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이 사람을 보라
프리드리히 니체 / 지만지 / 2016.11.29
니체가 직접 쓴 자신의 ‘철학적 자서전’이다. 자신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간략하게 정리했다. 니체에 관해서나 니체의 작품들, 또는 니체 철학에 대해서 기본적인 윤곽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 어떤 입문서보다 이 책을 읽는 것이 좋다. 가장 근본적인 핵심들이 이 책에 요약되어 있다.

○ 목차
서문 ······················vii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5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30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65
비극의 탄생 ···················83
반시대적 고찰 ··················9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02
아침놀 ·····················113
즐거운 학문 ···················118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20
선악을 넘어서 ··················146
도덕의 계보 ···················149
우상의 황혼 ···················151
바그너의 경우 ··················155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168
해설 ······················185
지은이에 대해 ··················195
옮긴이에 대해 ··················198
○ 저자소개 :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Friedrich Wilhelm Nietzsche,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자 음악가, 문학가이다. 1844년 독일 작센주 뢰켄의 목사 집안에서 출생했고 어릴 적부터 음악과 언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집안 영향으로 신학을 공부하다가 포이어바흐와 스피노자의 무신론적 사상에 감화되어 신학을 포기했다. 이후 본대학교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언어학과 문예학을 전공했는데 박사 논문을 제출하기 전에 이미 명문대인 스위스 바젤대학교에 초빙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1869년부터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고전문헌학 교수로 일하던 그는 1879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편두통과 위통에 시달리는 데다가 우울증까지 앓았지만 10년간 호텔을 전전하며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겨울에는 따뜻한 이탈리아에서 여름에는 독일이나 스위스에서 지내며 종교, 도덕 및 당대의 문화, 철학 그리고 과학에 대한 비평을 썼다. 그러던 중 1889년 초부터 정신이상 증세에 시달리다가 1900년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체는 인간에게 참회, 속죄 등을 요구하는 기독교적 윤리를 거부했다. 본인을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부르며 규범과 사상을 깨려고 했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고 한 그는 인간을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주체와 세계의 지배자인 초인(超人)에 이를 존재로 보았다. 초인은 전통적인 규범과 신앙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인간을 의미한다. 니체의 이런 철학은 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집대성됐고 철학은 철학 분야를 넘어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다.
『비극의 탄생』(1872)에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 등을 예술적 형이상학으로 고찰했으며, 『반시대적 고찰』(1873~1876)에서는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고,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문화의 이상으로 하였다. 이 사상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1880)에서 더 한층 명백해져, 새로운 이상에의 가치전환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여명』(1881) 『즐거운 지혜』(1882)에 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를 펴냈는데 ‘신은 죽었다’라고 함으로써 신의 사망에서 지상의 의의를 말하고, 영원회귀에 의하여 긍정적인 생의 최고 형식을 보임은 물론 초인의 이상을 설파했다. 이 외에 『선악의 피안』(1886) 『도덕의 계보학』(1887)에 이어 『권력에의 의지』를 장기간 준비했으나 정신이상이 일어나 미완으로 끝났다.
○ 책 속으로
나는 나쁜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고 독일인의 피는 거의 섞이지 않은 순수한 폴란드 귀족이다. 내가 나와 가장 심하게 대립되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비천한 본능을 찾게 되면, 언제나 내 어머니와 여동생을 발견하게 된다?이러한 천민들과 내가 친족이라고 믿는 것은 나의 신성함(Gottlichkeit)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 p.11
차라투스트라라는 유형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생리학적 전제들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 그 전제는 내가 위대한 건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개념을 가장 훌륭하게 그리고 개인적으로 설명한 곳은 이미 내가 설명해 놓았던 ≪즐거운 학문≫의 5권의 마지막 절이다. “새로운 자, 이름 없는 자, 이해하기 어려운 자인 우리는?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다?아직 증명되지 않은 미래의 조산아인 우리는, 새로운 목적을 위해서는 새로운 수단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건강을, 이전의 어떤 건강보다도 더 힘세고 더 빈틈없고 더 강인하고 더 대담하고 더 쾌활한 건강을 필요로 한다. — p.124
많은 것을 보지 말고, 듣지 말며, 자기에게 접근하게 놔두지 말라는 것ㅡ 이런 자기 방어 본능에 대한 관용적 표현은 취향이다. 이것은 가능한 한 부정을 하지말라고 명령한다. 계속 되풀이되는 부정을 필요로 하게 될 만한 곳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분리하라고 명령한다. 아주 작은 방어적 지출이라 하더라도 규칙적이 되고 습관적이 되며 엄청나면서도 전적으로 불필요한 빈곤을 유발시킨다는 합리적 이유에서다. 우리가 하는 가장 큰 지출은 지극히 자주 거듭되는 작은 지출들이 모인 것이다.
가시를 갖는다는 것도 일종의 낭비이고, 가시가 아닌 너그러움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을 때에는 가시는 심지어 이중의 사치인 것이다. ― <이 사람을 보라>
소년이었을 때 나는 와인을 마시는 것은 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젊은 남자들의 공허한 허상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나쁜 습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좀더 정신적인 본성들을 소유한 사람들 모두에게 알코올을 무조건 금하라고 충고한다.
