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아주 작은 습관이 만드는 놀라운 변화
매일 아침 마주하는 작은 선택과 반복적인 행동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요? 우리는 흔히 인생을 바꿀 거대한 변화를 꿈꾸며 원대한 목표를 세우곤 합니다. 하지만 전 세계를 사로잡은 제임스 클리어의 《아주 작은 습관의 힘》 (Atomic Habits)이 제시하는 핵심은 명확합니다. 거창한 목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매일 1%의 사소한 반복’과 이를 뒷받침하는 ‘시스템의 구축’이라는 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대 뇌과학이 밝혀낸 가장 아름다운 비밀 중 하나인 ‘뇌의 가소성 (Neuroplasticity)’을 주목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성인의 뇌세포와 신경망이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최신 과학은 우리의 뇌와 신경계가 평생에 걸쳐 경험과 행동, 생각에 따라 끊임없이 스스로 구조를 재배선하고 변화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습니다. 즉, 신경계는 고정된 콘크리트가 아니라, 쓰면 쓸수록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내는 유연한 점토와 같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신경 가소성의 기적은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필자 역시 지난 2006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구안와사 (안면신경마비)로 인해 신경계의 큰 위기를 맞이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손상된 신경 계통을 회복하는 데는 꾸준한 운동이 최고의 처방이라는 조언을 듣고 달리기 훈련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첫발을 내딛었을 때의 절망감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체력이 고갈되어 불과 15분도 채 뛰지 못하고 숨을 헐떡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초라해 보이던 ’15분의 시작’을 멈추지 않고 매일 반복했습니다. 어제보다 아주 조금씩만 더 달리는 사소한 반복을 이어가자, 뇌와 신경계는 놀라운 재배선을 시작했습니다. 마비되었던 신경들이 서서히 깨어나고 연결망이 견고해지면서, 몸의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재구축된 것입니다. 그 결과, 불과 15분도 못 뛰던 초보 러너는 지난 20년 동안 42.195km 풀코스 마라톤을 20회나 완주하고, 지구 한 바퀴에 달하는 총 3만 km의 거리를 달리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지극히 미약했던 시작과 우직한 반복이 빚어낸, 살아있는 신경 가소성의 증거인 셈입니다.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도 이와 정확히 맞물려 있습니다. 무언가를 반복할 때마다 우리의 뇌 속 뉴런들은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새로운 통로를 만듭니다. 처음에는 거친 풀숲을 헤치며 겨우 길을 내는 것처럼 어색하고 힘들지만, ‘신호 (Cue) – 열망 (Craving) – 반응 (Response) – 보상 (Reward)’이라는 습관의 사이클이 반복될수록 그 신경망은 점차 탄탄한 고속도로처럼 변해갑니다. 나중에는 큰 의지력을 들이지 않고도 자동으로 행동하게 되는 ‘습관의 자동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 과정에서 좌절을 겪습니다.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초기의 지루한 정체기, 즉 ‘낙담의 골짜기’를 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를 버텨내게 하는 힘은 무언가를 ‘얻어내겠다’는 결과 중심의 목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정체성 (Identity) 중심의 변화’에서 나옵니다. 스스로를 ‘매일 성장하는 사람’, 혹은 ‘매일 달리는 사람’으로 정의할 때, 뇌는 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신경 연결을 더욱 견고하게 다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사소한 반복과 가소성의 위대한 기적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낸 인물이 바로 미국의 육상 영웅 윌마 루돌프(Wilma Rudolph)입니다. 어릴 적 소아마비 진단을 받고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선언을 들었던 그녀는, 매일 조금씩 다리를 움직이는 사소한 반복을 통해 뇌의 새로운 신경 경로를 개척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여성 최초 육상 단거리 3관왕이라는 인류사적 기적을 일궈냈습니다.
필자의 3만 km 러닝 히스토리가 증명하듯, 그리고 윌마 루돌프의 삶이 보여주듯, 우리 몸과 뇌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반복하는 행동에 맞춰 스스로를 위대하게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변화는 단박에 일어나는 기적의 영웅담이 아니라, 지루함을 이겨낸 사소한 반복의 누적입니다. 매일 아침의 1% 노력이 쌓여 신경계의 지도를 바꾸고, 그 바뀐 지도가 결국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오늘 우리가 선택한 아주 작은 긍정적인 반복이, 머지않은 미래에 상상하지 못할 놀라운 변화의 꽃을 피워낼 것입니다.
이 아침도 달리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거실에서 만난 나의 어린 스승들
지난 2주간, 나의 서재와 거실은 지상에서 가장 작은 천국이었다. 한국에서 찾아온 아들 가족, 그리고 품에 안기기에도 조심스러운 어린 손주들과 온전히 시간을 보내며, 나는 평생 책 위에서 연구하던 인간 마음의 종착지를 비로소 발견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마 18:4)던 예수의 오랜 선언은, 교단 위에서 가르치던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내 거실 바닥에서 기어 다니던 생생한 진리였다.
