은 항구에 도착하여 그곳 이름도 떠나올 때의 도시 이름을 따라 플리마우스라 명명하고 정착한 것으로 역사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플리마우스에 도착하기 전 메이 플라워 배 안에서 <메이 플라워 서약, Mayflower Compact>을 만들고 모두 41명이 여기에 서명을 하고 자기들 끼리 첫 자치 총독을 뽑았습니다. 서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영국의 국왕을 인정하고 그에게 충성한다. 2. 우리는 아메리카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한다. 3. 우리는 자치적 정부를 만들어 질서와 안전을 도모한다. 4. 우리는 모두에게 평등한 법률을 만들고 그 법에 다함께 복종할 것을 다짐한다. 물론 이들 메이 플라워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한 처음 사람들은 아닙니다. 콜럼버스의 북미대륙 발견 후 퍽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남북미 각 지역에 정치, 경제적 이유로 옮겨왔습니다만 우리는 퓨리턴이즘이라는 시각에서 이들 1620년에 집단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뿐입니다. 그리고 이로 부터 약 40년 사이에 영국과 네덜란드의 개혁교회를 중심한 유럽으로 부터는 약 2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하였습니다.
4) 초기 청교도의 출발 요약
초기 청교도의 출발을 요약해 보면 로마 가톨릭의 교황제도에 반대하여 세워진 영국국교회인 성공회 역시도 신앙의 개인적 자유를 억압하고 세속적 정치권력의 하수인이 됨으로 이에 반대한 사람들이 고국인 영국을 떠나면서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대륙 쪽의 루터교회나 칼뱅주의와 흡사한 복음주의적 신앙을 추구했지만 이에는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인간과 제도의 권위나 전통을 인정하지 않고 성서를 모든 것의 표준으로 삼는 입장이었습니다. 영국의 왕권과 교회가 그들을 용납하지 않고 핍박함으로 신대륙으로 건너가 그 땅의 정신적 토대를 놓은 Found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Puritan이란 purity (순결, 깨끗함)에서 온 말로 사실 청교도들 자신이 부른 말은 아니었습니다. 메이 플라워의 기록에도 <청교도>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건국 초기 미국 이민자들도 자신들을 <청교도>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국국교회측에서 ‘그래 너 잘났다!’고 하면서 그들의 극단적 교리와 삶의 태도를 비아냥거리면서 붙인 <분리주의자, 바리새적인 사람들, 거룩한 무리들>이라는 뜻으로 부른 이름이 <Puritan>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점차 그들 공동체의 신앙적 정체성을 확립해 가면서 자신들이 추구해온 순수성과 깨끗함을 확실하게 표방하기에 이름으로 <청교도>라는 이름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1. 개인적 신앙과 교회의 순수성, 2. 생활 속에서의 도덕성과 순결성, 3. 일체 낭비와 사치의 배격, 4. 매사에 성실하고 부지런한 생활을 강조함으로 이를 더욱 더 확고하게 다듬어 갔습니다.
5) PURITANISM (청교도 사상)
앞에서 말씀드린 페리 밀러의 4가지로 요약된 청교도 사상을 좀 더 부연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1. 자유정신 – 국가는 개인의 신앙과 양심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한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한다. 우리는 국가교회 (National Church)를 부인한다. 우리는 국가가 교회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한다. 여기에는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포함된다. 2. 평등정신 –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공정한 사회에서 공정한 권리를 부여 받는다. 모든 사람은 천부의 기본적 인권을 지닌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3. 개인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사유재산을 소유 할수 있다. 우리의 생활은 부지런해야하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 허영과 허세는 배격해야하고 근검과 절약이 최고의 미덕이 되어야한다. 이는 개인적 자유에 대한 책임이다. 여기에서 퓨리탄들은 애국주의적 국가관과 성서를 생활의 기준으로 삼는 기독교적 생활 태도를 세우고 엄격한 주일성수, 십계명 준수, 금욕주의적 삶, 사랑과 나눔, 베품과 기부를 <청교도적 미국정신과 행위의 기초>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에 기초한 미국적 청교도 정신은 이후 역사를 통하여 여러 부분에 걸쳐 긍정적 요소로 나타나곤 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부를 축적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사유화하는데 촛점을 두지 않고 공동체로 되돌리면서 각종 교육 기관이나 의료기관을 설립하고 사회, 문화, 종교, 학문, 예술, 스포츠, 구제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기독교적 헌신과 베품에서 선도적 역할을 해 왔습니다. 요는 개인적 능력과 사유재산을 기반으로하는 자본주의적 동기가 그 안에 깃들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가져오는 부정적 요소를 최소화하기 위한 성실, 청빈, 기부와 기여, 그리고 민주적 정치체제의 도입 등이 청교도사상의 한 축이 되어왔다는 말씀입니다 (미국에서의 이런 청교도 정신이 만들어낸 학교, 병원, 연구소, 복지시설 등 다양한 사회시설의 설립과 학문, 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부분에 걸친 기부문화는 퓨리탄이즘의 긍정적 측면이라고 하겠습니다. 6.25 이후 미국은 순수 가정에서만 약 20만 명의 한국 애기들을 입양했습니다. / 동시에 가톨릭을 중심한 남미와는 달리 개신교를 중심했던 북아메리카에서의 민주주의의 유지와 발전은, 그 정치체제가 비록 ‘최선을 뽑는 제도가 아니라 차악을 선택하는 것’ – lesser of two evils – 이라 할지라도 현재로써는 ‘최악이지만 그래도 더 나은 것이 나올 때 까지는’ 지고가야 할 우리의 현실적 짐으로써, 이 또한 청교도정신이 가져다 준 하나의 실존이라 하겠습니다).