든든한 식사가 너무 양이 적은 식사보다 소화가 더 잘된다. 위 전체가 활동을 한다는 것은 소화가 잘되기 위한 첫 번째 전제 조건이다. 누구든 자기 위의 크기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래 질질 끄는 식사는 하지 말아야 한다. 간식도 하지 말고, 커피도 마시지 말라 : 커피는 우울하게 만든다.
차는 아침에 마셔야만 건강에 이롭다. 약간만이되 강하게 마셔라; 차는 조금만 약해도 건강에 아주 좋지 않으며, 하루 종일 힘들게 만든다. 차를 마실 때는 누구든 자기의 한도가 있는 법이며, 그것들 사이의 경계는 종종 아주 좁고도 미묘하다. 심한 자극성 기후에서 차는 하루의 시작으로는 권할 만하지 않다 : (마시려면) 차 마시기 한 시간 전에 기름을 뺀 진한 카카오 한 잔을 먼저 마시게 해야 한다.
가능한 한 앉아 있지 말라 ;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생겨나지 않은 생각은 무엇이든 믿지 말라ㅡ근육이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생각이 아닌 것도 믿지 말라.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ㅡ꾹 눌러앉아 있는 끈기ㅡ이것에 대해 나는 이미 한 번 말했었다ㅡ신성한 정신에 위배되는 진정한 죄라고. ― <이 사람을 보라>
비도덕주의자라는 내 말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부정을 내포한다.
첫째, 나는 이제껏 최고라고 여겨졌던 인간 유형, 즉 선한 인간, 호의적인 인간, 선행하는 인간을 부정한다.
둘째, 나는 도덕 그 자체로서 행사되고 지배적이 되었던 도덕 유형을 부정한다 – 즉 데카당스 도덕,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교 도덕을. ― 이 사람을 보라
비도덕주의자라는 말을 나는 다른 의미로서도, 즉 내 자신에 대한 표지이자 휘장으로서 선택했다
;나를 전 인류와 구분짓는 이 말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데에 나는 긍지를 느낀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교적 도덕을 자기 밑에 있는 것으로 깨닫지 않았다 ; 그러기 위해서는 높이와 멀리 바라보는 시각과 이제껏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심리적인 깊이와 심연성이 필요하다. ― 이 사람을 보라
나를 특정짓는 또 하나의 것은 싸움이다. 나는 기질상 호전적이다. 공격은 내 본능의 일부이다. 적수일 수 있다는 것, 적수라는 것ㅡ이것은 아마도 강한 본성을 전제할 것이고, 어떤 경우라도 모든 강한 본성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저항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저항을 찾는다. 복수심과 뒷감정이 필연적으로 약함에 속하는 것처럼 공격적 파토스는 필연적으로 강함에 속한다.
공격자가 어떤 적수를 필요로 하는지는 그의 힘을 측정하는 일종의 척도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좀더 강력한 적수를 찾는다는 데서ㅡ또는 좀더 강력한 문제를 찾는다는 데서 드러난다. 호전적인 철학자는 또한 문제들에 결투를 신청하지만, 그의 과제는 적수들을 이기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전 역량과 유연함과 싸움 기술을 힘껏 발휘하면서 전력을 다해야하는 적수를 이겨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ㅡ 대등한 적수를 이겨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적과의 대등함ㅡ정직한 결투를 위한 첫 번째 전제, 적을 경멸한다면 싸움을 할 수 없다. 명령을 하거나, 어떤 것을 자기 밑에 있다고 얕잡아보면 싸움은 이루어질 수 없다.
내 싸움 방식은 첫째: 나는 승리하고 있는 것들만 공격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승리할 때까지 기다린다. 둘째: 나는 내 우군이 없을 만한 것, 나 홀로 싸우는 것ㅡ내가 오로지 나만을 위태롭게 하는 것만을 공격한다. ― 이 사람을 보라
어디서든지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더구나 자기의 전 역량을 요청하는 위대한 과제를 풀어야 하는 자에게는 선택 영역은 더 제한된다. 풍토는 신진대사에, 그 방해와 촉진이라는 면에서 아주 큰 영향을 끼친다. 장소와 풍토 선택에서 실패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과제에서 멀어지게 될 뿐 아니라, 아예 과제가 억류당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 그 과제가 그에게 알려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진대사의 속도는 정신의 발이 움직이느냐 아니면 무기력 하느냐와 정확히 비례한다: ‘정신’ 자체가 진정 신진대사의 한 측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명민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또 존재했던 곳, 위트와 예민함과 악의가 행복을 이루었던 곳, 천재가 거의 필연적으로 자기의 안식처로 삼았던 곳을 모두 모아보자 : 그곳들의 대기는 모두 아주 탁월하게 건조하다. 파리, 프로방스, 플로렌스, 예루살렘, 아테네ㅡ 이 장소들은 무언가를 입증하고 있다: 천재는 건조한 대기와 맑은 하늘을 전제하고ㅡ 신속한 신진대사를 전제하며 거대하고도 어마어마한 양의 힘을 항상 다시 공급할 가능성을 전제한다는 것을.나는 탁월하면서도 자유로운 소질을 갖춘 정신이 풍토를 선택하는 섬세한 본능을 갖지 못해서, 오그라들고 움츠러버리는 전문가나 유머 감각 없는 뚱한 자가 되어버렸던 경우를 하나 목도했었다. ― <이 사람을 보라>
내 작품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도대체 다른 책들을 더 이상은 견뎌낼 수 없게 된다.
