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3개의 기둥” (눅 24:48)
지난주는 시편 86:11절의 말씀을 의지해서 ‘빠른 길보다 바른 길입니다.’란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입니다. 빠른 길보다 바른 길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길보다 하나님의 길이 중요합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야 하는데 정반대인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물고기 배 속에서 회개하고, 니느웨로 갔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배는 올바른 목적지로 순항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주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라고 믿었지만,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심문을 받으시고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모습을 보면서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흩어졌고, 그들의 꿈과 소망은 모두 무너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과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자신이 유령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실제로 살아나신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자신이 살아났다는 사실만 증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 가지 중요한 일을 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성경을 열어 주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성경 –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 (요 5:39)
예수님께서는 본문 4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여기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몇 권의 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히브리 성경’의 전체 구조를 가리키며, 기독교 구약성경과는 구조와 순서는 다르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히브리 성경은 24권이고, 우리 성경은 39권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상하로 나누어진 책은 원래 한 권이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한 권이고, 소선지서 12권도 히브리 성경에는 한 권입니다. 히브리 성경의 마지막 책은 역대기이고, 우리 성경은 말라기입니다. 다니엘서는 히브리 성경에서는 성문서에 속하지만, 구약 성경에서는 예언서에 속합니다.
히브리 성경을 유대인들은 ‘타나크(TaNaKh)’라고 부릅니다. 타나크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토라(Torah): 곧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모세오경, 율법입니다.
네비임(Nevi’im): 곧 선지자들의 글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대선지서와 호세아, 아모스 같은 소선지서들이 포함됩니다.
케투빔(Ketuvim): 곧 성문서입니다. 시편, 잠언, 욥기 등 지혜 문학과 찬양의 시들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히브리 성경 전체, 즉 구약 성경 전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향하여 기록되었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창세기의 여자의 후손(창 3:15), 출애굽기의 유월절 어린양, 레위기의 속죄 제사, 민수기의 놋뱀,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받는 종, 시편에 기록된 버림받은 자의 부르짖음까지, 구약 성경의 수많은 율법과 제사 제도, 인물과 사건들은 모두 오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요 이정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면 그 지식 자체가 자신들에게 영생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을 많이 아는 것과 영생을 얻는 것은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영생 그 자체가 아니라,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특히, 성경은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귀로 ‘듣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47절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라고 증언합니다. 성경의 활자가 머리에 머무는 지식적 독서를 넘어, 하나님의 음성,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내 영혼의 귀로 들어야 합니다. ‘읽는다’는 표현은 내가 주체가 되고 하나님이 객체가 되는 것이지만, ‘듣는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고 내가 객체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인간은 결코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의 모든 페이지마다 묻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발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성령 –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영 (요 15:26)
이어서 4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열어” 주셨다는 것은, 곧 그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셔서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제야 제자들의 머릿속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퍼즐로 완성되어 맞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전혀 몰랐던 무지한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어려서부터 회당에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낭독하는 것을 수없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심지어 지난 3년 동안은 말씀의 본체이신 예수님과 매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천국 복음을 직접 들었고 기적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도망쳤고,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머리로는 성경의 구절들을 알고 있었지만, 영적인 눈이 가려져 있었기에 그 말씀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 곧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는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성경의 원저자는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능, 아무리 탁월한 논리력과 학문적 지식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성령의 조명하심(Illumination)과 도우심 없이는 결코 성경의 깊은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어두운 방에 아름다운 명화가 걸려 있어도 불을 켜지 않으면 볼 수 없듯이, 우리 영혼에 성령의 빛이 비치지 않으면 성경은 그저 닫혀 있는 옛날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세 가지 용어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계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는 계시의 책입니다. 둘째 영감입니다. 성경 기록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책입니다. 셋째 조명입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읽는 사람의 마음을 밝혀 이해하게 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는 책입니다.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는 7년 동안 우리 교회의 표어입니다. 성경 따로, 성령 따로가 아니라 성경과 성령은 언제나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성경을 읽을 때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신혜경 부교님이 뉴질랜드에 가고 혼자 계신 선교사님에게 카톡을 보냈습니다. “라면 중에 제일 맛있는 라면은 ‘함께 라면’입니다.” 답장이 왔습니다. “함께 라면도 좋지만 ‘자유 라면’도 좋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시면,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로고스(Logos)가 생명의 말씀인 레마(Rhema)가 됩니다.
- 성도 –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 (행 1:8)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설명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진리를 깨닫게 하신 후, 매우 엄중하고도 영광스러운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48절입니다.“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헬라어로 증인을 ‘마르투스’라고 합니다. 이 단어에서 ‘순교자(Martyr)’라는 영어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참된 증인이 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생명을 걸고 진리를 사수하며 전한다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16일 매일 새벽 드려지는 세계선교사 중보기도회 강사는 러시아에서 사역하는 박형서 선교사였습니다. 박 선교사는 14살 때 삼각산에서 기도하다가 러시아 선교사로 살겠다는 마음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0년이 지나 34살이 되었을 때, 그는 러시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이 그의 인생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생기면서 그는 북한의 참혹한 현실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됩니다.