6) Puritanism의 부정적 측면
우리는 메이 플라워 만이 아니라 초기 미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정복자라는 측면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당시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총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들이 있지만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 의하면 1600년대 초기 남북미에는 약 5000만 정도의 인디안들이 살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200년 사이 아메리카 인디안들은 약 25만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오늘날은 다시 약 200만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진 백인들의 인디안 대량 학살과 그들이 유럽에서 가져와서 퍼트린 각종 전염병들 – 천연두, 홍역, 수두, 폐렴, 장티푸스 등은 질병의 청정지역이었고 면역체계가 없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대량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코로나 바이러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아메리카 신대륙의 한 인종을 거의 멸종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청교도들을 포함한 초기 이주자들은 미대륙에서 모든 동물의 총수 보다 더 많은 인디안들을 도륙했습니다 (이 원고를 쓰면서 북미 스토리는 아니지만 저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갇힌 생활을 하던 중 몇 편의 지나간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미션’을 다시 보면서 유럽인들이 어떻게 남미의 인디안들을 살육했는 지를 보면서 슬픔을 억누룰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후 이들 유럽의 정복자들은 퓨리탄이즘을 내세워 자연을 파괴하고 (트럼프 시절 세계 기후협약에 가입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면서) 물질을 획득, 생산하고 이를 이용하는 것을 인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를 낳게 되었습니다. 퓨리탄이즘은 여러가지 다른 형태로 확대 해석되면서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성공주의 신학을 뒷받침하는 것 등을 미덕으로 여기게 까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각종 식민지 전쟁을 일으키고 세계의 경찰인양 행세하면서, 경제적으로 까지 세상을 지배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여 온 세상을 정복하는> America First를 외치는 이론적 근거를 만들게 되었다고 봅니다.
2. PIONEER SPIRIT (FRONTIER SPIRIT) : 중기 서부 개척정신
1) 간단한 역사적 배경
1776년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부 13개 주로 구성되어 출발한 미합중국은 이후 서부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 때를 보통 서부개척시대라고 부릅니다. 영화 <역마차>에서 링고는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서부로 달립니다. Cow Boy 정신은 이를 매우 잘 드러냅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와싱톤의 본래 직업은 측량사였습니다. 그는 10대 무렵 부터 버지니아에서 측량사로 일하면서 더 넓은 땅을 바라보며 정복하는 시야를 훈련받았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또다른 상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국에서 19세기 전반기는 <한 곳에 머물거나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지경을 넓혀가는> Frontier 정신이 지배하게 됩니다. 영어의 Frontier란 <경계선>을 뜻하는 프랑스 말에서 왔습니다. 오늘날 <국경없는 의사회> <국경없는 기자회>란 모두가 일체의 지역적 한계를 넘어 경계선 없이 일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1803년 드디어 미시시피강을 넘게 됩니다. 1805년에는 로키산맥을 넘어 서부로 나가는 통로를 마련합니다. 1808년에는 서부로 나가는 최초의 국도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1846년에는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주를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이어서 1848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됩니다. 드디어 Gold Rush가 시작되어 사람들은 <서부로, 서부로> 진격합니다. 서부는 <톰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역마차>를 거쳐 <오 케이 목장의 결투> (저는 이번에 이 영화도 다시 보았습니다)로 이어집니다.
2) 긍정적 의미
Frontier 정신에는 독립정신, 개척정신, 모험정신, 창의성을 포함하여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지 같은 장점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 역시도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와 자본주의를 부추기는 청교도정신을 이어 받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투쟁과 용기, 승리와 쟁투를 통한 영웅화가 나타납니다. 자아 실현을 위한 도전정신, 목표성취를 위한 투쟁정신, 그러기 위해서 바탕이 되어야하는 무한한 자유정신 같은 것들이 피차 연결 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의 총기 소유에 대한 권리 문제는 이런 시각에서 접근해 보면 좀 더 이해가 빨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프런티어정신은 끊임없이 <한번도 않가 본 길을 가고져하는 사람들>이나 <한번도 안해 본 일을 해보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Oh! It’s very Good Idea! Try! Try! Try again!>이라고 격려하며 힘을 실어주는 도전정신과 창의성을 동반합니다. (이 점에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나 일을 하려는 친구들을 향하여 <그거 위험한 일 아냐? 괜찮을까? 조심해!>라고 충고하는 것과 비교해 볼수 있습니다) 프런티어정신의 긍정적 부분은 단순히 외형적으로 보이는 황무지 개척이나, 물질적 재화나 명예의 획득 같은 데서만 들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과학과 기술, 문학과 사상 등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정신세계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미국의 이런 정복적 Frontier Spirit는 1961년 처음으로 암스트롱을 달에 착륙하게 했습니다. 지금까지 노벨상 전체의 40% 이상을 미국인들이 수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전 세계 특허권의 70%가 미국인들에 의해서 개발하게 했습니다.
3) 부정적 측면
Frontier Spirit에는 미국인들의 잔인한 살륙과 침략의 역사와 더불어 교묘한 역사 조작도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초기 인디안들을 무참하게 살륙하고 정복한 역사는 두말할 것도 없고 이후 멕시코와의 전쟁을 필두로하여 최근의 페루시아만 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프런티어 정신을 앞세워 거의 모든 크고 작은 전쟁에 끼어들었으며 세계 최대의 전범국가라는 낙인을 받습니다. 프런티어정신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어 온 미국인들의 정복, 파괴, 학살, 그리고 그 밑에 도사리고 있는 자본주의적 탐욕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역사를 피로 물들이며 퇴행시킨 측면이 엄존합니다. <개척정신이란 정복자의 논리다!> 세계의 지성들은 미국과 미국인들의 역사를 인류 역사의 가장 부끄러운 단면이라고 말합니다 (Noam Chomsky, Edward Said, Howard Zinn, Ahmed Rashid. 등. 추천하는 책, <시대의 양심 20인 – 세상에 진실을 말하다, 노암 촘스키 등 공저, 시대의 창, 2006>).