배움의 진정한 황홀경을 체험한다: 나는 어떤 새도 이르러보지 못했던 높은 데서 왔고, 어떤 발도 길을 잃어보지 못한 심연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게 내 책 중 어느 하나를 잡으면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고 ㅡ 내가 밤의 휴식마저 설치게 한다고 말했다…… 내 책보다 더 긍지에 차 있으면서 동시에 더 세련된 종류의 책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기법이 바로 독일어로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할 사항으로 남겨져 있었다 : 나라도 예전에는 그 가능성을 혹독하게 배척했었을 것이다. 나 이전에 사람들은 독일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으며ㅡ 언어를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ㅡ 숭고하고도 초인간적인 열정의 거대한 상승과 하락을 표현하는 위대한 리듬 기법, 복합문의 위대한 문체가 나에 의해 비로소 처음 발견되었다 ; <차라투스트라> 3부 마지막 장인 <일곱 개의 봉인>이라는 표제의 송가에 의해 나는 지금까지 시라고 불리어온 것의 위로 천 마일이나 높이 날아올랐다. ― <이 사람을 보라>
나는 나의 운명을 안다. 언젠가 나의 이름에는 엄청난 사실이 추억으로 연상이 될 것이다. 즉 세상에서 전대미문의 대위기와 가장 심원한 양심의 갈등, 그리고 이제까지 신뢰되고 요구되었으며, 신성시되었던 모든 것에 거역하며 만들어졌던 결정에 대한 추억 말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다이너마이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 속에는 어떤 종교의 창시자와 같은 사고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란 천민의 관심사이다. 나는 신앙을 갖고 있는 무리들과의 접촉 뒤에는 손을 닦고 싶다.
나는 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이며 이것이 또한 나를 탁월한 파괴자로 만든다. ― 이 사람을 보라 中
○ 출판사 서평
이 책은 우선 서문과 짧은 프롤로그가 나오고, 세 장이 매우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뒤따라 나온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열 개의 절이 뒤따르는데, 여기서 니체는 자기 작품들의 생성 배경, 근본 주제, 핵심 주장 등을 출판된 시간 순서에 따라 매우 논리적이면서도 강력한 파토스가 담긴 문체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그는 ‘차라투스트라’에서 ‘디오니소스’로 의미를 확장해 나아가는 방향에서 각 작품의 의미를 다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네 번째 장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에서 니체는 자신의 영웅적인 위대함을 강력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니체는 자신의 운명과 세계사적 위기를 결합하면서 현재와 다른 ‘인간의 세계’에 관해 새로운 미래를 예견한다. “나는 내 운명을 안다. 언젠가 내 이름이 어떤 엄청난 것에 대한 회상과 접목될 것이다?지상에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던 위기에 대한, 가장 심원한 양심들의 충돌에 대한, 이제까지 믿어져 왔고 요구되어 왔으며 신성시되었던 모든 것에 대항해 거부를 불러일으키는 결단에 대한 회상과 접목될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는 그 제목에서 이 자서전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려 준다. 제목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본래 기독교 ≪신약성서≫에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가 가시관을 쓴 예수를 가리키며 한 말이다(요한복음 19장 5절). 이 말을 통해서, 한편으로 니체는 자신과 예수의 고난적인 삶을 관련지으려 한 것처럼 보인다. 니체는 여러 신체적인 병들로 인해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아무도 그를 이해해 주거나 인정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왜곡 없이 제대로 이해되기를 바랐지만 그야말로 시대의 외면을 받은 고독한 방랑자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 제목은 자신과 예수를 대결시키려는 목적에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줄에서 니체는 하나의 대립적인 명제를 내놓는다. “나를 이해했는가? ?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9절). 니체는 자신을 디오니소스라고 부르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항하는 존재로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라는 이 두 존재의 대결이 니체 철학의 핵심을 압축해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예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삶과 세계와 실재의 고통을 부정하거나 이로부터 도피하려는 모든 형이상학, 종교, 도덕, 학문을 총칭하는 기호일 것이다. 반대로 삶에 대해 그리스도교가 부정하는 것에 맞서 삶에 대해 영원히 긍정하는 것, 다시 말해 가장 가혹하고 끔찍한 고통과 무시무시한 시련과 두려움조차도 이겨 내고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 이것이 디오니소스를 나타낸다. 이러한 디오니소스는 바로 비극의 신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비극 정신의 강함과 위대함을 보았다. 이러한 비극 정신의 강한 생명력과 창조성이 인간의 위대함과 불멸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