아이들은 매 순간 움직였다. 그 지치지 않는 에너지는 미래에 대한 계산이나 염려가 끼어들 틈이 없는, 오직 ‘현재’라는 선물에 온몸으로 반응하는 생명의 춤이었다. 게으름을 피우려는 나에게 강한 도전을 주었다.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반짝이는 그 눈망울 앞에서는 40년을 살아온 시드니의 익숙한 풍경마저 매일 아침 창조되는 에덴의 첫날처럼 경이로웠다. 편견의 주석을 달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며, 기쁘면 온 마음으로 웃고 슬프면 투명하게 우는 감정의 순수성은 체면과 위선이라는 두꺼운 페르소나를 쓴 노학자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 깨웠다.
어디 그뿐인가. 놀이터에서 처음 본 동무와도 3초 만에 어깨를 걸치는 그 무조건적인 수용력, 넘어져 무릎이 깨져도 눈물자국 위에 곧바로 웃음을 피워내는 그 경이로운 회복탄력성은 내가 상담실에서 수많은 내담자들과 함께 도달하고자 했던 치유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었다. 어른들은 상처를 가시로 만들고 지나간 기억을 원망의 감옥으로 삼지만, 내 어린 스승들은 과거를 쉽게 잊는 ‘망각의 은혜’를 통해 매 순간을 새 도화지로 살아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깊이 부끄럽게 만든 것은 아이들이 가진 ‘의심 없는 큰 믿음’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상대의 조건을 저울질하거나 내일의 안위를 계산하느라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저 편견 없이 맑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이내 전적으로 믿어버렸다. 아빠의 품에 안길 때, 아이는 자신의 몸에 들어간 모든 힘을 빼고 온 무게를 아빠의 가슴에 얹어버린다. 혹시 나를 떨어뜨리지는 않을까 하는 일말의 의심도, 편견 섞인 계산도 없기에 가능한 무조건적인 내맡김이었다. 내일의 잠자리를 염려하지 않고 부모의 손길에 온 존재를 의탁하는 그 전적인 신뢰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불신과 염려로 가득 찬 비대한 자아였는지를 눈물로 고백하게 된다.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그것을 대책 없는 유치함이라 부를지 모르나, 하늘나라의 문법으로는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이기는 가장 큰 믿음이었다.
루소는 “자연은 아이가 어른이 되기 전에 아이이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렇다. 아이들은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순수가 고스란히 보존된 원형이다. 지식이 쌓일수록 편견의 두께만 더해가는 어른들의 세상에서, 아이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고향을 기억나게 하는 존재들이다.
손주들이 떠난 거실, 아이들의 온기와 웃음소리가 머물던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평생 학문을 닦고 사람의 마음을 고친다며 거드름을 피웠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나에게 진짜 필요했던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내 어린 스승들이 보여준 저 맑은 눈망울과 온전한 내맡김의 몸짓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오늘 아침, 운동화를 매어 매고 다시 달리는 길 위에서 나는 마음의 무거운 지식과 어른의 문법을 내려놓기로 한다. 그리고 손주들이 가르쳐 준 대로, 나를 지탱하시는 하늘 아버지께 온 무게를 편견 없이 맡겨버린 채, 오직 오늘이라는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아이처럼 맑게 웃으며 그저 경이롭게 걸어가리라 다짐해 본다. 나를 찾아왔던 작은 스승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며, 부디 어려움을 헤쳐나가며, 또한 계속 어린이의 마음을 유지하며, 주안에서 믿음으로 이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주길 기도한다.
게으름이라는 질병
최근 오랜만에 방문한 아들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손자 손녀들과 함께 쿠알라 파크를 찾았다. 나무에 웅크려 온종일 잠만 자고 있는 코알라를 보며 문득 호기심이 생겨 관리인에게 슬쩍 물었다. “코알라는 하루에 얼마나 잡니까?” 돌아온 대답은 놀라웠다. 적게는 18시간에서 많게는 20시간까지, 하루의 80% 이상을 오직 잠으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토록 게으른 동물이 또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코알라에게는 그 나름의 치열한 생존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주식으로 삼는 유칼립투스 잎은 영양분이 턱없이 부족하여,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아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잎 자체에 미량의 마취 성분이 있어 코알라를 늘 취한 상태로 만들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코알라는 그렇게 온종일 움직이지 않고 게으름을 피워도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따라 근육이 감소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전혀 다르게 창조되었다. 우리는 코알라가 아니다. 인간은 단 2~3주만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근육이 급격하게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근육의 감소는 단순히 몸이 약해지는 것을 넘어, 몸을 지탱하는 뼈를 무너뜨리고, 면역력을 떨어뜨리며, 결국 삶 전체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엄청난 불행을 초래한다.
그렇기에 나는 감히 ‘게으름은 질병’이라고 말하고 싶다. 움직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설계된 인간에게, 게으름은 몸과 영혼을 천천히 갉아먹는 가장 무서운 만성 질환이다.사실 건강도 부지런해야 지켜 낼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게으름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는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를 보면, 주인이 주신 달란트를 묻어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을 향해 주님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며 엄히 꾸짖으신다. 성경은 게으름을 단순한 성격적 결함이나 나태함으로 보지 않고, 창조주의 뜻에 반하는 ‘악함’ 그 자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듯 우리 몸과 영혼의 근육을 쓰지 않고 묵혀두는 것은 주인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다.