3. PRAGMATISM : 후기 실용주의와 미국인들의 사고
1) 프라그마티즘의 배경과 확장
프라그마티즘은 미국이라는 한 국가와 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경험과 역사가 낳은 산물입니다. 프라그마티즘이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어떤 천재적 사상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북 아메리카라는 한 특수한 지역, 그리고 그 곳에서 사는 미국사람들이라는 복합민족이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입니다. 프라그마티즘은 가장 미국적인, 미국인들의 중심사상입니다.
프라그마티즘의 역사나 그 뿌리는 길고 복잡합니다. 굳이 그 역사적 연원을 찾자면 아마도 Protagoras시대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 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이 사상의 정신적 바탕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프라그마티즘은 <인간 중심 사상>으로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이라는 것도 인간 하나 하나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individual을 위한 사상입니다.
프라그마티즘이 형성되기 전 신대륙 미국은 <1. 기독교적 전통 2. 헬라적 이성과 합리주의 3. 영국적 경험주의 4. 다윈의 진화론과 적자생존론 5. 밀의 공리주의> 같은 여러가지 사상들이 뒤섞여있던 사회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는 미국적 복합주의, Melting Pot Society로 부터 빚어졌던 것입니다. 17, 및 18세기 초기 까지의 미국은 유럽의 다양한 사상적 영향과 계몽주의와 도덕철학 등에 기초하여 나라를 세우고 이끌어 왔습니다. 아직 그들에게는 그들 자신들만의 독특한 이상이나 철학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 미합중국이라는 나라를 건국하면서 그들은 물었습니다. <미국의 정신적 기초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마침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지난날 자신의 선배들이 경험했고 도입해온 역사적 사상들을 단순히 배열, 배합,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국가적 생존의 원리를 찾을 수가 없고 그 정확한 대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토는 광활하고 인종은 다양하고 기회는 많은 이 신세계에서 살아가는 데는 무슨 사상이 필요한가? 어떤 삶의 철학과 원리가 가장 적합하고 또 그 생존을 지속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지난날의 전통과 역사, 사상과 경험을 몽땅 미국이라는 용광로에 부어서 다시 만들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새로운 합금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프라그마티즘이었습니다. 실로 미국은 여러 인종만 melting해 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도 모두 melting해 내는데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Pragmatism>은 미국이 만들어낸 가장 미국적 철학이라고 하겠습니다.
처음 프라그마티즘은 <미국의 정체성>이었습니다. 프라그마티즘은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교육, 국제관계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바탕을 이루고 있는 미국의 기초이며 버팀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차 거대해진 미국의 영향권 아래서 <실용성을 보다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으로 까지 받아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유용성의 사상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프로그마티즘의 세계화>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미국은 정치, 경제, 군사에서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온 세계로 확장하여 미국화 하는데 까지도 성공을 이루어냈습니다. 드디어 미국적 프라그마티즘의 세계화를 이루어냈다는 말씀입니다.
2) 프라그마티즘이란 무엇인가?
프라그마티즘은 <가치, value>를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입니다. 그 가치도 <실용적 가치, useful value, practical value>가 중요합니다. 이론이나 논리가 아니라 실제, 나와 우리의 삶에 있어서의 <쓰임새>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과 우리 공동체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이 경우 <진리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실용적인 것이 곧 진리>가 됩니다. 실용주의에서는 <선이냐, 악이냐> <진리냐, 거짓이냐> <정의냐, 불의냐>가 두부모 자르듯이 딱 짤라지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보느냐, 저기에서 보느냐 / 이 사람이 보느냐, 저 사람이 보느냐 / 지금 보느냐, 내일 보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어떤 것을 판단하는 데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이론을 따질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치있는 일이냐, 아니냐 / 혹은 그것이 실용성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해야한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프라그마티즘은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대립개념들을 타협하고 조절하면서 보다 더 가치있고 실용성이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독선과 극단을 피하고 중용을 택하면서 타협주의를 지향하는 프라그마티즘은 미국적 중용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종, 언어, 문화, 역사, 전통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서 어느 것이 보다 더 좋은 것이고 유용성이 큰 것인지를 알 수 없을 때는 갈라서거나 타협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경우 갈라서면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은 무너지고 나라는 파국을 맞게 됩니다. 타협, 양보, 토론, 유용성의 검토와 확인, 과학적 입증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합의를 도출해 낼수 밖에 없습니다. 다수가 숫자를 가지고 횡포를 부리지 않습니다. 동시에 소수의 의견도 존중하는 중용의 미덕을 만들어냅니다. 프라그마티즘을 겸손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도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은 상부상조, 상호협력이 그들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공동선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적 프라그마티즘에서 겸손이란 <굽신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비록 타인의 입장을 수용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듣고,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 까지는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그들 자신과 공동체의 생존과 계속성의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프라그마티즘은 타협의 기술입니다 (오래전 미국장로교회 총회에서 일하던 제 선배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미국사람들은 직장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비교적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도 귀를 잘 기울이는데 한국사람들은 직장이나 사회에서 자기의 생각과 주장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상사에게는 더욱 그렇답니다. 이럴 경우 미국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과 주장에 100% 찬성하고 동의하는 것으로 받아드립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고 complaint 하지 않으면 만족해하고 동의하는 것으로 아는 미국사람들의 태도를 그이는 pragmatic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프라그마티즘은 모든 사상, 전통, 이데올로기는 한결같이 불완전하고 부분적이며 시대적 제약과 지역적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잘 압니다. 동시에 인간과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란 결코 완전해 질수 없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인간과 우리 사회는 <영원히 불완전한 것>이라고 봅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긴 하지만 언제나 극단은 피해야만 한다고 가르칩니다. 변치 아니하는 영원하고 불변하고 참된 인간도 인간 공동체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겸손하게 자신의 주장을 낮추어 가면서 <제 생각으로는> <지금 제 입장에서 보기에는>이라는 식으로 말해야지 마치 자신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가 절대적인 양 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 모두를 비극으로 만들게 된다는 입장입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는 독선과 절대를 피하고 <중용과 타협>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이 프라그마티즘의 정신 중 하나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다. 당신은 사람이다. 성직자도 성자도 다 사람이다. 어깨에 힘주지 말아라. 우리 중 하나님은 없다. 자꾸만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 처럼, 가르치고 훈계하고 벌주려고 해서는 않된다> 이것이 복합적이며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미국이라는 사회의 사상적 바탕에 있는 프라그마티즘입니다. 이후 이 사상은 포스트 모던이즘 (post-modernism)에도 직접적이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프라그마티즘은 이렇듯 인간과 인간공동체의 불완전성과 그 한계 속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최선과 성실을 다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관용과 나눔의 행위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다시 말하면 실용성과 유익을 추구하는 프라그마티즘이라고 해서 오직 <나 한사람의 개인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것은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프라그마티즘은 <탐욕주의>나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프라그마티즘은 타인을 인정하고 타자의 가치를 나의 것과 동일화하고 함께 손잡고 가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프라그마티즘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인종, 성소수자, 장애인들, 병자들, 노인들, 어린이들, 여성들을 편들어주는 <약자들을 위한 철학>이 됩니다.