굶주림, 황폐한 땅, 희망이 사라진 얼굴들을 마주했습니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무엇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박 선교사님은 북한의 흙을 직접 가져와 한국에서 성분을 조사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죽은 땅입니다. 대부분의 농작물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생존율 90% 이상인 고구마입니다.” 그는 이 작은 가능성을 붙잡았습니다.
박 선교사는 캐나다 시민권자였기에 북한을 직접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구마 종순을 들여가 평안남도와 황해남도에서 시범 재배를 성공시켰습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북한 전역의 240개 군에 고구마 종순을 보급하고, 각 지역에 땅굴 저장창고와 가공공장을 세우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식량 나눔이 아닙니다. 북한의 구조적 기근 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하려는 전략적 선교입니다.
박 선교사는 특별한 모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손에는 복음, 한 손에는 고구마” 우리 구세군의 구호와 유사합니다.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빵” 빵만 가지고 가면 구제이고, 성경만 가지고 가면 전도이지만, 두 손으로 가면 선교입니다. 전도는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선교는 전인구원에 초점을 맞춥니다. 현재 박 선교사님은 러시아 선교사이고, ‘한민족고구마나눔운동본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대담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질문을 하는 선교사님들은 박 선교사의 설교 내용에 대해 걱정하였습니다. 북한의 실태를 사실 그대로 설명하다 보니, 만일 유튜브에 올라가면 신상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설교를 유튜브에 올리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분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과거 없는 의인도 없고, 미래 없는 죄인도 없다.” 의인은 과거가 깨끗해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된 사람입니다. 죄인은 죄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새 미래를 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은혜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다 같이 손을 들고 외쳐 봅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영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언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빠른 길보다 바른 길입니다 (시 86:11)
시편은 전체가 150편으로 되어 있고, 크게 다섯 권으로 나뉩니다. 이것은 모세오경이 다섯 권으로 된 것처럼, 시편도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 오경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권의 끝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편 150편은 시편 전체의 결론처럼,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로 끝납니다.
시편의 제목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테힐림’으로 ‘찬양들’을 의미하며, 헬라어 성경에서는 ‘프살모이’로, ‘현악기 연주에 맞춘 노래’를 의미한다. 우리 성경의 ‘시편’은 ‘시들의 모음집, 찬양의 노래들’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의 예배는 시편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의 예배는 시편으로 시작하고, 시편으로 채워지고, 시편으로 마무리됩니다. 시편은 내용적으로는 찬양이고, 형식적으로는 노래이며, 전통적으로는 기도집으로 자리 잡아왔습니다.
시편은 한 사람이 한 번에 쓴 책이 아니라, 무려 1000년간의 세월 동안 하나님의 백성이 드린 기도와 찬양을 모은 책입니다. 가장 오래된 시편은 모세가 쓴 90편이고, 가장 늦게 쓴 시편은 바벨론 포로 기간에 쓴 137편입니다. 시편에는 찬양, 탄식, 감사, 회개, 지혜, 왕의 노래, 성전 예배의 노래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시편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150편 중에 73편을 썼습니다. 오늘 읽은 86편도 다윗의 시입니다. 시편 86편은 다윗이 생명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께 드린 가장 깊고 개인적인 기도입니다. 학자들은 사울에게 쫓기던 광야 시절이거나,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하던 시기에 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는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붙들었고, 그 신뢰가 찬양으로 이어졌습니다.
본다이 가까이에 임마누엘 회당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그곳에서 예배를 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회중이 먼저 좌석에 앉아 있었고, 시간이 되어 랍비가 입장하였습니다. 랍비는 회중을 향하지 않고 토라가 있는 강대상을 향하여 한동안 시편을 읊조리며 기도를 하고 회중을 향하여 방향을 돌렸습니다.
성지순례 중 대속죄일 때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회당인 ‘예루살렘 큰 회당’(The Jerusalem Great Synagogue)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때 찬양대는 회중을 향하지 않고, ‘토라’가 있는 성소를 향하여 찬양했습니다. 유대인의 찬양은 대부분 시편에 곡조를 붙여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시편 86편 11절을 중심으로 ‘빠른 길보다 바른 길입니다’란 제목으로 피차간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단순히 열심히 살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길을 걷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빠른 길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길입니다. 넓은 길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길입니다.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입니다. 태양을 향해 가는 사람은 천천히 걸어도 그림자는 언제나 뒤에 있지만, 태양을 등지고 가는 사람은 빨리 걸어도 그림자는 늘 앞에 있습니다.
회개라는 단어는 헬라어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에서 왔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감정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86편 11절에서 다윗은 ‘인생의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세 가지 기도를 드립니다.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이 세 가지 기도는 믿음의 길을 보여 줍니다.
-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그러나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여기서 ‘도(道)’는 히브리어로 ‘데레크’인데, 발로 밟고 걸어가는 실제적인 삶의 길을 의미합니다.