세계적인 행동과학자 제임스 클리어 역시 그의 저서 《아주 작은 습관의 힘》에서 인간의 뇌는 본래 에너지를 아끼려고 게으름을 피우기 쉽다고 지적한다. 이를 극복하고 부지런함을 유지하려면, 매일 1%씩이라도 몸과 영혼을 움직일 수밖에 없는 나만의 ‘행동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가만히 두면 퇴화하는 인간의 본성을 이겨내기 위해 매일 작은 부지런함을 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도록 설계되었다. 손발을 부지런히 놀려 땀 흘려 일해야 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영적 근육을 키우는 경건의 시간을 갖는 데 부지런해야 하며,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배우는 일에도 부지런해야 한다.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부지런함을 유지할 때, 비로소 우리의 육체도 영혼도 무너지지 않고 건강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코알라에게 잠은 생존의 방식일지 모르나, 인간에게 게으름은 질병이자 악함일 뿐이다.
만약 지금 이 순간에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조금만 더 있다가”, “내일부터”라며 게으름의 늪에서 망설이고 있다면, 그 자리에서 즉각 일어나 몸을 움직이기를 바란다. 망설임은 질병을 키울 뿐이다. 지금 당장 생각의 끈을 끊고 첫걸음을 내딛는 즉각적인 실천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건강과 행복을 되찾는 유일한 열쇠다. 오늘도 우리는 깨어나 움직여야 한다. 부지런함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살아내야 할 우리의 사명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마 25:26)
천연 신약 (神藥) 공장을 가동하라
현대 의학의 발전은 놀랍습니다. 제약회사는 이제 뇌 속의 행복 물질인 세로토닌과 도파민, 심지어 밤의 호르몬인 멜라토닌까지 실험실에서 완벽한 화학식으로 합성해 냅니다. 알약 하나로 잠을 청하고, 주사 한 대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호르몬 의약품에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치명적인 역설이 있습니다. 바로 ‘부작용’과 ‘의존성’입니다.
우리 몸은 신비로울 정도로 정교한 자동 조절 시스템 (Homeostasis)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외부에서 인위적인 합성 호르몬이 지속적으로 주입되면, 영리한 우리 몸은 조절 장치를 바꾸어 버립니다. “어? 굳이 내가 만들지 않아도 바깥에서 충분히 공급되는구나”라고 착각하며, 스스로 호르몬을 생산하던 내부 공장의 가동을 멈추거나 아예 폐쇄해 버리는 것입니다. 약을 끊었을 때 이전보다 더 큰 무기력과 불면, 불안이 찾아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심장 의학의 개척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하버드 의대 버나드 라운 (Bernard Lown)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현대 의학의 약물 오남용과 부작용에 대해 이렇게 경고한 바 있습니다.
“의사는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처방하기 위해서 약을 주는 경우가 너무 많다. 하지만 모든 약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신체의 자연스러운 균형을 깨뜨리는 대가를 치르게 한다.”
라운 박사의 지적처럼, 인간이 만든 약물은 질병의 증상을 빠르게 누르는 데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결국 인체가 가진 고유한 호르몬 조절계의 균형을 뒤흔드는 대가를 요구합니다. 인간의 불완전한 기술로는 창조의 섭리가 심어놓은 섬세한 생체 리듬을 완벽히 흉내 내지 못해 발생하는 부조화입니다.
그렇다면 부작용이 전혀 없으면서도 우리의 신체 기능을 완벽하게 강화하는 치유의 물질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답은 이미 우리 내면에 심겨 있는 ‘하나님의 창조 법칙’ 속에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건강한 삶의 정답을 이미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6-18). 이 오랜 영적 지침은 현대 뇌 과학과 분자생물학의 관점에서 바라보아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천연 호르몬 분비의 스위치입니다.
우리가 삶의 작은 일에 항상 기뻐할 때, 뇌의 보상 회로가 활성화되며 활력의 원천인 도파민과 통증을 잊게 하는 엔도르핀이 솟아납니다. 두려움과 염려를 내려놓고 쉬지 말고 기도할 때,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분비가 멈추고 신뢰와 면역력을 높이는 옥시토신이 온몸을 감싸 안습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할 때,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행복 물질인 세로토닌이 뇌를 채우며, 이 평온함은 밤의 장막이 내릴 때 강력한 천연 항암 물질인 멜라토닌의 풍성한 분비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외부에서 주입하는 합성 약물은 무너진 균형을 잠시 붙잡아주는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우리 삶을 진정한 기쁨과 건강으로 채우는 힘은, 창조의 법칙에 순종하며 기쁨과 기도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 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천연 호르몬에 있습니다.
오늘도 내 안의 천연 신약 공장을 힘차게 가동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외부의 알약에 기대기보다, 영적인 순종과 마음의 평정 속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호르몬이야말로 우리 삶을 가장 완벽하게 치유하는 최고의 처방전입니다.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직전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