상대성과 다양성을 기초로 한 프라그마티즘이 정치에 나타나면 자유민주주의가 됩니다. 경제에 나타나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됩니다. 종교에 나타나면 중앙집권적 제도가 아니라 대의적 성격이나 회중적 모습을 지닌 교회가 됩니다. 동시에 이것이 문화에 반영되면 대중문화가 되고 또한 상업적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 결국 미국적 프라그마티즘은 가능한 한 <최대 다수에 의한 최대 다수의 유익을 창출하여 모두에게 만족과 기쁨을 주는 것>으로 요약이 됩니다. 이 토대 위에서 파생된 제도 중 현재 까지 그래도 괜찮은 것 가운데 하나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본주의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은 이런 정치-경제적 사상이나 제도를 결코 인류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궁극적 이상이나 완전한 목표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거듭되는 시행착오를 예견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재로써는 제도적 대의정치 체제인 민주정과 시장 경제 제도가 비교적 다른 것들 보다는 유용성이 높고 그런대로 가치있어 보이는 공동체적 삶의 형식이라고 볼 뿐입니다.
3) 프라그마티즘의 대표적 이론가들
저는 여기에서 초기 실용주의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 (Charles Sanders Peirce)로 부터 그 후를 이어 온 윌리암 제임스 (William James)와 죤 듀이 (John Dewey)와 리처드 로티 (Richard Rorty)의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참고도서 – Four Pragmatists, Israel Scheffler, New York, Humanities Press, 1971. 이 책은 미국이란 나라는 유럽과는 어떻게 다른가? 미국은 어떻게 유럽의 정신사를 극복해내고 독자적인 미국철학을 이루어냈는가? 라는 질문을 핵심과제로 취급하면서 4명의 실용주의 학자들을 심도 깊게 소개하며 그들을 Neo Pragmatist라고 부릅니다. 그외 ‘실용주의’ 이유선저, 살림출판사, 2008도 참고가 됩니다).
(1) 찰스 샌더스 퍼스 (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
독립전쟁을 통하여 미합중국이라는 신생국이 탄생된 후 미국적 독창성을 지닌 사상을 세워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 중에는 뉴잉글랜드 출신의 몇몇 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Ralph Waldo Emerson (1803 – 1882) 이나 Henry David Thoreau (1817 – 1862) 같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초창기 그들의 노력이나 사상은 아직 큰 영향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처음으로 미국적 특색을 지닌 사상을 제시한 사람은 찰스 샌더스 퍼스와 그의 친구 윌리암 제임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퍼스는 매사추세스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얻고 측량기사로 일하면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독서 클럽을 만들어서 같이 공부하며 토론하다가 그 클럽 멤버들의 공통된 생각을 <실용주의>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실용주의>라는 철학사상은 이렇게 한 평범한 독서 모임에서 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하바드대학 천문대에서 일하다가 존스 홉킨스대학 강사를 거쳐 말년에는 하버드대학 강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논문 <믿음을 확정하는 방법>과 1878년 발표된 <우리의 관념을 명석하게 하는 법>는 월간지 <대중과학>을 통해서 발표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그에 대한 책은 외국어대학 교수 이윤희가 쓴 <찰스 샌더스 퍼스>가 2017년 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처음 논리학과 과학자로 출발했던 퍼스는 후엔 미국 최초의 실용주의 철학자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습니다. <관념을 명석하게 하는 방법>에서 그는 철학의 목적, 즉 우리가 무엇에 대하여 <생각을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널려져있는 온갖 문제의 원인이나 진상을 파악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럼 도대체 철학의 목적,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철학의 목표, 우리가 생각을 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보다 더 잘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 실제적인 인생살이에서 보다 더 실용성있게 살아가도록 돕자는데 철학함의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전통적 철학의 관심사였던 관념론에서 실재론을 거쳐 실용주의로 가는 징검다리였습니다.