이 기도는 길을 잃은 사람의 기도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길을 묻지 않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르침을 구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배우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향하여 마음을 열지 않고, 타인의 지혜를 귀 기울여 듣지 못하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순간 그 마음은 닫히고, 성장은 멈춥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라고 해서 갈 길을 아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수많은 경험을 쌓았으며, 지혜로운 사람들의 조언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역대상 17:16절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위를 세우시고 그의 집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다윗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이룬 것을 바라보지만,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바라봅니다. 다윗의 감사는 자신의 작음을 깨닫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주님, 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의 길을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는 기도의 순서가 바뀔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구해야 하는데, 구하고 기도합니다. 자신이 이미 선택한 길을 하나님이 축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먼저 결정한 후에 하나님께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자신이 계획한 일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면서, 그것이 올바른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내가 만들어 놓은 길로 하나님을 초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계획의 조력자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잠언 3장 5절과 6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나님의 길을 배우려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열린 마음을 여러 방식으로 묘사합니다. 시편은 그것을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시 51:17)이라고 부릅니다. 마음이 부서졌지만 하나님을 향해 닫히지 않고, 오히려 그 부서진 틈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시도록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에스겔은 같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겔 36:26)이라고 말합니다. 돌같이 굳어 하나님이 새겨 넣을 수 없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새기시고 길을 이끄실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듣는 마음”(왕상 3:9)을 달라고 했습니다. 듣는 마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이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공간을 남겨 둔 마음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마음을 “겸손한 마음”(약 4:6)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내 판단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두는 마음입니다. 모든 표현은 하나님께 열려 있는 마음의 다양한 표현입니다.
-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시편 기자는 이어서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그는 주의 도를 배우고 나서 그 진리 안에서 걷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신앙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아는 신앙에서 말씀대로 사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이 어디일까요? 김수환 추기경은 그 거리를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했습니다. 천 번의 설교와 만 번의 기도에도 지식이 마음이 되지 않아,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먼 거리가 있습니다. 바로 머리에서 손끝까지입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간격은 생각보다 훨씬 멉니다. 앎이 삶이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앎의 완성은 삶에 있습니다. 말과 생각을 넘어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앎은 온전해집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듣기만 하고 삶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은혜를 받은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 삶에서는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는 신앙이 깊어졌다고 생각하지만,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착각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는데 행하지 않기 때문에 내적 불일치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려 했지만 미워할 때가 있고, 믿으려 했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상처가 다시 떠오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의지와 결심만으로는 늘 한계에 부딪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시는 상태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을 성령께서 채우실 때 비로소 삶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의 마음이 흔들릴 때도, 믿음이 약해질 때도, 성령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도록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만 우리가 아는 것을 살고, 믿는 것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옆에 사람과 인사하시죠. “성령충만하세요”
-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마지막으로 시편 기자는 가장 깊은 기도를 드립니다.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이것이 세 번째 신앙의 모습입니다. ‘일심’은 나뉘지 않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로 모아진 마음입니다.
야고보서 1:6절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고 말씀합니다. 의심이란 단어는 δισκρίνω(디스크리노)입니다. 두 마음을 품다’, ‘마음이 둘로 갈라지다’, ‘분열되다’, ‘갈팡질팡하다’라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1장 8절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모든 일에 정함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공동번역에는 “의심을 품은 사람은 마음이 헷갈려 행동이 불안정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나뉘면 신앙의 걸음도 흔들립니다. 믿음의 가장 큰 문제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나뉘는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너희들이 언제까지 두 마음 사이에서 머뭇거리겠느냐”(왕상 18:21) 엘리야는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참 하나님을 선택하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신앙의 본질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 기뻐하실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 하나님도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제가 사랑하는 말씀 중 하나인 시편 37편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우리가 여호와를 기뻐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을 기뻐하시고 그 마음을 보시며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박국과 같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코람데오(Coram Deo)’란 말이 있습니다. 코람데오란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택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입니다. 빠른 길보다 바른 길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방향이 잘못되면 목적지에서 더 멀어집니다. 회개란 방향을 바꾸다라는 뜻입니다. 속도가 느려졌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보다 뒤처졌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주님을 향하여 가고 있는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윗과 함께 세 가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 주의 도를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 생각과 경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길을 묻는 기도입니다.
“주님,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겠습니다.” 말씀을 듣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삶으로 순종하겠다는 기도입니다.
“주님,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나뉘고 흔들리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오직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겠다는 기도입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 오늘도 우리에게 주의 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우리의 뜻을 고집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배우는 겸손한 마음을 주옵소서.
주님, 우리가 진리에 행하게 하옵소서. 말씀을 듣는 데서 멈추지 않게 하시고, 들은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마음이 나뉘지 않게 하옵소서. 염려로 흩어진 마음, 두려움으로 흔들린 마음, 욕심으로 갈라진 마음을 주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로 모아 주님을 경외하게 하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