그는 문제의 본질이나 원인이나 성격에 대한 이론적 규명이나 관념적 해석 같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늘 보는 사람들의 개인적 환경이나 입장, 혹은 사회와 시대의 상황에 따라 제각기 다른 설명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탁상공론을 할 것이 아니라 문제가 무엇이든 간에, 그 문제의 원인과 성격과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그 문제의 결과를 통하여 우리의 실제적 삶에 효용성있게, 실제적으로 응용할수 있느냐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대상이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나 개념이 어떤 효과적 결과를 창출했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그런 각도에서 그는 <지식은 사실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다>라고 보았습니다. 그에 의하면 <지식이란 사실을 알아내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과거 우리는 <지구는 평평하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다>라는 지식 세계에서 산적이 있습니다. 1, 2년이나 1, 2백년을 그런 것이 아니라 2, 3천년을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지구는 평평한 게 아니라 둥글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광대한 우주의 한 행성에 불과하다>는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지식은 사실도 아니었고 진리도 아니었습니다. 핵심은 지구가 변한 것도 아니고 우주가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지구와 우주는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그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진리에 대한 인간의 생각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퍼스는 주장했습니다. <모든 진리는 변한다. 다만 시간이 빠르냐, 느리냐하는 문제만 남아있다. 모든 진리는 인간의 실제적 경험과 삶 속에서 다시 형성된다> 그가 말한 이 <실제적 경험>을 지금 우리는 pragmatic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다른 예도 듭니다. <다이아몬드는 부드러운가? 단단한가?> 보통 우리는 자신이 한 번도 다이아몬드를 만져본 적이 없으면서도 <다이아몬드는 부드러울 것이다. 혹은 단단할 것이다>라는 두 가지 중 하나의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던 우리의 기존 생각이 다이아몬드 자체를 부드럽게 하거나 단단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핵심은 다이아몬드를 만져보고 확인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퍼스는 <실용주의란 이론이 아니라 경험>이라고 보았습니다. <모든 실체적 진실은 경험을 통해서 확인해야한다. 진실은 실용성을 통해서 검증된다>고 본 것입니다. 퍼스는 철학이나 신학, 인문학이나 종교학 같은 것들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논쟁을 유발할 뿐 경험 없이 말만 가지고 하는 논쟁은 진리를 찾아내지 못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논쟁은 진리를 찾아내지 못한다. 경험을 통한 실용성 만이 진리로 나가는 길이다> 모든 형이상학적 관념의 세계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던 퍼스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너머에 진짜 이데아의 세계가 따로 있다고 머리로만 생각해 온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철저히 거부하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들이 경험하고, 만지고, 보고, 사용하는 현실만 있을 뿐이라고 믿었습니다.
(2)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 1842-1910)
퍼스의 친구였던 윌리암 제임스는 뉴욕의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872년 하바드 의대를 졸업한 후 처음엔 그 대학의 생리학 및 심리학 교수로 출발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최초로 하버드에 심리학 연구소를 설립하고 심리학 과목을 개설한 심리학계의 권위자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후에는 퍼스의 뒤를 이어 실용주의 철학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철학과 교수를 지냈습니다. 우리는 그의 프라그마티즘에 대한 연구 부분만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주요 저술로는 <심리학의 원리,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890,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2018>, <믿으려는 의지, The Will to Believe, 1896>,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1902, 김재영 옮김, 한길사, 2000>, <실용주의, Pragmatism, 1907, 정해창 옮김, 아카넷, 2008>가 있습니다.
제임스도 퍼스와 마찬가지로 <현실은 끊임없이 변하고 진리도 계속해서 변한다>는 안목에서 출발하여 <실용주의란 변화와 흐름의 과정철학>이라는 입장에서 미국적 실용주의를 정착시킨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프라그마티즘에 대한 제임스의 이론은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믿음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행동을 보면 그의 생각과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2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그의 현재의 행동이 그의 미래를 결정해 준다는 사실이다. 3 이 때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다.>
그는 예를 듭니다. <1. 숲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혼란한 정치, 경제, 종교,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방황합니다) 2. 이때 하나의 길이 보입니다. (혼란 속에서도 어떤 해결책이 보입니다) 3. 그 경우 우리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첫째는 여기로 가면 마침내는 안식과 평화와 자유를 얻게 될거야! 하는 기대와 둘째는 여기로 가다가는 오히려 더 깊은 숲속으로 빠져들어서 완전히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죽을지도 몰라! (지금의 선택과 결정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 될지, 아니면 더 큰 불행과 비극으로 인도하게 될 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4.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는 첫째와 둘째 선택의 미래를 전혀 예측 할 수가 없습니다. 5. 이 경우 우리는 첫째 결정을 따르는 것이 현명하고 실제적이고 실용성을 높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6. 실용주의란 자신의 생각과 믿음과 이에 따른 일체의 행동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길임을 믿는 사상입니다. 7. 그런 의미에서 실용주의는 인간의 인식과 행위에 대하여 ‘낙관적, Optimistic’입니다.>
제임스의 낙관주의적 실용주의를 설명 할 때 흔히 신의 존재 문제를 예로 들곤 합니다. 제임스는 <하느님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유신론과 무신론을 관념적, 이론적 논쟁에서 떠나 <하느님은 있다>고 믿는 것이 <하느님은 없다>고 보는 것 보다 훨씬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낙관적이 된다고 판단합니다. 유럽식의 관념적 신의 존재론을 가지고 갑론을박하기보다 꿈의 나라 미국에서는 <하느님은 있다>고 믿고 출발하는 것이 바르고 긍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라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미국인들, 혹은 미국철학에서는 유신론이나 무신론 같은 논쟁은 떠나 <하느님은 계시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을 pragmatic하다고 봅니다. <프라그마티즘은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철학입니다>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이거나 비관적인 생각과 행동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냐, 맘몬이냐>하면서 이 둘을 대립적으로 보면서 선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물질>을 다같이 인정하고 수용합니다. 하느님과 돈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공존 (共存)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미국적 기독교 신앙과 자본주의는 피차 절묘하게 접목됩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목사와 교인들이 하나님과 물질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고 이 둘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합니다만 프라그마티즘 위에 서 있는 미국교회나 미국 사회는 <이것도 저것도> 함께 포용하고 상황에 따라 절충하거나 융화시켜 나갑니다. 미국적 프라그마티즘에서는 절대로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를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황금을 보기를 하나님 처럼하고, 하나님도 돈 처럼 소중히 여기는> 프라그마티즘을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제임스를 통해서 다듬어진 프라그마티즘은 모든 지식이나 진리는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어떤 쓰임새나 유용성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진리란 현금적 가치, cash-value>가 있을 때 비로소 선한 것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실과 진리를 구별하였습니다. <진리는 처음 부터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생각이다. 생각은 변한다. 따라서 생각이 달라지면 진리도 달라진다. 사건이 진리가 된다. 새로운 사건이 생겨나면 새로운 진리가 등장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위가 진리를 만들게 된다>, <믿음은 사실과 다르다. 믿음은 믿는 것일 뿐이지 반드시 사실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사실에 기초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란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라기 보다는 우리의 생각을 풍성하게 하는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지식도, 지식 자체가 목표일 수는 없다 지식은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문제를 풀지 못하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제임스는 한 사람의 개인적 <믿음의 권리>는 인정합니다. 믿음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 그로 하여금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하고 죽음의 공포를 없이해 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매우 실용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프라그마티즘은 <신앙과 종교의 실용성>을 이야기합니다. <신앙도 실용적이다. 아니 실용적이어야만 한다. 종교도 실용성이 있을 때 비로소 종교로써의 가치가 인정된다> – 이것이 프라그마티즘에서 보는 종교입니다.
결론적으로 제임스의 프라그마티즘은 철저하게 결과주의입니다. <실용주의는 원칙주의가 아니라 결과주의다>라는 그의 주장은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논리적 원칙이 아니라 결과적 실용성을 중시했던 사람입니다.
(3) 존 듀이 (John Dewey, 1859-1952)
Vermont에서 태어나 John Hopkins대학과 Vermont대학에서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칸트의 심리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고등학교의 교사를 거쳐 시카고대, 미시간대, 미네소타대학과 콜롬비아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를 지냈습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심리학> 교과서를 집필했고 <시카고 실험학교>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기능주의 심리학자요 진보주의 교육학자요 미국의 민주주의, 여성운동 및 복지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으로 활동했던 듀이는 프라그마티즘의 대표적 사상가입니다.
그의 저서 중 한국어로 번역이 된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민주주의와 교육, Democracy and Education>, 이홍우 옮김, 교육과학사, 2007. <교육의 도덕적 원리, Moral Principles in Education>, 조용기 옮김, 교우사, 2016. <경험과 교육, Experience and Education>, 엄태동 옮김, 박영사, 2019. <인간의 본성과 행위, Human Nature and Conduct> 최용철 옮김, 봄, 2020.
듀이는 이미 퍼스나 제임스가 제기했던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철학을 이해하였습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 세계, 곧 우리가 날마다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삶과 단절된 관념의 문제를 다루는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철학은 현실적 문제에 대하여 현실적 해답을 제시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한다>, <우리에게는 전부터 전해진 문제이든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새로운 문제이든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철학은 이 모든 문제의 역사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 그 문제들을 해결하여 실용적으로 풀어내는데 그 가치와 의미가 있다>.
듀이는 퍼스나 제임스로 부터도 영향을 받았지만 그가 태어난 해와 똑같은 1859년에 출판된 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듀이는 다윈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연 환경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인간은 변화하는 자연의 한 파트이다. 인간은 수시로 변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존재요, 생존경쟁을 하면서 적자생존을 받아드리는 존재다> 듀이는 오래 전 고대 철학자 Herakleitos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anta rei! 만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한다>, <자연도 변하고 그 변하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도 변한다. 변하는 자연에 대해 변하는 인간이 투쟁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다. 인간은 그냥 심심해서, 재미로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문제가 생기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각이라는 걸 하는 존재다.> 그에 의하면 산다는 것은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일종의 도박 같은 것입니다. 작년에는 잘 되었으니까 금년에도 잘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측불가능한 세계 속에서 삽니다. Bush Fire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자연계와 생태세계는 보이지 않게 우리를 위협합니다. 지금 건강하다고해서 내년에도 잘 지낼 수 있을지, 지금 생겨난 코로나 바이러스만 극복해내면 앞으로는 안심하고 살아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듀이에 의하면 이 불안하고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둘 중 하나입니다. 첫째는 신의 도움을 구하는 것, 둘째는 우리 스스로 주어진 상황을 통제하고 극복하여 실제적 유용성을 창출해 내는 것입니다. 첫째 방법은 종교와 윤리를 낳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킵니다. 초기의 정령숭배로 부터 각종 제사와 제의, 기도와 종교적 의례를 발전 시켜왔고 또 신들과의 흥정을 통하여 <하느님, 착하게 살게요, 나쁜 일 않할게요>하면서 윤리와 도덕을 고양시켜왔습니다. 두 번째, 주어진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각종 과학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천문학과 기상학의 발전은 단순한 일기 예보를 넘어서 자연을 통제하고 순환의 주기를 조정합니다. 각종 의학의 발전은 인간의 건강을 지켜주고 생명을 연장시켜줍니다. 그러나 듀이는 이런 과학적 노력도 신의 도움을 구하는 종교적, 도덕적 방법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류의 불안을 완전히 제거하는 실제적이며 유용한 방법이 되지는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듀이는 여기서 이 둘의 협력과 상호 보완성을 제시합니다. 종교와 도덕은 과학과 기술과 더불어 서로 싸울 필요도 없고 싸울 대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와 과학은 상호모순이 되는 게 아니다. 그 둘은 서로 대결하거나 충돌할 필요가 없다. 제발 싸우거나 대결하지 마라. 종교든, 과학이든 결국은 다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제 이 둘은 서로 제각기 다른 분야에서 제 할일을 하면된다> 듀이는 여기에서 미국적 실용주의가 나갈 길을 제시합니다. <누가 문제를 풀든지 문제를 푸는 것이 중요하다. 혼자 못하면 둘이서 해야 한다. 여기서 않되면 저기서 해보고, 저기가 어려우면 여기서 가능할 수도 있다> 미국의 프라그마티즘이 지향하는 것은, 불완전한 세계, 불완전한 인간, 불완전한 통제와 해결을 전제 하면서 효용성의 확대를 향한 최선의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교육학자 듀이의 교육철학에 대해 한 마디만 언급하겠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 중 하나는 교육의 변화입니다. <교육이 변해야 인간과 사회는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 듀이의 입장입니다. 듀이에 의하면 교육이란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 아닙니다. 교육은 창조적이며 창의적이며 능동적인 자기 개발입니다. 선생은 교육의 전달자이고 학생은 교육의 수혜자가 아닙니다. 그 둘은 함께 가르치면서 같이 배우는 자들입니다. 학생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교육의 주체입니다. 학교는 기술자를 생산해 내는 공장이 아닙니다. 선생과 학생이 같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삶의 실험장입니다. 그는 이를 가리켜 실용적 민주주의 교육이라고 부릅니다.
(4) 리처드 로티 (Richard Rorty, 1931-2007)
시카고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프린스턴대학의 교수를 지낸 리처드 로티의 저서들 중에는 <철학과 자연의 거울, Philosophy and Mirror of Nature, 1979, 번역본은 박지수 옮김, 까치, 1998>, <실용주의의 결과, Consequences of Pragmatism, 1982, 김동식 옮김, 1996>, <미국 만들기, Achieving Our Country, 1998, 임옥희 옮김, 동문선, 2003>, <철학과 사회적 희망, Philosophy and Social Hope, 2001> 등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책으로는 <리처드 로티, 이유선 지음, 이룸, 2003>이 있습니다).
로티의 사상을 간단히 정리하면 <관계와 연대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관념적인 것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창작품들인데 이 모든 지식과 사상은 타인들과의 관계와 대화를 통하여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가<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할 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인간 지식과 인식의 상대성을 인정 할 때 마침내 우리는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게 되고, 거기에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프라그마티즘은 관계와 연대의 철학>이라는 신념이 그의 사상적 밑바탕입니다.
4) 프라그마티즘의 현대적 흐름 : 조지 리처 (George Ritzer, 1940 ~ )를 중심으로
유대계 가문을 배경으로 태어난 조지 리처는 미시간대학을 거쳐 코넬대학에서 노사관계로 학위를 받은 후 메릴랜드대학의 교수를 지낸 사회학자면서 고전적 프라그마티즘이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사람들의 일상적 삶 속에서 그 저변을 확대해 가는지를 밝혀내는 데 공헌을 했습니다. 은퇴 후에는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가르쳤습니다.
대표적 저서로 Sociology : A Multiple Paradigm Science, 1975 / Toward an Integrated Sociological Paradigm, 1981. / The McDonaldization of Society, 1993 (2012년 개정 증보판이 있음.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김종덕, 허남혁, 김보영 공역, 풀빛, 2017 / The Blackwell Companion to Major Contemporary Social Theorists, 2003. 현대 사회학 이론과 그 고전적 뿌리, 한국이론 사회학회 옮김, 박영사, 2006. / The Globalization of Nothing, 2007. Enchanting a Disenchanted World, 2009. / Sociological Theory, 2013 (사회학 이론, 김왕배 옮김, 한올출판사) 등이 있다.
리처는 <프라그마티즘은 합리주의다>라고 정의합니다. 그가 주장하는 <합리성이란 효율성>을 의미합니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는 미국적 합리성과 효율성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닙니다. 맥도날드는 생산과 생산비에서는 물론이고 소비자의 측면에서도 가장 적은 비용에,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높은 만족도를 지니는 제품으로 합리성과 효율성을 모두 만족 시킨다고 봅니다. Big + Many = Big Mac이라는 등식을 가능케 한 것이 이 미국적 McDonaldization 개념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는 <맥도날드가 보여주는 합리성의 원리>를 주장하려고 합니다. 그는 <맥도날드화>가 미국적 합리성과 실용주의의 특성이라고 봅니다. <30초 내에 주문하고, 5분 내에 음식이 나오고 15분 내에 다 먹고 나갈 수 있도록>하는 시스템은 의자는 색갈을 곱게 칠하여 예쁘기는 하지만 불편하게 만들어 오래 앉을 수는 없게하고, 절대로 클래식 음악을 틀지 않고 경쾌하고 빠른 템포의 음악을 틀어 순환의 속도를 높이게 함으로 장사가 잘되게 하는 방식입니다. 크게 보면 적은 비용에 의한 대량생산과 표준화된 시스템이 요점이긴 하지만 그 내용을 좀 더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개념들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는 Efficiency, 즉 효율성입니다. 맥도날드는 생산과 구매에 있어서 가장 quickly and easily 할 뿐만이 아니라 제품의 규격화를 통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합니다. 둘째는 Calculability, 즉 가격의 계산 가능성입니다. 이는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예측이나 가격에 대한 계산 가능성을 말합니다. 맥도날드는 그 제품의 양과 질에 따른 가격에 대하여 모든 소비자들이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합리성이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 가격을 기초로 합니다. 셋째는 Predictability, 즉 식당과 음식에 대한 예측 가능성입니다. 소비자들은 <이만한 가격에는 이정도의 직원과 이 정도의 서비스가 제공될 것>을 이미 예측하고 맥도날드에 들어갑니다. 맥도날드에서는 가격이나 서비스나 시설 등에 있어서 모든 소비자들이 예상하고 예측하고 들어가기에 항상 모든 면에서 거이 만족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측하기 어려운 트럼트 조차도 그의 ‘예측 불가능성 까지도 예측해야하는’ 인물로 봅니다). 넷째는 Control 입니다. 합리성이란 원자재의 생산과 구매, 직원들의 수와 능력, 소비자들의 주머니와 심리 까지도 모두 콘트럴함으로 이루어집니다. 맥도날드는 거의 모든 면에서 동일한 level로 조절하고 통제함으로 경영과 소비를 함께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맥도날드는 점주와 소비자를 함께 콘트럴하는 데 촛점을 둡니다. 하여튼 리처는 그의 책에서 맥도날드를 예로 들지만 오늘날 다른 수많은 프랜차이즈 업체들을 포함하여 포드 자동차 공장으로 부터 디지니랜드에 이르기 까지 거개의 미국사회는 생산과 소비 체제에 있어서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합리성을 기초로 한다>고 보는 것이 바로 프라그마티즘, 즉 실용주의 사상이요, 실용주의 정신의 기본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런 각도에서 리처는 기업과 소비자의 관계만이 아니라 정부와 국민, 문화와 소비자. 교회와 교인들을 포함한 전 세계적 Globalization 까지도 모두 합리성에 기반을 둔 <맥도날드화, McDonaldization>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맥도날드는 단순히 음식점 비지니스가 아니라 미국사회의 의식이고 미국을 이해하는 key word가 됩니다. 맥도날드화된 정치와 정부조직, 종교단체, 문화행사를 바람직한 합리적 조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더적은 비용, 더 높은 생산성, 더 높은 판매와 이윤창조란 사실 퓨리탄이즘으로 부터 출발하여 프런티어 정신을 거쳐 프라그마티즘에 이른 미국적 기독교 정신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묶어온 <상식과 합리성에 기반을 둔> 가치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맥도날드화>와 버금가는 것으로 프라그마티즘의 합리성으로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Fordism 입니다. 헨리 포드는 합리성에 기반을 둔 자동차의 대중화를 선도한 사람으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경영을 유도했습니다. 1) 적극적 분업화를 통하여 모든 업무를 분산시킨다 (물론 이런식의 분업화는 패밀리 레스토랑, CGV를 통한 극장의 체인화, 빵은 파리바켓, 커피는 스타벅스, 마트는 E-Mart라는 식으로 유도함). 2)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기계장치를 통하여 노동자들을 종속화하고 노동의 강도를 극대화한다. 3) 동시에 노동자들에게는 높은 임금을 줌으로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생활의 수준을 높인다 (실제로 포드회사는 다른 노동자들에 비하여 2배 이상의 임금을 주었습니다). 4) 그리하여 노동자들도 포드자동차를 구입하고 소비를 증대하게 한다. 5) 결국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그리고 이에 따른 이윤의 증대라는 2중의 목표를 실현한다. – 결국 McDonaldization이나 Fordism이란 합리성을 통한 이윤의 증대라는 자본주의와 프라그마티즘을 결합한 실험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외에 실례로 드는 것 중에는 카지노와 백화점도 있습니다. 카지노에는 3가지가 없다고 합니다 (3無라고 합니다). 시계, 창문, 거울이 없습니다. 시간에 신경 쓰지 마라, 해 뜨고 지는 것을 못 보게 하라, 초췌해지는 자기 얼굴도 못 보게 하고, 오직 도박에만 정신이 팔리게 하라는 것이랍니다. 백화점에도 시계와 창문은 없습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하고, 밖을 내다보지 말고, 오직 쇼핑만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화점에는 사방에 거울을 걸어두는데 이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더 좋고 더 비싸고 더 많은 물건을 사게 하려 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백화점의 엘리베이터는 보통 잘 보이지 않는 구석 쪽에 설치합니다. 손님들이 들어오자마자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기가 가려는 층으로 이동을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백화점의 중앙에는 에스칼레이터를 두어 이를 타고 가면서 이것, 저것 보며 기웃거리게 합니다. 충동구매의 효과적 방법입니다. 백화점에서의 식당은 지하 아니면 맨 꼭대기 층에 있습니다. 설혹 식사를 하려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매장들을 둘러보다가 충동구매를 하게하는 것입니다. 백화점의 1층에는 보통 여성의류나 여성용품 매장이 있습니다. 접근성을 편리하게 하여 이것저것 둘러보면서 충동구매를 하는 것이 여성의 심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통 남성 의류장은 3, 4층에 둡니다. 남자들은 보통 오늘은 무엇을 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오기 때문에 높아도 반드시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또한 남성 매장에는 쇼파를 두지 않고 여성 매장에만 편안한 쇼파를 둡니다. 남자들은 그냥 살 것만 사고 가는 편인데 여자들, 특히 남자와 함께 온 여자들에게는 쇼파가 있어야지 남편들이 거기 앉아서 쉬기도 하고 핸드폰도 보게 함으로 여자를 따라 다니면서 쌓이게 만드는 쇼핑 스트레스를 줄이고 마음 놓고 편안하게 쇼핑을 하게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21세기 미국적 자본주의와 프라그마티즘의 본질을 날카롭게 분석한 사람이 끝으로 본 <현대 미국 실용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조지 리처>입니다.
5) 문제점
McDonaldization을 통한 프라그마티즘의 결정적 문제점은 인간이 수단화되고 만다는 점입니다. 목적과 방법이 뒤집어져서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으로 둔갑된 것입니다. 인간은 소외되고 오직 물질과 제도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점점 개인의 주체성과 개성은 사라지고 집단의 취미와 집단 심리에의 예속화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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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